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글쓰며 사는 삶

류창희 2012. 12. 6. 11:54

 

 

글쓰며 사는 삶

나타리 골드버그 지음/ 한진영 옭김

 

 

 

 

 

 

 

인생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팬지, 매발톱꽃, 페튜니아, 금낭화를 군데군데 심어 정원을 깔끔하게 꾸며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양한 초목이 제멋대로 자란 숲을 그리워한다. 그런 숲에서 평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마치 수행할 때처럼 우리의 마음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한다.

 

 

손을 계속 움직여라. 될수록 구체적으로 억제하지 말라.

이거야말로 글쓰기와 섹스와 같은 점이다. 생각하지 마라. 섹스가 그런 것처럼.

 

 

1. 손을 계속 움직여라. 10분이든 한 시간이든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면, 절대 멈추면 안 된다. 10분을 마음먹었다면 8분쯤 지났을 때, 발 앞에 폭탄이 떨어지더라도 꼼짝해서는 안 된다. 시간을 다 채울 때까지 써야 한다. 잠시 멈춘다고 해서 별문제는 없겠지만 그러고 곧바로 다시 쓰는 건 늘 쉽지 않다.

 

 

2. 억제하지 마라. 말하고 싶은 걸 말하라. 글의 내용이 정확한지 겸손한지 적절한지를 걱정하지 마라. 그냥 뱉어내라.

 

 

3. 구체적으로 쓰라. 자동차라고 하지 말고 캐딜락이라고 하라. 과일이 아니라 사과라고 해라. 그냥 새가 아니라 굴뚝새라고 하라.

 

 

4. 생각하지 마라. 처음으로 퍼뜩 떠오르는 첫인상을 무시하지 마라.

 

 

5. 마침표와 철자, 문법에 얽매이지 마라.

 

 

6. 급소를 건드려라. 뭔가 두려운 것이 떠오르면 거기에 맞닥뜨려야 한다. 그곳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두려움의 주변을 맴돌며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진실을 회피하며 쓴 글은 추상적이고 밋밋할 수밖에 없다. 피하면 안 된다. 그런 곳에 모든 에너지가 모여 있다. 쓰면서 울거나 웃을 수야 있겠지만 그걸 쓴다고 죽지는 않을 테니 겁먹을 필요 없다.

 

 

‘10분’ 제한 글쓰기 ‘가 어떻게 단편소설, 장편소설, 수필로 이어질 수 있는지.

1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놓고 글쓰기를 해보자. “나는…. 을 기억한다.”

자, 10분이 다 됐으면 멈춰라. 하지만, 말을 하지는 말자. 다시 ‘10분 글쓰기’에 들어간다. “나는…. 을 기억하지 못한다.”로 시작해서 계속 써나간다.

우리는 보통 안전벨트를 매듯이 “나는…. 을 기억한다.”라는 일방통행식 글쓰기를 한다. “나는…. 을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부정문은 진행하던 길의 반대쪽으로 유턴하는 것과 같다.

 

 

문체에 대하여

“문체가 뭐죠? 저도 저만의 문체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우리는 모두 이미 자신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삶을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문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생긴 대로 살고 편히 호흡하고 마음껏 느끼라. 다만, 글을 계속 써야 한다는 것만은 잊지 마라.

 

 

구조에 대하여

퍼뜩 떠올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는 알고 있으니, 그것을 담을 형식만 찾으면 된다.

“뱀을 대나무에 넣어라.” 마디마디(문단) 표현하고 싶은 내용이 그것을 담아낼 형식이다. 글쓰기 훈련을 하려고 손을 계속 움직이는 것. 그게 바로 구조, 즉 형식이다. 나는 쓰고 싶다. 정말 쓰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리에 앉아서 손을 계속 움직여라.

 

 

조용한 공간을 찾아서

우리가 지구 위애 존재하는 것처럼 이 고요한 공간도 분명히 우리 안에 존재한다. 매일 글쓰기에 들어가기 전에 천천히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도 도움이 된다. 깊은 내면 평정과 진실이 담긴 고요한 장소에서 글이 나올 수 있을 만한 활동을 해라. 안전하다 주저할 이유가 없다 복잡할 것 없다. 단순하게 생각하라.

