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류창희 2009. 10. 3. 15:17

읽은 도서명 ;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저  자 ; 피에르 쌍소
출판사 ; 현대신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어화 달공 이제가면 언제 오나 어화달공“
상두꾼 소리에 맞춰 상여가 나갈 때, 두 걸음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못내 성큼 떠나지 못하는 이승이 있고, 차마 보내지 못하는 저승길의 발걸음이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결국 삶의 마감 선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니던가? 인생의 마감 선을 향해 바쁘게 항공으로 고속도로로 새마을호로 질주할 것까지는 무엇이 그리 바쁘던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름 같이 둥둥 뜬구름의 삶이 아기자기 즐거울 리는 없을 것이다.
학생시절 혹은 젊은 시절. 제도권에서 시간에 맞게 몸 크기에 맞게 한 걸음씩 늦추지 않아야 하는 시기가 주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아(自我)가 형성되고 자신이 가야 할 이정표(里程標)가 세워진 듯 하면 모든 기능성에서 내려, 한 포기의 풀이 자라는 과정을 살펴도 보고, 피어나는 들꽃을 즐겨도 보고, 풀벌레소리도 들으며 산책하고 도보하며 호젓한 오솔길로 접어들어, 절대적인 소요(逍遙)의 경지를 만끽 해 보는 여유 또한 삶의 꽃이 아니겠는가?
저자가 말하는 ‘느림’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모든 계절을 아주 천천히 경건하고 주의 깊게 느껴가면서 살 것을 이야기한다.

책의 차례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행하는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고급스런 권태, 꿈꾸기, 기다리기, 내 마음의 시골고향, 글쓰기, 포도주 한잔의 지혜, 모데라토 칸타빌레.
두 번째는 리듬의 교체.
세 번째는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로 문화적 흥분, 뒤늦은 도시계획을 위해, 분주하기 말기,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 하루의 탄생으로 마치고 있다. 목차만 봐도 거의 잡힐 듯한 처세술로 주위에서 흔히 접하고 이론으로 뻔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도 밑줄을 그어가며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구 절절 가슴에 닿는 것은 간절하게 내가 추구하는 삶이지 않았을까? 하는 자신을 뒤돌아보는 ‘쉼터’가 되었다.
젊은 날. 바쁘게 살아온 댓가로 자유로운 실뭉치를 조금씩 풀어가며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누구나 공평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많은 과제들에 시달리는 부림을 당하여 앞으로만 질주하느라고 소홀했던, 잃어 버렸던 본연의 마음을 찾아보는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책에서 덤을 톡톡히 얻은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부분, 시대에 맞지 않는 지나간 낡은 시간의 한 부분마다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 있었던 자리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다. 결국은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의 주인공이 되는 정체성(正體性)을 찾는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되는 일들을 움켜잡고, 분주한 삶 속으로 빠져들어 허우적대는 것이 나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내 팔자가 내게 운명지어 준 리듬에 맞추어, 인류에게 똑 같이 부여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고 외치며 나만의 정신적인 공간을 마련할 일이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 방랑시인 김삿갓이 누렸던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정신을 위해 시골길을 거닐며, 때론, 혼자서 논쟁을 벌이고 이의를 제기하고 추리하며 걷는 산책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 자와는 다를 것이다. 타박타박 타박네가 되어 봄들을 가을 들녘을 호젓하게 걷는 것은 홀가분한 걸음걸이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이 베어 있어 사색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희미한 불빛이 우리의 길을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 기다림은 있는 정성과 힘을 다하고 난 다음, 자신을 맡겨 기다리며 쉬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학생의 기분으로 배움의 공간에 적을 두고, 내가 아직도 빛을 흡수할 수 있고, 그 빛의 힘에 의해 더욱 자랄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도전하고 시작하는 것만큼의 기다리는 자세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농부들이 논밭의 잡풀이 마구 자라지 못하도록 허리가 휘어지도록 김을 매듯, 우리의 마음에 잡생각이 깃들지 않도록, 자신을 성찰하고 겸손해질 수 있도록 마음의 밭을 가꾸듯, 이 땅에 사는 동안 내내 ‘게으름 피우지 않기’ 위해서 삶을 가꾸는 글 쓰기를 권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재능을 과시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참모습에 더 접근하기 위함임이 중요하다.
일종의 의식(儀式)같은 포도주 한잔의 지혜로, 결혼을 하게될지, 아니면 결혼식에 초대해 줄지도 모르는 자녀를 위해 가장(家長)이 포도주를 준비하는 詩情어린 준비의 지혜를 이야기한다. 포도주를 보관하고 정돈하는 지하창고는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놋주발을 닦으며, 이부자리를 손질하며, 가족을 기다리는 마음의 조촐함. 비록 궁핍한 삶일지라도 몸에 배인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닦는 행위가 아닐까.
지금. 나는 원했든 아니든 간에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도 더 가지고 싶은 목록을 적으라면 어쩜 노트 한 권으로도 모자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가지는 일보다는 해야 할 일들을 자진해서 찾을 것을 권하고 있다. 적은 것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술은 자신의 절제의지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소박한 기쁨을 자주 만들어내는 것이 으뜸이라는데 행복의 본질을 꼭꼭 새겨 작은 행복을 모를 일이다.
목표를 향해 곧장 달리기보다는 기분 좋게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더 좋아하며 누군가에게 금방 다가서기보다는, 다가가기 전에 잠깐 그 사람 앞에 멈춰 서서 바라보는 리듬의 교체를 막간의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자투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투리를 아낀다. 잠깐 잠깐의 남은 시간과 공간을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쓰여질 것을 바란다.
세속의 말로 머리가 총명하지 못하면 손발이 바쁘다고 했던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흉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흔한 처세술로 읽히지 않고, 나에게 한 권의 지침서가 됨은 뒤돌아 볼만큼의 나이가 들었다는 유세쯤으로 여겨본다.
순발력의 문제다. 나는 손이 순발력이 있는 편이다. 야채나 과일을 다루는 칼 솜씨, 바느질, 뜨개질, 콩나물발 따기, 밤 깎기 등이 제법 속도가 붙는다. 그에 비해 걸음걸이의 습관도 있겠지만 발은 조금 서두르기라도 할라치면 발끼리 엉겨 넘어지기 일쑤다. 그 때문일까? 한발한발 걸어 이루는 밟을 리(履)의 이력을 보면 보통 표준사람보다 2-30년은 늦다. 그러나 결코 늦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떤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할 때, 나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보다는 ‘지금 나이가…’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살면서 겪어보고, 내 색깔인 것을 인식한 다음. 모시나 삼베의 자투리 홑 천으로 만드는 깨끼솔기의 마름질처럼, 뒤로 몇 땀 갔다가 앞으로 꿰매는, 그리고 다시 뒤로 몇 땀 가서 매듭을 맺지 않고 마무리한 조각 보(褓)처럼 살고 싶다.
어차피 기능성의 재봉틀 질주가 아니라면, 조금 속도가 늦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한 땀씩 왔다갔다하는 손길이 더 꼼꼼하고 운치 있는 모양새가 아니던가. ‘느림의 철학’은 천성적으로 행동이 굼뜨거나 게으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작가 피에르 쌍소가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처인 이발소를 예를 들었듯, 요즘처럼 온 국민이 바쁘게만 외치며 사는 이들에게 정박지(碇泊地) 구실을 충실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