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육아일기

계단을 오르는 자장가

신우택 변순남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사랑스러운 손녀 재연이가 사춘기 소녀가 되면, 그때 이 글을 주련다.

 

▹머리끝에 오는 잠이 눈썹 밑에 모여들었다.

 

▹잠투정이 심해 그나마 엎드려 재우는 게 덜 울리고 빨리 잠드는 효과를 보고 있지만, 네 아빠는 그게 마뜩잖은 모양이다. 엎드려 재울 때 위험성이 있다고, 육아 책에 쓰여있으니 보라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코앞에 있어야 색깔을 구분한 만큼, 눈이 안 좋지만, 증손녀 얼굴만큼은 눈에 선명히 잡히는지 볼에 뽀뽀하며 예뻐한다. 또한, 네 동생이 아들인지 딸인지 맞춰보려고, 네가 어느 손가락을 빠는지도 궁금해한다. 밤 9시가 되자 집안에 전등을 모두 끄고, “윙이 자랑 윙이 자랑자랑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남의 아기 잘도 논다.” 제주도 전해 자장가를 부르며 재운다.

 

▹악쓰듯 울어대는 너를 겨우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아기 곰”을 부르고 이어서 “붕붕이가 좋아요 왜~ 그냥 그냥”을 부르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율동까지 섞어 시선을 묶어 둔 위에야 울음도 그이고 옷을 입힐 수 있었다.

 

▹이유식이 육아 일의 절반 이상이나 되는데, ‘베베쿡’ 같은 전문점에 배달을 시켜먹이는 게 어떠냐고 조언을 받았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얘기했더니 네 건강을 위하는 일인데, 힘들지만 직접 만들겠다고 한다. 할머니 표 이유식은 영양의 보고이다.

 

▹증조 할아버지는 감격스런 목소리로 “우리 재연이 많이 욕아부렀제” 라 한신다. ‘욕았다’는 영리하고 많이 컸다는 제주도 사투리다. 옆에서 중조 할머니가 “왜 우는 소리로 말햄수까?”라고 타박한다. 증조 할아버지는 너무 감격스러운 나머지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연신 “요거 대훈이 새끼, 예쁜 거!” 라며 눈을 떼지 못한다. 네 아빠이름과 새끼라는 말이 어찌나 정감있게 들리는지 가슴이 뭉클했다.

 

▹할아버지가 너를 업고 재우는 걸 증조 할아버지께서 보시더니, “어느새 애비도 하르방 되엉 손주 업어신게” 라고 당신이 손자를 업고 다녔던 당시 모습을 떠올리며 지난 세월을 회상하시는 것 같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변함없이 환하게 웃으며 안아달라고 팔을 들썩인다. 누군가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얼마 전 낯가림을 했던 너이기에 더더욱 기쁘다. 집에 할머니 이웃분이 놀러 왔을 때, 할머니는 “우리 재연이는 책을 보면 벌써 집중력이 대단해요”라고 과장되게 얘기하며 팔불출이 된다. (읽으면서 샘이 났다. 이러다 글쟁이들 밥줄 끊어지는 것 아냐? 겁이 덜컼났다.)

 

▹할아버지가 주는 이유식을 처음엔 잘 먹더니 반쯤 남았을 때부터 딴 짓을 하며 잘 안 먹는다. 그러자 “재미있게 다른 말도 하면서 먹여야지 재연이 잘먹네. 왜 그 말밖에 없어요”라고 할머니가 핀잔을 준다. 할머니 말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다 너를 위한 것이니 마음 상할 일도 아니다.

 

▹엎드린 상태에서 팔에 힘을 주며 앉는 자세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기는 것은 연습한 만큼 효과가 없다. 할아버지가 시범을 보이지만 할아버지가 왜 저럴까 하는 표정이다.

 

▹퇴근해서 온천천에 유모차를 밀고 산책을 나선다. 흥얼거리는 할아버지 소리에 덩달아 네 콧노래가 바람을 가른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볼 때마다 할아버지 어깨가 으쓱으쓱, 한껏 행복감에 젖는다.

