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4학년 때 교실 속으로

류창희 2009. 10. 3. 20:09


40여년 전의 시간이
꼭 4년전 일처럼 선명했다.

가산초등학교 정교분실 4학년때
담임 박상룡 선생님과
이춘복 조옥례를 번개팅으로 소집

가는 날이 장날이라 내부수리 중
빨리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에
옆에 허름한 감자탕집으로 옮김

뭘 먹었는지 정신이 없었고
얼굴만 보고 또 보고






조촌에 살던 옥례는
송우리에 살고 있으며
딸이 시집가서 아들 딸을 낳았다고 한다.

옥례는 얼굴도 예쁘지만
글씨도 잘쓰고
바다와 소나무와 아침해를 잘그렸다.

초등학교때 옥례를 생각하면
항상 찔레꽃처럼 하얗고
찔레향이 번진다.
천경자 그림 속 '길례언니'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 얼굴 손으로 더듬어 만져보니
와아~ 정말 실감난다.



춘복이와는 길하나 건너사이에 살아
집안 속속 너무나 잘안다.
늘 손잡고 과수원길 지나
개울건너 학교를 걸어다니곤 했었다.

춘복이네 집 마당에는 아이들이 모여서 잘놀았다.
오랫말이나 고무줄 놀이를 하면
나는 펄쩍펄쩍 같이 뛰지 못하고
줄 붙잡고 서있는 것도 자랑스러워
얼굴이 벌개지곤 하였었다.

춘복이 말이 내가 어렸을 때
마음이 너무 여려
누가 조금만 크게 말해도
야단치는 줄 알고 울었었다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운다.
너무 웃다가 울고
예쁘고 좋아서 운다.
태어날 때부터 눈물샘 조절판이
불량품이었나보다.

우리 '호랑이 박상룡선생님'
그때 불같이 무서웠었는데,
지금 보니 하나도 안 무섰다.
오히려 우리가 막 나무랐다.
사모님 말씀 잘 들으라고.

초임발령을 받아 3년동안 초등에 계시다가
바로 서울 광운중학교로 가셨다.
아마도 우리를 만나기 위한 교육부 배려였나보다.

나는 줄곧 서울에서
장위동 선생님 댁을 드나들다
결혼하면서부터 찾아뵙지 못했었다.

사모님께서는 당신의 시동생에게 시집오라고 하셨었는데
하마터면~~
선생님 제수씨가 될뻔 했었다.

솔찍하게
우리 신랑 인물이 훠얼~씬 미남(?)
천만다행이다^^*





옥례왈 : 항상 아쉬움이란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걸 선물하는구나
다음엔 진하게 소주 한잔 하자구

당연하지 편하게 옷입고
퍼대앉아
찔레순 오디 삘기 안주로 긴밤지새우고...

춘복왈 : 선생님 초대해 즐거웠고
활기찬 네모습 좋았구
두루두루 고마웠어
다음에 또 보자

제사인데도 금새 달려와 만나주어
11살 소녀시절로 돌아가 재잘재잘
너무 신났었다.



검은 고무줄 팬티 흰런닝입고
본교인 가산초등까지 운동회하러 가고

개울에 나가 단체로 멱감기고
팬티만 입고 키재고 가슴둘레 쟀었다.
그때 공부 잘하고 글씨 잘 쓰는 옥례는
기록을 했었다.

선생님 말씀 : "그때 너회들 가슴둘레는 내가 다 쟀는디..."
"맞다! 그때 누구 가슴이 가장 컸을까?"
"ㅋㅋㅋㅋ"
"하하하"
선생님과 같이 늙어간다.



나의 스승 박상룡 선생님

서울과 불과 40분 거리지만 강북이라고 전혀 개발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정교리 정교분실국민하교.
류(柳)씨 이(李)씨 조(曺)씨의 집성촌으로 신문화와는 거리가 먼 외딴 오지. 매스컴이라고는 선거 때마다 붙는 벽보와 이장 집에서 틀어주는 라디오가 전부인 마을에 “류창희 워디 갔다 온겨” 충청도의 진한 사투리와 함께 새 바람이 불었다.
두개뿐인 교실에 흐린 날은 두 학년이 합반 수업을 받고, 맑은 날은 리어카와 삼태기로 운동장 돌 줍기, 겨울 날 솔방울 주워 난로 때기, 여름에 개울에 나가 멱 감기… 들, 산, 개울이 모두 열린 교실이었다.
공부보다는 일손이 귀해서 아이 보는 것이 우선인 우리들에게 본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견문을 넓혀야 한다. 책임은 내가 지겠다” 며 서울 나들이를 강행하셨던 박상룡선생님.
리라국민학교 수업참관, 창경궁을 둘러 찾아간 5층 건물의 신문사에서 귀청이 떨어지도록 윙하는 소리와 함께 신문이 나오던 신기한 모습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일손을 놓고 자식 덕분에 서울나들이 한다고 무지개떡, 계란, 밤, 등을 삶아 머리에 이고, 고운 한복차림으로 따라오신 어머니들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으시며 흐뭇해하시던 선생님.
분교 뒷 모퉁이 숙직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모두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임을 일깨워 주셨다.
그 후, 우리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왔고, 지금은 부산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둔 주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교과서 지식보다 함께 뛰고, 땀 흘리고, 생각하고, 참여하는 생활자체를 소중히 여기시던 선생님의 가르침이 떠오르곤 한다.
성적과 입시로 이어지는 요즈음의 교육현실에서, 당시 선생님의 가르침은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은 서울 경기고등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고 계신 선생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선생님의 건강을 빈다.


1994년 5월27일자 부산일보 실렸던 글

2008년 6월 21일


손영란   2008-06-30 08:03:55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만남과 글, 아름다워요.
류창희   2008-06-30 10:11:17
학교
여덟살에 들어가
십대에도 다니고
이십대에도 다니고
사십대에도 다니고
오십대에도 다니고

이 학교
저 학교
시간나면 다니고
등록금 마련하면 다니고

그래도 이력에다
내놓으라 하고 당당하게 적을 이름도 별루 없건만...

근데요.
졸업도 못한 <정교분실>은
정말 자랑스럽답니다.

스스로 신문지상에다가도 내놓죠.

그곳의 선생님과 친구들
늘 행복한 '유년시절 진행중'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