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김열규교수의 열정적 책읽기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독서
김열규, 2008
읽기는 나를 위해서 세계 속으로 길을 안내해준다. 읽기는 아직 잘 모르는 삶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나침반이 되고 이정표가 된다.
우리 집의 큰 손자였던 나는 어머니의 아들보다는 할머니의 아들로 자랐다.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순전히 옛이야기의 재미를 미리 귀띔해주는 소리였다. 그건 음악 같은 여운을 풍기기도 했다.
시, 그중에서도 여음에 남달리 애태우고 마음 쓰면서 깊이 젖어들게 된 단초는 바로 할머니의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에 있었다. 듣기와 읽기보다 먼저였다.
‘ㄹ'은 유음이라고 해서 물 흐르는 듯한 소리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듯한 움직임인데 구슬이 구르는 소리가 겹쳐지면, 그 아니 아름답겠는가! (류 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흔히 ‘서사체(敍事體)’라 번역되는 ‘내러티브 narrative' 동화 신화 전설 소설 기사 역사적인 사건이나 일상적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 이들이 모두 내러티브이다. 그중에도 꼬마들을 위한 내러티브로는 단연 동화가 으뜸이다. 거기에는 정서도 들어 있었고 인식도 들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할머니의 동화는 네다섯 가지를 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꼴로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곤 했다.
나의 듣기는 통째로 외우는 것이었다.
내 감각으로 남김없이 그 이야기를 집어삼키는 일이었다.
(박영희 왈: 몇 번만 읽으면, 저절로 외워져서 다른 아이들과 다른 자신이 싫어 매일 외워진 걸 잊어버리려고 날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었다.
타고난 지적인 호기심 천재성 천부적인 두뇌에 경배 - 이어령 이규태 김열규 최일남 등등)
한의 정서에 눈뜨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던 할머니의 목소리, 언문 제문을 읊조리시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둘은 나의 첫 고전이다, 영원한 고전이다. 내 귀에 들려오던 그분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내게 글이며, 책이며, 문학은 없었을 것이다.
낭독 ‘마음을 읽는다.’ 이는 외관으로는 감지되지 않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대방의 속내를 알아차린다는 의미.
당시 내게 내용은 둘째였다. 글자 하나하나가 고유의 소리를 가진 것이 신통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읽는 것, 그 자체에 홀려 있었던 것이다.
읽기를 하면서 열린 나의 눈! 그건 단순히 개안(開眼)이 아니라 점안(點眼)이라고 하는 게 마땅했다. 어느 화가가 벽에 용을 그리고는, 마침내 눈을 그려 넣었더니, 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그 기막힌 이야기! 나는 글의 점안으로 어린 용이 되었다. 언제 하늘로 날아오를 지 기약은 없어도 글과 책은 내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소리 내어 읽기- 나의 목소리는 절규되어
독본 시간이 되면 교실은 내 차지였다. 나는 거의 상대가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그야말로 ‘독야청청’했다.
“누구 읽을 사람?”
펼쳐진 책을 눈높이보다 조금 높게 추켜올린 것은 그만큼 우쭐해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뚝하고 당당하고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교과서를 읽어 나갔다. 아니, 읽는다기보다는 소리를 질렀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교실 안의 공기에 우지직 금이 가다가 드디어는 갈기갈기 찢어져 나갈 정도였으니, 그건 차라리 아우성 같은 것이었다. 나의 읽기는 절규였다. 나는 오히려 도도하기만 했다.
암송 외워 읽기-
동요나 동시는 가슴에서 울렁대고 산문은 머리에 찍히는 것이었다. 소리 내어 암송할 때 그 글들은 더는 남의 글이 아니라 내 속에서 우러난 나의 글이었다.
“외우면 내 글이 된다.”
책상은 엎드려서 책을 읽는 와독(臥讀)과 반듯하게 누어서 칙을 읽는 앙독(仰讀) 그 두 가지 ‘누워 읽기’의 전성시대가 바야흐로 지나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글자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방바닥에 내리쏟아졌다가는 위로 반사되는 전등 불빛이 책갈피에 번지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 무리를 우러르듯이 활자들을 우러른다. 느닷없이 책갈피가 작은 하늘이 된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내 방에 들여진 책상, 나만의 세상이 거기 있었다. 그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앉으면 나는 성주(城主)가 되었다.
‘약골’, 내게 따라다니던 그 꼴사나운 별명이 그럴 때면 무안해서 멀리 숨어버리곤 했다. 활기는 해일처럼 솟구치고 생기는 화산처럼 폭발했다.
8.15해방-본격화된 문학읽기
당시 ‘고리짝’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수도 없이 경매에 붙어졌다. 일본인들이 한자로 ‘行李’라고 쓰고 ‘고리’라고 읽던 것들이었다. 고리는 일종의 통 같은 것인데 위아래 두 짝으로 되어 있었다. “돋다 ‘일본말로 뭔가를 땄다거나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나중에 그 일대가 본격적인 시장거리가 되면서 ’도떼기시장 ‘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래서였다.