 

▹혜정이 고모가 너를 무릎 위에 앉히고 마주 보며 노래를 부르자, 너는 유심히 쳐다보다가 머리카락을 잡으려 한다. 생각보다 고모가 안아주는 자세가 편한 모양이다. 같은 성을 가진 딸로서 무언가 동질감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하얀 쌀알처럼 윗니가 조금 돋아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자다가 보챘는가 보다.

 

▹우유를 두 손으로 잡고 혼자서도 잘 먹는다. “이거 할머니가 제대로 가르쳤네!”라고 추켜세우자 “도리도리도 잘해요.”라고 할머니가 말한다. 오히려 우리가 먹일 때보다 먹는 속도도 빠르고, 스스로 해내는 자립심도 키워줘서 좋다. 사람은 누구든 간섭받는 걸 싫어하고 사랑받으며 혼자 해내는 성취감을 맛보고자 한다.

 

▹할머니가 집안에서 너를 업고 CD의 자장가를 틀고서, 따라 부르니 스르르 잠이 든다. 할아버지의 코끝에서 가을이 살금살금 스며든다.

 

▹윗니가 나오면서 근질근질한지 아랫니를 가지고 부딪히며 뽀드득거린다.

낮에 똥을 찔끔 싸서 답답했는데 밤에 우유를 먹고 미뤄 두었던 똥을 시원하게 쌌다. 내가 다 후련하다. (똥싸는 일이 대수냐 싶어도…)

 

▹이유식을 먹이면서 할머니도 배가 고픈지 양념치킨을 입에 넣어달라고 한다. 할머니는 네 입에 이유식을, 할아버지는 할머니 입에 치킨을 넣어주며 그리고 한 입 깨어 문다. (영화의 한 장면)

 

▹네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할머니가 매콤한 국물이 있는 해물짬뽕을 먹고 싶대서 중국음식점으로 간다. 손님이 많아 홀 안에서 기다리며 둘러보니 다른 아기 엄마, 아빠들도 눈에 띈다. 그 틈에 우리도 속해 있으니 조금 쑥스럽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너를 품에 안은 할머니 모습이 아름다웠다.

 

▹할머니가 짠 나타나며 “예쁜 짓 윙크”하니 너는 두 눈을 찡그리며 따라 한다. 덩달아 할아버지도 “재연아 윙크”하니 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두 눈을 찡그린다. 황홀감에 휩싸인다.

 

▹아기는 엄마 얼굴에 나타난 표정대로 따라 하기 때문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보다 미소를 잃지 않는 네 엄마의 지혜가 돋보인다. 엄마가 재밌는 표정을 지으니 까르르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그 세기가 우리와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역시 제 엄마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아무튼, 울든지 웃든지, 그냥 사랑하는 딸이 지금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에 네 아빠는 마냥 행복하다. 조금 뒤에 너는 아빠의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며 귀를 문다. 아빠의 짭조름한 귀가 씹기가 좋은 건지, 아빠 냄새가 그리웠던 건지 한동안 귀를 가지고 씨름한다.

 

▹목욕하고 우유 먹을 때는 할아버지의 역할도 한몫한다. 동요를 부르다 할아버지의 18번 노래인 ‘삼포 가는 길’을 부르고 내친김에 ‘너를 위해’까지 부르니 호응이 괜찮다. 딴 짓 하지 않고 잘 먹는다. (꾸밈없이 소박 진솔)

 

▹제사나 명절 때 할아버지 혼자서 잔 올리고 절하다 보면 너무 외로웠었는데, 오늘은 네 아빠도 옆에서 잔 올리고 너까지 절을 하게 돼서 너무나 든든하고 기쁘다.

 

▹네 엄마는 네가 잘 때라도 잠시 옆에서 같이 누워서 쉬면 좋으련만, 가족들이 쉬라 해도 일을 거든다. 할아버지가 꾀를 내어 네 한테 가 있으라 하니 그때야 방에 들어간다. (며느리사랑 시아버지 사랑)

 

▹이렇듯 업고 나갈 때마다 엘리베이터 앞 CCTV에 우리 모습이 찍히며 하루를 마감한다.

 

▹서둘러 옷과 기저귀를 벗기고 물수건 2개로 하나는 머리를 식히고, 또 하나는 몸 닦기를 38도 이하로 내려갈 때까지 계속한다. 보채는 너를 업지 않을 수 없어, 할아버지가 업고 네 머리를 물수건으로 감쌌다. 그 모습이 동화 속의 보자기를 쓴 ‘성냥팔이 소녀’ 같다고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휴대폰 사진을 찍는다.

