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김해숙(해운대 도서관)
일곱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퇴근해 오시면 늘 문밖에서 “숙아”하며 들어오셨다. 그러면 우리 사남매는 쪼르륵 달려 나가 인사를 했다. “아버지 다녀오십니까?” 나는 사남매 중 맏이도 막내도 그렇다고 엄마가 좋아하는 아들도 아닌데, 아버지는 늘 내 이름만을 부르셨다.
엄마가 저녁준비를 하는 동안 또 한 번 내 이름을 부르신다. “숙아 한 바퀴 돌러 가자” 아버지 손을 잡고 한 손엔 내 머리통만한 토마토를 들고 온 동네를 개선장군 마냥 당당하게 걷던 그 평화로운 저녁산책이 내 유년시절의 첫 기억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건 아버지는 왜 늘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오셨는지, 또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러 갈 때면 왜 꼭 내 손을 잡고 가셨는지…, 우리 가족 중 그 이유를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동생도 언니도 궁금해 하거나 따지지 않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아마도 둘째의 설음을 짐작하고 계셨었나 보다. 남동생처럼 아들도 아니고, 언니처럼 착하고 예쁘지도 않았고, 귀여운 짓만 골라하는 막내처럼 곰살궂지도 않은, 고집이 세고 눈치라고는 없는 내가 은근히 마음이 쓰이셨나보다.
나는 자라면서 내 위치에 대해 불만을 많이 가졌다. 둘째 특유의 반항이 아닌, 나름대로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
엄마는 항상 편파적인 심판관이었다. 남동생과 내가 싸울라치면 “누나가 참아야지 철없는 동생하고 싸워서 이기려 든다”며 팥쥐 엄마가 콩쥐 대하듯 하셨고, 언니와 싸우게 되면 “고집 세고 버릇없이 언니한테 대든다”고 또 똑같은 이유로 야단을 치셨다.
그래서 형제간에 싸움이 있고나면 나는 항상 억울함을 혼자 구석에 가서 삭혀야 했다. 엄마가 보이는 데서 울고 있으면, 또 눈물이 길다고 야단을 치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왜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엄마가 정말 야속했다. 낮에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들을 아버지는 보지 않아도 훤히 알고 계셨던 듯하다. 아버지만이 항상 “숙아” 하며 달래주셨던 것이다.
아버지와 동네 한 바퀴를 휑하니 돌고나면 내 마음 속의 모든 슬픔과 억울함이 또 휑하니 달아나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내게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심지를 심어주셨다.
조용히 내 안의 나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렴풋이 보이는 슬픔으로 울고 있는 한 아이와 따뜻한 아버지의 “숙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에는 부당함도 슬픔도 따뜻함도 평화로움도 모두가 공존하는 곳이며, 그 중 내가 무엇을 취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달라 질 수 있다는 진리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셈이다.
나의 아버지, 내년이면 팔순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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