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안소영 지음. 강남미 그림
진경문고
머리말
우리도 그들과 벗이 될 수 있을까
햇살 가득한 방안에 앉아서 온종일 책장을 넘기던 때가. 목덜미와 손등에 내려앉는 햇살이 참 따스했던 기억
드러내 놓고 표현은 안 하였지만, 이덕무의 글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부드러운 햇살이 창호지문으로 스며들듯, 그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 자신이 되어보는 것
그들이 몰두했던 실학(實學) 이란 말에서, 그저 편리함이나 효율성만을 떠올리면 안 된다는 젊은 그들
이야기 시작 1792년 12월 20일
얼마나 잤을까?
반가운 겨울 햇살이었다. 이리저리 방바닥을 명랑하게 굴러다니는 햇살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밝아진다.
‘靑莊書屋’ 백탑 아래 동네에 살 때, 초라한 나의 집을 안쓰럽게 여긴 벗들이 저마다 가진 책을 팔아 지어 준 공부방
방에 들어서는 순간 등을 보이며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만 같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책 속에 담긴 누군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마주치는 설렘.
그러고 보면 대궐에서 나는 책의 안과 밖을 지키기만 했을 뿐, 책과 마주앉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지는 못한 것 같다.
겨울 햇살은 어느새 책상 위에서 내려와 방바닥을 굴러다닌다.
나는 책만 보는 바보
햇살과 책과 나
‘해님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살며시 문고리를 잡고 열어 보았다.
그러다가도 조바심이 나서 마당과 방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제자리에 오지 않았을까?’
또다시 방문을 열어 보았다. 아, 해님은 거기, 내가 벽에 그어 놓은 첫 번째 금 위로 막 들어가고 있었다.
햇살처럼 환하게 일렁이는 글씨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의 모습이 되고 낯선 곳의 풍경도 되었다. 때로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하고한 날 좁은 방 안에 들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처럼 날마다 책 속을 누비고 다니느라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때론 가슴 벅차기도 하고, 때론 숨 가쁘기도 하고, 때론 실제로 돌아다닌 것처럼 다리가 뻐근하기도 했다.
《한서》를 이불 삼고《논어》를 병풍삼다
책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온기가 없는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를 대하는 듯한 느낌
긴긴 겨울밤을 홑이불 한 장으로 추위와 싸우며 보내야 했다. 덜덜 떨리는 아래턱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차가운 이불 아래에서 시를 몇 편이나 외우고 또 외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도저히 더는 견딜 수가 없어,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때였다. 윗목에서 기척이 나는 듯했다. 차곡차곡 쌓아 둔 《한서》한 질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두둑한 책의 무게가 얇은 홑이불을 눌러 체온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주었다. 따스했다.
낡고 해져 초라한 나의 이불은 이제, 중국의 역사로 무늬를 넣은 멋진 이불이 된 셈이다.
갈라진 벽의 틈새로 사납고 매서운 바람이 불어 들어와, 방 안의 등불이 몹시 흔들렸다.
안타까이 등불을 바라보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논어》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런 말을 건네며 제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내 몸으로 바람을 막아 보게!”
기분이 울적한 날이면 나는 조용히 앉아 《논어》를 읽곤 했다. 짤막하고 단정한 문장을 되풀이해 읽노라면, 어느덧 슬픔이 가시고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엣 사람의 차분함이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모양이었다.
그날 밤 나는 분명, 나를 위해 이불이 되어준 《한서》의 몸놀림을 보았고, 제 몸으로 바람을 막아 보라는 《논어》의 목소리를 들었다.
맹자에게 밥을 얻고 좌씨에게 술을 얻다
귀한 책을 보면 갖고 싶고, 좋은 책을 보면 오래도록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싶었다.
나의 책에 마음대로 붉은 점으로 표시도 하고, 책 빈 곳에 생각나는 글귀를 마음껏 써 보고도 싶었다.
그나마 집안에서 돈과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맹자》한질 밖에 없엇다. 결국 나는 돈 이백 전에 그 책을 내주고, 양식을 얻었다.