 

 

첫 생각

마음은 작가들의 풍경이다. 시각예술가들이 빛과 구도, 색, 공간을 연구하듯이 작가들은 기억과 상상, 생각, 단어들을 연구하고 글로 풀어낸다. 마음 한구석에 숨어 있는 원숭이 마음이 “이걸 쓰면 안 돼”하며 녹음기처럼 반복한다. 중요한 건 어떤 환경에서든 계속 써야 한다. 무엇을 쓰든 멈추지 않아야 한다….

열흘 연속으로 하루도 쉬지 말고 글을 써보라. 그 열흘 동안에는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지 말고 2주를 기다려라.

 

 

머뭇거리지 마라.

글을 쓰고 싶은데, 아이는 아내는 남편은 부모님은 경제는…. 이유가 끝도 없다. “다 핑계다.” 당신 인생이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좋다, 재밌다, 즐겁다.’라는 단어는 쓰지 말자.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다.

 

 

혼란스러움을 견디며

글쓰기는 치유와 다르다. 글쓰기는 치유라기보다는 마음속 깊숙이 감춰져 있던 것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행위이며 문학의 근본이다. 내 마음은 계속해서 어린 시절의 슬픔을 떠올리고 있다. 내면의 고통을 열어 보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

 

 

몰입

시간제한 글쓰기다. 건강한 압박감을 준다. 글쓰기 수업에 갔다. 계획은 열두 시에 수업이 끝나면 가든 레스토랑까지 걸어가서 혼자 글을 쓰는 것이다. 처음 2주 동안에는 전혀 글이 써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내 일정을 포기하고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오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점심을 먹으러 다니던 학생들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면 아무 어려움 없이 글을 쓸 수 있다.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있을 나 자신과의 데이트 시간을 표시한다. 혼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읽는 것

자기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글쓰기 모임에서 나는 수강생들에게 글을 쓰게 한 다음 즉시 그것을 전체에게 또는 바로 옆 사람에게 읽어주게 한다.

소리 내어 읽지 않으면 그 글은 공책 안에서 상처처럼 부패하게 된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도 부패를 막을 수 있다. 처음에는 남에게 자기 글을 읽어주는 것이 두려울 것이다. 목소리는 떨리고 심장은 뛰고 숨은 가빠진다. 어떤 수업시간에는 그것을 농담삼아 호흡 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병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할 거 없다.

 

 

처음 느낌 그대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든 상관없이 곧바로 글쓰기로 펼쳐보여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고, 그것을 조작하려고 했다. 관념만 가지고 맹목적으로 밀어붙인 셈이다. 글이 글을 쓰게 해야지,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글을 쓰려고 하면 안 된다.

 

 

달리기

사람들은 글쓰기를 하러 왔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글을 쓰고 싶다면 정착해서 꾸준히 써야 한다. 모임에 들어갔을 때 내가 달리기를 당장 잘 못하더라도 입 다물고 그냥 뛰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글쓰기는 비밀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스포츠다. 달리기 선수는 먼저 달리고 글을 쓰라. 작가는 먼저 글을 쓰고 달리기를 해라.

 

 

나는 작가다.

매일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자신에게 말하라. “나는 작가다.” 그냥 씨앗 하나를 심어놓았다고 생각하자.

 

 

주니어 올림픽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결국 적응한다. 당신 스스로 달리거나 쓰거나 앉아야 한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항상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얘기를 써라. 한나절을 쓰든 밤을 새워 쓰든 그 얘기를 전부 쓰겠다는 각오로 앉아라.

 

 

글에서 빠져나오기

매일 글쓰기를 마친 후에는 거리를 쏘다니며 상점들을 구경하거나, 뜨거운 물로 오랫동안 목욕을 하거나, 물 한 잔을 가득 따라서 내가 한 일을 씻어내듯 죽 들이켰다. 글쓰기를 마치자마자 달리기나 자전거타기, 수영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을 특히 효과가 좋았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전에 먼저 글을 쓰라. 사실,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말고 항상 써야 한다. 당신이 아는 작가와 연락하며 지내라. 그 사람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면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하고 싶다고 하자. 책을 출간한 작가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 글을 쓰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으로 넉넉하다. 그러니 혼자서 외톨이로 지내지 말고 글쓰기 강좌에 참가하며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친해져라.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글 쓰는 생활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그냥 입 다물고 쓰면 된다.

아는 것과 실제의 삶을 일치시켜야 한다.

