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유럽의 책 마을을 가다
글 사진 정찬국 / 생각의 나무
프로방스에서 이곳까지 온 좌판 위에서 거의 잊힌 미술사가의 라파엘로 전기를 집어 들었다. 명판 몇 점을 곁들인 1869년 판이다. 몇 장을 넘기자 마른 미색 꽃 한 송이가 떨어진다. 잎이 나비 날개처럼 접히고 꽃받침도 다소곳하다. 향기로운 주검이다. 140년의 세월을 넘어 그 책의 임자가 전해준 그 손길과 마음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망연자실했다.
책을 살리고 만드는, 책방과 출판사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럽 여러 나라에서 책 마을이 속속 늘어나고 있다. 유럽연합이 점점 커지면서 대도시에서 책방과 출판사가 크게 줄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버티던 주요 도시의 서점가도 왜소해졌다. 러시아까지 가세한 강대국 투기꾼들이 부동산을 공략하면서 우선 책방들이 희생되었다. 물론 컴퓨터와 휴대폰 등 디지털제품 가게도 책을 몰아내는 데에 한몫했다.
농촌은 농촌대로 작은 마을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도시에서라면 다른 것이 빈 것을 채우지만, 농촌에서는 이마저 여의치 못하다.
우리 일상의 곁에서 ‘작고 아름다운 것’이던 전통적인 서점은 이제 풍전등화 밑에 놓여 있다.
오래된 마을 공동체를 구질구질하게 여기고, 그곳에 살던 사람까지 쫓아내며, 아파트 지상주의에 눈이 먼 사람들이 지도를 마음대로 바꾸면서, 신도시를 짓고 있다. 또 그런 신도시에 발맞춘 거대한 출판도시도 탄생했다.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다. 책에 대한 사람은 내리사랑처럼 자연스럽다.
스위스
책과 술, 낭만이 어우러지다.
쥬네브의 플랭팔레- 예기치 못한 아늑한 사유의 공간 – 레만 호수는 ‘사진발을 잘 받으니’ 그곳을 끼고 있는 쥬네브(제네바) 또한 ‘포토제닉’ 하다. 백조와 오리, 아이들과 노인, 분주히 오가는 남녀, 분수와 해안의 보행로 모두 꽤 서정적이다.
양복 입은 신사가 가랑이 사이에 가방을 끼고서 책을 뒤적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성당 앞 계단에서 잠시 볕이 난 틈을 타 책에 얼굴을 묻고 있는 여인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땅에 기대어 부지런하고 소박하게 살던 스위스 농업의 실상을 엿볼 수 있어 좋았다.
과자나 화장품을 포장한 듯한 분위기를 넘어서 란제리처럼 말초적인 스타일도 서슴지 않는 우리네 책은 어디까지 독자에게 아첨할지 두고 볼 일이다.
색동옷을 입은 철부지처럼 알록달록한 책들이 언제쯤 성숙한 행색이 될까. 부대찌개가 상징하듯 얼얼한 잡탕 취미는 언제쯤 자연의 맛으로 되돌아갈까. 스위스 친구가 우리네 정서를 빗대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게”라고 농담을 즐기듯 시집은 시집답고 고전이 고전다운 제 모양을 갖출 날은 언제일까.
프랑스
어디든 달려가는 책의 수호신
주말에 일하지 않는 택시…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중요한 행사는 주말에 열어놓고 막상 주말에 대중교통을 운행하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는 전화는 부서지고 녹이 슬었다.
길바닥에 펼쳐진 책 상자 속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 소설가 쥘리에트 모리오가 지은 명성황후의 일대기 《운현궁》이 성큼 눈에 띄었다.
도서관에서 미리 알고 가서 책을 신청해 보는 것과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가 눈앞에서 발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책과 더불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택한 그들은 분명 책의 수호신이다. 큰 욕심 없이 그저 노잣돈이 된다면 어디고 기꺼이 달려가 귀한 소식을 전할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침내 날이 저물고, 그들이 삼삼오오 털털대는 차를 몰고 모두 떠나버릴 때까지 시커먼 대들보 밑에 주저앉아 있었다.
