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및 역자 소개

저 : 프란츠 파농  
    
프란츠 파농은 1925년 서인도 제도의 한 섬인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 프랑스의 한 대학에서 의학공부를 시작으로 심리학, 특히 정신분석하게 입문하 뒤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학문영역에 지적관심을 드러내 보인다. 후에 프랑스에 대항한 알제리 독립운동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에는 알제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정신분석의로 시술을 하기도 한다. 그가 식민지인들의 다양한 심리양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에 그가 수행했던 경험때문이다. 서른 여섯 살에 알제리 사람으로 죽은 프란츠 파농은 정신과 의사이자 FLN의 투사로 『검은피부 하얀가면』『아프리카 혁명을 위하여』『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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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흑인과 언어
2.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3.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
4. 식민지 민중의 의존 컴플렉스
5. 흑인성이라는 사실
6. 흑인과 정신병리
7. 흑인과 인정투쟁
8. 결론

  • 책속으로  
  
흑인은 이차원적인 존재이다. 한 차원은 자신의 종족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한 차원은 백인과 관련되어 있다. 흑인은 백인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신과 다른 종족의 흑인에 대해서도 매우 차별화된 행동 양식을 선보인다. 흑인의 이러한 자기 분열이 식민주의적 굴종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식민주의의 그 교묘한 지배 기술이 다종다기한 이론의 중심에서 도출된 것임을 믿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흑인을 원숭이가 인간으로 서서히 진화되어 가는 단계에서 나타난 중간자적 존재로 구인하려 했던 그 다양한 이론이 중심에서 말이다.---p.23-24


나는 주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절름발이의 겸양을 수용하라고 닥달한다. 어제 세상의 아침을 향해 깨쳐 일어나면서 나는 하늘이 철저하고 완전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나 역시 똑바로 서고 싶었다. 그러나 내장이 다 드러난 침묵이 내게로 무너져 왔다. 날개가 마비된 채, 책임감도 없이 한 발로는 무(無), 다른 한 발로는 무한을 떡 버티고 선채, 나는 긴 울음을 울었다.--- p.176



호수아빠   2009-02-12 14:30:20
알제리...프랑스 식민지였던 나라. 회교국가. 수도 알제. 남아프라카의 두번째 큰나라. 대부분이 사막인 나라. 공식어가 아직도 프랑스어인 나라. 세상 밖으로 알려진게 없는 나라. 한국기업이 이제 진출하는 나라. 지금 내가 하는 일로 방문해야하는 나라.
류창희   2009-02-16 12:49:19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난 너무도 아는 것이 없다.
지도를 보며 책을 보며 공부할 수도 있고
시간과 돈과 건강의 여력이 된다면
여행사를 통해 혹은 자유여행을 할 수도 있겠으나
이도 저도 그도 핑계만 댄다.
테마기행, 걸어서 세계속으로, 등등등
화면으로 '보고 또 보고' TV와 더불어 방학이 다 끝나간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실감하며 ...
호수아빠   2009-02-16 16:17:54
아는 만큼 보이겠지만, 보이는 만큼 아는 것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논쟁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교훈이 숨어있는 것 같아서....
보이는 만큼 아는 것의 존재에 대한 서글픔으로....지금 읽고있는 책의 내용중에 [인디언들의 십계명]있어 옮겨 봅니다.
1. 대지는 우리들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
2. 나무와 동물과 새들, 당신의 모든 친척들을 존중하라.
3. 위대한 신비를 향해 당신의 가슴과 영혼을 열라.
4. 모든 생명은 신선한 것, 모든 존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5. 대지로부터 오직 필요한 것만을 취하고, 그 이상은 그냥 놓아 두어라.
6. 모두에게 선한 일을 행하라.
7. 모든 새로운 날마다 위대한 신비에게 감사하라.
8.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사람들 속에선 오직 선한 것만을 보라.
9. 자연의 리듬을 따르라. 태양과 함께 일어나고 태양과 함께 잠들라.
10. 삶의 여행을 즐기라. 하지만 발자취를 남기지 말라.
류창희   2009-02-16 17:57:58
호수아빠
그러게말야. 가장 가까운 내 자신을 못보고
멀리 있는 타인의 것은 또렷하게 보인다는 착각.
매일 눈 앞의 일들에 한치 앞이 안 보이니 ...

