최명희의 <魂불>을 읽고
류 창희
환하게 보인다.
흡사 등잔불의 테두리마냥 둥그렇게 빛이 보인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눈두덩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꼭 눌러본다. 그리고 눈동자를 아래로 향해 내려다보면 희미하게 시작하여 점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그걸 ‘혼불’이라고 칭한다. 혼불이 보인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확인이리라.
살아있음은 육체의 건재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게다. 육체만 가지고 삶을 확인한다면 이 세상은 아마도 생명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저마다 나 여기 있수! 목소리를 내며 외친다. 강실이의 목소리는 애써 입만 벙긋거리다 사라지고, 효원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높낮이가 없이 감정을 좀 채로 드러내지 않는다. 강모의 유약함은 아무 소리도 내려고 하지 않는다. 옹구네는 시종일관 악을 써본다.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진솔하지 않음이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지키고 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한다.
동네를 수호하는 정자나무의 자태姿態로 정신을 이끌어 주는 어른의 목소리가 있다. 어른은 늘 선 자리에서 눈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살아 있다는 자체로서 말을 대신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눈을 갖추어야 한다고, 사람의 정신 속에는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穴이 있다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 말하는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문의 울타리가 가족을 지켜준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요즘이야 핵가족에다가 가장의 권위도 희미해지고, 사회도 국가도 개인의 능력과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정신을 관리하고 살기를 전해주고 있다. 비단같은 머리결, 산수의 빼어남보다 정신의 경치가 수려함은 자신을 귀격으로 높여 놓을 것이라고, 자신을 지키고 돌아보는 것이 숨쉬는 일처럼 몸에 익어 일상이 되도록 건사하라고, 청암부인을 통해 최명희는 구구 절절 어른의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진정 이 시대에 어른이다.
혼불을 읽다보면 많은 여인들을 만나게 된다. 여인들마다 한이 서려있지만 또한 염원도 들어있다. 그녀들의 애환이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정성스럽게 살 것을 말한다. 한 집안 문중의 정신이 잘 보존되려면 무엇보다 여자의 힘! 특히 며느리로 들어오는 안 주인의 마음씨에 달렸음을 이야기한다. 집안에 훈김 나고 냉기 도는 것은 다 여자 할 탓이란다. 그저 공 없이 내려온 것은 아니다라고 누대의 할아버지들 학덕에 힘쓸 때, 할머니들은 온 집안 구석구석 한 곳도 빈틈없이 섬기고 모시면서 성주님께 빌고 지신에 빌고 조상신에 빌고 대문신 외양신 뒷간신에 빌어서 우여곡절 다 겪으면서, 그 정성으로 공덕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많은 남의 이야기를 읽었다. 다른 소설들에 비해 혼불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느 문중 선산밑 동네에서라면 다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살았을 법한 보편적인 내용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쓰는 언어, 그들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기는커녕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말사전이고 속담사전이고 고사성어집이고 우리 민족의 정신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 읽노라면 책 속의 인물들과 나는 시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 속에서 빠져 나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자신도 모르게 토속어로 말하는 나를 발견한다.
순 우리말로 풀어놓는 세시 풍습은 해학적이다. 추억의 뒷 편에 썩은 대추나무를 도깨비불이라며 뒷간에 가지 못했던 어린 시절로 독자들을 옮겨다 놓는다.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이야기. 신발을 감춰놓고 잠자는 이야기는 하나의 풍속이, 아련한 추억이기 전에 전수하는 미풍양속이 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재미있으면서도 머리를 쭈빗하게 하는 젊고 예쁜 주당각시는 곱게 달래고 조심스럽게 위해야 하기 때문에 노염을 안 받으려고 뒷간 근처에서 어흠 어흐음 서너번 헛기침으로 통고하는 노크문화가 읽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섣달 스무나흔날의 한집안의 생 사 화 복의 근원인 부엌신인 조왕신을 모시는 대목에선 사는 건 다 삼가고 조신하게 공들인다는 것이다.