오드의 몽톨리외- 중세의 순례자처럼 고즈넉한 풍경을 거닐다.-
절판된 중고 본이 신간보다 고가로 유통되는 일이 허다하다. 좋은 책은 분명 갈수록 가치가 오른다. 우리나라에서 책값은 얼마던가? 아니, 수박 한 통은 얼마더라? 등심 1인분이 얼마인가? 운동화 한 짝에도 7~8만 원은 된다. 그렇다면 우리 현실에서 책은 헌 신발짝 값만도 못하다. 중고 서적은 대체로 무게로 저울에 달아 유통된다. 출판인이나 저자 편에서는 국민 수준이 낮다고 하고, 국민은 책이 제값을 못한다고 의심한다. 수많은 시간과 지성을 쏟은 저자나 역자의 책이든, 시정잡배가 대필시켜 쓴 책이든 종잇값이나 쪽수로서 정가를 맞춘다. 지성과 정신노동의 가치를 이렇게 경시한다.
책방 주인이 반드시 독서광은 아니지만 바쁜 파리 생활에서는 꿈도 꾸기 어렵지만, 생활 리듬이 느려 서점 주인이 아마추어 작가인 경우가 적지 않다. 정말 책을 사랑하다 보면 글에 연정을 품게 된다.
부르고뉴의 퀴즈리
거대한 책으로 변한 동화 같은 마을
‘책 마을’ 퀴즈리의 초입은 꽤 동화적이다. 거대한 아치 대신 책을 조형물로 세워 그 책갈피 사이로 빨려드는 효과를 연출했다. 주 진입로 샛길마다 책을 수북이 올린 좌판이 즐비하다. 말하자면, 마을 입구는 대성당처럼 익랑(翼廊)처럼 펼쳐진다.
선 채로 하염없이 독서삼매에 빠진 할아버지도 보기 좋았다.
서점 앞에는 몇 집 건너씩 벤치가 있다. 쉬엄쉬엄 보라는 배려였다. 궁둥이를 마주치며 만난 붉은 저고리 차림의 멋쟁이 노신사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그는 마콩 대학 고고학 교수로 주변의 여러 고대 유적발굴에 참여했으나 지금은 은퇴했다고 한다. 집에 쌓인 책과 자료를 주체할 수 없고, 바람도 쐴 겸 해서 주말이면 책을 내다 팔고 또 찾기도 하며 즐긴다고 했다.
마을 가운데 길은 ‘그랑 뤼(대로)’ 라고 하지만 이름만 그럴 뿐 차가 다닐 수 없다. 이 길가로 ‘푸줏간’, ‘문고판’, ‘작은 행상’이라는 친근한 이름의 서점들이 골목 깊숙한 곳에서 손님을 끌어들이려 익살을 부린다.
한나절 동안 다른 서점들을 둘러보고 온 내게 부르동은 신바람 난 표정으로 “자기 서점에 없으면 세상에 없다”고 으스대듯 에멜 부르다레가 1904년 조선을 탐사하며 기록했던 《조선에서》 《조선 여인들》이었다. 이 뜻밖의 수확은 하루의 피로를 한순간에 몰아내는 돗했다.
책 마을 서점이 인터넷 서점과 공존하는 데는 전략이 필요하다. 부르동은 계산기도 없이 연필로 계산한다. 카드 결제가 되진 않는 점, 그 대신 흥정하는 재미와 선심을 쓰는 호기, 여러 권을 구입 했을 때 한 권쯤 얹어주는 인심…. 이런 것들이 제도의 강박에서 풀려나가 무섭게 되살아나는 인간적 교감이 아닐까.