책을 팔아서 먹을 것들 얻다니, 어느 하늘 아래 나 같은 선비가 또 있을까.
유득공(柳得恭)의 집으로 향하여
“자네, 오늘 내가 누구에게 밥을 얻어먹은 줄 아는가?”
“글쎄, 맹자께서 양식을 잔뜩 갖다 주시더군. 그동안 내가 당신의 글을 수도 없이 읽어 주어 고마웠던 모양일세‘”
유득공은 얼른 서글픈 표정을 감추고,
“그래요? 그러면 나도 좌씨에게 술이나 한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책장에서 《左氏春秋》를 뽑아, 아이를 시켜 술을 사 오게 하였다.
오래도록 비어 있던 창자였는지라 술기운이 빨리 올랐다. 불콰해진 얼굴로 주거나 받거니 하면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술기운인지 울먹임인지 속은 자꾸만 메스껍고 헛헛한 마음에 객쩍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이러한 벗들과 책이 있었기에, 나의 가난한 젊은 날은 그리 서럽거나 외롭지만은 않았다.
백탑 아래서 벗들과
삼강오륜(三綱五倫) 글을 읽은 사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소박한 백성도 마음의 뿌리를 이 오륜에 두고 있다.
누구나 노래를 부르듯 기억하고 있다.
군신유의라, 의리로써 임금을 대할 기회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나에게 군주(君主)는 그저 아득히 먼 존재일 뿐이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아버님을 뵐 때마다 내 마음은 늘 아려온다. 아들을 낳고부터는 더욱 그랬다. 아비로서의 지극한 정으로도, 나와 같은 처지를 아들에게 불려주어야 하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부자로서의 친근함 이전에 흐르는 감정이 있다. 서자의 처지라는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서로에 대한 안쓰러움이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아내에게도 나와 마찬가지로 서출(庶出)이라는 피가 흐르고 있다.
장유유서라, 우리 같은 서자 출신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라도, 본가의 어린아이에게까지 존댓말을 써야 한다.
자리가 남쪽이라 하여 우리를 남반(南班)이라 조롱하기도 했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우리가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의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에 맞는 벗들과 함께 있는 그 순간뿐.
나는 언제나 이러한 벗들이 그리웠다. 내 입으로 글을 읽어도 듣는 것은 나의 귀뿐, 내 손으로 글을 써도 보는 것은 나의 눈뿐, 오로지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아 위안해 온 세월이 너무나 길었다.
연암 박지원 : 내가 백탑 아래도 온 지 이태 뒤에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이사 오였다. 우리 집과는 사립문을 나란히 하고 있을 만큼 가까웠기에, 연암 선생을 만나러 온 사람들은 내 집에도 자주 들렀고 때로는 우리 집에 왔다가 함께 선생 댁으로 가기도 했다.
선생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스한 눈빛으로 시원스러운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 사람의 위치나 처지보다는 사람됨을 먼저 보셨다. 나와 벗들을 조이는 무거운 신분의 사슬도, 연암 선생의 방 안에서는 느슨해졌고 나중에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남산 아래에는 또한 나의 벗이자 처남인 백동수(白東修)와, 박제가(朴齊家)가 살고 있었다. 백동수는 유일하게 무예에 뜻을 두는 벗이었다.
나는 벗들 가운데 특히 박제가에게 어쩐지 마음이 많이 쓰였다. 박제가는 누구에게나 할 말을 거침없이 다 하였고 자신의 감정을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솔직히 드러내었기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언뜻 보기에는 대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무척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라는 이름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그 제가(齊家)를 말한다.
하필이면 비좁은 내 집의 마당을 비려 달라니, 유득공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여기, 방 한 칸을 만들려고 합니다. 평안하게 책도 일고, 저희도 자주 찾아와 함께 지내고….
