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소셜한가?
<소셜미디어가 바꾸는 인류의 풍경>
유승호/ 삼성경제연구소
인간, 소셜미디어를 만나다 /
인간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행복, 신뢰, 통합일 것이다.
아들과 함께 프랑스 여행을했다. 좋은 호텔은 숙박료가 만만치 않아 인터넷을 통해 민박할 곳을 찾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집에 묵을 줄 알고 집을 버젓이 내놓는 것일까?’ 서재에 책이 있고, 각종 요리 기구와 가재도구도 갖추어진 집들이다. 민박사이트에는 이용자들의 출신과 직업도 쓰고 자기소개도 해야 한다. 페이스북 링크드인, 트위터 등 자신의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 외국어를 몰라도, 낯선 여행지에서 길을 찾아야 할 때에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복잡하고 애매한 것도 즉각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제는 이러한 친구들이 곧 나의 인지능력의 일부가 된 것이다. 바로 ‘증강인류’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풍경들 /
소셜미디어란, 웹이나 모바일을 활용하여 상호 소통하는 매체다.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트위터, 유튜브, 베보뿐만 아이라, 유저들이 직접 만든 콘텐츠를 생성하는 형식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소셜미디어가 있다. 18세기 이전까지 영국 북서부의의 호수지역은 황폐하고, 소름끼치는 곳으로 묘사되었다. 오랫동안 공포스러운 장소, 악령이 사는 곳, 대홍수와 연관된 공포의 원천이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은 자연을 감상한다. 낭만적이거나 미학적인 취향으로 자연을 대한다. ‘그림 같다.’라는 말은 아름답다는 말이다. 소셜미디어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소셜미디어를 공포의 대상으로 해석한다. 소셜미디어라는 깊은 숲 속에 악령이 산다고 믿는다.
지각된 근접성 /
누군가 스마트폰을 “가까이 있는 사람과는 멀게 하고, 멀리 있는 사람과는 가깝게 하는 것”. 카페에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다가도 어느 순간 모두 자신의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소셜 채팅 사이트에서 ‘재잘대고 있다.’ 친구와 이야기하려고 고개를 드는 것이 아이라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본다. 이제 이런 모습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남자자 여자나 아이들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높거나 낮거나, 똑똑하거나 어리석거나, 무식하거나 박학하거나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 즉 아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말을 들어주고 말을 걸어주고 인정하고 존경해주기를 강하게 바라며 이러한 욕망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 미국 제2대 대통령 말이다. 20세기를 지배하던 대중매체는 점점 힘을 잃고 인터넷과 SNS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세대 간 소통보다는 세대 내 소통을 더욱 촉발시켰다. 페이스북에는 ‘좋아요’라는 버튼만 있고, ‘싫어요’라는 버튼은 없다. ‘좋아요’의 권위에 순종하고 난 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한다. 복종이란 ‘싫다’라고 할 수 있는 공간을 빼앗는 것이다. 버튼을 누른 이후 우리는 복종하고 묵인하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대화 자체를 관리한다. ‘가까움의 미미어’는 이성적인 면보다 감성적인 면과 더욱 가깝다.
감염과 치유의 공간 /
행복도 감염되고 불행도 감염된다. 불행한 소속에 더 빨리 감염된다. 나쁜 소식이 지인인나 가까운 친구로부터 전해지면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셜미디어는 ‘메아리 방 효과’가 나타나 거짓 루머가 더욱 쉽게 퍼진다. 메아리 방은 소리의 울림을 얻으려고 만들어진 방. 사람들은 다양한 곳에서 정보를 찾으려 하지 않고 친숙한 곳에서만 정보를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편안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대상은 가족과 친구이다. 긴장을 늦추고 모든 정신이 무방비 상태가 되는 인지적 평안, 인지적 평안은 반복된 노출에서 유래, 반복된 노출은 낯섦을 제거한다. 치유의 공간이다.
공감의 공간, 소셜미디어는 우리 시대의 ‘데미안’이다. 나를 좋아해 주고 내 말을 들어줄 친구인 데미안과 같은 사람을 찾는 것이다.