비에의 몽모리옹
너무나 화려하고 고상하지만…
책 박물관처럼 나름대로 새로운 개념의 문화 공간을 갖추고, 낡은 건물을 현대식 디자인을 가미해 보수하고 서점과 공방은 해마다 늘어났다. 서점은 열한 곳, 예술, 공예 관련 공방은 무려 열여덟 곳. 사실 이곳이 다른 집보다 수강생이 많은 편이다. 그런데 이렇게 책방보다 훨씬 많은 공방은 말이 많은 공적 자금의 결과이기도 했다. 방학 때는 학생, 학기 중에는 주부들이 수강생이다.
기본적 문학 행위란 글쓰기가 아니라 ‘출판이며 인쇄하고 독자가 구매하는 행위’. 적어도 프랑스에서의 최근 통계를 보면 어림잡아 500권의 원고 중 두어 권만이 소설로 출간된다. 이렇게 문학은 수많은 사산아를 쏟아낸다. 문학적으로 낙태하거나 유기되는 원고는 너무 많고, 문단에 선을 보이지 못한 채 120대 미혼모가 낳은 아이처럼 버려지는 ‘옥고(玉稿)’도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문학이 산업화하면 할수록 이런 비극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유기되는 작품을 위한 ‘원고 복지회’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다른 집이나 기관에서 살려내도록 입양이라도 보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문인 사인회나 낭송회는 물론 대담 자리도 주기적으로 마련한다. 이런 활동은 영미 세계에서는 서럽이 ‘프로모션’차원에서 진작부터 꾸준히 해오던 사업이다. 더 전향적으로 시인 극작가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함께 호흡하면서 웅변과 수사의 전통을 이어나가려고, 정거장과 공원과 선술집에서도 반짝 이벤트를 벌이는 활기 넘치는 이탈리아에 비해서 뒤늦은 감이 있다.
책 박물관에서 마을 아래쪽으로 경사진 비탈길의 한쪽 난간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그림 같은 모습’로 해바라기 삼아 책을 읽고 있었다. 분명 그냥 지나친다면 섭섭하렷다! 처녀의 이름은 클레망소, 주말에 고향 부모님을 찾은 그녀를 보고 온몸으로 책 마을을 보여주고 있으니 대단하다고 했더니 “그나마 나마저 없다면 우리 마을은 어떻게 하라고요”라고 깔깔대며 받아넘겼다.
니에브르의 라 샤리테 쉬르 루아르
도시 생활에 찌든 ‘먹물’들이여 오라- 모든 출판 시장이 파리로 집중되었던 문제가 곪아 터지기 시작했다. 출판사와 서점은 비대한 몇 곳으로 통합되었다. 군소 출판사와 서점은 속속 문을 닫아야 했다.
아직도 20년 전의 원고료와 저임금 속세서 인문학도 출신의 수많은 아까운 인재가 얼마나 많은가, 공부와 학식, 그리고 순진하게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분주한 날들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고, 대형 서점의 서가도 요즘처럼 휘황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지난날의 기억은 강바람만큼이나 매섭다. 넓은 강폭을 출렁대며 오가는 바람이 강변 화랑의 진열장에 놓인 책 그림의 페이지를 훌훌 넘겨대는 듯했다.
사진 속의 카페가 아직 남아 있을까? 입심 좋고 팔뚝에 털이 숭숭한 할아버지들을 만나 재미있는 회고담을 들을 수 있을까?
로렌의 퐁트누아 라 주트
18세기 풍경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책 - 저수지가 거울처럼 빛나는 들판 사이로 들어섰다. 건초더미가 쌓여 있고, 수레바퀴가 나뒹군다. 길가의 높은 외양간에서 금방이라도 소 한 마리가 걸어 나올 듯하다.
서점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의 문지방을 넘자마자 항상 수소문하던 책들과 잃어버린 책, 잃어버린 문인, 저자를 찾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알랭 드 피즈는 서점에 ‘소설 쓰고 있네’ 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였다.
