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뇌프에서도 잠수교가 그립다
마틴 프로스트/ 도서출판 금토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그 다정한 웃음 속에는 날씨만큼이나 상쾌하고 그날의 바람만큼이나 신선한 느낌, 그런 친절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꼭 나를 향해 웃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를 보고 웃었건 상관없다. 아름다운 느낌에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한 남자의 평범한 웃음이 어떻게 나를 그토록 끌어당길 수 있었을까. 나는 그때 연세대 불문학과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매력적인 웃음’의 주인공은 체육학과 4학년 학생이었다.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
나를 낳은 후 아버지는 다시 항구도시 모스타가넴으로 옮겨 자신의 안경원을 개업했다 모스타가넴은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모든 도시가 투명한 공기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지만, 그 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웠다. 늘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볕 아래 빨간 흙들이 윤기 있게 반짝거렸고, 어디서나 노란 개나리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여자들은 하얀 목면 옷을 입고 꽃들 사이로 걸어 다녔다. 갈색의 피부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과 흰 피부에 나염으로 물들인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노랑 빨강 보라색의 꽃들과 미묘한 빛깔의 하늘과 바다가 눈부셨다. 모스타가넴은 다양한 빛깔의 도시였다. 그 시절의 아름다운 빛깔들은 지금도 내 가슴 한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밝은 태양과 맑은 공기,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 또한 나의 기억 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를 키운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의 청명한 자연이 내 몸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어서 지금도 나는 밝는 태양과 파란 하늘, 맑은 공기와 따뜻한 바람을 좋아한다.
어머니는 그 도시에서 화가가 되었다.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시를 써왔는데 시만으로는 도시의 아름다운 빛깔들을 전부 표현할 수 없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는 안 하고 놀기만 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내버려 두셨다. 프랑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둘 뿐이다. 나는 공부 대신 운동을 좋아했다. 유도를 배운 후로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공부에 점점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공부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 자신감이 생기면 공부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게 되고, 저절로 잘하게 된다.
서울은 매우 시끄러웠다. 일본인들은 조용히 걷고 조용히 말한다. 그런 세상에 있다가 한국에 오자 모두가 목청껏 소리 지르고 마음껏 웃어서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저런 강인한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여관방에는 침대만 하나 덩그렇게 놓여있는데 굉장히 넓었다. 일본에서라면 상상도 못 할 만큼 큰 방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규모가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도 넓었고 여자들이 입고 있는 바지통도 넓었다.
처음 와보는 서울, 버스는 매우 빠르게 달렸다. 낡아서 소리가 요란한 버스가 얼마나 잘 달리는지. 앞을 막고 있는 차들 사이를 잘도 빠져나가며 다른 버스와 경주를 벌이기도 했다. 차 안의 승객들은 이리저리 밀리면서도 모두 웃고 있었다. 서로 몸이 부딪쳐도 화를 내지 않고 신나게 떠들었다. 차에는 소녀 차장이 있었다. 그녀는 정거장에 내려서 손님을 태우고는 탕탕 힘차게 차를 두들겼고, 그러면 버스가 출발했다. 그 씩씩하고 강인한 모습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도 서울에 오면 느끼는 것이지만 서울의 길들은 대단히 넓다. 특히 파리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식당에서 한국의 대표적 요리라는 불고기를 먹었다. 먼저 숯불이 빨갛게 불붙은 화로가 나오고 조금 후에 얌전한 소녀가 양념한 고기와 함께 엄청나게 큰 가위를 들고 왔다. 소녀는 아기같이 예쁜 얼굴인데 어마어마한 가위는 무기처럼 무서웠다. 무표정한 얼굴로 소녀는 큰 가위를 들고 고기를 싹둑싹둑 잘랐다. 자신감이 넘치는 행동이었다. 아기같이 예쁜 소녀와 무섭게 큰 가위 그 장면 또한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여관은 잠을 자는 곳이므로 조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한국의 여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 여관은 여행객을 위한 곳이 아니라 근처에 흩어져 있는 술집의 손님과 아가씨들이 찾아와 잠깐씩 머무는 곳.
