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당신도 써라
배상문 북포스 2009
일기는 글이 아니다. 생각을 지면에 옮겨 놓기는 했으나 글로서 효력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기를 동생이 훔쳐보았다면, 그 일기는 글이 된다.
내 글을 읽는 독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지, 내가 쓴 글이 독자에게 어떤 식으로 이해될지, 혹시나 오해의 여지는 없는지, 어법과 맞춤법은 제대로 지켰는지, 얼마나 문장을 닦고 조기고 기름 쳤는지……. 이런 고민을 거쳐서 나온 글이야말로 제대로 된 글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작가’라 하면 ‘종이책’을 한 권이라도 낸 사람을 가리켰다.
종이책의 저자가 되거나 특정 매체를 통해 등단한다면 물론 기분은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즐거움일 뿐이다. 글쓰기의 본질은 글쓰기 자체에 있다.
어떤 이는 말한다, 문단해체 현상 때문에 요새는 ‘개나 소나?’ 글을 쓰게 됐고, 그 때문에 ‘함량 미달’의 작품이 쏟아져 나와 그 질과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이제는 본질에만 집중하다. 글쓰기 자체에만 ‘올인’하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메시지’가 있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장력’이 있는가 하는 것뿐이다.
블로그를 운영하자
이제 글쓰기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인터넷 문화, 대중문화, 비즈니스 등에서 필요한 ‘우리들의 것’이다. 글쓰기야말로 한 개인의 경쟁력이자 문화지수를 높여주는 중요한 척도다. 글쓰기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생존전략이 된 것이다. - 한기호
이제 글쓰기는 생존전략이다.
자신의 교양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글’이다.
요리를 못 하거나 사진을 못 찍거나 옷을 못 입는다고 지성이나 교양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가? 일관된 테마에 맞춰 관련 글을 꾸준히 업데이트하는가.
남들보다 이것만큼은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주제에 관해서만 한정해서 글을 올리는 게 좋다. 글을 올릴 때에는 편집에도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한다.
블로그를 운영할 때, ‘꾸준히’ 지속하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정성껏 글을 올렸는데 관심을 두는 사람이 적다면 그럴수록 더욱 성의를 다해 글을 올려라. 너무 조바심내지 마라. 최소한 5년 정도는 내다보고 블로그를 운영해야 한다.
당신이 쓴 글이 읽을 만한 가치만 있다면 인지도는 서서히 놀아질 것이다. 블로그 자체의 ‘히스토리’가 생길 정도로 오랫동안 꾸준히 운영하는 것이 ‘기간의 권위’이다.
우선 한 사람만 생각하라
이젠, 개인 대 개인 시대다. 개인끼리 감동을 주고받아야 하는 시대다- 종연남
“자기가 소화해낼 수 없는 많은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옛날식”이다. 글을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옛날식’이다.
모든 세대를 독자층으로 확보하겠다는 생각으로는 정작 한 사람의 마음조차 붙들기 어렵다.
독자층을 넓게 잡으면 글의 힘이 떨어지게 된다. 교장선생님 말씀과 같은 글이 되고 만다.
무난한 글은 누군가에게 열렬한 지지도 받지 못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도 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다소 불쾌해야 할 사람도 있겠거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껄끄러운 기분을 참아 내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려 하지 말고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라. 그러면 세상이 움직인다.
배우 송강호- ”1천만 명을 설득하는 힘과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한 명을 설득하는 힘은 본질적으로 같아요“
글을 쓸 때에는 구체적으로 한 인물을 정해놓고 그를 위해서 써라. 그러면 그 인물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들도 그 글에 반응한다.
하나가 열을 불러들인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구체적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라. 독자를 제한하는 일은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으려고 과욕을 부렸다간 한 사람의 사랑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심드렁한 독자 수천보다는” “제대로 알아주는” 열 명을 향한 글쓰기! 그 열 명을 정말 내 ‘펜’으로 만들 수 있다면 수백 수천도 결국에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
소설가 김영하가 제안하는 ‘연애편지적 글쓰기’- 연애편지는 우선, 독자가 분명하다. 단 한 명의 독자만 만족하게 하면 되는 글, 그것이 바로 연애편지다. 누가 읽을지 모르는 글을 쓰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다. 또한, 연애편지는, 목적이 분명하다. 연애편지는 대체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는다’ 확실하고 명쾌한 목표가 있다. 목표가 분명해지면 역시 글쓰기는 한결 쉬워진다.