전쟁이후 산업사회로 급 성장한 경제에 발 맞춰 치닫던 우리의 중산층 문화와 과소비를 교훈되게도 한다. 분수도 모르고 흥청망청 네것 내것 안 가리고 문어발로 끌어다 쓰던 경제구조, 거기에 발맞춰 아이엠에프이전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도 한다.
남의 것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음을. 가문 좋고 문벌 좋은 사람들은 가문에다 돈에다 자신을 걸지만. 내 것이 비록 한 자루의 초밖에 없다면, 단초 한 개피의 고리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연줄 연줄 이어지는 따뜻한 사회가 되어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인연은 흩어지는 민족 정서를 모아도 본다.
사람은 각자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한섬지기 농사꾼은 자기 가솔 굶기지 않으면 되지만, 열섬지기는 이웃이 굶는가 살펴야 하는 그릇이 있어야하듯, 핏줄만 가지고 종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핏줄이 지닌 책임으로 가족을 가문을 나라를, 세계에서 정신이 풍요로운 쪽으로 선망하는 국가가 되도록 인도한다.
쉽게 베풀음 또한 법도가 있음을. 사물은 제각기 할 일과 몫이 있는데 밥을 주었으면 그냥 주었지. 싱겁냐 쨔냐 참견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다만 헤아릴 뿐 묻지는 말아야 하는데 평생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섣부르게 베푸는 시늉을 부리면 원한의 근원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라며 요즘 남북정상회담과 더불어 남북화해무드를 뒤돌아보게도 한다.
무조건 알뜰하게 하면 죽 거리가 밥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큰 부자 안 되는 법. 알뜰 다르고 문견 다를진대, 없는 중에도 쪼개어 모양내고 가꾸는 것. 그것은 태깔과 격식에서 갖춰지는 것이다. 건너다 본 눈썰미와 내가 해본 손끝하고는 다르다고 작은 일도 손수 정성스럽게 해보는 실천을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면서 허황된 것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항상 지금 머무는 곳을 소중히 알아야 한다고. 고을이건 사람이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이 순간 만난 이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자신을 존중하며 살기를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
최명희는 갔다. 어떤 이들은 혼불이 꺼졌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이 시대의 어른이 갔다고 여긴다. 청암부인이 소설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도록 알려주고, 당신의 질서 속으로 홀연히 가듯, 최명희는 우리의 갈 길을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는 것을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만의 질서 속으로 떠났다.
그런 최명희는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작가가 이렇도록 간절하게 잠 못 이루고 쫓기며 아파할 때, 나는 편안하게 눈으로만 호흡을 같이하며 변죽만 울렸더란 말인가.
흥미로 읽어갔던 시간들이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녀의 혼불은 벌써부터 소진해 가고 있었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혼불의 작품과 작가의 목숨이 바뀌어진 것은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지만,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무엇이 소중한지도 모른 채 여러 많은 다른 작가 중에 한사람으로 기억했을 터이다.
17년간이나 인연의 끈을 쥐고 때론 절규하고 때론 모진 세월을 버텨냈던 소설 속의 인물들과 저승에서 만나 뒤풀이라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가끔은 육체에 이끌려 살아가다가 잠시 이상이 생겨 몸이라도 아플라치면 허둥지둥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나의 정신은 온전한가? 온전하게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를 확인하곤 한다. 소설 ‘혼불’은 삶의 질을 높은 데로 고귀한 정신 쪽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올려놓으려고 노력하는 나를 찾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가만히 눈두덩을 눌러본다. 그리고 혼불을 보려고 노력한다. 정신을 지키고 정성스럽게 살아가고저 하는 모든 이들의 눈과 마음속에서 최명희는 ‘혼불’을 밝혀 줄 것이다.
1998년 12월 11일
최명희님 편안하십시요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당신을 아끼던 독자 류창희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