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의 파리
창조적 영혼을 위한 파리 감성여행
에릭 메이슬 / 노 지양 옮김
왜 파리인가?
파리에 가는 것. 그것도 오직 글을 쓰려고 가는 것.
파리, 발을 내디뎠다는 것 자체에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2주가 되었건 6개월이 되었건 그 여행 기간에 ‘실제로 창조적 작업을 하는 것’
파리는 예술가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여드는 곳, 체코영화감독과 러시아 안무가와 아프리카 화가와 프로방스의 시인이 오다가다 마주칠 법한 장소이다. 파리는 ‘어울림’의 도시다.
파리를 직접 가보지도 못할 예술가들에게도 하나의 뮤즈가 되어왔다.
파리의 거리가 찍힌 사진만 봐도 왠지 기분이 고양되는 동시에 박탈감 비슷한 느낌이 찾아온다. 파리가 담는 그 무언가 때문에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지만 그럼에도 지금 당장 파리에서 살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마음 한구석 싸한 슬픔이 밀려오는 곳이다.
파리는 글을 쓸 수 있고 글이 써지는 장소다. 글쓰기에 완벽한 장소이며 글쓰기에 내 전부를 바치겠노라 다짐할 수 있는 장소다.
단순히 파리를 관광지로만 인식하지 말고 창조적 작업을 하는 장소로 여겨라.
보주 광장에서의 하루
파리에 도착할 때마다 나는 가장 먼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주 광장으로 달려간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바로 이것 때문에 파리에 온 거야!”
오전의 보주 광장은 시원하면서도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이 건물 6호에 살았던 빅토르 위고와 일곱 살에 이곳에서 콘서트를 연 모차르트 이야기를 전하며 관광객들의 얼어 있던 표정을 풀어준다.
마레 지구를 열심히 활개치고 다녔던 관광객들은 벤치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한다. 연인들이 만난다. 피크닉 나온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하나씩 펼쳐 놓고 마지막으로 와인을 딴다. 사람들은 책을 읽다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다 또 책 속에 빠져든다. 지친 배낭여행족들은 잔디에 누워 단잠을 청한다. 연인들은 서로의 팔에 안겨 달콤한 꿈을 꾼다.
파리에 오면 편안함이 느껴진다. 이 도시는 우리가 항상 갈망해온, 그러나 여유가 없어 온전히 하지 못했던 것들, 즉 산책하기, 생각하기, 사랑하기, 창작하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다.
보주 광장은 당신 안의 예술가적인 본성을 마음껏 펼쳐보이라고, 꼭 그래야만 한다고 말없이 주장한다.
순수한 플라뇌르 -
도시를 거닐다.
파리는 프랑스라는 반죽을 작은 쿠키틀로 둥그렇게 찍어낸 것 같다. 파리는 일부러 작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졌고, 시민 역시 이러한 특징을 마음껏 즐긴다.
파리에 오면 약속에 늦은 듯 급하게 종종거리지 않고 한가롭게 거닐고 싶은 기분이 든다.
공원에 혼자 앉아 있어도 불안하지 않다. 어슬렁거리며 겯는 순간, 긴장감은 사라지고 휴식이 찾아오는 것만 같다. 발길 닿은 대로 느릿느릿 걸어라. 산책은 파리에서 필수적인 경험이다.
플라뇌르는 ‘산책을 하는 사람’ 도시의 거리를 거닐며 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사고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나 우연히 만나는 괴상한 장면들을 구경하며 자기 내면과 때로는 실없는 때로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을 말한다. (소요유)-절대 자유의 경지. 플라뇌르는 다채로운 풍경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 맛보는 방관자이다. 집은 아니지만 어디서나 집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숨어서 모든 장소를 헤치고 다니는 관찰자로서의 예술가.
