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이충렬 지음
김영사



 




한국의 미를 지킨 대 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수집이야기

서문- 들이켜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뜻깊은 일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자료를 모으고 검토하고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골동품 계에는 “군계(群鷄)가 일 학을 당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그저 그런 골동품이 아무리 많아도 명품 한 점을 당하지 못하고, 명품을 한점 소장하고 있으면 다른 골동품들도 덩달아 인정을 받게 된다.

숙고(熟考)는 하지만 장고(長考)는 하지 않았고, 그래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나타났을 때 놓친 적이 거의 없다. 천학 매병도 마찬가지였다.

서화를 모으는 일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네. 재물도 있어야 하고, 안목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하지.

오세창은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젊은 자네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들어오는 순간, 깊은 산 속에서 흐르는 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산골물 간(澗)자 그리고 《논어》<자한편>에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라는 말이 아오는데,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뜻이네. 추사 선생께서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주면서 인용한 문장이지. 자네에게 이 문장에 있는 소나무 松자를 넣어 ‘澗松’을 주지. 마음에 드는가?“







“하하, 간송이라…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는 뜻이니, 선비의 청렴함과 변치 않는 의리를 강조하는 좋은 아호입니다.

오래전 제 외숙께서, 세상의 유혹에 꿋꿋하려면 옛 선비와 같은 격조와 정신을 갖춰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서화는 열심히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주고 하나 둘 그득할수록 안목이 늘고 진위를 판단하는 능력도 생기는 법일세. 서화상들은 장사꾼이지만, 대부분 서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작품을 알아주고 대접해주면 좋은 작품이 왔을 때 얼른 연락해주지.

구정상회 같은 포목점(결혼 한복을 종로 구정상회에서 맞췄다)

아직 조선에서는 그림만으로 생활이 쉽지 않군요. 예. 전시회 때 몇 점 팔아봐야 한지에 붓에 안료에 표구비 제하면 손에 쥐는 돈이 별로 없으니까요.

당시 서화점 주인들은 수장가와 거래할 때 ‘얼마 주세요.’ 혹은 ‘얼마 내세요.’가 아니라 ‘얼마에 올린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면 점잖은 수장가는 두말하지 않고 지급하고, 점잖지 못한 수장가는 흥정을 했다.

모으신 수장품 중 한두 점을 나눠주실 수 있을지. ‘나눠달라’는 말은 ‘양보해달라’와 같은 뜻으로 ‘팔라.’라는 말의 정중한 표현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표현에 따라 수장가의 품격을 판단했다.

전형필 집안 풍습으로 대상이 끝나고 두 달 후 禫祭를 지내야 脫喪할 수 있었다.

압구정은,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이 세조가 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사육신의 단종 북위 운동을 좌절시킨 권모술수의 대가 한명회가 한강변에 지는 정자다. 벼슬에서 떠나고 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며 시나 짓겠다고, 친할 狎 자와 갈매기 鷗 자를 써서 ‘압구정’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한명회의 권모술수를 비웃으며, 갈매기가 날아와 않으니 누를 押자를 써야 한다며 비아냥거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간과 골동품상들이 저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들고 찾아왔다. 그러나 오세창은 보는 글씨마다 ‘모르겠다.’라고 할 뿐이었다.

아예 모른다고 하는 게 상책일세. 대원군의 난도 마찬가지일세. 대원군은 제자들에게 난을 그리게 하고 자신은 낙관만 찍었기 때문에, 진짜 대원군이 그린 난은 손에 꼽을 정도네. 그런데 이 집에 가면 추사 글씨, 저 집에 가면 대원군의 난이 걸려 있으니, 그게 다 저런 뜨내기 거간들에게서 나온 걸세.

한참만에 김용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추사의 글씨를 비롯한 서예작품 모두와 혜원의 <미인도>를 자네에게 양보하겠네.? ”부끄러운 부탁이지만, 글 작품들을 나에게 양보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비밀로 해줄 수 있겠는가?“

권세가의 후손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서화를 팔았다는 소문이 나면 당사자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 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김용진보다 전형필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사람의 수명이라는 것이 나이순은 아닌 모양이다.

임자를 만나면 비싸게 팔고 못 만나면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게 서화 골동의 세계다. 그래서 전형필은 때로 비싼 값을 치르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거간들이 가장 먼저 그에게 좋은 서화를 가져오곤 했던 것이다.







혜원의 풍속 화첩을 포기한 전형필은 시간 날 때마다 박물관 공사 현장을 둘러보곤 했다. “일꾼들을 잚 먹여야 집이 튼튼해진다.”

전형필은 오동나무 상자를 들고 오세창을 찾아가 상서(箱書, 상자 위에 담겨 있는 소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글)와 跋文, 서화를 살펴본 추에 쓰는 글을 부탁했다.

전형필의 20대는 이렇게 ‘청춘’이라는 단어를 잊은 채, 흘러간 세월의 흔적과 씨름하는 사이에 훌쩍 지나갔다.







전형필의 어머니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논을 팔아 사금파리를 사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1938년 8월 중순, 전형필은 목수, 토역군들과 함께 건물에 재난이 없도록 地神과 宅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룻대(상량보)에 붓으로 龍자를 쓰고, ‘무인년 윤칠월 5일 ’立柱上樑’이라고 썼다. ‘應天上之五光, 하늘의 오색 빛이 감응하고, 備地上之五福, 땅의 오복이 준비하도다 라는 축원 글을 쓰고, 마지막으로 거북 龜 자를 썼다.

헌재 간송미술관 건물이다.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의미에서 ‘葆華閣’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손재형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오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수장자 집 앞에서 몇 달 동안 무릎을 꿇고 사정해 되찾아온 전설의 수장가고, 전형필뿐 아니라 오세창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