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가면
프란츠 파농 지음 / 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서론-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흑인과 백인을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흑인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
진실은 인간의 얼굴을 화끈화끈 달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열변을 점화하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매번 열변은 어디서나 불타올랐다. 그것은 전쟁과 기아와 불행을 수반했다.
백인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흑인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 사상사의 풍요로움과 그들 지성사의 뒤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
* 흑인과 언어-
불어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놈
저 친구 좀 봐, 거의 백인에 가깝게 말하는데
백인처럼 말한다고 칭찬한다,
R발음을 굴리는 연습을 부단히 할 것이다.
흑인은 일반적으로 원숭이와 백인이라는 인간을 연결하는 중간자적 존재를 일컬어진다.
흑인에게 말을 건네는 백인들은 하나 같이 흑인들을 아이 대하듯 한다. 이죽거리고, 속삭이고, 달래고, 어르고, 속이고. 어떤 특정 백인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흑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의 수준을 하향 조종해 가면서 백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 이것이 그들이 흑인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프랑스에서는 얼마나 살았어요. 불어를 꽤 잘하네요. 흑인들에게 이 말을 해주는 것보다 더 짜릿한 것은 없다.
어떻게 하면 언어를 보다 세련되게 가공할 것인가. 물론 그 언어는 자신이 백인의 문화를 완전 정복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도구로서의 언어를 의미한다.
*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열등감이란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제적인 느낌에 가까운 것.
흑인이 그 자신만의 고도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 백인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 백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흑인의 집착, 흑인의 욕망은 바로 그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야만인 단지 세련되지 않았음을 의미할 뿐.
흑인 여성들이 백인 세계로의 입성을 꿈꾸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 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
‘그렇고 그런 놈’
백인은 그가 지배자이고 특히 남성일 경우, 많은 여성과 잠자리를 즐길 수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나라, 특히 식민지의 경우 예외 없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반면 백인 여성이 혹인 남성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백인 여성의 흑인 수용은 거의 수혜에 가깝다.
백인 여성의 딸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영광이다. 적어도 자신이 덤불 속에서 잉태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
* 유색인 남성과 백인여성-
나는 흑인이 아닌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나를 사랑해 주는 백인 여성을 통해서만 나는 백인화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손이 그 순백의 젖가슴을 애무하는 순간, 백인의 문명과 존엄이 내 손아귀 속에서 내 것으로 화하는 것이다.
나는 백인이다, 나는 유럽에서 태어났다, 내 친구도 모두 백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흑인이 여덟 명도 안 된다, 나는 생각도 프랑스어로 한다, 프랑스가 내 종교다.
자유롭게 뛰어 놀아야 할 이 아이들은 하루 종일 기숙사 학교에 갇혀 재내야 한다. 모두 너를 위한 것이야.
너무 빨리 명상과 반성의 방법을 배워버렸다, 사소한 것에도 깊게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고독의 삶, 과민증 환자.
* 흑인성이라는 사실-
엄마, 저기 검둥이 좀 보세요! 무서워요! 검둥이라는 호칭 속에는 내가 야스퍼스에게서 주워들은 전설과 이야기와 역사와, 그리고 그 무엇보다는 역사성이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었기 때문
당시 나는 내 하나의 몸뿐만 아니라 내 동족, 그리고 내 조상들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었다.
나는 모든 감정의 면역은 거부한다. 나는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 어떤 이는 나를 노예로 끌려가서 혹심한 고문을 당했던 나의 선조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미국의 흑인들은 분리되어 있다. 남미의 흑인들은 노상에서 매를 맞고 있다. 서아프리카의 흑인들은 거의 짐승에 가깝다. 내 친구 중에는 정말 똑똑한 세네갈 친구도 있는 걸요. 나는 어쩐 부류로 분류 될 것인가
내가 어디로 숨을 수 있겠는가
저기 검둥이 좀 봐 엄마, 검둥이! 쳐다보지 마라, 아가야 내 몸은 그 희디흰 겨울 날 아침 다시금 애도의 분위기 속으로 가라앉고 왜곡되고, 다시 채색되고 피복되었다. 검둥이는 짐승이고, 검둥이는 사악하고, 검둥이는 비열하고, 검둥이는 추하다. 저기 검둥이 좀 봐 검둥이가 떨고 있는 것은 춥기 때문이다. 아이가 떨고 있는 것은 검둥이가 무섭기 때문이고.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난로는 꺼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떨었다.