 

▹어젯밤 할머니와의 논쟁으로 집안 공기가 싸늘하다. 식욕도 없었지만, 할머니도 아침밥을 차려줄 마음도 없는 것 같기에 그냥 출근한다. 수업을 하면서도 배고픈 생각보다는 네 열이 어떤지가 더 궁금하다. 할머니와 통화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건다.

 

▹집에 오니 할머니가 배즙을 먹이고 있다. 그런데 네 얼굴이 붉은빛이 도는 게 아픈 얼굴과는 다르다. 온통 땀에 젖어 축축하니 열은 없는데 열꽃이 핀 것 같다. 저 많은 꽃이 몸속에서 맺혀져 있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열꽃이 핀 네 얼굴은 삼국지 관운장의 대춧빛 얼굴을 능가한다. 아기들은 아프면서 큰다고 하는 게 틀림없다. 너는 제대로 기지 못했는데 어제부터는 목표물을 향해 기어다닌다.

 

▹혹시 열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앞서 열을 재는 자체가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이마나 볼에 입맞춤하며 간접적으로 네 체온을 느끼기도 한다.

 

▹할머니한테 기어오는 네 모습을 찍었는데, 눈이 또랑또랑 빛나 바로 기어 나올듯한 생동감 넘치는 사진이다.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한다. 휴대폰이 걸려오지 않아도 왠지 자주 열어보게 된다.

 

▹네가 관심을 두는 식탁 아래의 세계는 어떨까? 너처럼 기는 자세를 취해 식탁 밑의 위쪽을 보니, 그곳은 또 다른 공간의 지붕이고, 식탁의 다리는 조각이 훌륭한 기둥이다. 새로운 발견이다.

 

▹아침에 “맘마 먹자!” 하면 너는 좋아서 흥흥대며, 맛있는 유를 먹는다는 기대감으로 기다릴 줄 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바로 안 주면 으앙~ 울음을 터뜨렸는데…

 

▹네가 매트에서 놀다가 냉장고 쪽으로 기어가더니, 장밋빛 냉장고 문에 비친 네 모습을 보고는 연방 입을 아 벌리며 입맞춤을 한다. 할아버지가 보기에도 네 모습이 조명을 받은 장미꽃처럼 예쁘다.

 

▹네 건강검진 결과, 키는 74cm, 몸무게 9kg인데 다 평균이상이고 몸 상태는 모두 정상, 양호로 나왔다. 지금부터는 훈육해야 하는 시점이므로, 물은 컵을 이용해서 먹게 하고, 업어서 재우지 말라고 하는데 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에서 저녁까지 먹고 집에 들어서니 너는 이유식을 먹고 있다. 할아버지를 보자 그냥 오른팔을 한번 들고 손을 오므렸다 편다. 그걸로 인사 끝이다. 조금은 거만하게 보이는 네 행동이 마치 지체 높은 누굴 닮아서 할머니랑 한바탕 웃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간절히 원하면 우는 게 자연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우는 것도 네 언어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해야 소통이 이루어진다.

 

▹할아버지가 양말 신는 것을 유심히 쳐다보기에 네게도 예쁜 양말을 신겨준다. 아기들은 어른을 모방하고 동일시하며 나아가 창조적이 된다. 네 양말은 까만 두 눈이 그려져서 앙증스럽다. 발에도 눈을 달아 조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아침식사시간에 네가 자꾸 식탁 밑으로 기어 와서 네 아빠가 무척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아뿔싸! 네가 식탁 의자에 부딪혔다. 으앙~ 울음소리 데시벨이 높다. 네 아빠가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이럴 줄 알았다니까” 라며 화를 낸다. 네 아빠의 화는 자신한테 내는 것인지 아니면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 내는 것인지? 누굴 탓한 들 마음만 아플 뿐이다. 할아버지가 계란으로 네 눈 위를 문지르고 또 대려고 하자 네가 고개를 돌리며 운다. 그래서 네 아빠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투덜거린다. 뭔가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이 맺히고 가슴이 먹먹하다. 할아버지가 설 자리를 잃었다. 공허한 생각에 미치자 목욕도구를 챙긴다. 섭섭함, 행복감, 실망감, 기대감이 교차하는 파도가 일렁인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빠랑 엄마가 다 보이니 더 환하게 웃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무리 정성 들여 키운다고 해도 엄마와 아빠의 따뜻한 손길과 숨결이 전달되어야 정서가 안정되지 않을까 싶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필독서! 젊은 할아버지 할머니 수명만 길어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일하는 아들 딸 며느리 사위를 위해 고령화 인구가 맡아야 하는 일이 아닐까. 아하! 갑자기 갈 길이 멀다. )