논쟁이라는 단어로 서로 자존심에 상처를 내 피를 보이고...
'다른 시각을 존중한다는 것'
올해의 화두!
콩콩나무   2009-02-17 12:34:48
난 옛날에 흑인들은 무슨생각을하고살까?
하고 궁금할때가 있었을 뿐이고.....!!
이글을보니 맘아프고 불쌍 하다는.......~~
류창희   2009-02-18 19:38:33
콩콩나무님^^
우리가 헐리웃 영화로 긴시간 학습이 되어서요.
서부영화를 보면
항상 '착한놈'과 '나쁜놈'이 정해져있었잖아요.
편견이 무섭죠.


부산독서아카데미 2월 토론스케치


영춘화 매화 춘란이 꽃망울을 터뜨리던 이른 봄날 저녁, 2월 독서토론회로 모였습니다.
도서선정위원장님이 사정상 참석하지 못한 관계로, 이을규 전 회장님께서 토론을 진행하셨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인생이 80세에서 시작하여 18세쯤에 끝난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하고 탄식했다지요.
이을규 회장님의 열정을 보노라면 ‘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처럼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잡수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합니다.

오늘도 새 얼굴이 있어 참석회원들이 자기 소개 겸 지난 한 달 동안의 근황들을 나누었습니다.
방학을 맞아 학교 대신 매일 극장으로 출근한다는 사무총장님의 코멘트가 있자 main 요리에 들어가기 전의 전채요리는 영화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한창 뜨는 ‘워낭소리’에서부터 ‘쌍화점’을 거쳐 독립영화 ‘낮술’에 이르기까지...
특히 ‘낮술’에 대한 배교수님의 심층적 분석과 소개는 교수님의 전공이 철학인지 영화평론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로 회원들로 하여금 그 영화를 당장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호기심과 경탄을 자아냈는데요, 배교수님의 마지막 멘트는 더 압권(!)이었습니다. “나도 그 영화를 아직 못봤는데 한 번 봐야겠네...”

오늘의 main 요리는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입니다.
먼저 역자의 무성의함, 불친절함에 대한 불만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대중들이 읽기를 원하는 책이라면 앙틸레스, 마르티니크, 포르드 프랑스가 도대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 빈번하게 사용된 피진(pidgin), 크레올, 네그리튀드... 등등의 용어에 대한 설명을 각주에라도 붙여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닌가...

이에 대하여 역자의 문제 뿐만 아니라 저자 스스로도 친절하게 쓴 책이 아니다며 여러 철학자, 사상가들의 말을 인용하고 있으나 본문과 부조화도 있었으며 독자들에겐 낯선 전문가들도 많이 인용하고 있어 읽기가 힘들었다는 지적들이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점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찾아가면서 읽도록 하는 장점도 있었다는 촌평도 있었습니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는 소감들이 많았습니다. 곽민이님은 저자의 처녀작이다보니 학자로서의 세련미가 부족하여 처음에는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체험에서 우러나온 분노가 담겨있고 울림이 있었기에 좋았다는 의견을 피력하셨고, 배교수님께서도 앞 부분을 읽으면서는 학자로서의 전문서도, 의사로서의 정신분석서도 아니어서 실망스러웠으나 3장 이후부터는 흥미로웠다고 공감을 표하셨습니다.

최나래 님은 책의 제일 마지막 “연구를 끝마치면서 나는 희망한다. 이 세계가 나와 더불어 활짝 열려진 모든 종류의 의식의 문을 느낄 수 있기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기도한다.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라는 외침이 강한 울림을 주었고 힘들었지만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보는 의견들도 많았습니다.
4개월 후면 세상에 태어날 아기를 데리고 참석하는 열정(!)을 보이신 전연조님께서는 흑인들의 문화적 열등감이 백인의 언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려는 집착으로 표출되는 모습은 결국 영어교육의 광풍에 휩쓸려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
셨고요.

최나래님은 제3세계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도 하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자성적 의견을 개진하셨습니다.

흑인에 대한 거부감, 부정적 이미지가 본능에 의한 것인가 학습된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색채론의 관점에서 볼 때 검은색에 대한 거부감은 단순히 학습된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고 본능적인 부분도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처음 참석한 석연숙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은 우리도 모르게 학습되고 축적된 문화적 편견에 기인하는 면이 많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이현석 원장님은 한 때 훈(Hun)족이 유럽을 지배했을 때 게르만인들이 그에 복속된 역사를 예로 들면서 현재 서구 백인 중심 문화가 선진문화로 보이는 것은 인종이나 문화적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 종족의 문화에 다른 종족이 복속되는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는 지적을 해 주셨습니다.

