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고사목

류창희 2011. 1. 28. 16:44

 


고사목

고경숙 (2011 한라일보 신춘문예)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 고경숙 (경남 통영 출생 )

당선소감

시, 낯선 얼굴로 만져주던 존재

탁구공이 내는 소리가 좋아 탁구장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정적을 깬 소리가 닫힌 나를 열고, 달팽이관 속의 웅크린 어둠을 먹어치운 뒤 내 눈빛마저 단숨에 삼켜버렸다. 온몸을 던져 톡톡 우는 그 소리는 눈부시게 반짝거렸으며 짜릿한 쾌감을 주고도 남았다.
시도 그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주시하는 것처럼, 시 역시 늘 낯선 얼굴로 와서 동그맣게 울었다. 그 울음은 차갑고도 명징해 귀먹은 나를 어루만졌고, 한 점 의혹도 없이 빠져들었다. 간간히 성마른 소리로 외면하기도 했으나 귀에 쟁쟁한 흐느낌을 모지락스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아마도 부딪힘이 주는 아픈 여운 때문에 시의 탁구대 앞에 섰는지도 모르겠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전신을 휘감고 돈다. 이는 분명 시가 나를 부르는 신호이리라. 내부 깊숙이 들어와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움켜쥐고, 시의 라켓을 들라고 한다. 두렵다. 하지만 내가 던진 공은 작고 가벼우나 내 시의 소리는 장대하기를 바랄 뿐이다. 다산어록에서 시는 자연스러우면서 해맑은 여운이 그 어려움이라고 했다. 명심할 점이다.
아울러 생각지도 않은 웃음보따리를 선물하신 심사위원님과 한라일보사에 감사를 드린다. 내시의 영원한 응원군인 남편과 두 딸, 미지와 영지에게도 사랑한다고 시적으로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