브르타뉴의 베슈렐
마을로 관문인 렌시내에 있는 ‘밤이 새도록’ 서점
루아르의 앙비에를
책을 켜켜이 쌓아놓고 지성의 잔치를 벌인다 -
다비드는 장사가 서툴다. 그래서 조금 전, 사람들이 꽤 찾는 만화 뭉치를 들고 온 아주머니와 흥정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그는 마음이 여려 가격이 뻔한 책에도 선뜻 새 값을 매길 줄 모른다. 아직도 문학청년처럼 소설을 읽고 책을 찾아내는 일에나 익숙하다.
그는 마을의 후견인으로 ‘스타’도 물색했다. 마자린은 자전적 소설로 《꿰맨 입》으로 말문을 터트려 단김에 20만 부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미모의 작가. 특히 미테랑 전 대통령의 숨겨둔 딸로서 세간의 화제를 몰고 다닌다. 마자린은 얼마 전 서울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냉동고 영아 살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는 신작을 내놓아 지금 한창 참새 떼의 관심을 끌고 있다. 가혹한 운명에 의연하게 맞서 세속적 성공으로 복수한 당찬 여인이었다.
‘케스툴리’ 프랑스어 “너 뭐 읽니?”
베네룩스 3국
벨기에 플랑드로의 담 - 과연 비바람을 맞지 않고 플랑드로 땅을 밟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진 찍을 틈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안달이 날 만큼 비는 온종일 그치지 않았다. 그 빗줄기가 이곳으로 도던 길에 남부역 화장실에 들어선 순간, 고릴라 같은 경찰 둘이서 악을 쓰며 초라한 동남아 사내를 난폭한 몸짓으로 몰아세우고 두들기는 광경과 마주쳤다. 벨기에제 가장에 달랑거리며 붙은 귀여운 고릴라의 다른 모습이다. 이웃마을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사람의 뿌리 깊은 고질인지라, 유럽을 여행하면서 어디 이런 일을 한두 번 목격했던가.
최근 유럽에서 기차역들이 깨끗해졌다고 좋아라하는 여론이 있다. 인권보다 ‘위생’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그간 무고한 유색인이 얼마나 수모를 당했을까. 그런 식으로 깔끔한 체하는 사람들은 청소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니까 인종 청소도 서슴지 않는다.
한편 누구나 잘 알다시피 벨기에는 세게 최대의 만화 생산 소비국이다. 담에서는 책방마다 수북한 만화책을 찾기에 그만이다. 일본 만화는 풍부한데 아직 우리 만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달팽이’ 서점은 천천히 찾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분류에 무심한 채 책들을 뒤죽박죽으로 쌓아두었다. 그래서 손님은 달팽이처럼 천천히 이 책장에서 저 책장으로 먼지 구덩이를 파고 넘어야 한다. 끈기만 있다면 잡초 속에서 찔레꽃처럼 함초롬한 물건을 찾아내리라.
아니나 다를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벨기에서는 그저 감수해야 할 일상이다. 광장 모퉁이를 돌아 카페를 찾았다. 올리브 빛에 짙은 청보랏빛을 보색으로 곁들인 창틀로 테를 두른 카페에 들러 뜨끈한 국물에 빵 한 조각을 곁들였다. 브로콜리를 갈아 넣고 버터를 섞은 걸쭉한 야채수프가 일품이다.
흔히 놀라운 창작을 보여준 인간들이 그렇듯이 그의 삶은 고요했다. 빈센트는 오직 자신과의 싸움에 몰두했다. 그림으로만 다 할 수 없는, 무언가 비장하며 애절한 개성이 필요했다. 그 가치를 높이도록, 그 작품을 더욱 신화로 채색하기 쉽도록, 그래서 경매장에서 더욱 천정부지의 또 다른 신화를 ‘리드’할 수 있도록….
빈센트가 살아서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창녀의 가슴팍이라도 주무르며 침대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인터넷을 떠돌기라도 했다면, 그가 긁적거리는 낙서 조각이라도 가진 사람은 얼마나 안절부절못하면서 내일의 경매 일자를 손꼽아 기다렸을까.
