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천국의 식사> 송혜영

류창희 2009. 10. 4. 01:47







천국의 식사


* 송혜영



  혹시 마나사로바 호수의 진줏빛 물을 한 동이쯤 마셔 내 죄가 다 씻겨진다면 모를까.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저지른 죄가 적지 않으니 천국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다. 그저 오늘 살아서 갈 수 있는 ‘유사類似천국’이나마 흔쾌히 다녀올 밖에.

  아침에 쪄 놓은 옥수수 두 자루와 포도 한 송이를 배낭에 넣는다. 물병을 챙기는 것으로 짐 꾸리기는 간단하게 끝난다. 길을 떠나려면 짐이 가벼워야하는 법. 하물며 천국 가는 행장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녀온 사람들이 한 입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 곳, 동네사람들이 천국이라 부르는 그 산꼭대기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선녀가 하강한다는 강선降仙마을을 지나간다. 극락 가는 길목, 선녀가 더러 내려오기도 하겠지. 계곡을 따라 선녀 서넛이 뽀얀 몸을 담그기에 적당한 웅덩이가 이어진다. 옷을 훌훌 벗고 선녀 흉내를 내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달리 흉물이 된 몸이 정신 차리라며 등을 민다. 계곡의 물소리를 옆구리에 끼고 천국으로 가는 울울한 산길로 접어든다.
  어둡다. 남쪽의 마지막 원시림답게 잎이 촘촘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빛을 가리고 있어서다. 아마 이런 정도의 어둠일거야. 문득 누구나 홀로 걸어가야 할 열명길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뿌옇게 떠오른다. 푸른 안개가 가득한 어둔 숲 너머에 꼭 틴바트교가 놓여있을 것 같다. 악한 자가 건너가려고하면 다리가 칼날 같이 좁아져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그 다리. 죄 지은 자가 모두 악인이라면 나는 결코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없으리라.  
그런데 숲에 가득한 이 퀴퀴하고 구수한 냄새는 뭐지. 몇 년 푹 묵혀놓은 퇴비 냄새와 비슷한 이 냄새. 혹 저승내가 이렇지 않을까. 제 명을 다 한 만물을 푹  썩혀서 거름을 만드는 곳이 저승이라면 이게 바로 저승의 냄새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명을 다한 거목들이 여기 저기 쓰러져있다. 몇 백 년을 살다가 십년 전에 간 나무, 20년 전에 누운 나무들이 차례로 땅보탬을 위한 기나 긴 절차를 밟고 있다. 이 질 좋은 거름을 가져가면 우리 마당 식구들이 환호성을 지를텐데. 안타까워하자 대신 발바닥이 반응한다. 발가락이 흡반이 되어 땅의 영양분을 빨아올린다. 혈관을 타고 시들시들한 몸에 물이 오른다.  
  제법 올라온 것 같은데 정상의 기미는 없다. 동네사람들은 뒷동산에 올라갔다 온 정도로 쉽게 얘기하던데, 도시에서 기신거리던 우리에게는 힘에 부치는 거리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작은 폭포를 낀 너럭바위에 앉아 다리쉼을 한다.
“ 꽤 먼데.”
“ 천국이 그리 호락호락 하게 나타나겠어.”
포도 씨를 뱉으며 격려의 말을 나눈다.
푸른 녹물이 낀 돌에 몇 번 미끄러지면서 어둑신한 산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꽃속에 불을 환하게 켠 것 같은 동자꽃이 길가에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천국의 전령들인가? 키 작은 관목이 촘촘한 좁은 길을 돌아서자 갑자기 눈앞이 확 밝아지면서 넓은 구릉지가 나타난다. 아마 천국도 어둔 길 헤매다보면 이렇게 느닷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일 게다.
  완만한 구릉지로 이루어진 탁 트인 정상은 온통 남보라빛의 이질풀꽃과 주황색의 동자꽃으로 뒤덮여 있다. 늘 상투성을 면치 못하는 내 풍경 묘사가 오늘따라 이렇게 한스러울 수가. 어쨌든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관에 입이 벌어진다. 작은 꽃잎들은 내 무릎 밑에서 살랑거리고 거칠 것 없는 하늘은 견줄 곳이 없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다. 마치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이곳. 바로 여기가 천국이야. 만약 천국이 있다면 틀림없이 이런 모습일거야. 천국을 그린 판타지 영화에서 주인공 로빈 윌리암스가 바로 이런 드넓은 꽃밭을 마구 뛰어 다녔잖아.
나는 자발없이 뛰어다니는 것보다 조용히 눕는 걸 택한다. 천국을 느끼기 위해 꽃밭에 몸을 누인다. 포근한 하늘을 덮은 채 눈을 감는다. 여지껏 나를 세계의 한부분으로 포용하던 중력이 잠시 손을 놓았나. 몸이 하늘로 붕 떠오른다. 두 손을 깍지 끼어 떠오르는 몸을 지그시 누른다.
천국에서 얻을 수 있다는 안식이 이런 것이겠지. 걱정도 근심도 없는 달콤한 시간은 얼마 못간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시장기다. 그제야 같이 올라온 사람도 궁금해진다.
  ‘휘’ 둘러보니 그는, 저만치 정상의 깃대를 꽂기 위해 시멘트로 마감해 놓은 곳에 조용히 앉아 있다. 그의 뒷모습에서 천국 체험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당신은 역시 웅숭깊은 사람이야. 등을 두드려주려고 가까이 가보니 웬걸. 그는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옥수수를 뜯고 있다.
‘‘후’’ 웃음이 나온다.  
천국의 깃발 아래에서, 이승의 가장 허름한 양식을 넘기는데 열중하고 있는 그의 옆구리를 찌른다.
“ 내 것은 남겨 두었겠지.”
우리는 펄럭이는 붉은 깃발 아래 나란히 앉아, 껍질이 툭툭 터져 속살이 하얗게 부풀어 올라온 찰옥수수를 달게 넘긴다.
  천국의 맛이다.


