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노동' 글 속에 나오는 집





수필의 날
부채들고 있는 송혜영님






황홀한 노동


*  송혜영  
hisong999@hanmail.net
                                                  
  
   그들이 왔다.
   긴 머리를 야무지게 뒤로 묶고 왼쪽 귀에 금빛 귀걸이를 해박은 대장을 선두로 그들은 우리 마당에 썩 들어섰다. 젊은 그들이 마당을 점령하자 이끼 낀 오래된 마당에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대장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자재며 장비를  풀어놓았다. 그리곤 진군하듯 헌집을 접수해나갔다.
   ‘우두둑’ 오랜 세월 소임에 충실했던 노쇠한 양철지붕이 끌려 내려왔다. 이가 빠진 창문도 급히 몸을 빠져나왔다. 제 구실을 못한 지 오래된 굴뚝이 뭉개졌다.
   마당 가득 유월의 때 이른 폭염이 쏟아지고 있었다. 일하는 그들의 이마로, 귀 뒤로, 싱싱한 뒷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셔츠의 등판은 금세 땀에 젖어 몸에 척 들러붙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이른 무더위가 내 탓인 것만 같아 돈을 주고 일을 시킨 게 외려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런 내 심경이 무색하게 그들의 얼굴에는 짜증과 피로의 기색이 없었다. “이번 현장은 너무 빡세다”며 투덜거리는 뒤끝에도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작업과 관련해 간간이 우스개 소리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지방이 완전 연소된 그들의 팔과 다리는 좀처럼 쉬지 않았다. 잠깐 숨을 돌려 담배 한 대 달게 피우는 게 휴식인 셈이다.
   그들은 아침 여덟 시면 어김없이 우리 마당에 들어섰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내 오랜 습관은 조정이 불가피했다. 기상 시간을 파격적으로 앞당겼고 낮잠도 멀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염도 높은 땀에 대한 보답으로 국수를 삶고 빵을 구웠다. 아껴두었던 매실 원액으로 차가운 음료수도 열심히 만들어 바쳤다.
   나는 현장 감독을 빙자해 일하는 그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이것저것 참견하려고 했지만 입 댈 데가 별로 없었다. 집 고칠 때 이런 저런 일로 속깨나 썩는다기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속 썩을 빌미를 주지 않았다. 모처럼 내게 찾아온 행운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활기찬 노동을, 정직한 노동으로 단련된 몸을 황홀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됐다. 그들의 알배기 종아리를, 암갈색 팔뚝을 홀린 듯 따라다녔다. 노골적으로 바라보다 들키면 그들도 나도 민망할 것 같아 슬금슬금 안보는 척 훔쳐보았다. 국수에 얹을 애호박을 볶으면서도 간유리에 비친, 진지하게 일에 몰두하는 그들의 프로필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의 잰 손과 부지런한 다리가 가 닿자 오래된 집은 세월에 입은 깊은 생채기와 갈라터진 속이 말끔하게 치유됐다. 유쾌하고 일 잘하는 그들이 하도 보기 좋아 공사가  좀 지연되었으면 하는 객 적은 생각도 해보았다.
   그들이 보여준 황홀경은 삼인 일조의 젊은이 여섯이 손을 맞춰 기와의 일종인 ‘슁글’을 덮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이슬이 미처 마르지 않은 맨 지붕에 오르는 건 자살행위에 버금간다. 그나마 좀 시원한 아침녘에 기와를 덮는 작업을 할 수 없는 이유다. 물기가 바싹 마른 지붕에 그들이 올랐을 때 여름 해는 젊은이들의 정수리를 녹이려고 작정한 듯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그늘 한 점 없이 오직 푸른 하늘만을 배경으로 그들은 작업을 시작했다. 땀에 푹 젖어 박자를 맞추며 경쾌하게 기와를 덮는 그들을 입을 벌리고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눈이 부셨다. 그날 햇볕이 유난히 강렬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건강한 젊음이, 정직한 육체가 내뿜는 광채 때문에 더 눈이 부시었다. 나는 이마에 손그늘을 드리우고 그들의 노동에 한껏 매료되어 있었다. 그때 가늘어진 눈으로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 돌연한 물기는 무엇인가. 그들의 몸이 보여주는 황홀경에 감동해서 눈물겨워진 것인가. 아니면 폭염 속 노동이 안쓰러워서인가. 아! 한 번이라도 저들처럼 삶과 치열하게 정면으로 마주 선 적이 있던가. 부끄러움도 섞인 복잡한 눈물이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내딛는 발자국 하나까지 무심할 수 없었다. 몸뚱이를 금쪽같이 아껴가며, 신통치 않은 머리만 굴리며 삶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데 이골이 난 터에, 가까이에서 접한 그들의 정직한 노동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마침내 나는 잔머리 굴리지 않고 몸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경의(敬意)를 보탠 진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노동의 댓가를 가지고 흥정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 먹었다.
  일주일간 속도전으로 일을 끝낸 그들은 장비를 챙겨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그들의 빠르고 야무진 일솜씨를 탐내는 곳이 많은 것 같았다. 위태위태하던 헌집은 그들 덕에 산뜻한 새집으로 거듭났다. 이제 마당은 이전의 고요를 찾았고 나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그들이 깔아놓고 간 튼튼한 대청마루에 하는 일 없이 앉아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일 없는 내가 편치 않다. 그들은 지금 어느 현장에서 틈을 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는가. 앞으로 오랫동안 그들이 남기고 간 시큼한 땀 냄새와, 알이 꽉 찬 종아리와, 황홀한 노동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 송혜영
휴전 협정 3년 후, 경남 울주군 언양면의 한미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입학 무렵 상경, 죽 서울서 버티다 얼마 전부터 홍천강변의 누옥에서 묵새기고 있슴.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로 제도권 교육을 마감함
십수년간 소일하던 얼치기 화가 노릇을 접고 2004년 '현대수필'로 등단.