신촌시장 뒷길에서 만난 어린 소녀가 동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의 허락도 없이 나는 그 아이 덕분에 한국의 가정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마루에는 걸레가 놓여있었다. 걸레 같은 청소도구가 사람들의 눈에 뜨이는 곳에 놓여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프랑스에서는 걸레는 더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청소함 안에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한국에서는 그것보다는 늘 쓰기 편리한 곳에 두는 것이 더 좋은가 보다. 그래서인지 어디를 가나 걸레와 빗자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승근씨는 내가 좋아하는 검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아름다운 폼으로 공을 넘겨주는 그는 내게 큰 힘을 주었다. 나도 최선을 다해 공을 쳐야 한다는 투지가 생겼다. 중학교 시절 ‘봄’에 관한 주제의 작문숙제를 할 때처럼 정성을 다해 공을 쳤다.
프랑스에서 테니스는 지성적인 운동으로 여긴다. 지성과 인격을 갖춘 운동선수들이 대단히 존경받는데 그런 선수들 중에 테니스 선수들이 많다.
서양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애인이 있더라도 노력해서 그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도록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승근씨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서양에서는 남자친구가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지는 않는다. 각자 헤어져 집에 가면 그만이다. 모두 똑같은 성인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는 승근씨가 데려다 주는 것이 무척 좋았다.
우리의 만남은 프랑스 안경집 딸과 한국 시계점 아들의 만남인 셈이다.
한국의 인사법은 언제 어디서나 몸조심 건강 조심하라는 말이다. 나는 몸조심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누가 내 건강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언제나 육체적인 건강보다 마음의 상태, 즉 정신적인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프랑스의 인사법이다. 건강을 조심하라는 말보다 즐겁고 편안하게 보내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한국에서는 부모님의 강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것이 바로 한국 젊은이의 비극이다. 자녀들이 다 자라도 부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의 유행은 너무 획일적이다. 어떤 흐름이 한번 시작되면 모두 따라야 한다. 그것은 개성이 없는 사회의 한 특징이다.
승근씨로부터 받은 편지의 인상적인 말들을 수로 새겨놓고 승근씨 면회 갈 때의 한 장면을 그려놓기도 했다 ‘정오의 니른함 속에서 하늘을 베고 풀을 벗 삼아 벌레와 이야기하고 산 개미와 싸움하면서 당신을 생각하네.’ 수에 새겨놓은 승근씨 편지의 한 구절이다. 나는 그 문장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수를 놓으면서 몽땅 외어버렸다.
한국에서는 바쁘다는 핑계를 너무 많이 댄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가 어디서나 통한다. 바쁘다고 하면 무조건 이해해 주어야 한다. 바빠서 못 왔다. 바빠서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바빠서 준비 못 했다. 바빠서 가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모든 것에 바쁘다는 핑계를 댄다. 그러나 바빠서 밥을 먹지 못했다거나 바빠서 잠을 자지 못했다. 바빠서 옷을 입지 못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바빠서 편지를 쓸 수 없을 정도라면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할 만큼 바빠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다. 아무리 바빠도 이야기할 것 다하고 담배 피울 것 다 피우고 차 마실 것 다 마신다. 바빠서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없다는 아버지도 친구들과 골프 치러 갈 시간은 있으며, 바빠서 시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한다는 며느리도 친구들과 백화점에 옷 구경하러 갈 시간은 있다.
주말이면 빠지지 않고 화천에 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그 집에서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승근씨가 나오든 못 나오든 그 집에서 승근씨를 기다렸다. 승근씨가 못 나오면 혼자 책을 읽고 산책을 했다. 주말에 그를 기다리는 시골 방 하나. 가구 하나 없는 방이지만 따뜻하고 편안했다. 승근씨 말고 그밖에 더 무엇이 필요하랴.