저 검둥이는 참 잘 생겼네! “말조심하시오, 아주머니!” 동시에 나는 두 가지 일을 성취했다. 하나는 내 적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스스로가 하나의 상황을 주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는 것, 만루 홈런감이었다.
뭐라고? 증오와 경멸의 소유자인 나는 버림받는 존재라고? 구걸과 개탄의 대상인 나는 최소한의 인정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그렇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타고난 컴플렉스로 부터 탈출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흑인’임을 당당히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가 늘 인정하기를 망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오직 하나, 나를 알리는 것.
역사 이래로 유태인은 식인행위를 전혀 해보지 않은 인종에 속한다. 자신을 낳아준 아비를 잡아먹다니! 이 정도로도 유태인은 흑인과 다르다. 그런데도 유태인 역시 탄압의 대상이다. 유태인은 사냥감이고 멸절의 대상이며 소각의 대상이라는 것. 그렇지만 이 정도는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 같은 흑인의 경우 우리에게 아예 어떤 기회조차 주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외부세계에 의해 화석화된 인종(화석 천형 주홍글씨)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노예, 외관의 노예인 것이다.
나란 존재는 백인들의 시선 아래서 박살난 지 이미 오래다, 나는 고착화된 존재인 것. 백인들은 절단기를 사용해 나라는 실체를 냉정하게 절편화했다.
검둥이 속옷에서 검둥이 냄새가 난다. 검둥이 이빨은 하얗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내 동료들마저도 나를 거부한다. 그들 역시 백인이 된 지 오래다 그들 역시 백인 여성과 결혼할 꿍꿍이 셈을 가진지 오래다. 그들은 이제 갈색으로 표백되어 가는 아이를 갖게 되리라 누가 알겠는가? 조금씩 그렇게 가다 보면…
흑인 성직자가 경이의 대상이 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지금은 혹인 의사 흑인교수 그리고 흑인 장치가, 항상 흑인 선생이고 흑인 의사고 그렇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인종차별이란 한 인종이 다른 인동에 대해 갖는 근거 없는 증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내 속에 칼날이 번득이고 있음을 느낀다. 이제 내 스스로를 방어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리듬은 감각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동감 넘치는 요소의 원형이다. 리듬은 예술의 일차조건이자 기준이다. 리듬은 살아 있는 것이고 자유로운 것이므로… 리듬이 우리에게 지적인 것과는 가장 거리가 먼 방식으로
순종의 무릎을 꿇는 방법만을 배운 사람들 잘 길들여지고 기독교도화 된 사람들 잡종의 피가 주입 된 사람들…이들이 바로 내 동포들이다.
오늘날 흑인들의 능력은 일보다는 재주 면에서 훨씬 뛰어나다.
백인이 내 아비를 죽였다네
내 아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백인이 내 어미를 겁탈했다네
내 어민 아름다운 여자였으므로
백인이 작열하는 태양의 한 길가에서
내 형을 매질했다네
내 형은 강했으므로
그리고
백인은 내게 다가왔다네 피 묻은 손으로
내 까만 얼굴에 경멸의 침을 내뱉으며
폭군의 목소리로 말했다네
“이봐, 꼬마. 세숫대야, 수건, 물” 이라고
백인과 나를 연결할 수 있는 건 오직 초월뿐이다.
이것이 열등감의 표현일까? 아니다. 비존재의 감정이다. 백인이 선이라면 흑인은 악이다. 손에 총을 쥐고 있는 백인들, 그들은 항상 옳다. 악인은 항상 나이므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나는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 그것뿐이다.