추운 겨울날에는 칼바람이, 눈이 녹기라도 하면 썩은 초가지붕에서 누런 불이 흘러내렸다. 나는 나대로, 손님은 손님대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그마한 서재 한 채를 짓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늘도 궂은 인상 한 번 쓰지 않았고, 부드러운 오월 바람은 몇 번이고 흙벽을 쓰다듬으려 단단하고 매끈하게 만들어 주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만의 편안한 공간을 얻게 된 감격에 울먹울먹 속이 일렁여서 그런지, 그날따라 술기운이 빨리 올랐다.
벗들은 청장관(靑莊館)이라는 나의 호를 따서, 새로 지은 서재에 ‘청장서옥(靑莊書屋)’ 벗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우리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어찌 눈으로만 책을 읽는다 하는가?
그 무렵, 나는 책과 지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모아 문집 《耳目口心書》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어 놓았다는 뜻
꽃처럼 다시 피어날 수 있다면
바둑이나 장기도 두지 못하고, 책 보는 것밖에 달리할 줄 아는 것이 없는 고리타분한 나에게도 한 가지 취미가 있었다. 조물주의 솜씨를 흉내 내어, 밀랍으로 매화를 피워 내는 일이었다.
밀랍으로 만든 매화를 윤회매(輪廻梅)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돌고 돌아, 윤회하여 핀 매화라는 뜻, 벌이 꽃에서 꿀을 얻고, 그 꿀에서는 밀랍이 생기고, 그 밀랍으로 다시 매화를 만드는 것이니, 과연 한바탕 윤회라 할 만하다.
손놀림이 더디면 꽃잎이 둔하고 너무 빠르면 바스러지기 때문에 손을 가쁜 놀려 재빠르게 만들어야 한다.
벗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밀랍 액에 속이 빈 나무 대롱의 끝을 살짝 담가, 꽃잎의 형태를 사뿐 떠내었다. 그런 다음 재빨리 옆에 있는 차가운 물에 담가 식혔다. 찬물에 들어가자마자 밀랍으로 만든 꽃잎은 이내 말간 젖빛을 띠면서 물 위를 동동 떠다녔다.
기품있게 생긴 매화나무 가지에 여러 송이의 윤회매를 피워놓고, 화병에 담아 두고두고 보거나 벗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가 윤회매 만들기를 좋아한 까닭은,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매달릴 수 있는 그 일이 좋아서였다. 가난한 살림도 잊고,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앞날도 잊고, 꽃잎을 만드는 내 존재마저 잊었다. 오직 내 손에서 피어날 맑고 투명한 꽃잎만을 생각했다.
봄날, 시냇물처럼 다가온 벗
박제가 :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봄날 신록처럼 싱그러운 젊은이였다. 그러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자주 그에게서 가을을 느끼곤 하였다.
벗들 가운데 박제가의 성격이 가장 강파르고, 깎아지른 절벽처럼 위태로웠다.
박제가의 어머니는 가냘픈 체구에 말이 없는 분으로, 아들의 친구들을 대하는 것도 무척 어려워하셨다.
그러나 묘하게 슬픔이 일렁이는 그의 눈은 어머니를 닮았다. 옅은 녹색 빛이 도는 눈동자에 어머니는 늘 슬픔을 담고 계셨지만, 박제가는 타는 듯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운명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주눅이 들게 한적
적자와 서자의 구별이 엄격하여 우리 같은 사람은 낄 자리가 없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하여 먹고 살 방도를 찾아보려 하여도 양반의 핏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럴 때 한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물려준 보잘것없는 핏줄이 아니라, 아버지가 물려준 이기적인 양반의 핏줄이었다.
나의 벗 유득공
젊었을 때 나는 《사소절(士小節)》이란 책을 썼다. 선비와 부녀자와 아이들이 지녀야 할 도리와 예절에 대해 쓴 책이다. 평소에 내가 살아오면서 생각한 것, 스스로에게도 일러두고 명심해야 할 것을 적어 두었다. 쓰기에 어렵지는 않았으나 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작정하고 한 번 입을 열면 말이 많아지는 나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며 벗들은 놀리기도 했다.