이 밖에도 저자의 경험과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겪은 우리 국민들의 경험을 비교하는 논의들도 있었는데요, 조성락 원장님께서는 內鮮一體를 표방하며 지배자의 부와 권력에 추종하도록 유도했던 우리의 식민지 경험과 교육이나 문화적 혜택을 완전히 박탈당한 아프리카 식민지 경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열기를 더한 토론은 두 시간을 훌쩍 넘겼답니다.
이 책에 대한 토론으로 그동안 ‘천개의 찬란한 태양- 바리데기- 황금물고기’등으로 이어지던 주류로부터 압제받는 자들의 문제에 대한 독서 여행이 종착역에 도착한 것 같아 뿌듯하다는 점에 참석자들의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3월의 책은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리 호이나키 著, 녹색평론사)입니다.
부산카톨릭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는 배채진 교수님께서 책에 대한 발제를 하시고 토론 진행을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보다 더 흥미진진한 토론회가 될 것 같습니다.

독서회 스케치: 박영주변호사



검은 피부 하얀가면
프란츠 파농 지음 /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서론-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흑인과 백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흑인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
진실은 인간의 얼굴을 화끈화끈 달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열변을 점화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매번 열변은 어디서나 불타올랐다. 그것은 전쟁과 기아와 불행을 수반했다.
백인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흑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 사상사의 풍요로움과 그들 지성사의 뒤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

* 흑인과 언어-
불어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놈
저 친구 좀 봐, 거의 백인에 가깝게 말하는데
백인처럼 말한다고 칭찬한다,
R발음을 굴리는 연습을 부단히 할 것이다.
흑인은 일반적으로 원숭이와 백인이라는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자적 존재를 일컬어진다.
흑인에게 말을 건네는 백인들은 하나 같이 흑인들을 아이 대하듯 한다. 이죽거리고, 속삭이고, 달래고, 어르고, 속이고. 어떤 특정 백인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흑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의 수준을 하향 조종해 가면서 백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이 그들이 흑인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프랑스에서는 얼마나 살았어요. 불어를 꽤 잘하네요. 흑인들에게 이 말을 해주는 것보다 더 짜릿한 것은 없다.
어떻게 하면 언어를 보다 세련되게 가공할 것인가. 물론 그 언어는 자신이 백인의 문화를 완전 정복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를 의미한다.

*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열등감이란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제적인 느낌에 가까운 것.
흑인이 그 자신만의 고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 백인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 백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흑인의 집착, 흑인의 욕망은 바로 그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야만인 단지 세련되지 않았음을 의미할 뿐.
흑인 여성들이 백인 세계로의 입성을 꿈꾸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
‘그렇고 그런 놈’
백인은 그가 지배자이고 특히 남성일 경우, 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즐길 수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나라, 특히 식민지의 경우 예외 없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반면 백인 여성이 혹인 남성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인 여성의 흑인 수용은 거의 수혜에 가깝다.
백인 여성의 딸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영광이다. 적어도 자신이 덤불 속에서 잉태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

* 유색인 남성과 백인여성-
나는 흑인이 아닌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는 백인 여성을 통해서만 나는 백인화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손이 그 순백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순간, 백인의 문명과 존엄이 내 손아귀 속에서 내 것으로 화하는 것이다.
나는 백인이다, 나는 유럽에서 태어났다, 내 친구도 모두 백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흑인이 여덟 명도 안 된다, 나는 생각도 프랑스어로 한다, 프랑스가 내 종교다.
자유롭게 뛰어 놀아야 할 이 아이들은 하루 종일 기숙사 학교에 갇혀 재내야 한다. 모두 너를 위한 것이야.
너무 빨리 명상과 반성의 방법을 배워버렸다, 사소한 것에도 깊게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고독의 삶, 과민증 환자.

