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방랑건축
유럽방랑 건축 + 화
최우용 그리고 찍고 쓰다
<프랑스 편>
시적 은유로 충만하다.
여행에서 잘못된 정보는 비용과 시간 모든 면에서 치명적이다. 몇 해 전 출간된 단행본의 정보를 믿고 휴관 일을 골라서 찾아가는 실수를 한 것은 순전히 게으름 때문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국적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간혹 있다. “어디서 왔습니까?”라는 말보다는 “중국인입니까?” 또는 “곤니치와!”처럼 국적을 짐작하고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양인이 가진 아시아인에 대한 선입견, 그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이다.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은 파리 시내 대부분의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입장인지라 지친 몸을 굴려가며 오르세, 퐁피두로 옮겨다닌다.
노트르담 대성당
빅토로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는 책을 보던 프롤로가 시선을 옮겨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며 “아, 슬프도다!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 프롤로의 불길한 예감은 인쇄술(성경)이 건축술(노트르담 대성당)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이 무슨 말인가? 인쇄술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건축을 살해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것일까?
대성당은 글을 못 읽는 까막눈들에게 성경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
우리는 무미건조한 문자 ‘빛’보다는 성당의 어느 창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을 경험했을 때, 저 깊숙한 곳에 전해지는 깊은 울림을 받게 된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한 요원이 루브르 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를 보고 “저 피라미드가 마음에 드십니까?”
매우 함축적인 질문이다. 함축적이라기보다는 오만하고 자기 중심적인 질문이다. 피라미드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안목 없는 미국인이 되어버리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프랑스인에게 모욕되는 식이다.
그들이 국시로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똘레랑스’를 세계적 차원에서 충분히 발휘하여, 강탈당한 국가들의 입장과 권리를 헤아리는 현명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숭고함의 수도원, 몽생 미셸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이곳 몽생미셸에 오게 될 줄 상상이나 했었던가?
신비스런 이미지로 가득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극적인 장소, 꼭대기에 있는 성당에 들어서니 (소설 속처럼 어느 한 곳을 파보면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공간이 나올 것만 같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어설 기색이 전혀 없다.
샐러드를 죄다 덮어버리는 ‘드레싱’같은 사회일수록 문화적 다양성과 지역적 특수성이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건축에서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오직 ‘하나’을 위한 신념이 만들어 냈을 그 위대한 건축 앞에서 경외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