오므린 모양새는 꽃봉오리요, 주름 잡힌 모양은 피지 않은 연꽃- 사근사근 상추쌈 소리
싱싱한 초록빛 상추와 하얀 밥 붉은 쌈장의 화려한 색깔이 떠오르면서 입에서는 저절로 군침이 돌았다. 막 씻어 건져 올린 초록빛 상추잎처럼 싱그러운 유득공의 웃는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든 그의 손길과 눈길을 거치면 순식간에 이렇게 유쾌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주는 독특한 기운이 있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1, 함께 흥분하여 소리 높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2, 우스갯소리로 울적한 마음을 한번 비틀어 밖으로 날려보내는 것, 유득공은 그의 성격이 워낙, 안 되는 일에 연연해 하기보다는 털어 버리기를 좋아했다.
정말 그의 가슴 속에는 근심 걱정을 담갔다 걸러내는 우물 하나가 있는 것일까. 심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짝 들어 올리는 그의 우스갯소리는 그 우물에서 튕겨 올라온 시원한 물방울일까. 나와 벗들의 근심 걱정을 수없이 담갔다. 길어 올려도 조금도 마르는 법이 없이 늘 새롭고 싱그러우니 말이다.
집안에는 밤늦도록 등불이 환했다. 아랫목에서는 어린 유득공이 책을 읽고 있고 윗목에서는 어머니가 바느질하고 계셨다. 방 안에서는 책장이 한 장 두 장 넘어가는 소리, 나직이 글 읽는 소리와 옷감이 미끄러지는 소리, 간간이 실패 굴러가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의지하는 소리였다.
유득공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은 글 상자였다. 그는 늘 소매 속에 종이와 붓을 넣고 다니며 조금이라도 색다른 것을 보면 글로 써 두었다.
그러한 버릇은 이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색색의 고운 조각 천을 바느질 상자에 모으셨듯이, 그는 아름답고 색다른 굴 귀 조각들을 글 상자에 모았다.
칼칼한 바람 속을 누비다 -백동수
그가 찾아오면 떠들썩한 목소리에 우리 집은 활기가 돌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몰고 오는, 낯선 곳의 흙먼지가 묻어 있는 바람이 좋았다. 백동수의 길은 호기심과 두근거림, 설렘이 있는 여행 본래의 길이었다.
나는 그를 맞이할 때마다 가 보지 못한 낯선 곳의 새로운 바람을 마음껏 들이마셨다.
그의 가슴 속에 담긴 홧홧한 기운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막대기고 허공을 갈라도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인연이 특별해서였는지, 열여섯 살에 나는 동갑내기인 그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나는 못마땅한 일을 보면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그럴 때마다 큰 소리로 상대방을 나무라며 혼쭐을 내는 그를 보면 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걷노라면 바람도 한층 시원하고 물소리도 더욱 크고 맑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웅크린 어깨까지 저절로 펴지는 듯했다.
가난한 날, 사람들과의 사귐이 특히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를 벗이라 할 수 있을까-이서구
땅거미가 슬금슬금 내려앉고 있었다. 보던 책장에도 어스름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해 얼굴도 낯설고, 반듯하게 갖추어 입은 차림새도 초라하지 않아 더욱 낯설기만 했다.
그의 이름은 書는 글이나 책을 뜻한다. 九는 홑자리 수 가운데 가장 클 뿐만 아니라 크고 많다는 것을 뜻한다. 이름 자체가 온 세상의 모든 책을 뜻하는 셈이었다.
구서재(九書齋), 말이 서재지, 허름한 창고였다. 따로 방이 없던 나는, 봄가을에는 그곳에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조선시대 이서구의 ‘九書齋’ ‘九書’란 책을 읽는 讀書, 책을 보는 看書, 책을 간직하는 藏書, 책의 내용을 뽑아 옮겨쓰는 抄書, 책을 바로잡는 校書, 책을 비평하는 評書, 책을 빌리는 借書, 책을 햇볕에 쬐고 바람을 쐬는 曝書를 말한다.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을 그곳에서 하겠다는, 젊은 시절의 호기로운 서재 이름이었다.