나만의 ‘언덕’을 쌓아라
싸움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언덕 씨름’을 해야 한다. 뒤집어 말할 수도 있다, 싸움에서 지기 싫으면 남의 ‘언덕’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마라.
‘홈 경기’냐 ‘원정 경기’냐 ‘언덕 씨름’을 하면 그만큼 유리하다는 말이다.
삼성은 반도체, 현대는 자동차, 대우는 조선사업. 작가도 어느 작가 하면 무엇을 특징으로 하는 작가라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자기 작품을 특화해야 한다. 언뜻 특화된 것이 없고,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구축되지 못하면 그저 누구의 아류다. - 임병식, 막 쓰는 수필, 잘 쓰는 수필
이처럼 ‘언덕 씨름’은 글쓰기의 중요한 전략이다.
당장 급한 것은 먼저 ‘언덕’을 쌓는 일이다. 체계를 염두에 두고, 가능하면 목차까지 짜서 규모 있게 글을 쓴 다음 블로그에 올려라. 그런 글들이 몇 년에 걸쳐 ‘기간의 권위’를 차곡차곡 쌓이면 블로그자 바로 당신의 ‘언덕’이 된다.
‘옷’이 아니라 ‘피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오랫동안 글쓰기를 가르쳐 온 윌리엄 진서의 말처럼 “작가로서 내가 팔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쓴 ‘책’을 파는 게 아니라 ‘나’자신을 파는 것이다. 독자들이 당신이라는 ‘인간 자체’에 흥미를 느끼게끔 글을 써야 한다.
독자가 당신임을 알아볼 수 있는 문체를 개발하자.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다. 꾸밈없이 정직하게 쓰면 그게 곧 당신의 문체다. 누구나 자기만의 독특한 말투가 있듯이 ‘글투’도 있다 그리고 대체로 말투가 곧 글투다, 글을 쓴다기보다 말을 한다는 기분으로 글을 써라.
글짓기가 아미라 말 짓기, 글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다! 감정이다.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가까운 것은 글보다 말이다. ‘말’은 곧 ‘마음’이다. 이제부터의 문장작법은 글을 죽이더라도 먼저 말을 살리는데, 감정을 살려놓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 이태준 문장강화
김원우의 만연체는 느끼하지 않은데 왜 나의 만연체는 안면을 근질거리게 할까. 내 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투가 곧 당신의 문체다. 말하는 것처럼 글을 써라. 말할 때 쓰지 않는 표현은 글에서도 쓰지 마라. 나는 이니 나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
편견도 매력이 될 수 있다
나의 편견은 상식이고, 너의 편견은 몰상식이다. 나의 편견이 몰상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문화평론가 박민영은 ‘이즘’이란 ‘모든 개념 중에서 최상위의 위상을 갖는 개념’ 또는 ‘거대한 체계를 갖는 개념’을 뜻한다.
어찌 보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 같다. 그러나 작가가 쓰면서 긴장감을 못 느끼는 글이라면 독자도 읽으면서 재미를 못 느낀다.
독자는 당신의 편견이 듬뿍 담긴 주관적인 글을 원한다.
이것만 읽지 말고 저것도 읽어라
이윤기가 영화감독 지망생인 아들에게 말했다. “예술가는 절대로 예술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튀어봐야 결국 문화사의 컨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 손오공이 부처님 손안에서 빠져나가는 서유기가 있더냐? 아들이 대꾸했다. ”그건 아카데미즘입니다. 저는 영화를 가르처려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려는 겁니다. 가르치는 프로가 아니라 보여주는 프로가 되려는 겁니다. 이윤기의 잎만 아름다워도 꽃 대접을 받는다.
