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그들은 누구인가
최운
아버지, 그들은 누구인가.
일찍이 한반도에서 태를 가르고, 이제는 남미 아르헨티나 땅에 가솔(家率)을 풀어, 길게는 30년까지 고단한 타국생활을 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축 처진 어깨에 유행 지난 잠바를 걸치고 터덜터덜 백구를 오가는 그들은 누구인가. 검정 볼사를 두 손에 들고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헝크린 채 온세와 아베쟈네디를 종종걸음으로 누비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거미줄 엉킨 꼬세르방에셔 미싱바늘의 귀를 찾느라 안경 낀 두 눈을 더 가늘게 뜨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찬바람 몰아치는 훼리아 바닥에서 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때로 고된 이민 생활이 모두 아버지 때문이라는 원망을 들어도 그저 허공을 향해 담배연기를 뿜으며 가슴을 다스리는 그들은 누구인가.
자식을 앞세우지 않으면 이민청도, 연방경찰서도, 자동차면허시험장도 갈 수 없는 남자. 학부모 자격으로 학교에라도 가는 날이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어 우두망찰하다 돌아와야 하는 남자. 차를 몰다가 경찰의 검문을 받으면 우선 돈부터 꺼내야 하는 남자. 그들은 환생한 심봉사들인가, 호흡하는 장승들인가, 영원한 범법자들인가.
세상이 떠들썩한 패륜아의 소식에도 감히 욕 한 마디 하기가 주저로운 아버지. 누구의 자식은 어떻게 성공했다는 소문도 애써 못들은 체 해야 하는 아버지.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8,15와 6.25, 4.19와 5.16의 격동을 겪었고, 서슬 퍼런 이념의 시대를 살았으며, 절대식량이 부족했던 곤궁의 시절을 견디어 온 주인공들이 그들 아닌가. 가정을 세운 가장, 자식을 키워 온 엄부, 조국을 지킨 용사, 산업을 일으킨 역군이 그들 아닌가. 인생을 고뇌하고 사랑을 아파했으며, 낭만을 즐기고 유행에 민감했던 주인공들이 그들 아닌가.
그들은 배워야 산다는 일념에 충실했고, 시간이 금이라는 진리 따라 일을 했다. 그들에게 가난 극복은 제일의 명제였고, 자녀 성공은 가장 큰 소망이었다.
아버지, 오늘의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위로 치켜 찢어진 두 눈과 납작한 코를 부끄러워 아니하고, 우랄 알타이어의 한 갈래를 유감없이 구사하며, 한국학교 세우기에 열심을 내는 그들은 당당한 배달의 후손이다. 김치를 먹어야 입맛이 당기고, ‘전원일기’를 시청해야 감정이 살아나며, 흘러간 노래를 불러야 향수가 달래지는 그들은 엄연한 단군의 핏줄이다.
그들은 한 잔 술에 취하여 과거를 잊으려 하고, 물가에 낚시를 드려 현실에 자적(自適)하기를 배우며, 골프장 그린에 그려지는 포물선을 따라 미래를 설계하고 싶은 한인 1세들이다. 그들은 이민을 결심했을 때 이미 웅비의 기상과 도전의 의지가 남달랐던 선견지명의 세계인이다.
아버지 ,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어머니가 희생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아버지는 책임으로 사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자애의 상징이라면 아버지는 위엄의 표상이다. 자식을 감싸는 것이 어머니의 애틋한 정이라면 자식을 초달(楚撻)하는 것은 아버지의 도타운 마음이다. 자식의 오늘 걱정이 어머니의 몫이라면 자식의 내일 염려는 아버지의 분깃이다. 눈물이 어머니 사랑의 진액(津液)이라면 훈계는 아버지 애정의 정수(精髓)이다.
아버지, 그들은 누구인가.
삶은 있으나 생기가 메마른 그들은 누구인가. 호칭은 있으나 권위는 전만 못한 그들은 누구인가. 생업은 있으나 그 주역에서 멀어진 그들은 누구인가.
아내의 역할이 커지고 자녀가 앞장서야 하는 이민가정 속에서 그들의 자리는 어디에 남아있는가. 사회보장이 제도화되지 못한 아르헨티나 이민사회에서 그들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30년 이민사에 그들의 족적은 어떤 모양으로 새겨질 것인가.
아버지날이 다가온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6월은 그들이 견디기에는 너무 추운 계절이다.