동시성, 자아의 확장 /
소셜미디어는 리얼타임이다. 바로 내 스마트폰에서 나의 친구들과 동시에 소통할 수 있다. 전화는 일대일로만 소통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내가 동시에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건 가슴 뛰는 일이다. 왜 인간은 이렇게 리얼타임에 열광하는가? 그것은 바로 내 몸이 리얼타임이기 때문. 소셜미디어, 또 다른 나를 확인하는 공간.
SNS는 대학생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이나 동영상을 공유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SNS는 개인의 관심사와 인맥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커뮤니티이다. SNS는 ‘공유와 개방’보다는 ‘친구등록’이라는 절차를 통해 친구로 등록할지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다소 폐쇄적이다. 새로운 질서에 들어간다기보다 자신이 이미 속해 있는 환경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자신이 이미 보고 알고 경험하는 세계를 인터넷으로 재확인하고 싶어 하는 ‘상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상의 커뮤니티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화간하고 기뻐하는 것,
유아가 거울 속 이미지를 자신으로 보고 사랑하고 애착을 느끼는 것.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자기와 아주 유사한 탄인’이지만 자기와 동일시. 상대가 나와 비슷할 때 매력을 느끼는 ‘유사성 매력 효과’가 극대화되는 것이다.
e-퍼서낼러티: 자기 노출과 친화적 외향성 /
토크쇼의 번성: 노출의 매력, 왜 갑작스럽게 우리 사회에 토크쇼가 늘어난 것일까? ‘자기 노출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 자신을 거리낌 없이 노출하는 출연자에게 시청자들이 매력을 느낀다. 한국에서 뜨는 유명 인사들은 대부분 토크쇼에서 자기의 사적인 인생사를 그래도 드러낸 사람이다. 스타의 노출은 그들이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옆에서 말하는, 나와 친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노출하고, 패션도 보통 사람처럼 입음으로써 대중에게 일반 서민처럼 비쳤다. 즉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을 쓰는 대중의 취향과 유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중은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열광했다.
자기 노출과 친화적 외향성, 자기노출이란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노출이 타인에게 잘 통하려면 정말 자신을 있는 그래도 순수한 의도여야 하며, 양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지 않고, 애매한 것보다 긍정과 부정이 명확할수록 좋다. 개인이 블로그에서의 자기 노출을 통해 타인에게 신뢰를 얻고 친구도 얻게 되어 행복해진다. 스마트폰에서는 특정한 사람과 나눈 대화나 특정한 이름을 터치할 경우, 그 사람과 주고받은 문자 내용에 대한 히스토리가 모두 뜬다. 자기 노출은 실시간인 동시에 과거의 흔적까지 포함한다. 시공간적으로 확장된 노출은 인간에게 더욱 큰 매력을 부여한다. 공간적으로 가까우면 실제로 가깝다.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전 세계가 이웃사촌이다.
‘4일 효과’, 4일 동안은 외향적이고 친숙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보여야 상대방에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어제는 그냥 지나쳤을 타인이 공간적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더욱 한한 유대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소셜미디어는 친구 관계, 지인관계라는 사적인 관계에 기초한다. 그곳에서 생성되는 정보는 즉각적이고 솔직하며, 그래서 흥미롭다. 공적인 정보의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생기면서 인테리어에 비해 맛이 없는 레스토랑도, 잉크가 번지는 만년필도, 게임밸런스에 문제가 있는 게임도 모두 소지자원에 고소해야 할 정도의 큰 사안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적인 불만이 어마어마하게 넘쳐나는 곳이 소셜미디어 공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표정이 그대로 묻어나는 영상 전화 통화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효과가 더 컸던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해도, 발명된 지 100년이 넘은 전화기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영화관, 음악회, 스포츠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증강인류’의 도래와 소셜미디어의 미래 /
중년의 한 동료는 직장에서 5명의 친한 친구만 사귀면 인생에서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은퇴한 대기업 경영자는 후배 5명만 있으면 노후가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나 20대 들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 친구가 드디어 1천명을 넘었다고 자랑한다. 소셜미디어 세대는 대기업법인의 직원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람을 친구로 거느리며 관리하는 ‘자연인’이 되었다.