혜성처럼 나타나 책 한 권 던져 놓고 혜성처럼 사라질 생각이라면 다른 작가들의 글은 읽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장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많은 글을 ‘폭식’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의 글 읽을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내 글 한 자라도 더 쓰겠다는 생각으로는 10년을 써도 필력이 늘지 않는다. 물론 우선순위로 치자면 쓰기가 읽기보다 훨씬 중요하다, 폭식하되 읽는 시간이 쓰는 시간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취향의 확산’ 매일 먹던 것만 먹고 입던 옷만 입고 만나던 사람만 만나고, 다니던 길로만 다니는 사람이 있다. 인생에 ‘헛짓’이 필요하듯이 독서에 ‘헛독서’도 필요하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
어는 한 분야를 공부하려면 기본적으로 그 분야의 역사를 훑어보는 게 순서다.
수영을 배우려고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글을 쓰려면 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눈으로 허우적허우적 헤엄을 쳐봐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문청(文靑)’들 중엔 간혹 자신만의 ‘뚜렷한 소신’ 때문에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영향을 받는 게 두려워서’라고 대답한다.
다독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한창 부지런히 글을 써야 할 시기에 독서만 한다. 쓰는 것은 어렵고 읽기는 쉬우니, 공부 핑계 삼아 계속 읽어대기만 하는 것이다. 아주 좋지 않은 습관이다.
어느 분야든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는 법이다. “몰랐거나 어설프게” 알았을 때 만만하게 보였는데, 막상 해 보면 그렇지 않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소설은 곧 노동의 산물인 까닭에 엉덩이가 가벼우면 볼 장 다 본다. 최일남 어느 날 문득 손을 바라본다.
요컨대 엉덩이가 무겁지 않으면 작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한번 의자에 앉으면 서너 시간은 괴로움 없이 죽치고 앉아있는가? 가수로 치자면 절대 음감을 가지는 것과 맞먹는 귀중한 재능이다.
글은 ‘재능’만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능’을 익히지 않으면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내 생각에 좋은 글을 쓰려면 ‘재능은 20’, ‘기능’은 80, 그런데 직접 글을 써 보지 않으면 ‘기능’은 결코 한 뼘도 늘지 않는다.
명절 때도 나는 일해
‘나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나는 농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일이 있건 없건 규칙적으로 책상 앞에 앉는 편이다. 성석제,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매일 규칙적으로 책상 앞에 한 시간 이상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라!
다른 방법은 없다. 세계적인 작가도 그렇게 부지런을 떠는데,
“작가란 오늘 아침에 글을 쓴 사람이다. 로버타 진 브라이언트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일을 열심히 하려면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려면 기계처럼 살아야 한다. 규칙적으로 기계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어설프게 몸과 마음을 다 동원해서 글을 쓰다가는 내 몸은 곧 망가질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만 읽고 넘길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몸에 습관으로 붙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시간 낭비만 하는 셈이다. 글이라는 건 ‘규칙적’으로 ‘기계적’으로 써야 한다. 날마다 책상 앞에 앉아야 한다.
당장 글은 쓰지 않아도 좋다. 그저 펜과 공책을 앞에 두고 한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연습을 해보자!
당신의 머릿속에는 글이 될 만한 아이디어가 수십 가지나 있다. 수백 가지인들 없겠는가? 그러나 글을 쓰는데 수백 가지 아이디어는 필요하지 않다. ‘하나’만 있으면 글이 된다. 글을 쓴다는 건 그 한 가지 아이디어를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드는 과정이다.
작가란 단 한 편이라도 완결된 원고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벼락치기로 글을 쓰는 버릇을 들여선 안 된다. 하루에 한 시간씩 매일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노트에 해 놓은 것이나, 아이디어를 적어 놓은 것이나, 토막토막 타자쳐 놓은 것을 글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부단히 틀림없는 원고를 생산해 내야 한다.
읽고, 베끼고, 쓰고
습작도 연주나 운동처럼 ‘기능’을 연습하는 과정에 가깝다.