사람들은 고리짝 안에서 더러 책이 나오면 재수에 옴이라도 오른 듯이 패대기쳤다. 난데없이 돈벼락이 아닌, 책 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그렇게 저렇게 쏟아진 책으로 졸지에 책방이 차려졌다. 한길 건너편의 보수동 골목에 본격적으로 헌책방이 줄지어 들어서게 되었다.
읽는다는 것은 ‘아는 것’도 ‘아는 짓’도 아니었다. 그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뭔가가 되는 것. 그렇게 나만의 세상이 만들어 가는 걸 실감하곤 했다.
사람이 몸으로만 노는 게 아니란 것, 머리로도 신명나게 또 진지하게 놀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다. 그래서 ‘창작읽기’며 ‘추리읽기’는 내게 읽기의 신기원을 열어주었다.
내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고도 여기 소개하지 못한 또 다른 대목들까지 모두 떠올리며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내가 너무 초라하고 초췌해 보였다는 것 정말이지, 작품에서 얻어내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삶과 목숨은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읽기란 곧 글 속에 빠져드는 것이라는 생각,
뜨거운 마음과 마음이 오고감, 이걸 독일문학에서는 ‘친화력’이라고 한다. 친화력을 한국식으로 바꾸면, ‘정’ 또는 ‘정겨움’
철없이 일찍 눈이 내린 날, 날이 저물어갈 때 최후를 맞는다. 그가 토한 핏자국이 선명한 어느 언덕에서. 숨이 약해져 가고 의식이 몽롱해져 가는 그의 앞에 신이 나타난다.
“지금껏 네가 겪은 것, 그리고 지금 겪는 것, 그 모두가 좋으냐?”
신은 죽어가는 크눌프에게 묻는다.
“네, 좋습니다. 모두 받아들입니다.”
그 대답이 이 세상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삶이 온통 방랑이었던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을 “네”라고 받아들이다니.
두보의 시를 읽으면서 자주 입에 올리는 달관(達觀)이란 말, 다만 비창하기 그지없었다.
(저승길로 가시는 어머님, 어머님 몸에서 부르르 마지막 전율이 빠져나가며 몸서리칠 때, “어머님, 어머님, 고맙습니다. 어머님 고맙습니다.” 붙잡아 껴안고 차마 놓아 드릴 수가 없었다)
읽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 것. 가고 싶은 곳을 자주 가고, 좋아하는 과자를 많이 먹어대고, 즐기는 장난을 자주 쳐대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서가에 꽂힌 책, 책상에 놓인 책, 끼니때 밥상 옆에 놓인 책, 어린 시절 가슴에 묻은 책, 방바닥에 흩어진 책 … . 책도 차지한 자리에 따라서 신분도, 계급도 달라진다.
내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은 베갯머리 책이다. 사지를 활짝 펴고는 편안하게 누워서 읽다가 펴든 채 잠들어버려도 좋은 책.
두보읽기 - 비참한 현실, 찬란한 시심
두보에는 무엇보다 삶의 고통이, 그 아리고 쓰라림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그러기에 처절한 아픔과 함께 전해지는 비장미가 비길 데 없이 좋았다.
강촌 많은 병에 얻고자 하는 것은 다만 약뿐이니
이천한 몸이 이밖에 더 무엇을 구하리요
그의 노래에는 궁핍과 곤궁이 가득하다.
속병도 만성적으로 앓았다.
그렇다. 주태백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그는 술에 취해 달그림자를 안고 정사(情死)한 것이다. 전설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까.
여름 방학은 으레 동래 범어사에 달린, 깊은 산 속의 작은 암자에서 보내곤 했다. 거기 입산할 때면 책이라곤 달랑 릴케의 것과 독일어 사전만 들고 갔다. 그러니 릴케 읽기는 ‘입산수도’, 바로 그것이었다.
해 질 녘이면 멱 감은 몸을 바위에 실었다. 온종일 햇살이 군불을 때듯이 데워놓은 탓에 암상(巖床)에 배를 깔고 누우면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할 수 없었다. 자주 배앓이를 하던 나로서는 마치 입원치료를 받는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읽는 릴케는 알뜰살뜰한 간호사를 겸하기도 했다.
산책하듯 읽기 - 가다 말다 읽다 말다 (77세)
산책하듯이 책을 읽는다. 이제 하루 일과라고 해보아야 키보드 두드리기와 책 읽기와 산책, 그 셋이 전부이다. 그게, 나의 일일삼과 (一日三課)다.
책 읽기도 절로 한가한 길 걷기. 저절로 독서가 산책이 되어버렸다. 마감에 쫓겨서 일을 매듭지어야 하는 그런 비상시가 아니라면, 언제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분고분 아주 고분고분 걸음을 옮기듯이 이쪽 페이지에서 저쪽 페이지로 눈길을 옮긴다.
굳이 시간과 목적지를 정해놓고 걷는 건 산책이 아니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게 산책이다.
흰 구름이 드맑은 가을 하늘을 떠가듯이, 책갈피는 나만의 창공이다.
바람이 책장을 넘겨주면 거기서부터 읽으면 된다.
