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조일리에서

와인향이 있는 가을.. 11월 독토 풍경  
글쓴이: 박영주 조회수 : 85 07.11.06 00:37 http://cafe.daum.net/bbra/IFxM/1420  

사무치는 그리움이

검붉은 피 한 잔

투명한 유리잔 속에 갇혀있다.

눈에서 눈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은빛 세상을 불태우는

사르비아 꽃잎 한 장. (김기희/ 레드와인)




가을이 익어가는 오후

도심의 부산함을 떨쳐버리고

텅 빈 들녘 끝 논두렁 태우는 연기를 헤치고 시골길을 달려

수백년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듯한 큰 느티나무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길을 조심스레 건너

초록빛 잔디밭이 아름다운 조일리 조원장님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와인과 함께하는 독서토론회 특별모임...

잔디밭 위에서 펼쳐진 만찬은 늘 야외 식사의 주방장을 도맡아 온 임승권, 정인화

두 분의 바비큐 조리에 회장님 부부께서 준비해오신 구수한 시래기국, 조원장님

사모님께서 직접 농사지으신 유기농 야채까지 곁들인 황제의 식탁.

거기에 회원들이 가져온 갖가지 와인들이 함께 하니

여기가 지상인가 천국인가...




만찬과 함께 강원장님의 간단한 ‘와인 개론’ 강의가 있었습니다.

와인을 건배할 땐 서로 눈을 마주쳐야 한다네요.

여성회원들이 좀 더 많이 왔더라면

조일리 마을의 밤 하늘에 플래쉬 불빛이 꽤나

많이 터졌을 것 같았는데...


만찬이 끝나자 방안에 둘러앉아

문원장님의 ‘와인 각론’ 강의가 있었습니다.

와인에 관한 자료집까지 준비해오셔서 와인 전반에 대하여 꼼꼼하게  안내해주셨

습니다.   보리밭을 지나가기만 해도 어질 어질해지며 음주운전의 의심을 받을 정

도로 와인에 대하여 무지한 저로서도 마치 '교양인'이 된 듯 가슴 뿌듯해지는 유익

한 강의였습니다.



2부론 11월의 도서인 서경식과 노마필드, 카토 슈이치 공저 “교양,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Y회원은 교양인과 지성인은 개념적으로 조금 차이가 있는데,

이 책에서는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고,

J회원은 교양의 두가지 조건은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는 것과 타자(他者)를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은 학교 교육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교육에서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윤모회원은 “모든 차별은 하나다”라는 선언이 충격적으로 가슴에 다가왔고

그 명제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가치를 충분히 얻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H회원은 이 책에서는 교양교육의 부재와 실패를 질타하고 있지만,

취업전쟁에 목숨을 걸고 있는 우리의 대학 현실에서

과연 학생들에게 어떤 커리큘럼을 현실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는가라고 자문해 볼 때

대안이 없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날 줄 모르는 토론의 열기를 겨우 진정시키고,

류창희님께서 특별히 준비해오신 ‘추성부(秋聲賦)’를

성우 뺨치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문원장

님께서 낭송해주셨습니다.  

가을 밤이 깊었지만 아름다운 분위기에 젖어 동자처럼

대답도 없이 머리를 떨군 채 졸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이어 가을을 음미하는 아름다운 선율들...

정인화 님의 기타 반주와 조성락 원장님의 섹소폰 선율 속에 가을은 점점 깊어가고,

조수완 원장님께서 우리 모임을 위해 큰 맘먹고 장만하셨다는

최신형 노래반주기에 맞추어 회원들이 한가락씩 노래 솜씨를 뽐내었습니다.



와인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섹소폰 선율에 취해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려 뜰 밖으로 나오니

적막속의 시골 밤하늘엔

도심에선 볼 수 없었던 별들이 가을 밤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12월의 책은 "돈가스의 탄생(오카다 데쓰 지음)" 이랍니다.

돈가스를 먹으며 토론회를 해야 제맛이 날 것 같네요.