‘나는’으로 시작해서 현재형 문장을 쓴다.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자신 안에서 나오는 대로 적으면 된다. 작가로서 당신이 할 일은 그냥 글을 쓰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꿈을 글로 풀어쓰는 것은 마음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좋은 연습이 된다.

내가 글을 쓰는 건 스스로 글쓰기를 원하고 세상에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간절한 열망

지독한 감기와 함께 잠에서 깼다. 벌써 나흘째다. 마침내 침대에서 구르듯 일어나 몸을 이끌고 분홍색 면 티셔츠를 입고 갈리스티오 카페로 글을 쓰러 갔다. 주저하지 말고 당신이 보는 것을 말하라.

 

 

왜냐하면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작가는 글을 쓸 때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냥 서술하면 된다. ‘이유’가 아니라 ‘무엇’을 말해야 하는 거다.

글쓰기는 자신을 주장하는 행위이므로 접속사 없이 문장 위에 다음 문장을 이어서 쓰면 된다.

 

 

아주 그리고 정말

‘아주’는 단어의 힘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아주 훌륭했다.” “그것은 훌륭했다.”가 더 당당하고 흔하지 않은 문장이다.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핵심을 보여준다.

 

 

고난의 첫해

글쓰기 모임에 나가거나 뜻이 맞는 동료와 카페에 모여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족이 글 쓰는 것을 비난해도, 주머니에 돈이 다 떨어져도,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도, 관절염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 동료

글쓰기는 민주적이다. 거기에는 계급이 없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사람도 다음날 일어나서 다른 작품을 써야 한다. 그녀는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했고 나는 15년 전에 시작했다.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의 글에 생생함이 살아있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옆에서 열심히 손을 움직이며 글을 써내려가는 사람이다. 그냥 함께 글을 쓸 동료를 구하고 열심히 쓰면 된다.

 

 

타오르는 열정

내 인생에서 최초로 무언가에 열광한 이 시기가 나의 전성기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글을 계속 쓰자 점점 결심이 굳어졌다. 이제, 스스로 글이 마음에 들든 아니든 출판을 하든 말든 글쓰기는 내 삶의 토대이고 기본적인 실천행위다.

정말로 사랑했던 것, 충일감과 완전함을 느꼈던 활동에 대해 써보자. ( 걸스카읏트 공기놀이 네잎크러바 찾기, 구정 뜨개질, 퀼트, 사이트에 사진과 글 올리기)

 

 

의무감을 즐겨라.

당신의 글이 분노와 복수심, 시기심, 증오로 가득 차 있다면, 이제 즐거움을 주는 소재로 글을 시작해보라.

아무리 싫더라도 일단 쓰기 시작한 원고를 끝내야 한다. 그게 옳다. 그런 각오를 해야 강한 의지를 갖추고 시작할 수 있다. 아무거나 대충 쓰다가 그만두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독자들도 똑같이 좋아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마라. 천천히 부드럽게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설명하라.

 

 

경마

글을 쓸 때, 마음속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열린다. 나는 그 길에서 나를 부르는 단어들을 찾아간다. 글쓰기를 배우는 건 마법의 힘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누고도 그 힘을 당신에게 전해줄 수 없다.

경마장을 나오면서 복권을 2달러에 샀지만, 아무것도 당첨되지 않았다. 이런 게 인생이다. 빈손으로 시작해서 빈손으로 끝나는 것, 이것이 당신이 매번 작가로서 배우게 될 오래된 진리다.

셀러리를 한 입 베어보라. 어떤 느낌이 드는 지 강렬한 단어를 표현하라. 맛있다, 짜다, 좋다는 안 된다. 가만히 앉아서 구체적인 낱말이 떠오르기를 기다려라. 이미지가 있는 구체적인 명사가 떠오르도록 몰입하라.

글쓰기는 시각예술이다. 당신이 쓴 글에서 그림이 떠오르는지 확인해 보라.

 

 

성공에 대하여

처음 시를 썼을 때, 나는 그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완전함과 생동감을 느꼈다. 나는 완전했다. 스스로 뭔가를 창조했고 다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글을 쓸 때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공하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내가 유명해지고 나면, 그때는….” “내가 이 책을 다 쓰고 나면, 그때는….” “내 책이 출판되면, 그때는….”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로 그대로 두고 그 순간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만 얻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장작을 패고 있다면 온전히 장작 패는 일에 몰두해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있다면 양치질에만, 걷고 있다면 걷기에만 몰두해야 한다.