 

▹할아버지도 어제 네 아빠한테 좀 서운했었지만 자고 나면 풀어지는 게 부자지간의 정이라, 네 아빠 차가 아파트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차마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아빠 차를 바라보며 너는 어떤 생각을 했니? 아마 네 엄마는 내색은 안 하지만 이별의 아픔을 희망찬 내일의 밑거름으로 승화시키고 있었을 게다.

 

▹할머니가 이유식을 데워서 가져오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네”라고 말했다가 된통 한소리 듣는다. 네게 이유식이 뜨겁다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냐며 할머니가 따지고 든다. 그게 아니라 그냥 보이는 현상을 얘기했을 뿐인데 오해를 하고 화를 낸다.,

 

▹육아일 말고도 집안일이다 뭐다 해서 심신이 피곤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게다가 할아버지 저녁까지 준비하려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그러니 말 한마디 잘못 벙긋했다간 할머니한테 욕을 한 바가지 듣기 일쑤다. (연자비, 가장 힘든 부분은 남편이 저녁 먹고 오면 좀 좋나.)

 

▹본뜻과 달리 말을 받아들이는 할머니의 관념적인 생각에 할아버지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둥 소통의 장을 닫아버리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게 다 할머니 몸이 고단해서 생기는 여파인 듯하다.

 

▹아침에 몸을 뒤척여서 네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손을 잡으니 손을 만지작거린다. 이 아침의 큰 행복감은 이렇게 작은 네 손에서 비롯된다.

 

▹현관과 거실 창 사이로 네 미소가 번진다. 잠깐 현관에서 멈칫, 너를 지켜본다. 할아버지를 보고 달라지는 네 표정을 읽고 싶었다. 엷은 미소에서 환한 웃음으로 바뀌는 것은 찰나였다.

 

▹너는 할머니를 한 번 봤다가 몸을 빙글 돌려 할아버지를 보고는 방긋 웃고 귀를 꼬집고 좋아한다. 출근시간이 다 돼 가는데, 할아버지가 못 나가도록 이부자리에 붙들어 매는 네 미소가 빛난다.

 

▹할아버지가 집에 들렀다가 모임에 가려고 아파트에 진입하는데 아기 띠로 너를 안고 가는 할머니가 보인다. 경적을 울리니 할머니랑 네가 활짝 웃는다. 길에서 만나니 또 다른 느낌이 들며 즐겁다.

 

▹네가 거울을 보더니 혀를 내밀며 익살스런 표정을 짓는다. 혀를 꽃봉오리처럼 만들어, 거울 속의 또 다른 네게 표정연기를 하는 듯하다. 할아버지가 모임에 갔다. 늦게 들어오니 너는 이미 꿈나라에 가 있다. 최대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옷을 갈아입고 물소리를 억제하며 씻는다.

 

▹진열장 모서리에 손을 잡고 서 있는 네 모습을, 엄마 아빠한테 전송했다. 네 아빠의 반응은 ‘손을 놓치면 위험할 텐데…’이고 네 엄마는 ‘스스로 혼자 선거에요’이다. 네 행동 하나하나에 아빠는 ‘유비무환’을, 엄마는 ‘일취월장’을 생각한다.

 

▹할머니와 얘기하다, 할머니 너머 탁자에서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네게 잠시 시선이 갔다 싶은데, 할머니는 그 시선이 너를 살펴보라는 압박으로 느껴진다며 아옹거린다. 여러모로 심신이 고단한 할머니의 투정이거니 생각하지만 뭔가 씁쓰레하다.

 

▹낮에 네가 기저귀를 모자처럼 쓰고 놀기에, 할머니가 우스워서 휴대전화사진을 찍어 네 엄마한테 전송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마치 음악책에 나오는 ‘바흐’ 같은 머리스타일이다.