참석: 조수완 부부, 이을규 부부, 조성락, 윤봉한, 강성호, 문장원, 임승권, 정인화,

류창희, 이재선, 하종명, 권종대,  박영주 , 이웃집 원장님 부부(존함을 깜빡..)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서경실 노마필으 카토슈이치 공저 이목 / 옮김
노마드북스

서문; 학생들 입장에서는 내말이 왜 정답인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출제자들이 원하는 정답을 써 합격점을 받는 게 중요할 뿐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 학력은 생존과 사회적 신분상승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양극화’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승자와 패자’ ‘패자’로 전락되고 싶지 않다면, 인간의 자율성이니 주체성 같은 것에 미련을 두지 말고 재빨리 자신을 효율적인 기계로 만들라.
모든 문제에 관해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유보해놓고 있을 뿐, “그것도 한 가지 사고방식이지요” “다양한 의견들이 있겠는데, 어쨌든 좋은 일 아닙니까?” 라며 정작 자기 의견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애매모호)
지배층이 “다음번엔 전쟁!”이라고 공표하면 그들은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요” 하면서 맹목적인 무저항으로 추종하지는 않을까.

1. 왜, 지금 ‘교양’인가? -서경석-
교양교육의 현재-
‘왜 대학에서 공부하는가?’
‘배움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슨 자격증을 따야 원하는 회사에 취직하는가.
대학과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단순히 실용주의적인 목적만으로 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교육의 목적’-
‘러버럴 아츠 칼리지’ 예술 학예 기예 리버럴 아츠 곧 자유학예 곧 ‘교양’이다.
“자네 태도는 교양주의적” “그건 교양주의에 지나지 않다” 등은 일본에서는 상대방을 비난하는 표현으로 사용.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뜻.
리버럴 아츠란 무엇인가?- 자유인 학예 학문 신사에게 걸 맞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적합하거나 어울리는 상태, 일, 직업을 설명하는 용법으로도 사용.
세련된 지성을 확충하려는 목적에서 리버럴 아츠를 공부하는 행위가 가능했던 인간들은 과거의 경우 오직 ‘프리맨’만이 다시 말해 특권층에 속한 남성 뿐.
심지어 여성마저도 법 앞에서 ‘자유인’입니다. ‘개인’으로 성장해갑니다.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인격체로 성장해간다.
‘리버럴 아츠’의 현대적 의미-
본래 대학이란 그러한 인문교양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목적을 지향하며 노력하는 대학 역시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2 ‘교양’의 재생을 위하여  -카토 슈이치-
‘교양’이란 무엇인가? 녹록하지가 않다. 사전을 보면 ‘교육’이라는 단어와 뜻이 겹치기도 하고, ‘문화’의 의미와 중첩되기도 한다.
고전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독일어로 교양을 ‘빌둥’ 이라고 한다.
조금 달리 학습과 지식을 축적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격을 형성하는 것, 개성 있는 인간이 자아를 실현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학문을 탐구하고 공부하면 인격이 닦아져 자아를 풍성하게 실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이 같은 고전적 전통은 중국에도 뿌리 깊게 존재했고, 1천여 년에 걸쳐 중국의 많은 청년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儒學을 공부, 전형적인 고전문학을 바탕으로 시문을 지었다. 그런데 과거시험에 합격할 정도의 해박한 고전 지식과 시문의 작성 능력이 도대체 국가의 행적업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서는 그 같은 전통이 20세기까지 1천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그것을 일종의 ‘교양주의’라고 보는 것이다.