빈센트만큼 우리 출판 환경을 공교롭게 증언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이상적이지만 부조리한 요구, 즉 ‘값싸고 좋은’ 이라는 그런 지표가 환상일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책 앞에서는 이런 몽상을 즐긴다.
룩셈부르크 비안덴
중세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책자 – 사람들은 저마다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로 이야기한다. 호텔과 식당과 가게에서 그 이름과 간판도 제각각이다. 이곳이 독일의 산골인지, 프랑스의 소읍인지, 아니면 플랑드르의 마을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모두 그럴듯하게 예스럽고, 어중간하다. 한곳에 오래 있던 것의 기억은 없다. 서로 절충되고 중첩되고 그럭저럭 어울려서 제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독특한 개방성이다. 그저 여러 세기 여러 양식이 중첩되었으나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다.
다닥다닥 붙은 집집이 활짝 열어젖힌 차고가 이색적이다. 그 속에는 그동안 모았던 책 상자들이 줄줄이 손님을 맞는다. 마치 부자들이 모처럼 축일을 맞아 곳간 자물쇠를 열어 굶주린 독자를 맞이하려는 모습이다.
네덜란드 헬데를란트의 브레더보르트
베르메르의 그림을 닮은 고적한 마을
‘넓은 여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을은 여기저기 연못 위로 수초가 떠다니고 그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젖어있다. 마을을 우선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걸어 다니는 이들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다. 자전거가 지우개질하듯 휑하니 지나간 배경은 붉은 벽돌담이 절반이고 그 나머지는 책들이다. 벽의 틈새에 낀 이끼도, 길가 잡초도 모두 책을 꾸미는 띠 장식처럼 피어있다.
골목길 나무상자에 담아 놓은 책은 동전을 집어넣고 가져가면 된다. 가장 원시적이고 매력적인 자판기였다.
세월이 가면, 흔히 ‘펜의 전쟁’에서 승자와 패자의 운명은 엇갈린다. 역사로서나 문체로서나 완승을 거두며 필독서가 된 사가, 비평가의 책을 과 나란히, 재중의 호기심을 노린 허구로 윤색되어 “소설 쓰고 있네!”라며 핀잔을 받은 책까지도 고가로 유통된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오리무중인 대중 취향이 승승장구하는 시대에는 치열하게 탐구하는 사람보다 입심 좋은 문인이, 칼이 아니라 펜을 놀려 싸우는 평화로운 전쟁터는 지성과 감성이 다투는 터전이다. 월계관을 쓴다.
스칸지나비아
노르웨이 - 세상에서 가장 운치 있는 책방거리 책 모양을 수놓은 엉뚱한 바이킹 털모자를 하나 사서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오자 완연한 저녁이다. 책방들이 희뿌옇게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드는 부두 테라스로 나왔다. 부두 앞 책방 옆집이 하나뿐인 호텔이다. 제일 전망 좋은 방이라며 ‘노라의 방’을 내주었다. 노라처럼 가출한 아낙네는 못 되지만 망명지에서 뒤척이는 영감처럼 서점에서 찾은 마을 역사책을 마지막까지 넘겼을 때 에필로그는 엉뚱하게 존 레논의 <이매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한국어의 의미가 울퉁불퉁 부딪쳤다.
독일
대낮에 밝혀진 붉은 등불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이다 보니 자연스레 18세기 계몽기의 독일이 떠올랐다. 당시 독서광이 출현하면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유행 덕분에 제일 많은 재미를 본 사람들은 커피 장사라고 하지 않던가.
지도와 도록과 나란히 첩첩이 쌓인 사진집들을 들춰나가자 우리 6·25전쟁에서 알몸으로 지프를 올라타고서 성기(性器)에 철모를 걸고 승리를 구가하는 미군 병사의 사진이 튀어나온다.
작센안할트의 뮐베트 - 손에 손에 우산을 받쳐 든 사람들이 한 건물 현관 앞에 모여 10주년 책 마을 행사를 하고 있다. 사흘간의 일정에서 백미는 마지막 날 저녁의 지역 문학의 밤이다. 이 지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과의 대화와 ‘오토렌레중’, 즉 저자 낭송회가 마련되었다.