사실 이서구와 내가 마음을 나누는 벗이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이미 장가든 지가 오래였고, 그는 이제 스물도 한참 안 된 어린 소년이었다. 나는 가난에 찌든 선비이고, 그는 부족함이 없는 명문가의 자제였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운명을 벗어날 길 없는 서자이고, 그는 임금님과 성이 같은 종친의 당당한 적자였다. 그러나 내 책들을 바라보는 그의 빛나는 눈길을 보며 나는 또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내게로 다가왔음을 느꼈다.
우리는 책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하고, 너무나 잘 맞는 서로에 오래도록 취하였다.
새로운 책을 구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다른 벗들도 모두 책보기를 절려 하였으나, 이서구와 나는 좀 더 특별하였다. 우리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었다. 글자 하나까지 꼼꼼히 들여다보며 적절하게 쓰였는지 파고들었다.
한점 그늘 없는 벗- 나는 그의 환한 처지를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내 운명을 더는 탓하지 않기로 한 지 오래되었고, 스승의 가르침과 벗들과의 사귐으로 내 삶도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이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곤 했다.
(마치 그의 친구들을 보는 것처럼, 내 곁에 있는 벗들의 얼굴도 떠올린다. 그냥, ‘젊은 그들’이 부럽다.)
이서구의 얼굴은 어딘가 달랐다. 얼굴이 누렇고 검은 편인데도, 우리 가운데 얼굴빛이 가장 흰 박제가보다 더 환하게 보였다. 웃음도 많지 않고 무뚝뚝한 편이었지만, 싱그러운 웃음을 띠는 유득공보다도 어쩐지 더 편안해 보였다. 그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물론 이서구에게도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늘이 없다는 것은 얼굴빛만 환하다는 말이 아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누구 앞에서건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법이 없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때로는 당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이러한 감정의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래서 그의 글은 깊이가 있으면서도 냉철하고 분명했다.
똑같이 직선적인 성격이라 하여도 박제가와는 또 달랐다. 박제가의 꼿꼿함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분노까지 담고 있어 위태로웠다.
나는 늘, 삶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가슴까지 차오른 말도 입 안에서 한 번 더 굴려야 하는 자신이 답답하였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주저하지 않는 이서구는 당당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나는 솔직히 그가 부러웠다.
그는 부쩍 시골로 내려가 지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다.
“앞으로 처자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밭 갈며 살려 합니다. 일을 하다 틈이 나면 책을 읽고, 또 연구한 것을 글로 써서 남기고, 한 권 두 권 쌓이는 것을 보며 늙어 가는 것을 잊고 싶습니다.
스승, 더 큰 세계와의 만남
나에게도 스승이 계신다면, ‘공자도 나처럼 스승을 갖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학이편 인용 학이시습지불력열호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인주지이불온불역군자호)
날마다 고요히 앉아서 글을 읽고 또 읽은 사람, 가끔 벗이 찾아와 주기라도 하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며 다독이는 사람. 이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였다.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는 우리의 웃음소리가 하늘까지 닿아, 별빛들도 함께 쟁그랑거렸다. 우리는 달빛을 밟았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 담헌 홍대용 선생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 또한 저마다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잔잔하게 미소 짓는 사람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꼬장꼬장한 스승 앞에 무릎을 꿇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도 있다.
먹빛으로 변한 뭉게구름이 금방이라도 우레를 토해 닐 것처럼 사납게 일렁거렸다. 과연 오래지 않아 하늘에는 긴 천둥소리가 지나갔다.
선입견을 버려라- 연암 박지원 선생
“도대체 우리에게 옛날이란 무엇인가? 옛사람들은 과연,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던 그때를 ‘옛날’이라고 생각했겠는가? 그 당시에는 그들도 역시 ‘지금’ 사람
저릿저릿 힘이 없었다. 끝없이 아득한 가을 하늘 속으로 내 몸이 붕 떠올라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차라리 점점 작아져 한 점 티끌이 되었으면. 짧은 순간 이대로 떠돌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면.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비참 것은 쓰일 데가 없다는 것.