교양을 죽음으로 몰아내는 두 가지 이유
최근에는 그러한 전통적인 교양 개념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 지금은 회사 사장이 한가로이 그리스어, 라틴어 책을 손에 드는 그런 광경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 고전에 대한 교양교육은 날로 후퇴해가고 학교에서도 그 비중은 크게 낮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고전은 어떤 직업이나 기술에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도움을 주지 않다는 점이다. 일종의 사치로 간주되어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여유가 있는 유한계급의 지적 도락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바뀐 것은 자연과학의 발달이 압도적인 성과를 낳았기 때문.
고전적인 인문교양은 자연과학과 똑 같은 차원에서는 별로 발전한 게 없다. 고전이란 대개는 진보하지 않기 때문이다.《논어》나 셰익스피어 작품들 속의 대화 같은 것들은 변하지 않는 텍스트일 뿐. 고전의 진보란 없으며, 구체적인 문제해결에는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테크놀로지와 연결되면서 사회와 환경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교양주의를 무너뜨리게끔 작동한다. 음풍농월하는 한가로운 인문교양보다는 구체적인 직업과 직결된 실용적 능력을 연마하려는 욕구가 강해지기 때문.
소수 엘리트들이 공부하던 영국의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대체로 오전 중에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대부분 조정이나 럭비 같은 운동수업을 한다. 그런 수업방식의 배경에는 엘리트학생들에게는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어떤 화두만 슬쩍 던져주면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한다.
교양주의와 테크놀로지-
두 가지 문화 테크놀로지 문화와 교양주의 문화
테크놀로지는 여행을 다닐 때 필요한 수단과 방법이다. 그것은 상품을 생산하고 경제적인 부를 창출할 수단은 되겠지만,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나침반이 될 수는 없다.
교양의 재생은 왜 필요한가.
개인이건 사회건 간에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어떤 가치를 최우선으로 내세울 것인가. 교양이 없으면 아무 목적도 없는 능률지상주의 사회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은 1930년대에 중국을 상대로 침략전쟁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 30년 동안이나 중국을 위협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살육을 자행했다. 1945년 무렵 무렵의 일본은 먹을 양식도 부족했고 불과 15년 만에 그 폐허 속에서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했다. 초고속 성장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은 일본인이 지닌 뛰어난 실용적 능력이다. 거꾸로 올바른 목적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교양주의적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무능하다
우린 현대인들에게는 교양인으로서 갖춰야 할 몇 가지 핵심적인 화두. 화두는 ‘자유’이다. 시와 문학 속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고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정신은 문학예술 작품 속에서는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다. 당연히 문학과 예술을 향유하거나 창조하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상의 세계 속에서의 자유다. 그리고 그 상상 속의 자유는 사회 속의 자유로 이어져 간다. 사회 속 개인의 자유, 그것이 바로 인권이다. 인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다.
다음의 화두는 ‘상상력’이다.
★또 ‘차별’이다. 민족차별 남녀차별 계급차별 인종차별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모든 차별은 하나다.

3.전쟁과 교양-노마필드-
‘교양’과 ‘문화’는 어떻게 다른가.
의식주를 비롯하여 기술 학문 예술 도덕 종교 정치 등의 생활양식과 내용을 포함한다. 문명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나, 서양에서는 인간의 정신생활과 연관된 것을 문화라 부르면서 기술적 발전의 의미가 강한 문명과는 구별한다.
문학을 통해 정신적 내면성의 자유와 타자에 대한 상상력 그리고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상상력의 역할을 강조했다. 상상력(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 허구)
불평등의 수많은 폐해들 가운데 하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결핍이다. 내 자신과 동떨어져 있으면 타인의 고통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타자’ 란 양심적인 사람이 비판을 전제로 사용하는 말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빈곤한 사람들,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여지가 없는 사람들 빈곤하다는 것은 결코 근사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공고하게 매달려 사는 중산계급의 생활, 매달려 있다는 사실과 매달려 사는 삶의 내용,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없는 만큼, ‘고급’한 문화활동에 정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이 없다’는 것 역시 일종의 허상. 늘 불안에 쫓기고 시달리면서 좀 더 빨리, 더 근사하게, 조금 더 많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낙오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하며 초조한 날들을 보내는 것이 중산계급의 잿빛 현실은 아닐까?
지천명이 된 나로서도, 지금의 생활을 잃고 싶지않다 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내 생활이 위협받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근본적인 변혁에 참가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공허한 바람을 간직해 왔다.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난 뒤 도쿄가 거리 사람들의 옷차림도 소박해졌다. 이것을 “무력감”이라며 단순히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오랜 역사 속에서 자라난 풍성한 서민생활을 새로운 형태로 살려낼 기회 역시 교양의 창조다.