영국 & 아일랜드
잉글랜드 컴브리아의 세드버그 – 요크셔 데일스에서 컴브리아로 접어드는 산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엔지미온이 영원히 잠든 ‘달의 계곡’처럼 오전인데도 짙은 안갯속에 여전히 달빛이 교교하다. 어지럽게 굽이치며 돌아내려 가는 길가의 언덕은 제주도의 오름이 바람에 실려와 이곳에 내려앉기라도 한 듯 다소곳하다.
스코틀랜드 덤프리스 앤드 갤러웨이의 윅타운 - 잊힌 세월이 말을 건넨다 - “위타운이 어떻게 북타운이 되었습니까?” “그냥, 우리가 이겼지!” 그 산파였던 안젤라 에버리트는 투사처럼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이렇게 답했다. 이제 10년이 된 책 마을이 정부에서 시행한 공모에 선정되었다는 뜻이다.
책 마을 첫 10년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이제 정말로 은퇴를 준비하느라 가게도 내놓았다.
카페를 겸한 안젤라의 서점은 여권신장파로 자리를 잡았다. 모딜리아니의 여인처럼 갸름한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이 언제나 슬픈 눈망울을 한 아프리카 소녀의 초상과 나란히 벽에 붙어 있다.
큰 십자가, 공동묘지와 납작하게 이어지는 살롱과 이발소, 빵집과 복덕방, 꽃 가게와 사진관…. 단지 보안관이 드나드는 파출소만 없다. 그 사이에 책방이 끼어들어 있다. 엷은 핑크와 스카이블루로 칸칸이 칠한 틈 사이로 예스러운 전통을 간직한 장식의 간판들이 그럭저럭 어울린다. 슈퍼마켓만 큰 네온사인을 번쩍이며 활기 있어 보일 뿐 적막강산이다.
슈퍼마켓에서 몇 집 건너에 선명한 배추벌레 빛깔로 ‘스코틀랜드에서 제일 큰 서점’이라고 써 붙인 책방이 있다. 입구에는 화재로 타다 만 책을 쌓아서 문설주로 삼았다. 애도의 기념비로 삼아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유통시키겠다는 약속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 상당수가 지원금을 받아 출간되었다. 지원금을 받고 쓴 격조 있고 현학적인 책들은 아깝게 사장돼 중고 서적 시장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일랜드 킬게니의 그레그나마나
토머스타운은 거대한 수도원 건물을 빼면 납작한 한촌이다.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거리는 황야를 연상시키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운전은 거칠기만 하다.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물으려 하니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노리고 웃어댈 때 벌어지는 입은 하나같이 검게 탄 옥수수자루 꼴이다. 어쨌든 사과로 맥주 맛을 낸 사이다도, 쌉쌀한 킬케니 생맥주도 없다. 내빼는 수밖에. 사태가 어떻든 길을 물어야 했다. 말쑥해 보이는 식당이 하나 눈에 들었다. 샌드위치 집이다. 동네의 다른 바와 이를테면 물이 다른 집이다. 제대로 된 구수한 호밀빵에 커피가 일품이다.
물건이 사람보다 더 뻐기기 시작하고 건물과 도시에서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엄청난 역전의 시대가 시작되는 모습이다.
가로나 세로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자모를 갖춘 한글 같은 어가 또 있을까? 이런 종횡무진의 문자를 갖고도 참신한 디자인을 쏟아내는 일본 출판에 비해 뒤떨어지니 부끄러울 수밖에. 조상이 준 천금 같은 선물을 이렇게 뻣뻣이 활용할 줄 모르는 후손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디자이너들은 한글로 하면 디자인이 나오니, 안 나오니 하면서 무수히 쏟아지는 도록이나 소책자에서 영문을 고집한다.
