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영 hisong999@hanmail.net

휴전 협정 3년 후, 경남 울주군 언양면의 한미한 집안에서 출생하여 울산에서 유년기를 보냄.
초등학교 입학무렵 상경, 죽 서울서 버티다 얼마 전부터 홍천강변의 누옥에서 묵새기고 있슴.
홍익대학교 교육대학원 수료로 제도권 교육을 마감함
십수년간 소일하던 얼치기 화가 노릇을 접고 2004년 '현대수필'로 등단, 오늘에 이름.


그 여자의 말뚝 


   딱따구리가 야무지게 나무를 찍는 것 같은 소리에 잠이 깼다. 잠자리를 걷고 일어나려는데 ‘딱 딱’ 오금을 박는 목소리가 다시 아침 공기를 갈랐다. 그녀가 돌아왔나보다. 논에 모도 얼추 자리를 잡았고, 한 숨 돌리는 참에 서울 다녀온다며 나섰는데 좀 지체한 게 화근이었다. 그동안 채마밭은 풀이 무성하고 제때 옮겨 심지 않은 들깨는 누렇게 부황이 들어있었다. 이틀 내린 빗밑인데도 물꼬를 제대로 터주지 않은 게 더 부아를 돋운 것 같았다.
“ 들깨 좀 옮겨 심으면 어디가 덧나나.”
“ 풀은 키워 내다 팔겨.”
  그녀는 논으로, 텃밭으로, 뒤꼍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며 말총을 쏘아 댔다. 응사가 없는 걸 보니 그녀의 표적은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겼다. 그래도 난사된 총알이 퍽퍽 깨밭에 박히고, 밤나무를 관통하고, 우리 집 마당에도 유탄이 날아왔다. 담장 너머로 밭에서 잠시 허리를 편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흙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엄지부터 차례로 꼽아가며 아들 딸 집으로 휘돌아 온 그간의 바쁜 일정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종내는 남편 흉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아, 그래 좀 늦었더니 죄 엉망이야. 저 들깨 꼴 좀 봐. 내 없는 새 옮겨 심었으면 오죽이나 좋아.”
그쯤에서 그의 역성을 들어주어야할 것 같아 한 마디 거들었다.
“ 아저씨도 그냥 놀지 않으셨어요. 논으로 밭으로 꽤 바쁘신 것 같던데…….”
“ 분주다사지 뭐. 그 양반은 그냥 말뚝건달이야.”
“ 네? 무슨 도사라고요. 말뚝이는 또 뭐예요.”
“ 아니 분주다사(奔走多事). 하는 일 없이 이리저리 바쁘기만 하다고. 실속도 없이.”
  우리는 웃고 말았다.
  그녀가 오고 사흘도 안돼 모살이가 좋아지고, 텃밭도 예전의 활기를 찾았다.  밭고랑을 메운 풀이 머리채가 잡혀 끌려나오고, 들깨가 널찍하게 새 자리를 찾아들었다. 시난고난하던 파도 빳빳하게 일어났다. 그에 비해 연일 집중포화를 맞은 그녀의 말뚝은 혼자 왔다 갔다 하던 때보다 표 나게 풀이 죽었다.
  평균치에 훨씬 못 미치는 체구의 그녀는 어디 한군데 진득이 살 붙은 데라곤 없다. 그건 워낙 몸이 재바른 그녀에게 살이 붙어있을 새가 없어서다. 그녀는 땡볕을 무서워하지 않고 논밭을 돌보고 틈틈이 품도 팔고, 도로 공사 현장에도 나간다. 남의 밭에서, 자기 논에서, 장독대에서 수시로 출몰하며 가공할 노동량을 소화하는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녀의 경이로운 노동이 없었다면 자식 공부시키고 집칸이라도 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그녀의 ‘말뚝 건달’은 도대체 뭐하냐고? 그로 말하자면 동네 최고의 인텔리겐치아이면서 로맨티시스트이다. 그는 나름대로 화려했던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거나 시국을 개탄하느라 집일은 뒷전이다. 집 앞에 내놓은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그를 보면 개미귀신이 연상된다. 파라솔 그늘에 숨어 마치 사람이 굴러들어오길 기다리는 것 같아서다. 바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은 그 집 앞을 지날 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잠깐 곁을 주면 커피 한 잔 곁들여 길고 지루한 시국 강연을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긴 옹색한 땅(수로 옆이나 포장도로 옆, 또는 밭과 길의 경계)에 각종 화초를 심고 보살피는 것도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낮 술 몇 잔에 흥얼거리며 곧잘 풍류도 즐긴다.
  그에게는 조선시대 사대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선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는 낡은 논어나 맹자, 육법전서가 그의 지적 토대를 말해준다. 그들의 생활방식의 하나인 가정경제를 돌보지 않는 불치가산(不治家産)도 꿋꿋이 실현하고 있지 않은가. 관을 상대로 심심치 않게 올리는 ‘상소’도 그가 구시대의 중심세력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가장으로서의 소임에 대한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는, 아내의 강도 높은 잔소리에 대응하는 태도에서도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어떤 모멸의 순간에도 결코 담장 밖으로 큰 소리를 내보내지 않음으로써 선비의 품위를 지킨다. 한번은 아내에게 푸진 잔소리를 듣고 공자 마누라도 악처였다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내에게 핍박받는다는 점에서도 시대를 뛰어넘어 성현과 동질감을 느끼는 듯 했다.
  가을걷이로 나남 없이 바쁜 날, 오후 내내 투덕투덕 뭔가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자기키보다 한 뼘은 큰 도리깨로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콩을 터는 중이었다.  그는 ‘국가백년지대계(國家百年之大計)’를 논하러 동창회에 갔는지 또 안 보였다.
내가 시킨 일도 아닌데 땀 흘리는 그녀에게 괜스레 미안해 쩔쩔 맸다.
  “아휴, 힘든데 좀 쉬었다 하세요.”
  그녀는 촌에서는 쉬는 게 바보짓이라며 도리깨를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쉭쉭’ 하늘을 가르는 도리깨는 그녀의 말뚝을 겨냥한 것 같았다. 아니, 항상 빈둥거리는 나를 향한 건가? 돌아서는데 뒷덜미가 서늘했다.
  
