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이불과 논어 병풍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열림원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책머리

 

몸은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마음은 ‘그때 거기’로 향할 때가 많다. 지금 이곳의 삶은 내게 늘 허전하고 허기를 준다. 옛글과 만날 때 나는 오히려 내면의 충만을 느낀다. 생기를 얻는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덕무(李德懋) 의 청언소픔(淸言小品)이다.

 

글을 읽다 보면 얼음이 꽁꽁 어는 추운 방에서 시린 손을 호호불어가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글씨를 써나가던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온다. 온몸으로 그 시대를 고민했던 이, 폐병과 영양실조로 어머니와 누이를 먼저 보내는 처절한 궁핍속에서도 제 가는 길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던 사람, 그가 남긴 글은 아름답고 슬프다.

 

서설

예사람의 맑은 정신이 뜬금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삶의 속도는 나날이 빨라져, 어떤 새것도 나오는 순간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내면에는 마치 허기가 든 것처럼 충족되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목멱산 아래 멍청한 사람이 있는데, 어눌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고 성품은 게으르고 졸렬한 데다, 시무(時務)도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이를 욕해도 따지지 않았고, 이를 기려도 뽐내지 않으며,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릴 때부터 21세 나도록 손에서 일찍이 하루도 옛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에 따라 빛을 받아 글을 읽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보게 되면 문득 기뻐하며 웃었다. 집안 사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보고 기이한 책을 얻은 줄을 알았다.

 

두보의 오언율시를 더욱 좋아하여, 끙끙 앓는 것처럼 골똘하여 읊조렸다. 그러다 심오한 뜻을 얻으면 아주 기뻐서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데, 그 소리는 마치 갈까마귀가 깍깍대는 것 같았다. 혹 고요히 소리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하고, 꿈결에서처럼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해도 또한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의 전기를 짓는 이가 없으므로 이에 붓을 떨쳐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그의 이름과 성은 적지 않는다.

 

이 <간서치전>은 이덕무가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에 대해 적은 실록이다.

 

이덕무! 그를 생각하면 나는 떠오르른 그림이 있다. 후리후리한 큰 키에 비쩍 마른 몸매. 퀭하니 뚫린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두눈. 추운 겨울 찬 구들에서 홑이불만 덮고 잠을 자다가 《논어》를 병풍삼고,《한서》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얼어죽기를 면했던 사람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단지《맹자》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딜 길 없어 2백 전에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소.

 

희희낙락하며 영재 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뽐내였구려. 영재 또한 굶주림도 또한 하마 오래였던지라, 내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서 《좌씨전》을 팔아서는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나를 마시게 하지 뭐요. 이 어찌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나를 먹여주고 좌씨가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그러나 나는 알 수가 있다. 제손때 묻은《맹자》가 혹 남의 손에 넘어가지나 않을까 싶어 하루가 멀다하고 헌책방을 기웃거렸을 그의 모습을 말이다.

 

말똥과 여의주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아무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여의주에게 말똥은 전혀 쓸데가 앖다. 모든 일에는 꼭 필요한 곳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똥은 더렵다 하고 여의주만 귀하다 한다. 제게 가치로운 것만 최고로 여기고, 그밖의 것에는 눈도 주지 않는다.

 

시작과 마무리

화가가 옷을 걷어붙이고 다리를 쭉 뻗고 앉는 것은 처음시작하는 마음가짐이고, 포정(庖丁)이 칼을 잘 간수하여 보관하는 것은 마무리하는 이치이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이런 활달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무위도식, 그 게으름으로 인해 바깥 세계와 호흡하는 털구멍은 다 막혀버려 맑은 바람이 불어도 시원한 줄을 모른다. 아름다운경치를 만나도 감동할 줄 모른다. 구제불능의 밥벌레들이다.

 

우주 사이의 한 가지 유희

내 평생의 일을 비추어보건대, 다른 사람이 지은 득의의 글을 읽으면 미친 듯이 소리치고 크게 손뼉치며 평하는 글을 휘둘렀으니, 또한 우주 사이의 한가지 유희라 할 만하다.

여기서 드넓은 우주 사이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예사람과 더불어 노니는 즐거운 놀이를 찾는다.

 

좋은 벗

좋은 벗이 날 찾으니 오래오래 그와 함께 있었으면 싶다. 그런데 그는 바쁘다며 곧 떠나야 한다고 하니 내 마음이 너무 섭섭하구나.

 

거간꾼

글을 읽으면서 단지 공명에만 정신을 쏟고, 마음으로 환하게 비추어보지도 않으면서, 장차 소요하여 노닐지도 않는다면, 어찌하여 진작에 저잣거리 가운데로 가서 거간꾼이 되지 않는가?

 

봄비와 가을 서리

봄비와 같은 사람이 있고, 가을 서리와 같은 사람이 있다. 더불어 삶의 기쁨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고, 옆에만 서도 으스스 떨리는 사람이 있다. 훈기로 인정스레 가슴을 덮혀주는 사람이 있고, 오싹하게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이 있다.

 

파초그늘

시정화의(詩情畵意)라 했다. 그림을 그리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시 쓰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일이다. 넋두리만 있는 시, 손끝의 풍경만 있는 그림에는 정신이 담기지 않는다.

 

혼자 노는 놀이

눈 온 날 새벽, 비 내리는 저녁에 내 좋은 벗이 오질 않으니 더불어 이야기 나눌 사람이 누구겠는가? 내입으로 읽으니 이를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이를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니 혼자인 것이 조금도 서운치가 않다.

 

신선

신선이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담백하여 때에 얽매임이 없다. 만약 내가 잠깐이라도 얽매임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그 잠깐 동안 신선인 것이요, 반나절 동안 그러하다면 반나절 동안 성인이 된 것이다. 내 비록 오래도록 신선이 되어 있지는 못해도 하루 가은데 거의 서너 번씩은 신선이 되곤 한다.

신선이란 마음에 누추함이 없고, 희디 흰 종이처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 착하려고 하지마라. 그것도 욕심이라. 그냥 맑으면 되는 것을. 2006년 부자스럽지 않게 살자)

 

가을 햇살

문종이로 바른 창이 화안하더니 흰 국화의 기우슥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묽은 먹을 묻혀 기쁘게 모사하였더니, 한 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좇아와서 꽃가운데 앉는다.

 

감상법

시문을 볼 때는 먼저 지은이의 정경(情境)을 살펴야 하고, 서화를 평할 때는 도리어 저 자신의 마음가짐과 됨됨이로 돌아가야 한다.

한편의 글 위에는 떠도는 아지랑이가 있다.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에 걸려있는 그 아지랑이가 바로 시문의 정경이다. 남이 노심초사한 결과을 앞에 두고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해댄다. 성에 차지 않는다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말하는 사람의 본바탕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