프랑스 사람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집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모두 집 밖으로 나오고, 특히 겨울에도 밖에서 생활하는 어린이들이 건강하고 씩씩해 보여서 감탄했다.
프랑스는 화려한 나라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프랑스 여성들은 손을 잘 보호하지도 않고 화장도 안 한다. 오히려 한국 여성들이 그런 것에 신경을 훨씬 많이 쓰는 편이다. 나도 한국에 있으면서 주변 여성들의 영향을 받아 피부 손질도 하고 화장도 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라면 그런 것은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여름에 나는 주인집 부부가 하는 것을 잘 모아두었다가 승근씨에게 목물을 해주었다. 윗통을 벗고 엎드리게 하고는 펌프로 퍼올린 물을 바가지로 등에 부어주는 것이었다. “어푸, 어푸.” 승근씨는 비명을 지르며 좋아했다. 남자는 웃통을 벗고 마당에 나와도 되지만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 한국에서는 남녀가 정말 평등하지 못하다.
외국에서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는 한국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3인용 병실에 들었는데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심한 냄새였다. 병원에서 좋은 식사가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갖가지 음식물을 병실로 가지고 들어온다.
한국 사람들은 아는 사람이 입원하면 꼭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온다. 입원실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환자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큰 소리로 웃어댄다. 아이들까지 따라와 소란을 피운다. 도대체 환자들이 안정을 찾고 조용히 잠을 자거나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방문객이 왔다가는 거의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가버리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환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고 바로 가버리면 큰 실례다. 바쁘거나 심심하더라도 얼마 동안은 꼭 환자와 함께 있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거꾸로 오래 앉아 있으면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구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늦게까지 있는 것보다 밥을 먹고 나면 바로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프랑스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 주인이 재미가 없어서 가버린다고 생각하게 되므로 실례가 된다.
임신을 하자 입덧을 심하게 했다. 평소에는 생각도 나지 않던 프랑스 음식이 먹고 싶어지면서 프랑스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프랑스를 별로 그리워한 적이 없다. 부모님 생각도 많이 해보지 않았다. 프랑스 여자들은 대개 그렇다. 스무 살만 되면 거의 집을 떠났고, 한번 떠나면 집과 멀어졌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처럼 먹는 것을 중요시하는지 어디서나 많이 먹으라는 것이 최고의 인사다. 많이 먹어야 건강하고, 많이 먹어야 공부도 잘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촌 시장의 만두집 할머니나 육군 중위인 이승근씨나 똑같다.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조금 먹어야 건강하고, 조금 먹어야 머리가 좋아진다고 말한다.
83년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전통결혼식을 했다. 필요한 옷과 도구는 거기서 모두 빌리고 내가 준비한 것은 버선과 고무신뿐. 결혼식 연습 말고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승근씨와 가족들은 여러 가지를 해주려고 했으나 거절했다. “마틴, 다이아몬드 반지는 하나 있어야 한답니다.” “뭐라구요? 그런 걸 승근씨가 살 수 있어요?” 나는 정말 승근씨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승근씨가 그렇게 돈이 많아요?”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 사주시는 거예요.” 그 말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결혼을 하는데 왜 부모님이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시려고 하는 것일까.
프랑스에 계시는 부모님들은 축하전보만 보내주셨다. 프랑스에서는 결혼식에 큰 비중을 두지 않기 때문에 양가 부모가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는 김소월을 좋아한다. 그의 시는 읽기 쉽다. 김소월의 시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의 시는 누구보다도 쉽고 간결하면서도 깨끗하다. 한국의 봄꽃과 같은 예쁜 슬픔이 있고 가을 하늘처럼 맑은 아픔이 있다.