* 바람 부는 날의 산조
타관은 더 춥다더니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겨울은 영상 5도에도 혹한이다. 그러나, 정작 견디기 어려운 것은 추위가 아니라 바람이다. 미운 작부처럼 속속들이 파고드는 바람, 그것은 마음을 저미는 비수요, 가슴을 후비는 송곳이다.
이런 날은 천근 남자의 마음도 바람을 탄다. 인생의 겨울을 생각하는 어쭙잖은 사색인이 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을 헤아리는 서툰 철인도 된다. 그러다가 현실 속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며 암울에 빠지는 심약자가 되어 버린다.
몇 손님과의 가벼운 상거래, 종업원과의 두어마디 잡담, 신문 훑기, 잡지 뒤지기, 그리고 찬 도시락을 열어 젓가락을 들면 외로움이 먼저 식도를 넘는다.
방향감각을 잃은 겨울바람은 쁘로빈시아의 오후를 마냥 흔들어 마음의 안정을 못내 방해한다. 밖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책을 집었다 놓기도 한다. 그래도 오후는 길다. 불경기는 시간 속에 지루함으로 살아있다. 또 몇 손님과의 가벼운 상거래, 그리고 종업원과의 두어 마디 잡담. 이윽고 돈통을 열어 허약한 하루를 챙긴다.
운 빼소로 감히 벤스를 산다. 버스 안에는 초췌한 3등 인생들이 졸고 있다. 이가 안 맞는 창문 틈에서 새어 드는 황소바람을 깃으로 막으며, 동족은 아니나 동류임이 분명한 그들 속에 섞이어 같이 눈을 감는다.
오늘도 옷값을 깎아 달라는 손님이 있었다. 얄미운 생각에 응해 주지를 않았다. 사간 지 오랜 옷을 바꾸러 온 손님도 있었다. 뻔뻔스러워 보여 안 된다고 잘랐다.
항상 지나놓고 나서야 후회하는 버릇, 늘 현재상황이 아닐 때에만 너그러운 도덕군자가 되는 심보는 무엇인가. 내일 또 다시 너그러울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조차 부담으로 와 닿지 않는 위선은 또 무엇인가.
웅성거림에 눈을 뜨니 졸던 동류들이 모두 내리고 있다. 낌새가 고장이다. 마침 네거리를 휩쓸며 줄달음치던 바람기둥이 판자촌 지붕 위로 승천하듯 사라지는 것이 모인다. 이민 선배들의 한과 땀과 눈물이 고였던 곳, 여기를 잊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소리가 바람 기둥에서 들여온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초라하게 누운 꼬레아 길을 밟는다.
각 나라의 이름을 딴 거리가 허다한 아르헨티나에 우리의 길이 없었다는 것도 참지 못할 부끄러움이었지만, 천신마고로 얻어냈을 단 한 꽈드리의 바나나형 비탈길도 그 몰골이 수치스럽기는 거기서 거기다.
어느 날은 찬비에 후줄근하던 낙엽 밟기가 싫더니, 오늘은 또 발끝에 채는 꼬레아길 나뭇잎의 신음을 듣는 것이 마냥 짜증스럽다. 고샅길 더듬듯 골라 골라 환한 백구에 닿는다. 여기는 왕십리다. 길음동이다. 모래내다, 봉천동이다.
동포 식품점의 보리비아노는 과일상자를 들이느라 혼자 바쁘다. 번들거리는 감의 윤기에 이끌리어 한 발 가까이 가려는 순간, 젊은 동포 여인이 급히 다가와 선뜻 감을 고르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여인을 훔치는 치한으로 변한다. 그 눈으로 감을 고르는 여인의 손끝에 엷은 피로가 묻어있음을 본다. 소매에 붙어있는 분홍색 실밥에 고단한 이민의 하루가 물들어 있음도 본다, 스웨터를 입었어도 너무 좁은 여인의 어깨는 안쓰럽다. 감에 어리는 향수의 눈빛은 애처롭다. 밑 화장도 없는 여인의 얼굴이 감빛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항상 밤에 더 짓궂은 것인가. 미장원을 출입한 지 오래된 여인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흩으면서 귀밑에 숨어있던 연민의 색깔을 보여준다. 희어서, 고와서 너무 슬픈 부위다.
“시어머님이 감을 좋아하세요.”
반듯한 서울말씨는 단감 맛이다. 저만치 가버린 여인의 거리는 감빛 공허로 남는다.
까라보보 한인촌의 중심 거리를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진다. 작아진다. 그리고 사라진다. 외등은 허공에서 졸고 가로수는 맨몸으로 떤다. 그 밑에 초로의 겨울 남자가 혼자 서 있다.
밤바람이 다시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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