* 흑인과 정신병리-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질병 밑에는 가족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흑인애들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굽신거려”
그러나 사실 “흑인애들은 자기네들이 알아서 굽실거리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흑인은 공포의 대상이자 분노의 매개물이라는 것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태도가 큰형이 막내 동생을 대하는 듯한 태도와 유사함
흑인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그 엄청난 성적 정력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 생식기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흑인의 정력은 환상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미군부대가 있는 도시 뒷골목의 페티엄마 메리엄마 등등을 보았다. 그들은 눈자위가 거무스름했으며 손등이나 팔에 담배불로 지진 자리가 붉거나 이미 갈색으로 낙인 찍혔었다. 그녀들은 늘 끈 떨어진 번쩍이는 끈 나시 드레스식 잠옷을 입은 채 화투나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악을 쓰고 ‘갓뎀’ 욕하며 운다거나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티는 눈이 바비 인형처럼 예뻤다)
유태인이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가 부를 축적하고 싶어 하고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흑인은 불가불 생식기 단계에 고착되어 있다.
흑인은 생물학적 위험을 상징한다. 유태인이 지적인 위험을 상징하듯이 말이다.
흑인은 생물학적인 것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흑인은 아홉 살에 사춘기를 지나 열세살에 아버지가 된다.
흑인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백인여성의 경우, 다시 백인 남성에게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그 여성을 강간하는 주체는 바로 그녀들 자신이다. 성행위 도중 자신의 파트너를 향해 나를 심하게 다뤄줘요“라고 외치는 여성들.
프랑스에서 백색의 상징이 정의 진리 순결 저 사람 몸은 너무 시커머, 저 사람 언어도 시커멓고, 아마 저 사람 영혼도 시커멀거야“ 이것이 백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논리이다. 흑인은 추악함의 상징인 것이다.
‘희생양이라는 본질’
영화에 나타나는 흑인의 본질 혹은 ‘본성’
언제나 하인으로
언제나 비굴하게 알랑거리고 히죽거리며
나, 훔친 적 없어요, 나, 거짓말 안 해요. 라고 사투리를 써가며
언제나 변함없이 “아, 잘 먹었다”고 말하는…
본능,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고 불변적인 것이며 구체적인 것이다. 반면 습관, 그것은 습득되는 것이다.
잘 생긴 흑인은 프랑스 백인의 모임에 초대되기도 한다. 이 모임이 지성인들의 모임이라면 아마 그 흑인은 이런 점을 강조했으리라. 자신의 피부색을 보지 말고 자신의 지성을 보아달라고.
아프리카인들은 그들 자신의 성생활을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과 같은 생리적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다.
결론
흑인은 백인이 되고 싶어 한다. 흑인에겐 단 하나의 운명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인이 되어야 한다는 운명.
얼굴 구조의 정합성 이론이라는 것에 내가 아직도 종속되어야만 하는가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나를 자꾸만 전쟁터로 내모는 세상, 절멸이냐 아니면 승리냐 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만이 남아 있는 세상에.
그토록 끊임없이 연상하고 싶어 하는 “아, 참 잘 먹었다”라고 이빨 빠진 발음을 내뱉는 존재가 아님을
나의 삶은 흑인의 가치를 대변과 차변으로 나누어 무게를 달아보는 대차대조표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
인간을 가두려는 시도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유색인의 불행은 그가 한때 노예로 부려졌었다는 데 있다.
유색인으로서 바라는 것: 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 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뿐이다.
바로 ‘당신’이라는 세계를 건축하도록 나의 자유가 나에게 주어진 것. (내 인생은 내가 ‘디자인’ 한다.
사회혁명은… 그 시적 특성을 과거에서 견인해 오지 않는다. 미래에서 견인해 온다. 과거와 관련한 모든 관행을 벗어버리니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사회혁명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혁명은 세계사의 기억에 의존해 왔다. 그 혁명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각성된 상태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 내용을 정확하게 탐진하기 위해서 19세기의 혁명은 이미 죽은 자들의 손으로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묻게 해야 한다. 과거엔 번지르한 말이 내용을 앞섰지만, 이젠 내용이 말을 앞서야 할 때다.
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라르트의 무월 십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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