드넓은 대륙에 발을 내딛다.
청나라로 바뀌고 난 다음부터는 ‘연행(燕行)’이라 불렀다. 중독의 수도 북경(北京)을 연경(燕京)이라고도 불렀으니, 그저 연경에 다녀오는 행렬이라는 뜻이다. 은근히 청나라를 얕잡아 보는 말이기도 하다.
박제가나 나처럼 사신을 수행하여 따라가는 사람들.
유리창, 세상 모든 책이 여기에 - 서장관(書狀官: 외국에 가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벼슬)
연경의 서쪽 편, 옛 서적과 오래된 예술품들로 유명한 유리창 거리로 향하였다. 유리창은 원래, 유약을 바른 화려한 기와를 만드는 공장들이 많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명나라 때 북경에 자금성을 지으면서 생겨났는데, 궁궐을 다 짓고 나자 그 자리에는 서적상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유리 기와로 만든 화려한 자금성은 여전하지만, 왕궁의 주인은 바뀌었듯이, 공장 안의 유리 가마는 여전하지만, 그 안에는 유리 기와 대신 온갖 진귀한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는 “천하의 모든 책을 수집하라.” 명령을 내렸다.
유리창 거리의 방 안에는, 말소리 대신 하얀 종이 위를 스치는 붓 소리만 들렸다. 조용한 가운데 서로 마음이 통하면 왁자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오고 이내 붓을 쥔 손이 바뀌어 종이 위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선비가 장사에 나서는 것은 물론, 상점에서 상인과 흥정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상인이라 해서 천대받지 않았고, 또한 그들 중에는 글을 읽는 사람도 많았다. 선비들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상점에 들러 직접 물건을 샀다.
정작 박제가 그의 글을 읽은 전하는 언짢아하시지 않았는데, 언제나 그렇듯 공연히 나만 가슴을 졸이며 애를 태웠다.
박제가를 중국 송나라 때의 젊은 재상 왕안석에 비유하셨다. 왕안석은 쇠약해진 송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여러 가지 개혁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반대파에 밀려 결국 뜻을 이루어지는 못한 불운한 사람이다.
“문(文)과 무(武)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새의 두 날개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전하는 처지나 조건보다는 언제나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을 먼저 보셨다.
아이들이 열어 갈 조선의 미래는
유득공의 큰아들, 아이들의 이름을 보면 그 이름을 나는 아비의 뜻을 알 수 있다. 本學은 학문의 근본, 本藝는 예술의 근본이란 큰 뜻이 담긴 이름이다. 흐르는 물처럼 거침이 없는 유득공다웠다.
지금 우리에게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웃고, 슬퍼하고, 탄식하던 생생한 시간은 ‘옛날’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채 기억 저편에서 가물가물해질지도 모른다.
옛사람들과 우리, 그리고 저 아이들, 또 먼 훗날의 다른 아이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제 몫의 세월만큼은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나눈다는 것은, 반드시 얼굴을 마주 대하는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옛사람들이 살아온 시간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들, 그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산과 들을. 내 안에 스며 있는 그 시간을 느낄 때면 나는 그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나도 옛사람들에게, 나의 시간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그들의 소망이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다면, 옛사람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더 살아가는 것이다.
더 먼 훗날의 사람들과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의 마음속에 스며 돌아와 나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서로 시간을 나눌 수 있다. 옛사람과 우리가 우리와 먼 훗날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나누며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함께하는 벗이 되리라.
1793년 1월 24일
손자는 아들과는 또 달랐다. 아들이 어렸을 때는 나도 아직 젊은 아비라 그랬는지, 나만의 고민이 많았다. 나의 눈길은 자주 내 속으로 행해 있거나, 집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향했다. 그래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손자를 대하는 느낌은 좀 달았다. 이 세상에서 이 아이의 시간과 내 시간이 서로 교차해 만나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나, 그런 아쉬움이 있어서인지 핏줄의 끌림을 더욱 강하게 느꼈다. 손자를 볼 때마다 나의 눈길은 자연스레 그 아이 뒤를 쫓아갔다. 내가 알지 못할 시간 속에서 살아갈 그 아이의 삶을 미리뫄 충분히 축복해 주고 싶었다.