 

▹네가 잠이 오는지, 뒤척거리다 계속 칭얼대고 잉잉 운다. 지난번 소아과 의사가 말한 훈육을, 할머니가 한답시고 목소리 톤을 높이니 네가 멈칫하며 우는 걸 그친다.

 

▹할아버지 출근할 때, 네가 우유를 먹으며 ‘빠이빠이’ 눈으로 인사한다. 우유병을 두 손으로 잡고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다. 눈으로 통하는 사이가 가장 친밀한 사이가 아닐까.

 

▹할아버지가 출근할 때, 너는 오른손으로 흔들고, ‘잼잼’할 때도 오른손으로 하는 걸로 봐서 너는 왼손잡이는 아닌 듯싶다. 물건을 가지고 놀 때는 양손을 다 사용하니 별문제가 없는데, 할머니는 괜한 걱정이다.

 

▹할머니가 퀴즈를 낸다. “레고 통을 짚고 3분 이상 서 있었는데, 왜 그랬게요?” 할아버지가 다소 엉뚱하게 “레고 통에 타고 싶어서”라고 답을 하니, 그게 아니고 스스로 짚고서는 건 됐지만 앉지를 못해 네가 울더라고 했다.

 

▹할머니도 집안일이 정리되지 않아 힘겨운 나머지 할아버지한테 성을 낸다. 안아줘도 싫다 하고 같이 놀자 해도 네가 할머니한테 쪼르르 기어가서 할아버지가 참 난감하다.

 

▹할머니는 네 엄마의 불그스름한 뺨을 보고, 마치 영화배우 전지현처럼 예쁘다고 한다.

 

▹엄마, 아빠, 네가 삼각형 꼭짓점에 해당하는 가평, 장성, 부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이 쌓이니 오히려 거리를 단축하는 것 같다.

 

▹부산역에서 네 엄마가 올라오는 출구가 몇 번인지 네 아빠가 찾고 있고, 할머니와 너를 만나 다 같이 플랫폼까지 내려간다. 네 아빠 말이 네 엄마가 트랩에 내리자마자 너를 볼 수 있도록 객차 앞에 있어야 한단다. 그만큼 네 엄마에 대한 마음씀씀이가 자상하다.

 

▹네 엄마가 드디어 모습을 나타내고, 너는 물끄러미 엄마를 보다, 이내 품에 안겨 엄마 냄새를 맡고 좋아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만나는 순간, 애틋한 정이 혈류를 통해 전달되어 금방 아늑함을 느끼는 게 부모 자식 간이다.

 

▹할아버지는 요즘 궂은 소식을 접하면, 다른 분을 통해 예의를 갖춰 조의를 전하고 직접 문상하는 걸 삼가고 있다. 너를 키우는 동안만큼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 네게 정성 들이고 싶기 때문이다.

 

▹할머니 일손을 조금 덜어주는 일 중에 할아버지가 저녁밥을 먹고 들어오는 것도 하나다.

 

▹서울 가는 기차표를 예약하고 이제 다음 주에 너와 떨어져야 한다는 게 서서히 피부에 와 닿는다. ‘곁에 있어도 그립다.’라는 시구가 생각난다. 할머니 목소리가 밝다. 네가 똥을 ‘예쁘게’ 쌌다고 한다. 그렇다. 푸짐하고, 때깔 좋고, 냄새가 향긋하다.

 

▹죽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유 먹인 거 아니냐며 할아버지가 걱정 투의 말을 하자, 할머니가 불같이 화를 낸다. 할아버지가 괜한 말을 해서 할머니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한 것 같다.

 

▹네가 강아지 ‘자비’ 몸에 손을 대고 꼬집듯 잡아당겨도 ‘자비’가 피하지 않고 멀뚱멀뚱하게 쳐다본다. 강아지 녀석도 네가 할아버지한테 가장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인식하는 듯하다.