4. 교양은 무엇을 해결해 줄 것인가?
이과에서는 문학수업이라던가 역사 수업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제대로 된 대화마저도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당장 응급처치. ‘하루 한 권 주의’ 번역서로 몇 번인가 읽고 응급처치를 했던 것이 내 교양의 출발점. ‘다른 사람한테서 전해 듣는 것’ 하고는 다른 차원.
다른 누군가의 이해를 거치지 않고 제 힘만으로 고전을 읽는다는 게, 그것도 마지막까지 통독한다는 것. 철저한 무신론, 이를테면 과학적 발상.
필요하다면, 프랑스어나 라틴어라도 읽을 수 있어야한다. 나 스스로를 가둬두고 있는 국가나 사회를 밖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시각을 키우는 일.
특권계층에게만 허용되던 교양 평등한 가운데 누구든 접근 가능한 것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테크놀로지는 필연적으로 전문화를 요청합니다. 전문 ‘家’가 아니라, 전문‘化’ 즉 스페셜라이제이션이지요. 그것은 성큼성큼 앞서 나갑니다. 만일에 교양이라는 개념을 과학적 지식의 전문화와 대립적으로 생각하면, 승부는 교양의 패배밖엔 나올 게 없지요. 교양이라는 건 전문 영역 사이를 움직일 때, 요컨대 경계를 넘나들기.
★인간관계 속세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연애도 해야 할 것이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야 해요. 거기에 교양이 없다면, 삶은 참혹한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사르트르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엔 쉬지 않고 사고했다” 결국 그 말은 주변 사물에 대해 항상 호기심이 생생하게 작동했다는 뜻.
테크놀로지는 군사력에 이용되고 군사력은 그것을 직접 반영하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미래가 어둡다.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출구는 없다. 만일 출구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교양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교양은 정글의 법칙 곧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인류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
교양이 엘리트의 독점물이나 특권층의 자기변호를 위한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 ‘타자’ 라는 정의. 교양의 필수조건.
자유로이 문학작품의 등장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고, 이른바 타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즐거움 그리고 그런 상상력을 확장해가면서 동시에 못 보던 사물이 보이고 납득하지 못했던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쁨을 어떻게든 전달해 주는, 바람직한 ★ 교양이란 다양한 영역, 다양한 문화 사이를 오갈 때의 자유로움, 일종의 유연함.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보는 것. 恕.

5. 현대의 교양이란 무엇인가? -서경석-
‘교양’ 을 영어로는 ‘리버럴 아츠’ 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일반교양’ 또는 ‘종합교양’ 미국에서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
교양이라는 것은 극히 한정된 특권계급의, 그것도 남성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고, 그것은 노예적 혹은 기계적인 노동에 봉사하는 지식이나 학문과는 대립하는 개념.
‘배움 그 자체를 위하여 배우는’ 행위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키워낼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인 셈.
★일반 서민, 성별을 불문하고 소위 평균적인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자유인으로 육성 가능한가 하는 문제.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양이 필요. ‘인생의 목적, 다시 말해 왜 살아가는지,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사람’
자기 스스로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 그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있는 각자가 되어주는 것이 인문교양의 목적이다.
‘휴머니즘이란 인간의 기계화로부터 인간을 옹호하는 인간의 상상’ 인간은 도구가 아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왕왕 기계로 변하기 십상이다.
지난날의 교양은 제한된 소수 엘리트 특권계급의 남성만이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과거 특권계급의 남성만이 향유하던 이문교양이 이 같은 냉혹한 시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참고로 남편친구들이 나를 칭하기를 “교양덩어리”
꼭 이렇게 스스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