아무리 아일랜드의 개장경제가 호화이라 하더라도 “그래, 미샤야. 돈 많이 못 벌더라도 힘들 땐 고향으로 가거라. 너도 언젠가는 고향이 좋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넓은 세상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좁아도 할 일은 많단다. 아저씨 또한 벌이가 신통치 않았고 고향이 싫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더라도 내일 새벽에는 돌아갈 거란다.” 내 말을 경청하던 착한 미샤를 보내고 나니 그새 별이 총총하다. 내일은 맑기는 하려나. 이제 책 마을을 핑계로 훔쳤던 시간을 반납하고 발길을 재촉할 이유를 찾아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한다.
나도 이 글을 쓰기 전부터 책 마을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책이라는 물건을 만들고 그 원고에 생명을 주고, 그것이 세상에 살아 있도록 유통하는 사람이다.
유럽 사회는 이른바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유능한 문학, 예술 평론가를 얼마나 많이 배출했던가? 그러니 타인에게 읽기를 가르쳐주는 사만은 반드시 학벌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식도 상관없다. 옛날에 할머니들은 손자를 무릎 위에 눕혀놓고, 교재도 없이, 기억에서 울려 나오는 길고 긴 이야기를 끝없이 들여주던 이야기꾼이었고 서사시인이었다.
어느 날, 프랑스 한 산골 마을 책방에 하도 군침을 돌게 하는 책이 많아 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닫혀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위층에서 파이프를 문 턱수염 신사가 내려왔다. 그가 서점 주인인데 알고 보니 문인이었다. 그의 2층 서재는 조촐하고 소박하며, 전망도 별것 아니지만, 잡스러운 겉멋 같은 것이 끼어들 틈이 없고 그렇다고 초연한 척하거나 현학적인 멋을 부리는 분위기도 없었다. 그저 책을 즐겨 읽고 또 쓰는 사람의 방이다.
이번 기회에 책에 미친 이들은 그렇다 치고, 책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또 멀찌감치에서 액을 읽지도 않으면서도 마냥 좋아하는 그런 사람도 만났다. 카페의 아주머니나 성당의 종지기처럼…. 아무튼 마을에 있는 ‘책’도 중요하지만, 책이 있는 ‘마을’도 중요하다.
수치상으로 경제 수준과 교육수준이 대단히 높은 우리나라에서 도서문화는 참으로 쑥스럽다. 우리 사회에서 헌책방이라면 거의 ‘3D’ 업종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책이 잘되자면, 우선 책을 다루는 사람이 잘 되어야 한다. 책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만들고 전하는 모든 사람이 중시되어야 한다. 그런 날이 언제일까. 중매쟁이들이 어느 출판사 다니는 총각 아니 색싯감을 잡으려고 난리를 피우고, “책 만드는 놈한테 딸을 보내야 할 텐데…”라든가, “아무개 서점 아들 없소?” 하면서 수소문하는 부모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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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마치 내가 그곳
대도시도 아닌,
이름있는 도서관도 아닌
대형서점도 아닌,
소도시 작은 마을 도서관도 없는
좁은 오솔길 같은 책 마을을 갔다
나는 마을의 도랑이 되고 풀잎이 되었다
읽으면서 내내 '상큼'을 떠 올렸다
그리고 이런 책을 읽고 있는데
"네가 생각나" 카톡을 보냈다
그래, 이런 거야
왜?
뭐하러?
이런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
그뿐이 아니다
갈피 갈피, 저자가 찍어놓은 소박한 사진들이 좋아
한 컷 한 컷 찍었는데....
무슨 오류인지 사진이 없다
내가 지금 요일마다 종종거리며 하고 있는
강의 요청이 끊어지면
훗날......
어딘가 한적한 작은 마을에
책속의 그들처럼
.......
자그마한 여인
돋보기 코에 걸치고
골목 길 평상에 앉아
한 쪽 한 쪽 책장은 지나가는 바람이 넘겨주고
나는 해바라기하며
꼬박꼬박 졸고있을란다
그런, 한적한 풍경이 되고 싶다
누군지 모를 저자, 정찬국님은
이런 책을 쓸수 있어 참 좋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