그런가 하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풀썩 풀밭에 주저앉아 더없이 멍해 있는 것도 산책의 재미이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가 내려놓고는 멍하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것도 산책하듯 읽기의 바른 자세이다.
머리 위에 설레는 나뭇잎들은 나더러 자기들이 지표에 던지는 그림자의 무늬를 읽으라고 속삭인다.
“저걸 상형문자처럼 읽어봐!”
숲길에서 작은 물웅덩이를 만나면 여린 바람이 잔잔한 물살을 일으키면서 나더러 권한다.“저 잔주름을 신성문자처럼 읽어봐.”
이렇듯이 산책길에는 책 말고도 하고많은 읽을거리를 만난다. 숲길은 내 서재가 되고 책꽂이가 된다.
‘바람 멱 감기’ 風浴 책장이 살랑살랑 나풀대면 나는 이내 서방정토로 들어선다. 읽다 말다, 졸다 말다,
나의 길동무로는 벅찬 책, 꼬치꼬치 따져야 하는 책은 자연히 멀어진다. 가볍되 은근하고, 마음이 놓이되 포근한 책이 이젠 단골이다. 뻐기고 우쭐대는 책들, 예컨대 베스트셀러니 뭐니 하면서 목에 힘주는 책들, 또는 문제작이니 뭐니 하면서 기세등등한 책들은 모른 척하는 게 마음 편하다.
노마의 노련 말고 사람의 노련도 있기 마련인데, 나는 그것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지칠 대로 지쳐서 항구에 돌아왔을 대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그는 중얼댄다.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멀리 나간 것뿐이야.”
다만, 그의 일에 바친 열정이 중요했을 뿐이다. 소유며 소득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들 그렇게들 위로하지!)
과정만 귀하고 결과에는 관심이 없는, 그 절대의 자유! 이것도 노인이 누리는 노련미라고 여기고 싶다.
노복(老福)! 참 좋은 말이다. ‘늙을 老’자가 붙은 말 중에서 가장 근사한 말이다. 노련은 재기 발랄하고 노숙은 완벽하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은 뭐든 좋은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니 노인이 죽는 것보다 더 자연스런 일이 또 있을까?
노인의 죽음은 탈대로 탄 불길이 절로 삭아서 꺼지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완착을 향하여- 끝이라는 것
남을 두고서 뭔가를 판단하고 의견을 말하는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그럴 땐 침묵이 제일이다.
글짓기가 창조인 것처럼 글 읽기 또한 창조이다. 우리의 읽기가 언제나 ‘창조적인 읽기’가 되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클로즈 리딩, 꼼꼼 읽기는 이른바, ‘클로즈 리딩 close reading, 이를테면 ’밀착 읽기‘
클로즈 리딩은 바싹 붙어 읽기인 동시에 ‘눈 박고 읽기’이다. 동시에 활자로는 표현되지 않은 숨은 뜻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따져 드는 읽기이기도 하다. ‘캐서 따져 읽기’도 클로즈 리딩의 조건이다.
지은이가 이 대목을 쓸 때 내쉰 숨결, 저 대목에서 토해낸 한숨, 그런 것이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느껴져야 숙독은 제구실을 하게 된다.
쾌락은 참 성가시다. 별것이 다 쾌락이란 이름, 향락이란 명분을 뒤집어쓰고는 나부대기 때문이다, 그 품종이 많은 만큼이나 그 질도 매우 별나다. 흥분과 도취가 쾌락의 알맹이인가 하면, 안정과 고요도 유락(愉樂) 이고 열락(悅樂)인 경우가 많다. 덥석 대고 날치는 게 향락인가 하면, 차분해지고 가라앉는 것이 쾌락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극과 극인데, 그 극끼리가 서로 통한다. 그래서 독서의 쾌락도 이 양단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
아우성치는 즐거움이 책 읽기에 폭포수처럼 쏟아질 수 있다. 가벼운 쾌락으로 책을 대할 수 있는가 하면 묵직한 즐거움으로 독서를 대할 수도 있다.
글 읽기는 즐거움이어야 한다. 재미가 쏠쏠해야 한다. 흥청망청해야 한다. 게임을 하듯이 - 실마리를 잡아라.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이 우리는 책을 가직 놀아야 한다. 독서삼매란 말이 있다. 책 읽기에 홀랑 넋이 빠진다는 뜻이지만 이 지경에 다다르려면 우리는 그렇게 놀 줄 알아야 한다.
재미가 먼저다. 신명이 앞서야 한다. 교양이니 지식이니 하는 그 고상한 소득은 나중 문제이다. 흥청거리는 게 독서의 제일보이다.
그런 읽기의 신명을 위해서는 책과 글의 구석구석을 대목대목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한다. 갈피마다 가지고 희롱할 줄 알아야 한다. 보물찾기하듯이 샅샅이 뒤져야 한다.
에필로그--- 책과 함께 우리가 될 그날을 위하여
지금 나로서는 ‘나와 너’라고 다정하게 손잡을 상대로는 책이 으뜸이다. 꼬박 70년, 책을 벗해온 내게 마음 터놓고 ‘우리’라고 마주 안을 상대로는 책이 단연 맨 선두이다. 책들과 나는 ‘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