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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을 깎으며

류창희 2012. 4. 2. 09:00

 

 

연필을 깎으며

 

 

  이해인

 

오랜만에
연필을 깎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깎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깎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깎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웬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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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21일

해인방에 있는 책중 200여권을 주셨다

수레로 끌고 차에 싣고와서

고유번호로 등록하여 우리 <메트로작은쌈지도서관>

장서가 되었다.

 

 

전날 '클라우디아' 생일에 받으셨다는 쿠션 연필이다

"이리와! 우리 자매잖아"

자매라는 말이 좋아 얼른 한 자루를 들고

옆에 섰다

 

 

사각사각

나는 지금, 연필을 깎는 중이다

올 한해 깎고 또 깎을 것이다

 

 

 

 

 

 

 

 

 

 

 

'논어의 君子상을 닮은 넓고 깊은 작가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라는

해인 수녀님의 응원에 힘입어

나도 감히 수녀님처럼

'쓸쓸해도 즐거운 경지' 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