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승 박상룡 선생님
서울과 불과 40분 거리지만 강북이라고 전혀 개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정교리 정교분실국민하교.
류(柳)씨 이(李)씨 조(曺)씨의 집성촌으로 신문화와는 거리가 먼 외딴 오지. 매스컴이라고는 선거 때마다 붙는 벽보와 이장 집에서 틀어주는 라디오가 전부인 마을에 “류창희 워디 갔다 온겨” 충청도의 진한 사투리와 함께 새 바람이 불었다.
두개뿐인 교실에 흐린 날은 두 학년이 합반 수업을 받고, 맑은 날은 리어카와 삼태기로 운동장 돌 줍기, 겨울 날 솔방울 주워 난로 때기, 여름에 개울에 나가 멱 감기… 들, 산, 개울이 모두 열린 교실이었다.
공부보다는 일손이 귀해서 아이 보는 것이 우선인 우리들에게 본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 며 서울 나들이를 강행하셨던 박상룡선생님.
리라국민학교 수업참관, 창경궁을 둘러 찾아간 5층 건물의 신문사에서 귀청이 떨어지도록 윙하는 소리와 함께 신문이 나오던 신기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일손을 놓고 자식 덕분에 서울나들이 한다고 무지개떡, 계란, 밤, 등을 삶아 머리에 이고, 고운 한복차림으로 따라오신 어머니들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으시며 흐뭇해하시던 선생님.
분교 뒷 모퉁이 숙직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일깨워 주셨다.
그 후, 우리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왔고, 지금은 부산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둔 주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교과서 지식보다 함께 뛰고, 땀 흘리고, 생각하고, 참여하는 생활자체를 소중히 여기시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떠오르곤 한다.
성적과 입시로 이어지는 요즈음의 교육현실에서, 당시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은 서울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빈다.
1994년 5월27일자 부산일보 실렸던 글
2008년 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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