책을 쓸 때면, 언제고 이 작업이 끝나기만을 갈망한다. 책을 다 쓰고 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또 다른 책을 쓰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냥 쓰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에서 얻는 미덕이다. 성공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하얀 궁전

보모님은 이미 그분들의 인생을 살았고, 지금 중요한 건 ‘내 인생’이다. 내가 진실을 말한 대가로 비난을 받는다면 그건 뭔가 잘못된 일이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주위에서 진실을 말하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오히려 말하고 나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지난 3월에는 파리의 한 카페에 앉아서 오전 내내 글을 썼다. 인간적인 자아가 징징거렸다. “ 아, 안 돼. 나탈리. 이거 출판하지 않을 거지?” 그러자 나의 작가적 자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속삭였다. 당연히 출판해야지. 무어가 문제야? “ 맞다. 나는 늘 나의 작가적 자아에 충실할 것이다. 그 자아는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다. (민재 이야기)

 

 

경계를 넘어서

7년 동안은 하루 온종일 주말도 없이 책을 쓰는 데에만 몰두했다. 잠자리에 일찍들고 일찍 일어났다. 음식도 잘 먹고 옷도 차분한 색깔로 입고 사람들도 전혀 만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봤다면 권태로움을 느꼈겠지만, 나의 내면에는 야성이 가득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마지막 페이지를 타자기에서 빼내면서……. 여자들과 사귀고 싶다였다. 만물이 공존하는 곳, 말이나 새, 베트남인 중국인 동성애자, 돌멩이 심지어 극우주의자들과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양성의 세계에 흔쾌히 들어가야 한다. 경계가 없는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 글쓰기 훈련이다.

수강생들에게 자신이 보거나 이야기하기 두려운 주제들을 적어보라고 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 그땐 미처 몰랐지만 나 자신의 다른 모습을 찾으려고 레즈비언 바에 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곳은 야성적 적이고 이국적이었다. 내가 찾은 건 표준 세계 밖에서 자기만의 삶을 선택한 여성들이었다. 이 사회에서 작가가 된다는 역시 어찌 보면 표준 세계 밖의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많은 작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거나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글쓰기는 자유의 길로 떠나는 위대한 여정이다. 남들의 눈에는 헐렁한 옷을 입고 밋밋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이며 글을 쓰는 모습이 지루하게 보이겠지만, 바로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파리 카페 순례 (P 208~209)

 

 

 

빛과 어둠

반 고흐는 서른일곱 살에 빈털터리 정신병자로 죽었다. 나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그의 작품을 보려고 빗속에서 2시간이나 줄을 서 있었다. 3월 초라서 손이 점점 시려 왔다. 고흐가 이 장면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반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그림을 한 점도 팔지 않았다. 가난한 정신병자로 생을 마감했지만, 빛과 색에 대해 언제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연히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무덤을 발견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지만, 나란히 묻혀 있었다 나는 그 옆의 초록색 벤치에 앉았다. 내가 이곳에 왔었다는 표시로 그들의 무덤 옆에 작은 돌멩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거기에 그냥 앉아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녀와 사르트르는 매일 아침 카페 ‘레 되마고’에서 만나 두 시간씩 글을 썼다고 한다.

‘이제 마흔 살이 됐구나. 쉰 살이 될 때까지 나는 무얼 해야 할까?’ 곧바로 답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줘야 하겠지.’

‘책은 안 쓰고?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다시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 것들도 좋지. 하지만, 그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주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일주일이나 며칠 동안 여행했던 도시나 마을에 관해 써보라. 자동차여행에 관해, 기차에 대해, 당신이 묵은 호텔에 대해 써보라. 그동안의 여행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하자.

 

 

글짓기 교사

앨런 긴스버그 왈 ‘한 줄의 멋진 시를 쓰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지루한 시를 길게 쓰라. 그러면 사람들이 잠들 것이다.

살아있는 교사는 살아있는 교실을 만든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도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에 집중하지 않은 채 애매하고 불명확하게 쓰면 독자를 잃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것, 자신과 연관된 것,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

자, 이제 글을 써내려가라. 쓰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나무에 키스를 하는 일이 유치하다고? 유치하지 않은 게 뭐가 있는가? 글쓰기는 가장 유치한 일이다. 그런 유치함을 잃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을 때 당신은 이 길을 오랫동안 글을 수 있다.