   요즘 동네가 조용하다. 남편을 닦달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다. 그가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서울 딸집에 머물며 침을 맞으러 다닌단다. 항상 의기양양해 다니던 그녀의 잰 걸음걸이에 힘이 빠진 것 같다. 그리 못마땅한 남편이 눈에 안 보이니 시원해할 만도 한데 파리를 씹은 얼굴이다.  
   항상 골목 어귀를 지키던 그녀의 말뚝이 없는데 나는 또 왜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지. 들고 날 때마다 운동모자의 챙을 들었다 놓으며 인사를 놓치지 않는, 그 깍듯한 예절과 지극한 자상함도 꽤 성가셨는데……. 막상 안보이니 매사에 분별력 있고 하늘 아래 모르는 게 없는 척해도 돈이 곧 인격인 세상, 힘 센 사람들이 경영하는 세상에서 고개 똑 바로 들고 살아가기가 꽤나 고달팠을 그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입으로 사는 의고적(擬古的) 인간인 그나 한 공기 밥보다 못한 글이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나나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는가.
  가재미눈으로 그를 흘깃거렸던 날이 언제였던가. 나는 그녀의 말뚝이, 내 동지가 어서 건강을 회복해 파라솔 밑에 다시 앉기를 기다린다.    




  수행자                                                    

우리 집안은 숙면(熟眠)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자상하게 설명을 덧붙이자면, 잠을 잘 잘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뿐 아니라 때를 가리지 않고 자도, 많이 자도 비난하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오래전부터 정착된 잠에 관한한 너그러운 가풍은 다양한 방식으로 식구들을 배려했다. 우선 등교시간 외에는 잠을 자는데 방해를 받지 않았다. 밥 때가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면 한 끼를 포기시키더라도 계속 자도록 조치했다.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든지, 놀다가 쓰러져 자든지 아무튼 집안 식구 중에서 누군가 자고 있으면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일찍이 할머니는 룸펜 삼촌이 낮잠을 자는 머리맡에서
  “ 야는 잠 하나는 잘 잔다 아이가 ”라며 대견해 하셨다. 한창 일할 나이의 청년이 대낮에 코를 고는데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음으로써 가계의 전통을 성실하게 계승하고 있음을 증명하셨다. 어머니도 시어머니의 가르침에 충실해 잠자는 것에 대해서만은 말을 아꼈다. 내일이 시험인데도 쿨쿨 자고 있으면  깨우는 걸 자제했다. 책상에 엎드리면서 몇 시에 꼭 깨워달라고 당부를 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시간이 되어 두어 번 흔들어 보다가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의자에서 끌어내려 이불속에 넣어 버렸다. 성적이 엉망이 되는데 기여한 어머니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부끄러운 걸 알 나이였던 것 같다. 안방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 얼굴이 간지러워 눈을 떴는데, 방안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친척 아저씨였다. 아마 아저씨의 우려 섞인 눈빛 때문에 잠이 깬 것 같았다. 어머니는 과일이라도 깎으러 부엌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민망한 얼굴로 일어나려는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단박 아픈 사람이 되어야 했다.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이젠 좀 괜찮다고 했다.  연출된, 기운 없는 걸음걸이로 안방을 물러 나오면서 기가 막혔다. 손님이 왔으면 깨워서 딴 방으로 보내야지 입을 벌리고 자는 나를 그냥 안방에 방치해 놓다니.