* 흑인성이라는 사실-
엄마, 저기 검둥이 좀 보세요! 무서워요! 검둥이라는 호칭 속에는 내가 야스퍼스에게서 주워들은 전설과 이야기와 역사와, 그리고  그 무엇보다는 역사성이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
당시 나는 내 하나의 몸뿐만 아니라 내 동족, 그리고 내 조상들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었다.
나는 모든 감정의 면역은 거부한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 어떤 이는 나를 노예로 끌려가서 혹심한 고문을 당했던 나의 선조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미국의 흑인들은 분리되어 있다. 남미의 흑인들은 노상에서 매를 맞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거의 짐승에 가깝다. 내 친구 중에는 정말 똑똑한 세네갈 친구도 있는 걸요. 나는 어쩐 부류로 분류 될 것인가
내가 어디로 숨을 수 있겠는가
저기 검둥이 좀 봐 엄마, 검둥이! 쳐다보지 마라, 아가야  내 몸은 그 희디흰 겨울 날 아침 다시금 애도의 분위기 속으로 가라앉고 왜곡되고, 다시 채색되고 피복되었다. 검둥이는 짐승이고, 검둥이는 사악하고, 검둥이는 비열하고, 검둥이는 추하다. 저기 검둥이 좀 봐 검둥이가 떨고 있는 것은 춥기 때문이다. 아이가 떨고 있는 것은 검둥이가 무섭기 때문이고.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난로는 꺼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떨었다.
저 검둥이는 참 잘 생겼네! “말조심하시오, 아주머니!” 동시에 나는 두 가지 일을 성취했다. 하나는 내 적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스스로가 하나의 상황을 주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는 것, 만루 홈런감이었다.
뭐라고? 증오와 경멸의 소유자인 나는 버림받는 존재라고? 구걸과 개탄의 대상인 나는 최소한의 인정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타고난 컴플렉스로 부터 탈출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흑인’임을 당당히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가 늘 인정하기를 망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오직 하나, 나를 알리는 것.
역사 이래로 유태인은 식인행위를 전혀 해보지 않은 인종에 속한다. 자신을 낳아준 아비를 잡아먹다니! 이 정도로도 유태인은 흑인과 다르다. 그런데도 유태인 역시 탄압의 대상이다. 유태인은 사냥감이고 멸절의 대상이며 소각의 대상이라는 것. 그렇지만 이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 같은 흑인의 경우 우리에게 아예 어떤 기회조차 주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외부세계에 의해 화석화된 인종(화석 천형 주홍글씨)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노예, 외관의 노예인 것이다.
나란 존재는 백인들의 시선 아래서 박살난 지 이미 오래다, 나는 고착화된 존재인 것. 백인들은 절단기를 사용해 나라는 실체를 냉정하게 절편화했다.
검둥이 속옷에서 검둥이 냄새가 난다. 검둥이 이빨은 하얗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내 동료들마저도 나를 거부한다. 그들 역시 백인이 된 지 오래다 그들 역시 백인 여성과 결혼할 꿍꿍이 셈을 가진지 오래다. 그들은 이제 갈색으로 표백되어 가는 아이를 갖게 되리라 누가 알겠는가? 조금씩 그렇게 가다 보면…
흑인 성직자가 경이의 대상이 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지금은 혹인 의사 흑인교수 그리고 흑인 장치가, 항상 흑인 선생이고 흑인 의사고 그렇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인종차별이란 한 인종이 다른 인동에 대해 갖는 근거 없는 증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내 속에 칼날이 번득이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내 스스로를 방어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리듬은 감각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요소의 원형이다. 리듬은 예술의 일차조건이자 기준이다. 리듬은 살아 있는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므로… 리듬이 우리에게 지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먼 방식으로
순종의 무릎을 꿇는 방법만을 배운 사람들 잘 길들여지고 기독교도화 된 사람들 잡종의 피가 주입 된 사람들…이들이 바로 내 동포들이다.
오늘날 흑인들의 능력은 일보다는 재주 면에서 훨씬 뛰어나다.

백인이 내 아비를 죽였다네
내 아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백인이 내 어미를 겁탈했다네
내 어민 아름다운 여자였으므로
백인이 작열하는 태양의 한 길가에서
내 형을 매질했다네
내 형은 강했으므로
그리고
백인은 내게 다가왔다네 피 묻은 손으로
내 까만 얼굴에 경멸의 침을 내뱉으며
폭군의 목소리로 말했다네
“이봐, 꼬마. 세숫대야, 수건, 물” 이라고

백인과 나를 연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초월뿐이다.
이것이 열등감의 표현일까? 아니다. 비존재의 감정이다. 백인이 선이라면 흑인은 악이다. 손에 총을 쥐고 있는 백인들, 그들은 항상 옳다. 악인은 항상 나이므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나는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다.