 

 

세밀한 묘사

30년 전의 일을 쓰더라도 온전히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세밀한 묘사다. ‘소녀는 예뻤다.’라고 하지 마라. ‘ 그 소녀는 입술이 붉고 이가 하얗다. 콧잔등에 주근깨가 있고 눈은 라일락 같았다.’ 작가는 눈 입술 턱을 세밀하게 묘사할 뿐 아무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멋진 글들은 원래의 세부묘사에 충실하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놓고, 좋아하는 것들에 관한 글을 쓰다가 그것들을 끼워 넣어 보라. 그러면 글이 더 탄탄해질 뿐만 아니라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사랑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글에 긴장감도 더해진다.

 

 

추상적으로 쓸 권리

추상적인 문장을 쓸 권리도 쟁취해야 한다. 원래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도약하거나 한 걸음 물러나려고 추상적인 문장을 써도 괜찮다. 세부묘사 서른여섯 문장이 단 하나의 추상적인 문장과 맞먹는다.

 

 

지체와 기다림

지체와 기다림에는 차이가 있다. 지체는 글쓰기를 미루는 것이다. 내일이 현재라는 생각으로 삶의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방식이다. 지체하지 마라. 지금 쓰라. 기다림은 내용이 꽉 차 있는 상태다. 어쩌면 기다림보다는 ‘충만함’이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는 산책을 한다. 글쓰기로 가득 찬 산책이다. 지체는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작아지게 한다.

 

 

동사는 놀랍다.

동사의 함은 놀랍다. 문장에 힘을 준다. 동사는 행동이다. 동사 없는 문장을 생각해보라.

과거형마저도 최대한 현재형으로 쓰려고 했다 그러자 글에 생동감이 생겼다. ‘가버렸었다’ ‘가버린 후였다.’ 그냥 ‘갔다.’ 가능한 동사를 간략하게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작가에게 갈 길을 안내해주는 정확한 지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누구나 혼자 길을 가야 한다.

 

 

계속 쓴다는 것

“흠, 나는 계속해서 책을 쓰게 될 거야. 그건 분명해. 문제는 글을 쓰는 동안 어떻게 생계를 해결하느냐 하는 거지.”

자, 이제 다들 이 이야기의 교훈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쓰라는 얘기다. 그 무엇도 변명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실패에 대하여

‘걱정하지 마, 나탈리. 네가 완전히 실패해도 좋다고 허락할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책을 쓸 수도 있는 거잖아. 자유롭게 마음대로 써봐.’ 자기 자신에게 실패할 권리를 부여하라. 자신과 타인들의 기대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보자. 글을 쓸 때 자기 자신에 대해 연민을 가져야 한다. 실패는 없다.

 

 

게으름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끝내던 무렵의 봄에 나는 빈털터리였다. 학교 수업이 3시에 끝나면 집까지 차를 몰고 가서 공책을 들고 곧바로 갈리스티오 카페로 갔다. 카페에 도착해서는 핫초콜릿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서 공책을 열며 조용히 말했다. “시작.” 그리고 2시간 동안 썼다.

스트레스는 세상과 단절하게 하고 호흡을 잊어리게 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내게는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일에 대한 책임감과 글을 쓰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강박감을 느껴다.

스트레스는 사람을 무지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일이 긴급상황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긴급한 건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누워서 쉬는 게 더 낫다.

작가들은 대개 게으른 성향이 있다. 충분히 이용하자. 소파는 기분 좋은 자리다. 한창 일을 하다가 온 중일 거기에 누워보라. 그건 마치 식초와 식용유를 섞어 흔든 다음 식초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식용유가 다시 맑아지듯 당신도 맑아질 것이다. 글은 바로 그런 온전한 상태에서 써야 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게으름이다.

글쓰기는 우리 삶의 맨 밑바닥이다. 충분히 빈둥거리고 나면 쓰고 싶은 욕구가 물 위로 물거품처럼, 죽은 물고기처럼 떠오를 것이다.

 

 

작품 속에 갇히지 마라.

한 작품을 끝냈다면 그 작품은 이제 작가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계속해서 다른 것을 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