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세상 읽기와 삶 읽기

류창희 2009. 10. 3. 15:56

추억의 레파토리 - 어린 마음에도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를 부르면 있지도 않은 누나 생각이 나서 코끝이 시큰했다.“뜸북뿜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를 부르다가가도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잎이 안타까웠다.

생각의 광휘- 내게 소나기처럼 쏟아졌던 한순간의 생각들은 도대체 잠깐 만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생각은 벼락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사라진다. 성호 이익 선생은 ‘질서(疾書)란 제목을 붙인 책을 여러 편 남겼다. 질서는 말 그대로 빨리 쓴다는 뜻이다. 가까운 곳에 필기도구를 놓아두고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즉시 기록으로 남겨, 여러 권의 책이 되었다. 깨달음은 섬광과 같다. 반짝 떠 올라 보석처럼 명멸하다가 순식간에 광휘를 거둔다. 이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을 어찌해야 가둘 수 있을까?

월출정을 조문함 - 진국집에는 돌아가신 스승의 체취가 늘 함께한다. 스승은 설렁탕을 드시다가 으레 주인에게 국물을 더 달라셨다. 주인이 뚝배기에 국물을 담아 내오면 반은 내 그릇에 부으시며, “공부하는 사람은 고기 국물을 많이 먹어야 해” 하셨다, 그 어지신 모습을 떠올리려 지금도 나는 자주 그 집에 간다. (너무 부럽다)

중간이 없다-이명은 저만 듣고 남은 못 듣는다. 코골기는 남은 들어도 저는 못 듣는다. 이명은 병이다. 제 병통을 장점인 줄 알고 뽐내다가 남이 안 알아준다고 난리친다. 코골기는 병은 아니다. 안 골던 사람도 피곤하면 고는 수가 있다. 그런데도 남이 저보다 먼저 알았다고 성을 낸다.

소일(消日)과 석음(惜陰) - 입만 열면 사오정(四五停) 오륙도(五六盜)를 말하는 판에,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 100세, 120세가 된다는 말은 일없이 보내야 할 시간이 30년에서 50년 또는 70년으로 늘어난다는 뜻이다. 별 준비 없이 덜컥 직장에서 밀려나거나 명퇴를 당하고 나면, 나머지 30년 또는 50년을 보낼 일이 참으로 막막하다. 평생을 모은 퇴직금을 한 번의 판단 착오로 날려버리는 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다. 말이 좋아 웰빙이고 여가활동이지 경제적 마련이 없이는 하루 세 끼 먹고 살기도 버겁다. 오래 사는 것이야 누구나 바라는 일이지만, 그것도 육체와 정신이 건강할 때 이야기다.

정약용은 《도산사숙론》에서 천하에 가르쳐서는 안 될 두 글자의 못된 말이 있으니‘소일(消日)’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이덕무도 《사소절》에서, 멀쩡한 사람이 소일하기 어려움을 말하곤 하는데, 석음(惜陰) 즉 촌음(寸陰)을 아껴 써도 시원찮을 판에 날을 보낼 궁리나 하고 있다니 이것이 무슨 불길한 말이냐고 나무랐다.

그저 소일이나 한다는 말은 다 늙어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할 의욕도 사라지고 없을 때 속으로 울면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