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껌 씹는 맛

류창희 2015. 8. 26. 22:34



껌 씹는 맛

  김시헌

 

대구에 간 일이 있다. K 씨를 방문했다. 그는 최근 몇 달 동안 난치병을 앓고 있다. 내가 나타나자 의외라는 듯 반기면서 여윈 손을 내민다. 투실했던 옛날의 건강한 손은 간 곳 없고 나의 악력이 지나칠까 봐 주저가 된다.

평소에도 그는 사람을 만났을 때 환성을 지르거나 과장된 인사말을 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다. 그날도 악수뿐 말이 없다. 다리, , , 표정 어디에도 병마에 시달린 피로한 모습이다. 언제나 깔끔하게 몸단장을 하던 그였는데 입고 있는 복장에도 나태가 보인다. 세상일에 무관심해진 모양이다.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정이 움직인다. 외로워지면 사람이 그리워지리라. 병에 걸렸던 처음은 방문객도 많았는데 지금은 사람의 발길도 끊어졌다고 한다.

나는 부질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흘리면서 껌 씹는 맛으로 살아갑니다.” 한다.

껌 씹는 맛이라, 평범한 말이지만 뜻이 담겼다. 그 말 속에 K 씨의 마음과 동작이 다 표현된 것 같다. 나는 그 표현이 가시처럼 가슴에 걸린다. 하루하루가 그토록 무료하다는 뜻이리라.

K 씨의 방 벽에는 예술사진이 몇 폭 걸려있다. 그는 사진작가다. 옛날의 화려했던 생활을 증언이라도 하듯 생기에 넘치고 있다.

방구석에는 바둑을 두다가 둔 흔적이 있다. 가족과 바둑을 두는 것일까, 이웃집 사람이라도 와서 그와 시간을 보내주는 것일까. 이야기하는 것조차 피로해 보이는 그에게 많은 이야기를 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나의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말대꾸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벼운 관심을 보낸다.

고장 난 기계 같다고 할까. 기능이 좋게 들어가던 자동차의 나사가 몇 개 늦추어져 버린 광경이다.

청년이라면 희망과 의지를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껌 씹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가 그의 귀에 새로우랴?

한참 후에 다시 한 번 악수를 하고 그의 집을 나왔다. 인간이 거쳐야 할 불행한 한 토막을 보고 나온 느낌이다. 걸음에 힘이 빠진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이 있다.

껌 씹는 동작은 K 씨만의 생활이 아니다. 어쩌면 나 자신의 생활인지도 모른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껌을 씹어야 한다. 삼사십 대까지만 해도 껌 맛은 달고 쫄깃하다. 껌의 달콤한 맛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노년의 껌은 아무 맛도 없다. 그런데도 쭈걱쭈걱 씹어야 한다. 맛도 없는 껌을 왜 씹어야 할까. 반드시 버려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미(無味) 속의 맛! 반복 속에 있는 무미(無味)! 그것은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는 건널목인지도 모른다.

40대 때, 어느 미술 전시회에 간 일이 있다. 여러 작품이 놓여 있었다. 돌아보다가 한 곳에 발길이 머물렀다. 마룻바닥을 하얗게 닦아놓고 그 옆에 걸레를 얹어두고 ()’이라고 제목을 붙여놓았다.

무슨 의미인가? 하고 있는데 작가 자신이 옆에 왔다. 이것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는 예사로운 표정으로 때가 묻은 마룻바닥을 하얗도록 닦자면 같은 동작이 얼마나 많이 반복되었겠습니까 한다. 말뜻을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선()이로구나, 선의 경지를 다는 모른다. 하지만 닦고 닦아 마음의 바닥을 투명하게 만드는 과정이리라.

아직은 겨울이 가로수를 뒤흔들고 있다. 바람 속을 걸으면서 K 씨의 껌 씹는 맛을 생각해 본다. 무료한 껌 씹는 맛은 K 씨만의 것은 아니다. 지우면 나오고 뽑으면 다시 돋는 여름의 풀싹처럼 사람의 의식은 자신을 끝없이 괴롭힌다. 그 풀싹을 잠재우는 작업이 껌 씹는 맛인지도 모른다.

 

 

* 김시헌(1925~2014) 님은 수필가

현대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오후의 사색》 《허무의 표정

- 좋은수필2015-7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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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27일 별세


이럴 때 나는 까막눈이다. 그날 한국수필문학진흥회의 강철수 회장님의 전화가 몇 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나는 도서관운영위원회 일로 집행부와 만나 회의를 하고 서류를 정리하느라 몇 번이나 울린 다급한 전화를 놓쳤다. 겨우 통화하니, 수필가 김시헌선생의 부음 소식을 전하며, 빈소가 부산이기에 서울에서 갈 수가 없으니 에세이문학을 대표해서 대신 문상을 가 달라는 지령의 부탁이다. 부산의 몇 분한테 전화를 드렸는데 휴가철이라 그런지 모두 바쁘다는 것이다.


부산의 영락공원은 내가 지리도 길도 장소도 잘 아는 익숙한 곳이다. 더구나 에세이문학회 부산 회장을 맡고 있으니 내가 가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오늘따라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으니 퇴근하면서 바로 영락공원으로 갔다.


컴컴한 도로를 쌩하니 달려갔으나, 사실 나는 김시헌선생님의 존함은 들어봤으나 글을 읽어본 적도 없다. 몇 곳의 빈소를 지나치며 김시헌, 김시헌이름을 보고 찾아갔다. 빈소에 도착하니 상주들이 아직 성복 전인지, 문상을 받을 분들이 없다. 분주하게 병풍을 세우고 업자들이 연단에 꽃다발을 설치하고 우왕좌왕이다. ‘에구~,’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너무 빨리 문상을 간 것 같다. 쭈뼛거리며 얼쩡거리니 어느 여자분이 누구시냐고 묻는다. 자신은 고인의 따님이라고 하며, 장남이 부산에 살고 있어 고인을 부산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서울 에세이문학에서 왔다고 했더니, “서울에서요?” 부리나케 상주들을 불러 분향을 하고 상주들과 어색하게 맞절을 했다. 무엇을 여쭤볼 수도 없고, 애도를 표현할 다른 말도 없이 옷 소몌를 잡으며 그래도 국밥이라도 한 그릇 드시고 가라는 말씀을 뒤로하고 캄캄한 주차장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 있기에 나는 너무도 김시헌 썬생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는, 그래서 감정도 말끔한 근무복 차림이었다.


오늘, 김시헌 선생님의 <껌 씹는 맛>을 읽으며, ~, 이런 분이셨구나!


그분이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베풀어 주시는 따끈한 국이라도 한 그릇 먹고 올걸. 이미 국밥은 식었지만, 이렇게 뒷북이라도 칠 수 있어 감사하다.

선생님 1주기 껌 씹다 가신 영전에

마음으로 향초를 사른다.

껌 씹지 않고 가지는 사람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