이덕무가 떠난 뒷이야기
연암 박지원은 이덕무의 일생을 기록한 행장(行狀)을 쓰고, 이서구는 묘지명을 지어 애도하였다.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이덕무의 유고집 《아정유고(雅亭遺稿)》가 1797년에 완성되었다.
정조가 그처럼 애착을 두고 만들었던 규장각도 축소되고, 장용영은 해체되어 백동수도 종조가 세상을 떠나고 포천으로 내려가 지내다가 1816년에 세상을 떠났다. 박지원은 늙음과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805년, 세상을 떠났다. 독서로 세월을 보내던 유득공도 18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서구는 평안 감사까지 올랐으나 1805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포천에서 글을 읽으며 조용히 지냈다.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역사가. 이덕무 박제가 이서고 유득공은 한문학사에 四家로 불린다.
이덕무1741~1793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실하자. 자는 무관(懋官), 호는 청장관(靑莊館), 형암(炯庵), 아정(雅亭). 서자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학다식하고 시와 문장을 잘하여서 젊어서부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서구 1754~1825조선 정조 때의 문신 학자. 나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중국에까지 알려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달리 유일하게 사대부 가문의 적자(嫡子)출신이다. 어려서 박지원에게 학문과 문장을 배웠다. 1805년 벼슬에서 물러나 경기도 포천 양문에서 은거, 고을 사람들은 그를 ‘양문대신’이라 불렀다. 문집으로 《惕齋集》《薑山初集》이 있다.
정조(正祖) 1752-1800) 조선의 제22대 왕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사도 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 1776년에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통치의 그 틀을 마련. 재위 기간에 자신의 학자적 소양을 바탕으로 문화 정책을 추진하고, 청나라의 발달한 문화를 들여와 문예부흥을 이루고자 하였다.
양반(兩班)전: 연암 박지원이 쓴 한문 소설. 천한 신분의 부자가 가난한 양반의 빚을 대신 갚아 주고 그 신분을 사려고 하였으나, 양반의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몰락하는 양반 계급의 허위와 부패상을 폭로하고, 실학사상을 고취하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연암 박지원이 쓴 중국 기행문집. 1780년 박지원이 중국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따라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가면서 보고 들은 청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해 적어 놓았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이덕무의 수필집.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다. ‘이목구심서’란 제목은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 입과 마음으로 말하고 생각한 것을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일정한 체제나 형식을 갖추지 않고,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생각나는 부분과 개인의 성향이나 경험, 반성을 실어 놓았다.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문장이 특색이다.
《漢書》 중국 후한 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쓴 역사책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서이다.
<나도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처럼
"나도 작가다"
여러군데의 도서관 문화원
기업등에서 나도 수도 없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사인을 했었다.
또 원북원 행사의 운영위원을 맡으면서
여러 유명한 작가들과 같이 행사를 진행했었다.
안소영 작가
이름도 생소한 분이었고 처음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그으면서
참으로 문체가 쉬우면서도 유연함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작가를 보고 싶었다.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 박식함,
그중, 한 문장, 문장 따뜻한 표현
좋았다.
작가들은 남의 것, 칭찬 잘 안한다.
왜 그런지 몰라도
작가들의 '자존심' 같기도 하다.
내것만 칭찬받기를 바란다.
ㅋㅋㅋ 나만 그런가?
어찌 되었든
나는 아직, 멀었는지,
글 좋으면 글쓴 사람까지 좋아하고
글쓴 사람 친구도 좋아하고
글쓴 사람 가족도 좋아하고
글쓴 사람 안경 모양이라던가
스커트 길이가지 좋아한다.
닮고 싶고 무조건 존경한다.
사람이 덜 떨어져 좀 모자란다
근데, 원북원
<책만 보는 바보> 정말 잘 선정되었다.
행사 끝나고 기념사진 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