쌀통에 쌀부터 채워라
글 쓰는데 가장 큰 적은 ‘완벽주의’다. 필요한 자료는 모두 구해서 책상 옆에 쌓여 있어야 하고, 쓰려는 글의 개요와 목차는 미리 짜여 있어야 하고, 너저분한 책상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고, 키보드를 두드릴 때 신경 쓰이지 않게 손톱은 짧게 깎여 있어야 하고……
‘생각’도 글을 쓰기 위한 준비 단계에 포함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래선 안 된다. 글을 생각의 결과물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버려라.
생각은 글을 쓰면서 하라. 노트나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생각하라.
생각을 글로 바꿔 놓으면, 그 글이 다시 나의 시야로 들어와 뇌를 자극해서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
쌀이 있어야 밥을 지을 것 아닌가. 진밥이 돌까 된밥이 될까 하는 고민은 나중에 해도 된다.
돌 없고 벌레 없는 쌀을 구해야 한다고 ‘맨날’ 걱정만 하고 있어 보라. 진밥보다 된밥을 먹고 싶다고 ‘첫날’ 희망만 늘어놓고 있어보라.
“그런다고 쌀이 나오느냐 밥이 나오느냐!”
손가락으로 사유하라
‘글은 생각 없이 써야 한다.’ ‘글은 손으로 써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손이다. 이왕주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글은 쓰기 싫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일종의 알리바이로서 ‘생각’과 ‘독서’에 빠져 지냈던 것이다.
작가들은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남 앞에 미흡한 글을 내놓기를 꺼린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일단 써라. 쓰면서 자신의 그을 분석 하거나 평가하지는 마라.
나중에 다 써 놓고 검토해도 된다. ‘가슴에서 꺼내라.’라는 광고 카피처럼, 가슴에 손을 넣어 그냥 꺼내라. 펄떡펄떡 살아 있을 때 잽싸게 꺼내라. 생각을 많이 할수록 글은 생기가 떨어진다.
글쓰기는 단순히 생각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다. 글쓰기의 진정한 즐거움은 ‘발견’에 있다. 내가 쓴 글의 작자가 아니다. 최초의 독자다.
‘재능’보다는 ‘땀’이 소중하다.
문장력을 높이라. 어떻게 높이는가.
“자꾸 써 보면 알아져.”
기술은 시간과 공을 들여 익혀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짜장면’을 쓰고 싶으면 쌍지읒을 쓰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먹기 싫어도 만날 ‘우동’만 먹어야 한다.
그 기술이라는 것은 대부분 ‘단순 기술’이다. 단순 기술을 배우는 데에는 속성 코스가 없다. 오히려 ‘고급 기술’은 지름길이 있다. 작가의 단순 기술은 문장력이다. 문장력의 향상은 흘린 땀의 양에 비례한다.
독자들은 재능는보다는 ‘땀’을 더 존중한다. 물론 그 땀은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고인다.
세상이 아무리 대충대충 흘러가는 분위기라도 작가는 문장에 대해서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꼼꼼쟁이가 되어야 한다. 인기작가가 되고 싶은가, 존중받는 작가가 되고 싶은가.
보는 것만 고수가 되지 마라
나는 영화를 볼 때 혼자 가서 본다. 괜히 다른 사람과 같이 가서 영화 감상에 방해를 받고 싶지 않다. 나도 영화에 대해선 보는 것만 고수다. 영화인들이 보면 딱 밥맛 없어할 부류다.
나는 영화를 감상하듯이 글을 단순히 보고 즐길 수만은 없는 처지다. 남의 글을 읽는 것은 물론 동시에 나의 글도 남 앞에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썼네 못 썼네 구시렁거리지 말고, 그럼, 자신이 직접 써 보시든지.
아무리 허섭스레기처럼 보여도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독서광 중에 보는 것만 고수인 사람들이 뜻밖에 많다.
정작 자기 글을 써 보라고 하면 A4용지 한 장도 못 채워서 진땀을 흘린다. 이는 책을 많이 읽으면 글쓰기능력도 저절로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그저 착각일 뿐이다.