‘게으른 산책’은 예술가의 운동이자 식이요법이다. 플라뇌르는 한가로운 시간을 아름답게 채우고 사색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노닒) 거부감이 들 정도로 부르주아적인 15구나 16구도 걷기에는 괜찮은 곳이다. 그리고 방랑을 시작해라. 내키는 대로 무작정 걸어라. 특이한 박물관 안으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어도 좋다. 그곳에서 살짝 미소 지어라. 그리고 앉아서 글을 써라. 다시 배회하라. 카페나 교회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어라.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찾아오면 곤한 단잠에 빠질 것이다. 방관자적인 소질을 연마하라. 플라뢰느라 불리는 ‘산책 명상’은 닫혀 있던 창작의 문을 시원스럽게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살구-
“이 값에 좋은 살구만 골라서는 안 됩니다. 나쁜 것도 한꺼번에 가져가세요. 안 그러면 이 장사 남는 거 없어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함께 끌어안는 것. 이는 이 세상 모든 예술가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원칙이다. 당신은 훌륭한 글과 함께 하찮은 글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작가이더라도 어설픈 문장을 쓰기 마련이다. 어쨌든 써야 한다. 작가가 훌륭한 글만 쓰려고 노력하게 되면 그곳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완벽주의의 완벽한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파리는 모든 일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보라고 권유한다. 걸작은 잊어라! 그냥 쓸 준비만 해라.
오르세 미술관 -
당신은 그곳에 그저 그런 관광객이 아니라 품위 있는 예술가로 갈 수 있다. 즉, 그곳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반갑게 만나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에 가라. 오후 두 시의 오르세는 정어리 캔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오르세는 9시 15분에 도착해라. 그리고 1층에서 서성대지 말고 바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들이 있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반 고흐 그림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라. 이 시간대에만 누릴 수 있는 오르세의 쾌적함과 호사는 모두 당신 것이다. 줄 서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도 있다.
프랑스어를 못하는 것에 대하여 -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데 프랑스어를 얼마나 잘해야 할까? 소로본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러 간 것이 아니다. 프랑스 시민에게 연설하려고 가는 것이 아니다. 글 쓰려고 가는 것이다. 사실 프랑스어를 잘하는 미국인들은 파리에 오면 대개 파리와 파리 시민 흉을 본다. 하지만, 나는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인해 오히려 단순한 행복감에 젖는다.
베를린에서 글을 쓰고 싶은데 독일어를 못한다고. 글을 쓰고 싶다면, 로마에서 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그렇게 해라.
공공장소에서 글쓰기 -
파리에서의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야외에서 글쓰기를 수반하게 될 확률이 무척 높다. 호텔방이나 스튜디오는 협소하다. 특히 버스 정거장에 앉아서 글 쓰는 것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경치를 찾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항상 작은 노트를 갖고 다녀라.” 노트를 갖고 다니지 않은 것은 연장을 안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어떤 광경이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지체 말고 수첩을 꺼내 무엇이건 써라.
교회에서 글쓰기 - 오래되고 낡은 교회일수록 좋다. 장식이 없는 밋밋한 건물이나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단순한 석조 건물도 반갑다. 결국, 누구나 교회가 종착역이 될 것이다. 당신이 신봉하는 종교가 아니라 문학이라고 할지라도 문학에 대한 열정을 거의 종교의 수준으로.
파리를 바라보면 낭만과 감상에 젖어드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하지만 하나의 덫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헤밍웨이의 흔적과 기호품을 찾아 나서게 되며 작가 노트는 펼쳐보지 않게 된다.
파리에서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어디서 글을 쓸까가 되어야 하지, 어떤 문학적 조상과 만날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유명한 카페, 그곳에서 글을 쓰거나 창조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는 관광객이라기보다는 ’예술가‘다.
쿠르아상과 미술관은 알아서 굴러가도록 내버려둘 것. 당신이 굴러가게 해야 할 것은 당신의 글이다.
파리에서만은 돈 걱정하지 않고 오직 창조적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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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파리에 가고 싶은가?
보주 광장 앞 잔디밭에 누워 한나절 햇볕을 쬐고 싶다.
방돔광장 길 모퉁이 프랑스 자수를 보고 싶다.
레되마고에서 글 한 편을 탈고하고 싶다.
무엇보다
붉은 제라늄 꽃잎이 떨어져 있는 거리를 걸어 다니고 싶다.
ㅋㅋㅋ
솔찍하자!
인생의 남은 시간들,
겉멋 들어 노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