* 송혜영
hisong999@hanmail.net

휴전 협정 3년 후, 경남 울주군 언양면의 한미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입학 무렵 상경, 죽 서울서 버티다 얼마 전부터 홍천강변의 누옥에서 묵새기고 있슴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로 제도권 교육을 마감함
십수년간 소일하던 얼치기 화가 노릇을 접고 2004년 '현대수필'로 등단.



류창희   2009-09-19 16:57:13
곰배령 누구는 '천상의 화원'이라고 한다.
똑 같은 사물을 보고서
한 사람은 사진으로 찍어
눈에 보이는 만큼 (제대로 안목도 없으면서...) 담아 온다.

전에 송혜영님의 글'천국의 식사'를 보면서
천국에 다녀왔다보다 라고만 여겼다.
곰배령 입구에 刻으로 새겨 걸어놓아야 한다.

아끼는 글을 주셔서 감사~
우리 관절 상하기 전에 홍천 찰옥수수 한자루씩 싸들고
언제 한번 올라가 봅시다.

아~ 그곳은 남편들하고만 가야하나...
갑짜기 헷갈리네...
호미   2009-09-21 21:38:51 
곰배령- 곰이 누워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형상의 고개라고 하던데...
그곳에 누워 송선생님은 천국을 누리고 멋진 식사도 하셨네요.
숲에서 나는 저승의 냄새를 거의 잊고 사는 도회생활에서
달콤한 꽃내음이 폴폴나는 글을 읽으며 천국을 그리워합니다.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곳을 ...그리고 또 한곳 이땅에서의....

류창희 쌤의 넓은 발자취 덕분에 오늘 밤은
두편의 멋진 글을 읽고 혼곤한 꿈 속에서 행복할래라!
두분 쌤들 고맙습니데이.
건강하시이소.
류창희   2009-09-22 08:02:21
호미님^^
나란히 앉아 논어읽던 그 분과 함께
그곳에 올라보세요.
송혜영님과 또 다른 사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남의 생각은 흉내낼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