몸의 상태가 가장 좋은 시간에 책을 읽는다. 기분이 최고일 때는 글을 써야 한다. 매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글쓰기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아야 한다.
작가란 오늘 아침에 글 쓴 사람이다.
어떤 핑계를 대든 오늘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면, 오늘 하루를 공친 것이다. 하루가 허무하게 날아간 것이다. 온종일 책을 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 글을 쓰지 않은 건 글을 쓰지 않은 것일 뿐이다, 잘못된 독서 습관만큼 글쓰기에 치명적인 것은 없다.
독자는 글을 읽는 사람이고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내 생각- 아무도 없는 시간에 글을 쓴다.,
누군가 곁에 있는 시간에 읽는다.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생기면, 그 시간에 한 장짜리 글부터 써야 한다. 글을 다 써 놓고 시간이 남으면 그때 책을 읽어라.
아는 만큼 정직하게 써라
벤처 사업가로 손꼽히는 컴퓨터 전문 주치의 안철수 “고객에게 정직해지는 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는 것이다.
당신도 독자에게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야 한다. 글쓰기가 그래서 어려운 거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첫째 내가 실천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입을 다무는 것이다. 둘째, 그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싶으면 스스로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다. 내 말과 글과 행동에 괴리가 있으면 남들이 지적하기 전에 스스로 창피함을 느낀다.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은 원숭이는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일 뿐이다. 당신은 원숭이가 아니라 작가다.
경험이 없으면 쓰지 마라
경험담이 없다면 다 말장난이다.
경험만큼 글쓰기에 중요한 자산은 없다. 제아무리 치밀한 논리와 현란한 수사를 동원해서 쓴 글도 작가의 소소한 체험담이 가진 감화력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어떠한 경험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바로 여기에서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이 갈린다.
학의 길이가 길면 잘라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라. 단어만으로 충분하다면 굳이 문장을 쓰지 말고, 세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네 단어로 늘여 쓰지 마라. - 프랭크런츠
문장을 간결하게 쓰라는 것은 글쓰기의 상식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쓸 때마다 신경을 바짝 써라. ‘문장이 늘어지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들면 거기서 끊어라. 한 문장이 길어질 것 같으면 두 문장으로 쪼개라. 숨표를 써서 두 문장을 한 문장으로 연결하지 마라.
‘쉼표’라는 문장 부호를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 버려야 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 중심주의’다. 글쓰기는 당신이 펜을 놓는 순간 끝나는 게 아니다. 독자가 당신이 쓴 글을 읽고 이해해야 비로소 끝난다.
블로그를 운영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난다. 내가 올린 글과 ‘핀트가 맞지 않는’ 댓글이 달리는 것이다. 심지어 내 의도와 정반대로 이해하는 댓글도 보인다. 이럴 때 단순히 그 댓글을 단 사람의 착각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오해는 글이 ‘장황하게’ 늘어져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간결하게’ 썼다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정치법(문장을 이루는 성분을 순서대로 바르게 배열하는 일)에 따른 문장을 쓰도록 하라.
예) 나는 매미들이 발악적으로 울어대는 오솔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 나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이외수 글쓰기의 공중부양
정치법에 철저히 훈련해 두지 않으면 평생 고생한다. 잘못된 문장 습관을 고치기는 담배 끊기보다 어렵다.
똥 눌 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을 들이게 되면 나중엔 담배를 피우지 않고선 똥을 못 누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비문을 피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단문으로 쓰는 것이다
성경에도 단문과 복문이 나오는데 인간이 ‘선악과’을 따먹기 전에는 다 단문으로 말했다고. 선악과 이후에는 복문을 쓰게 됨을 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복문은 죄와 관계가 깊다. 무언가 변명거리가 많을 때 문장은 기술이 필요해지고, 그것은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이는 복문으로 된다- 강은교
절반은 전체보다 낫다
무의미한 문장을 더 써넣은 것보다 차라리 좋은 문장이라도 문맥상 거슬린다면 과감히 잘라내는 편이 훨씬 낫다 - 쇼펜하우어 문장론
저술가는 독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배배꼬인 문장으로 우리의 인내력을 시험하고 있는가. 막상 읽어 보면 별 내용도 아니면서 당신은 양심적인 태도로 글을 써야 한다. 문장 가지고 장난쳐서 독자를 힘들게 하지 마라. 쉽게 쓸 수 있는 글을 어렵게 쓰지 말고, 짧게 쓸 수 있는 글을 길게 쓰지 마라.