소셜미디어 시대의 친구는 이제 그냥 친구가 아니다. 나의 신뢰와 행복, 그리고 권력까지도 좌우하는 친구이다. 소셜 테트워크의 친구가 2천명을 넘으면 채용할 때 가산점을 준다는 기업도 있고 특채까지 하는 기업도 등장했다. 이제 소셜미디어 시대의 친구 테트워크는 나비나 잡는 ‘거미네트워크’를 넘어, 가히 권력을 통째로 얻는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되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폐쇄된 집으로 만들어졌지만, 소셜의 피라미드는 개방된 거리로 이루어져있다.
소셜미디어 속의 나의 매력은 스스로 사람들의 입을 거쳐 퍼져 나간다. 증강인류는 영혼불멸성을 지향한다.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가 된다. 소셜미디어 상에서 친구 지우기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할 정도다. 백성 한 명 한 명이 소중한 파라오의 신전과 같다.
노출의 증강: 평판을 경영하다 /
증강인류는 노출을 증강시킨다. 우리 몸에서 자아 표현이 가장 쉽고 빠르게 드러나는 곳은 얼굴이다. 프로필 사진만이 아니라, 친구 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친구들의 분위기는 어떤지 등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친구 수를 보면서 그의 권위를 가늠하고, 내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친구가 나에 대해서 말한다. 노출의 증강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내 주위, 나의 친구로부터 나온다. 내가 모르는 나까지 노출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판이다. ‘남들이 보는 나’가 ‘스스로가 보는 나’보다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면 공적인 권력처럼 비춰진다. 스타의 권력이 스타 그 자체가 아니라 펜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노출하여 친구를 만들었어도 그 친구들은 또 다른 친구들을 갖고 있다. 그래서 실제 친구 수가 많이 늘어나도 늘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며, 스스로 좋은 친구로 인정받으려 평판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무리의 증강: 무리로부터 권력을 얻다 /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와 친한 친구가 다른 사람과도 친한 친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그 친구에게 친한 친구인지 의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명이 모여 하는 잡담이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친하다는 유대감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대감을 확인하기에 가장 손쉽고 편안한 장치가 그 자리에 없는 타인과 그 자리에 있는 우리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즉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비난’을 통해 가장 쉽게 달성된다.
애착의 증강: 팬의 팬은 스타다 /
증강인류는 애착을 증강시킨다. 페이스북에 내가 포스팅한 글과 사진에 ‘좋아요’ 버튼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다시 그 사람의 포스트를 보고 이번엔 내가 ‘좋아요’버튼을 누르면서 미디어 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사성 매력의 법칙은 더욱더 작동하기 쉬운 환경이 되었다. 더 이상 매력남, 매력녀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닐 필요가 없다. 소셜미디어 덕분에 스타들처럼 보통 사람들도 스스로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모은다. 서로 팬의 팬이 된다. 서로 팬이 되어주면 ‘나도 스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사적인 것까지 내놓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노출함으로써 소셜미디어에서는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수 없다. 나의 매력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나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노출시켜야 한다. 그것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호기심을 지속시킬 수 있다. 프라이버시를 주장하다간 고립되고 만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외향성과 친화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겸손해하지 말고 프라이버시를 신경쓰지 않으며, 외향적이고 친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행복과 소셜미디어의 미래 /
깊은 관계를 지속화하기 위해 오히려 얕은 관계가 필요하다. 중강인류에게 자기 노출은 아주 중요하다. 자기 노출은 얕은 관계를 형성하고, 나아가 깊은 관계로 진전되며, 깊은 관계가 끊어졌을 때 오는 상실의 완충제로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자기 노출에 적극적인 사람을 자기 노출에 소극적인 상대보다 더 호의적으로 대한다.
행복에 대한 몇몇 관점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한가?‘ 행복한 순간은 바로 다음에 찾아올 덜 행복한 순간을 예고한다. 최고의 기쁜 감정은 곧바로 허탈하고 공허한 감정을 동반한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초점이 맞춰진다. 행복감은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감과 함께 순간순간 느끼는 주관적 행복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자기 몸이 피곤하면 어디에도 관심이나 주의력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행복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반대로 주의력을 기울일 여유가 있다면 행복을 느끼거나 느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마치 빨대를 꽂은 듯 인간의 주의력을 단번에 흡수한다.