류창희   2009-09-19 17:18:50
홍천 송혜영 작가의 글이다.
'홍천, 그녀가 머무는 곳'
사진 속에 있는 집을 지을 때의 이야기이다.

올 여름 홍천집에 갔을 때의 사진과 같이 올리고 싶었는데
달라고 달라고 조르다가
오늘에서야 내게 글을 보내주었다.
집보다 글이 좋아 혹여라도 홍천에서의 사진이 누가 될까싶다.

가을에도 가보고 싶고
겨울에도 가보고 싶고
물론 봄에도 또 가보고 싶다.
아예, 그 헛간 자리에 방 한칸 얻고 싶다.
근데, 사실 부산에서 너무 멀다.
호미   2009-09-21 21:29:08
오랫만에 송혜영 선생님의 글을 읽습니다.
깔끔한 문장, 맛깔난 글솜씨를 보노라니 문득....
저도 사진속의 마루에 앉아
삼인 일조의 여섯 젊음이 땀흘린 내음에 젖은 낮잠을 즐기고 싶네요.
사진으로 뵙는 송선생님 여전히 행복한 미소가 참, 좋습니다.
건강하시고 재미있는 글 많이 들려 주세요.
- 부산 애독자 -
류창희   2009-09-22 07:58:09
호미님
나의 글벗에게 관심과 사랑주셔서 감솨~
이미 '그여자의 말뚝'에서 만난 사이이지요.
사진 속의 마루!
마루 정말 편안하고 좋아요. 특히 기대앉을 수 있어서.
송혜영   2009-09-25 12:38:43 [삭제]
반가운 호미님!
가을이 깊어갈 때 쯤 류선생과 함께 놀러오세요.
부산과 홍천, 선뜻 나서기가 힘든 길이지만
우리 마루에서 다리 뻗고 수다 떨 기쁨으로 달려올 수는 없을까요.^ ^

류샘도 추석 잘 지내고 건강 또 건강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