글을 다 쓰고 나면 지인들에게 읽히고 조언을 구할 것 (냉정하게 판단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들이 옳다! 그들은 언제나 옳다. 속은 무척 쓰리겠지만, 그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신이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을 받아들인다는 게 그만큼 힘든 일이다.
당신은 예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 전달이다. 메시지가 우선이고 예술은 그 다음이다. 메시지는 간결함을 좋아한다. “불씨가 남아 있을 수 있으니 불을 끄고 나면 반드시 재차 살펴보자.”라고 쓰는 것보다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고 쓰는 게 백번 낫다. 한 단어면 충분할 것을 한 문장으로 늘이지 마라. 한 문장으로 충분할 것을 한 단락으로 늘이지 마라. 한 단락으로 충분할 것을 한 장으로 늘이지 마라.
형식에 복종하라
<낮술> ‘조명 설치할 돈도 없는데 무슨 영화를 찍는단 말인가.’ 하고 포기하지 않고, ‘조명이 없으면 낮에만 찍으면 되지, 뭐.’ 하고 발상을 전환하는 순간, 그 영화만의 독특한 미학이 탄생한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형식상에 제한”을 두고 쓴 글이 자유롭게 쓴 글보다 독자에게-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광고 카피가 그렇지 않은가. 메인카피는 한 줄이다. 광고에 꼭 반영해 달라고 광고주가 열 마디를 던져 주고 가면, 카피라이터는 그걸 한 마디로 압축해서 토해 내야 한다.
열 마디보다는 한 마디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반드시 한 단락의 분량을 일정하게 채워야만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독자에게 정돈되고 안정감 있는 느낌이 든다.
예컨대 영화 리뷰를 써서 블로그에 올리더라도 반드시 원고지 10매 분량에 맞춰서 써 보는 거다. 9매도 11매도 안 된다. 딱 10매다. 서론 2매 본론 6매 결론 2매 이렇게 쓰인 글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독자는 이런 형식미가 느껴지는 글에 더 신뢰를 느끼게 된다.
원고가 나오면 원고가 나온다
일관된 주제 아래 엮어 낸 원고가 최소한 책 한 권 분량(원고지 800매 이상)은 되어야 작자라고 할 수 있다.
800매 분량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분야(언덕)가 있어야 한다.
‘무엇’을 경험하느냐 보다는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가 더 중요하다.
800매 분량을 글자로 채우려면 한 문장 한 문장 꾸역꾸역 써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걸 피할 도리는 없다. 800매라는 미래의 숫자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오늘 써야 할 20매에만 집중한다.
오늘 쓸 양만 생각한다
차는 헤드라이트가 비춰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다. 단지 당신 앞의 2~3피트 정도 앞만 보면 된다. 그런 식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머리보다는 손가락을 믿어라. 그 쓰기는 순간적인 선택의 집합이다. 우리가 쓰려는 것은 학술 논문이 아니다. 논문은 쓰는 도중에 결론을 바꾸지 않는다.
너무 멀리 보지 마라. 다만, 오늘 할 일인 ‘몇 단락 쓰기’에 집중해라.
홈쇼핑 수법- 80만 원짜리 컴퓨터를 12개월 할부로 “한 달에 8만 원도 안 되네!” 왠지 심적 부담이 덜하다.
‘조각’, 2백 자 원고지 15매 정도 매일 쉽게 잘 쓸 수 있는 조각. 오늘 해야 할 작은 조각만 생각. 먹기 딱 좋죠? - 에릴 메이젤 일상 예술화 전략 미국 심리 치료사이자 ‘창의력 전문가’
책 한 권이나 글 한 편은 머릿속에서 지워라. 너무 멀고 너무 거창하고, 너무 부담스럽다. 물론 하루 작업량으로 얼만큼이 적당한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날마다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조각’
‘오버 페이스’로 두 페이지를 쓰고 나면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린다.