말글의 미래, 소셜미디어는 ‘말글’이다. 글이긴 하나 말로 이루어진 그이다. 친구에게 말을 거는 글이다.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다. 누군가 문어체를 쓰면 그냥 채팅 창을 닫아버린다. 글은 위압적이다. 그러나 말은 수평적이다. 서로 나눌 수 있다. 글은 한 사람이 쓰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읽을 뿐이다. 말글은 그런 면에서 말에 더 가깝다. 상대방의 반응이 없으면 쓸 일이 없다. 말하면 욕구가 풀린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꿈이며, 꿈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인간을 구제하는 수단이다. 꿈은 스토리다. 이야기하는 것 그 자체로, 말하는 것 그 자체로 인간은 치유된다. 소셜미디어는 말하기의 공간이자 말글의 공간이다. 말글에 의존하는 소셜미디어는 오래갈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향후 더 좋은 말글 서비스로 진화할 것이다.
소셜미디어, 최후의 인간을 만나다 /
TV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불안을 조장한다. 청년백수, 은퇴 악몽, 100세 공포 등 사람의 위기를 끊임없이 말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존중하는 메커니즘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소셜미디어를 왜 사용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다. 일시적이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했던 구성원과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한국이나 미국이나 예외 없이 유사하다. 행복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친구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충분한 관계이다.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자체가 기쁨이다. 더 이상 마음을 쓰거나 말을 떠벌릴 필요도 없다. 그저 말없이 함께 있음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편안한 것’이 늘 ‘좋은 것’은 아니다. 니체에게 ‘편안한 것’이란 풀을 뜯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낙타의 삶’이다. 니체는 “철학은 공포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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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전, 집의 큰아이가 내게 집을 한 채 선물했다. <류창희> 사이트다. 집이 너무 커서 어찌 관리를 해야할 지 몰라 한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가 말하기를 “지금부터 웹을 가지고 놀면 이다음 다리 아프고 힘들 때, 혼자 놀기 괜찮은 곳이라고 했다. 그냥 소소한 엄마의 일상을 올리다 보면 재미도 추억도 있을 거라 했다.
그런데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댓글과 그날그날 조횟수에 적자 않게 압박을 받았다. 벌써 7년전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기간의 권위라는 것도 있는데, 나도 게을러 졌다. 그동안 스마트폰이라는 스마트한 기계가 나왔다. 불특정 벗들이 컴퓨터 앞에 앉지를 않으니 그마저 시들해졌다. 더구나 도박 불법사이트들이 무작위로 쳐들어와 도배를 하는 바람에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이 되었다.
점점 재미가 없어지던 차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문제점은 살펴보니 말글로 말하지 않고 문어체 글로 썼기 때문이다. 라고 위안한다. 글쓰는 이와 말하는 이의 차이점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글을 포기할 수도 없고 말은 더구나 포기할 수 없다. 이미 나는 SNS에 중독되어 있다. 내가 살아있다는 몸짓은 내 생각을 글 쓰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핑계를 다 갖다 붙이며 닫으려고 하면
“그냥 두세요, 가지고 노세요” 라고 아들은 말한다.
차일피일 복구도 리모델링도 못하고 나날이 풀섶이다.
며칠 전, “엄마 사이트”좀 어찌해봐라. 라고 하니, 엄마도 이제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해봐요. 오히려 그편이 낫다고 한다. 나는 이제 얽히고설키고 시시각각 반짝반짝 대응하는 것이 지친다고 했더니, ‘활력있게 살라’고 한다.
SNS 그것을 해야 한다는 데, 그건 도대체 뭐하는 물건이고? 하던 차다. 용어도 생소한 책을 펴들고 골 아파도 공부나 해보자던 애초의 시큰둥을 깨고 단숨에 다 읽었다. 나에게는 다소 어려웠지만, ‘아하! 그런거구나’ 관심으로 감을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이미, 깊숙하게 소셜네트워크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