* 흑인과 정신병리-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질병 밑에는 가족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흑인애들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굽신거려”
그러나 사실 “흑인애들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굽실거리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흑인은 공포의 대상이자 분노의 매개물이라는 것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태도가 큰형이 막내 동생을 대하는 듯한 태도와 유사함
흑인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그 엄청난 성적 정력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 생식기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흑인의 정력은 환상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미군부대가 있는 도시 뒷골목의 페티엄마 메리엄마 등등을 보았다. 그들은 눈자위가 거무스름했으며 손등이나 팔에 담배불로 지진 자리가 붉거나 이미 갈색으로 낙인 찍혔었다. 그녀들은 늘 끈 떨어진 번쩍이는 끈 나시 드레스식 잠옷을 입은 채 화투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악을 쓰고 ‘갓뎀’ 욕하며 운다거나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티는 눈이 바비 인형처럼 예뻤다)
유태인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부를 축적하고 싶어 하고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은 불가불 생식기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
흑인은 생물학적 위험을 상징한다. 유태인이 지적인 위험을 상징하듯이 말이다.
흑인은 생물학적인 것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흑인은 아홉 살에 사춘기를 지나 열세살에 아버지가 된다.
흑인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백인여성의 경우, 다시 백인 남성에게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그 여성을 강간하는 주체는 바로 그녀들 자신이다. 성행위 도중 자신의 파트너를 향해 나를 심하게 다뤄줘요“라고 외치는 여성들.
프랑스에서 백색의 상징이 정의 진리 순결 저 사람 몸은 너무 시커머, 저 사람 언어도 시커멓고, 아마 저 사람 영혼도 시커멀거야“ 이것이 백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논리이다. 흑인은 추악함의 상징인 것이다.
‘희생양이라는 본질’
영화에 나타나는 흑인의 본질 혹은 ‘본성’
언제나 하인으로
언제나 비굴하게 알랑거리고 히죽거리며
나, 훔친 적 없어요, 나, 거짓말 안 해요. 라고 사투리를 써가며
언제나 변함없이 “아, 잘 먹었다”고 말하는…
본능,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고 불변적인 것이며 구체적인 것이다. 반면 습관, 그것은 습득되는 것이다.
잘 생긴 흑인은 프랑스 백인의 모임에 초대되기도 한다. 이 모임이 지성인들의 모임이라면 아마 그 흑인은 이런 점을 강조했으리라. 자신의 피부색을 보지 말고 자신의 지성을 보아달라고.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자신의 성생활을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생리적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결론
흑인은 백인이 되고 싶어 한다. 흑인에겐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인이 되어야 한다는 운명.
얼굴 구조의 정합성 이론이라는 것에 내가 아직도 종속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나를 자꾸만 전쟁터로 내모는 세상, 절멸이냐 아니면 승리냐 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만이 남아 있는 세상에.
그토록 끊임없이 연상하고 싶어 하는 “아, 참 잘 먹었다”라고 이빨 빠진 발음을 내뱉는 존재가 아님을
나의 삶은 흑인의 가치를 대변과 차변으로 나누어 무게를 달아보는 대차대조표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
인간을 가두려는 시도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유색인의 불행은 그가 한때 노예로 부려졌었다는 데 있다.
유색인으로서 바라는 것: 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 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뿐이다.
바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건축하도록 나의 자유가 나에게 주어진 것. (내 인생은 내가 ‘디자인’ 한다.

사회혁명은… 그 시적 특성을 과거에서 견인해 오지 않는다. 미래에서 견인해 온다. 과거와 관련한 모든 관행을 벗어버리니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사회혁명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혁명은 세계사의 기억에 의존해 왔다. 그 혁명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각성된 상태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 내용을 정확하게 탐진하기 위해서 19세기의 혁명은 이미 죽은 자들의 손으로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묻게 해야 한다. 과거엔 번지르한 말이 내용을 앞섰지만, 이젠 내용이 말을 앞서야 할 때다.

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라르트의 무월 십팔일


류창희   2009-02-16 13:35:45
그동안 헐리웃영화를 보면서
화석화된 역할들
백인 흑인 혹은 황색인종
다양한 문화에 대해
'선입견 & 편견'을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혹, 조만간에
<화얀피부 검은가면>이 나올지도 모른다.
오바마 당선이래,
요즈음 우리나라 TV 상업광고를 보며
가장 발 빠른 속도에 나도 편승한다.
속도감 적응 못하면 촌닭처럼
심한 멀미를 할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