‘필’을 받아서 며칠 동안 잠 안 자고 식음 전폐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습관, 그 후유증.
일단 급선무는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조각’의 크기를 알아내는 것이다. 괜히 욕심이 앞서서 작은 입으로 큰 조각을 물었다간 입아귀만 찢어진다.
정답은 하나뿐이다
눈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휘를 시각적 어휘라고 한다. 읽으면서 문맥 속에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어휘를 ‘이해어휘’ 몸에 체득되어 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어휘를 활용어휘라고 할 수 있다. - 신규철
우리말 어휘를 따로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한국어를 외국어처럼 생각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목적에 걸맞은 학습법으로 공부해야 한다.
작가 ‘활용어휘’의 양이 늘어나지 않으면 필력도 늘지 않는다.
사소한 실수는 사소하지 않다
글쓰기에서 사소한 실수는 더욱더 사소하지 않다. 일상에서 저지른 사소한 실수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어딘가 허술한 결점이 생기더라도 독자들이 안 보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의 눈에는 얼룩부터 보이고, 그래서 독자는 흠집만 골아서 보는 듯하다.
작가라면 누구나 흠이 없는 “하얀 한복”과 같은 글을 쓰기를 원한다. 글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완벽에 대한 독자의 기대치도 함께 높아지게 된다. 독자는 같은 실수를 해도 ‘B급작가’에겐 비교적 너그럽지만, A급 작가에는 적잖은 실망을 느끼게 된다.
“가장 좋은 것은 조금씩 찾아온다. 작은 구멍으로도 햇빛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커다란 바위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건 오히려 작은 조약돌 같은 것이다. - 안상헌 내 삶을 만들어준 명언노트 추리작가 코넌 도일의 말
사람을 넘어뜨리는 건 ‘바위’가 아니라 ‘조약돌’이다. 바위는 눈에 잘 띄기 때문에 보이면 쉽게 피할 수 있다. 조약돌은 그렇지 않다. 아차 하는 순간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진다. ‘도토리’ 한 개정도는 그래도 봐줄 만하다. 그러나 ‘도토리 두 개는 곤란하다. 축구에서는 옐로카드 두 장이면 곧바로 퇴장이다.
언어에도 불량품이 있다
디자인도 훌륭하고 착용감도 좋은 게 이탈리아 명품 같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에이, 이거 중국산이잖아,”
작가는 이런 장면을 보고 그냥 웃어넘겨선 안 된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마음이 불편해져야 한다. 민감한 언어 감수성은 작가로서 중요한 덕목이다. 차라리 ‘의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지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국어 소비자이자 생산자다. 소비자로서 당신은 언어를 과소비해서는 안 된다. 언어는 검소하게 사용해야 한다. ‘얼큰이’ ‘숏다리’ 또는 ‘중국산’과 같은 불필요한 말은 되도록 쓰지 마라. 그리고 생산자로서 당신은 불량품인 언어를 만들어 내는 데 끼어들서는 안된다.
제목이 얼굴이다
책의 제목은 사람의 이름과 같다. ‘제목장사’라는 말. 책에 담긴 메시지를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똑 떨어지게 표현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100권 읽기보다 한 권을 써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88만 원 세대‘
좋은 제목을 지으려고 머리를 싸매고 고심해 보는 것도 글쓰기의 주요한 즐거움 중의 하나
제목부터 정해놓고 그에 걸맞은 내용을 써보라는 얘기다.
제목을 확정하고 나면 글쓰기의 절반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 ‘내용이 먼저냐? 제목이 먼저냐’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퇴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퇴고는 글쓰기의 마무리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퇴고 직전까지가 글쓰기의 사전 작업이고, 퇴고부터가 본격적인 글쓰기의 시작이다.
