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에서의 1년
프로방스에서의 1년
피터메일 지음/ 송은경 옮김 / 진선출판사
이웃의 중요성이 도시에서는 퇴색하고 있지만, 15센티미터 두께의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벽 저쪽 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일도 있을까 말까 하다. 시골에서는 바로 옆집이 몇백 미터나 떨어져 있다 해도 이웃은 삶의 일부가 된다.
하루 내내, 아름다운 바다 같은 눈 속에 고립된 것이 있는 기분. 프로방스의 한겨울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정적과 공허감이 동시에 찾아들면서 마치 바깥세상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정상적인 삶에서 유리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일단 첫인사가 끝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장바구니나 짐은 내려놓는다. 적어도 진지하고 만족스러울 정도로 대화가 되려면 반드시 양손이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손은 가시적인 마침표도 되어주고, 문법에 맞지도 않는 문장을 끝맺어 주기도 하고, 말을 강조해 주거나, 단순히 장식적인 기능도 한다. 말이란 것은 단순히 입을 움직이는 것일 뿐, 그 자체로는 프로방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충분히 육체적이지 못하다. 프로방스에선 에어로빅이 전혀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십 분만 잡담해도 충분한 육체 운동이 되니까.
영국인들은 술을 마실 때 대화하고, 담배 피우고, 먹는 중에도 술잔을 빙빙 돌리며 들고 있다. 양손을 써야 할 자연현상, 코를 풀거나 화장실에 갈 경우에만 마지못해 술잔을 내려놓는다. 프랑스인들은 다르다. 잔을 받자마자 내려놓는다. 한 손만으론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잔들은 식탁 위에 여기저기 놓이고 5분 정도 지나다 보면 어느 게 누구 잔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다른 사람의 잔을 쓰려니 찜찜하고, 그렇다고 자기 것을 가려낼 수도 없게 된 손님들은 못내 아쉬운 듯 샴페인 병만 쳐다보고 있다.
이 책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현실 도피를 조장하며, 전원생활에 대한 과도한 낭만을 불러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는데….
프로방스에서의 삶은 단순과 느긋함,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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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여니 '2000년 5월 22일' 이라고 서명이 되어 있다.
그리고 45쪽에 사인이 되어 있다.
그때 내 나이는 45세였다.
'45', 꿈꾸는 프로방스보다 신선한 숫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