 

▹결혼식장에 가려고 네가 입을 예쁜 옷을 고른다. 청바지에 체크 남방이 어울릴까, 아니면 밤색 치마와 티셔츠가 한 세트인 옷이 어울릴까? 아무 옷이라도 예쁘지만, 치마를 입히고 체크 남방을 걸친다. 네 머리핀을 찾느라 차 안에서 할머니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진다. 보물을 찾아낸 듯 할머니가 머리핀을 찾았다고 탄성을 지른다. 저금이라도 더 예쁘게 꾸미려는 할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액세서리 하나에 역시 공주님의 포스가 느껴진다.

 

▹집에 돌아와서 네 장난감이랑 옷으로 어질러진 방안을 보니 오히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며 정감이 흐른다. 네가 가평에 올라가고 너와 관련된 것들이 정리되어 비어 있을 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네가 이유식을 잘 받아먹을 때, 손뼉을 치고 칭찬을 하면 너도 따라서 손뼉을 치며 아 하고 다시 입을 벌린다. 칭찬과 박수가 네 입맛을 돋우는 파수꾼인 셈이다.

 

▹오늘, 할머니 생신인데 할아버지가 깜빡 잊고 학교에서 밥을 먹고 와버렸다. 할머니가 내심 저녁 외식을 기다렸는데, 할아버지가 무심하게 잊고 있었다. 뒤늦게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고 초를 켰다. 잠이 쏟아지던 네가 촛불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할아버지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자 할머니 무릎에 앉아 같이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할머니가 후~ 촛불을 끄는데 한 번에 꺼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기력이 그동안 많이 떨어진 듯하다.

 

▹일찍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집안이 썰렁하다. 네가 가평에 갈 날이 며칠 남지 않아서 그런지 외로운 섬에 갇힌 느낌이다. 할머니한테 전화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에 외출한 할머니한테 은근히 화가 나려는 걸 참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오늘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이다. 할아버지가 수능감독을 하려고 새벽에 집을 나선다. 네가 곤히 자고 있다. 꼭두새벽부터 수능응원 나온 학생들이 교문 앞에 줄지어 서 있다. 네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대학입시제도가 어떻게 변할까? 단 한 번의 시험에 미래가 결정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서니 네가 방금 목욕을 했는지 얼굴에 로션향기가 가득하다. 할아버지를 보고 방긋 웃는다. 행복이 넘치며 와락 눈물이 날 뻔했다. 네 엄마에게 전화한다. “에미야 재연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지? "보내려니 눈에 밟혀서 말이다.” (코끝이 찡해지며 독자도 눈물이 나온다.)

 

▹네 엄마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할아버지 마음이 간절해도 너를 보고 싶어 하는 네 엄마에 비할 수는 없지.

 

▹학교에서 저녁을 안 먹고 평소보다 빨리 집에 왔다. 그런데 집을 쳐다보니 불이 꺼져 있다. 현관문이 안 잠겨 있고 실내에 한기가 쌩하니 흐른다. 창문이 죄다 열려 있다.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어딜 돌아다니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되레 할머니한테 반격을 받을지언정 우선은 쏘아붙인다.

 

▹청평역에 도착하여 계단을 내려가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네 엄마가 바로 코앞에서 너를 반긴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할머니가 너를 외할머니 품에 안기게 한다. 엄마를 보고 방긋 웃는다. 다행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낯설어하지 않는다.

 

▹외할아버지가 차를 역 앞에 갖다 댄다. 바람이 차다. 네 엄마에게 너랑 먼저 차에 타게 했다. 그리고는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한테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린다. 네 불에 뽀뽀하고 손을 흔들며 역으로 방향을 바꾼다. 청평에 도착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았지만…. 네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 없어 그대로 발길을 돌린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가 시큰하다. 눈물이 와락 쏟아진다.

 

▹네 엄마한테서 문자가 왔다. 네가 할아버지, 할머니랑 헤어지고 나서 차 안에서 계속 운다고 한다. 가슴이 미어지고 쓰리리다. 다른 사람 보기 민망하게 전철 안에서 쉼 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네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슬픈 마음이 격해져서 받을 수가 없다. 네가 엄마 품에서 웃는 사진과 메시지가 전송됐다. ‘재연이 적응 완료했습니다. 이제 안 우니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세요.’

 

▹밤 11시, 기차에 몸을 싣고 부산에 내려오는 길, 너무나 허전하다. 석 달간 힘겨웠지만, 그보다는 훨씬 기쁨과 행복이 넘쳤던 시간이 꿈같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