기껏해야 10퍼센트 미만이다. 그런데 그 10퍼센트를 꼼꼼히 퇴고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글의 질이 확연히 달라진다. 10퍼센트를 고치느라고 90퍼센트를 쓴 시간의 몇 배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러나 그 바보짓을 해야 좋은 글이 나온다. 초짜는 글을 쓰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이 길고, 타짜는 글을 쓰고 나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다. 초짜는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탄성을 내지르고 타짜는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한숨을 내쉰다. 글의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타짜는 눈이 높다. 눈이 높아서 자기 검열도 심하다. 그래서 초짜들 눈엔 완성품으로 보이는 원고를 타짜는 구토가 나오는 순간까지 매만진다.
문장을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껄끄러운 부분을 솎아 내거나 다듬는다. 그걸 되도록 많이 되풀이하면 된다. 이때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이 좋다.
초고를 완성하고 나면 “당분간 잠재워 두는것"이 좋다.
초고를 완성한 직후, 그 자리에서 열 번 읽느니, 하룻밤 자고 자서 이튿날 아침에 한번 읽는 게 낫다. 내 글이 아니라 남의 글처럼 보이게끔 하려고 적어도 하루는 묵혀 두라는 것이다. 물론 이틀이면 더 좋고, 일주일이면 더더 좋고, 한 달이면 더더더 좋다.
작가는 ‘그저 직업이’이 아니다
작가라는 직업을 신비화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작가를 ‘그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떨떠름하다. 그저 직업이란 뭘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택한 직업이 그저 직업이다. 주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안정된 직장 또은 철밥통일 것이다. 국가와 시민에 대한 봉사라는 답변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오로지 돈 때문에 선택하는 직업이 바로 그저 직업이다.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보자면 작가만큼 답이 안 나오는 직업도 드물다. 단순히 ‘생계’가 목적이라면 뭐 하려고 작가를 하나.
‘돈 안 되는 놈’ 톡 까놓고 얘기해서, 작가가 과연 직업으로 분류될 수 있는 지도 의문이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물질적인 만족감과는 다른 만족감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100억 정도 줄 테니 죽을 때까지 글 같은 건 쓸 생각도 하지 말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만약 작가를 그저 직업으로 생각한다면 흔쾌히 승낙할 것이다. 평생 일하지 않고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뭣하려 있는 손톱 없는 손톱 물어뜯어 가며 책상 앞에 앉아 있겠는가. 그만큼 ‘인정 욕구’의 충족이 가져다줄 수 있는 쾌락은 크다.
세상엔 수많은 직업이 있지만, 그중에 ‘나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고민까지 하게 만드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는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직업이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라는 말 속에는 “나는 어떤 인간이 되겠다.”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이 ‘그저 직업’을 갖고 아파트 평수나 늘려 가며 살길 바란다.
나는 언제나 최고의 행복보다는 덜 불행한 길들만 택하며 살아왔었지. 시시한 청춘이다.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나는 비록 가난했으나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사람이었지만, 월급쟁이가 된 나는 돈이 생겼지만, 세상에 너무 많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끝없이 복제되고 있는 대한민국 요원들이여. 당신들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 김준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중에서
글쓰기 자체가 보상이다
자신의 ‘언덕’을 비비며 써야 읽을 만한 글이 나오는 법이다.
글쓰기 자체가 보상이다. 내 이름이 박힌 책을 갖게 되는 것은 꾸준히 글을 써 나가는 과정에서 얻는 부수적인 즐거움일 뿐이댜.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써라.
사람들은 하나의 장점에 ‘매혹’되면 나머지 단점은 눈감아 준다. 매력적인 작가가 되고 싶으면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최소화하는 것이다.
기성작가는 쓰기 어려운 개성 강한 글을 쓰되, 미숙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문장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런데 그 문장력은 하루아침에 늘지 않는다. 적어도 10년은 글을 써야 는다.
“뭐가 달라도 달라야 비싼 영화와 차별성이 생긴다. 첫째도 개성, 무엇보다도 오직 개성, 개성이야말로 가난한 예술가의 무기이다.- 박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