한국에서는 왜 넓은 아파트가 필요한지 나는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살림살이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 집에는 꼭 필요하지도 않은 가구와 물건들이 너무 많다. 일생에 한 번 쓸까말까 한 것들까지 집안에 잔뜩 끌어안고 있다. 그러니 집이 넓어야 한다.
태교는 엄마가 편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슬픔과 미움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요소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런데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많이 본다.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싸움을 많이 하는지, 택시를 타다가도 싸우고, 버스 안에서도 싸운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도 싸우고,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싸운다. 에너지가 넘쳐서 그런다고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쉽지 않다. 특히 남자가 여자를 때릴 때는 며칠 동안이나 그 장면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마음이 편치않다.
특히 한국의 산부인과는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살벌하다는 느낌이다. 우선 아기를 낳을 때 아빠를 함께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기는 엄마 혼자 낳은 것이 아니다. 아기는 엄마와 아빠가 함께 뿌린 사랑의 씨앗인 만큼 둘이 함께 낳아야 한다. 아기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똑같이 필요하다. 아기가 나오는 순간 아빠는 엄마와 고통을 함께하며 아기의 탄생을 함께 축복해야 한다.
갓 태어난 아기를 엄마로부터 떼어놓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의 병원에서는 아기가 태어자나마자 엄마로부터 떨어져 신생아실로 들어간다. 세상에 처음 나온 아기가 신생아실에서 누구를 의지하란 말인가. 병원에서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지 못하게 했는데 그것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은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아기에게 알맞은 것은 엄마의 젓이다.
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을 하러 가려는데 양수가 터졌다. 낮에는 남편이 달려와 나를 데리고 뉴코아 백화점에 가서 출산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쇼핑을 하고 돌아오자 약하게 진통이 왔다. 남편은 강좌에서 배운 대로 내 진통의 시간과 주기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러면서 그는 집안청소를 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를 위해 집안이 청결해야 한다면서 안방과 거실, 부엌과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다.
“마치 하나의 우주가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아기가 다 나오는 데 20분쯤 걸렸는데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어요.” 남편은 뒤에 그 순간을 그렇게 이야기했다. 남편은 갓 태어난 아기를 내 배 위에 올려놓았다.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아기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탯줄도 자르지 않은 채, 내 배 위에 엎드려 가만히 엄마의 체온을 느끼고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남편은 미리 배운대로 탯줄을 실로 묶고 가위로 잘랐지만 단번에 잘라지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가위질을 해야 했다. “잠깐 밖으로 나가요.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해요.” 남편을 방 밖으로 나가게 했다. 조용한 환경을 만들어 아기를 안심시킨 뒤 젖을 물려야 한다. 사람들을 내보내고 조명을 줄이고 얼마 동안 아기를 정성스럽게 감싸 안고 있다가 젖을 물리자 아기는 드디어 힘차게 빨리 시작했다. 조금 후에 남편이 미역국을 데워 주었다. 저녁에 내가 진통하는 사이 혼자 미역국을 끓여 두었던 것이다.
한강, 강물은 시간과 날씨 계절에 따라 빛깔이 달랐다. 어떤 때는 역광을 받아 수면의 흔들림이 반짝거리며 살아났다. 서울에 그렇게 넓은 강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걸어서 고작 5분, 뛰어가면 1분 안에도 건널 수 있는 파리의 센 강에 비하면 너무나 넓고 시원한 강이다. 나중에 파리에 가서도 한가을 몹시 그리워했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퐁뇌프에서도 나는 잠수교가 그립다. 많은 외국인들이 서울에 오면 한강을 보고 놀란다. 세계 어느 도시에도 그처럼 넓고 깨끗한 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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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책이다. 버리는 책 속에서 주워왔다.
프랑스여자와 한국남자의 사랑이야기다, 읽는 내내 ~~ 그리고 여운이 진한 뱇깔로 남아있다. 요즘 EBS 교육프로그램 중에 프랑스식 육아가 대세다. 육아를 할 나이는 지났지만, 그냥 흥겹고 아름다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