어머니는 그런 식이었다. 정리정돈을 똑바로 해라. 깨끗이 씻어라. 밥을 남기지 마라. 공부 좀 해라. 신발 제자리에 벗어 놓아라.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행동을 규제하면서도 자고 있으면 조용했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 어머니가 내 방에 들어오는 기색이 있으면 잠든 시늉을 한 적도 많다. 그러면 무슨 용무가 있어 기세 좋게 열고 들어왔던 문을 가만히 닫아주고 발소리를 죽였다.  
달라이 라마가 ‘잠은 최고의 수양修養’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그럼, 할머니나 어머니는 자손들의 정신 수양을 위해 잠에 관한한 그리 너그러웠나.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일년에 한 번, 초파일에나 절에 가는 고부가 달라이 라마의 수행에 관한 아포리즘까지 꾀고 있을 리가 없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할머니와 어머니는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굳게 믿었음 직하다. 많은 자식을 욕심껏 챙겨주지 못하니 보약 대신 잠이라도  실컷 재우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잠 하나는 실컷 자면서 자랐고, 지금도 남보다 많이 자고 있다. 살아오면서 계속 숙면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나는 생겨먹길 잠이 많게 생겼다. 쓸데없이 눈이 크고 눈 꼬리가 쳐진데다가 속눈썹이 빗자루처럼 매달려 있어 조금만 피곤하면 스르르 눈에 힘이 풀린다. 그래서인지 내 눈을 보면 멀쩡하다가도 졸린다는 사람이 있다.        
잠이 많은 사람은 대게 게으르다. 게으른 사람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기보다 안주하기를 즐긴다. 나는 잠(게으름의 다른 이름)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친 적도 많다. 그렇지만 능력도 없으면서 무리하게 일을 도모해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보니 얼굴이 뜨뜻한 게 아무래도 자랑할 일은 아니지 싶다.
잠이 많아서 게으른지, 게을러서 잠이 많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신 수양’은 매일 매일 모자라지 않게 잘 하고 있다. 이렇게 성실히 修行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득도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순조로웠던 수행에 장애가 생겼다. 별다른 갱년기 증세가 없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하필 불면증이라는 복병이 내습할 줄이야. 잠을 못이루고 전전반측하는 밤이 무룻 기하이며 신새벽에 홀로 깨어 마당을 내다보다 아침을 맞는 일이 예사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벽에 걸려있는 보왕삼매론이 나를 그윽히 내려다 보고 있다.
   수행하는데 마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 지지 못한다.
   성인이 말씀하시길 마군으로써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역시 득도는 만만한 길이 아니다.  






     내가 선호하는 뒤처리 방식

나온 순서도, 업적과 죄질에도 상관없이 황망히 하늘로 불려 올라가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게다가 이미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을 반 넘어 소비하지 않았는가. 요즘 들어 부쩍 죽음의 뒤처리 방식을 두고 생각이 많아진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때, 내가 묻힐 서너 평의 땅을 탐낸 적이 있다. 햇살 가득한 숲길에서 은초롱꽃 화관을 쓰고 어린 고사리를 품은 봉분과 만났다. 세월이 쌓이고 쌓여 푹신해진 꽃 무덤의 발치에 앉아 다리쉼을 했다. 찬기가 가신 따끈한 햇볕을 쓰고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편안하고 졸음이 왔다. 나중에 이런 자리에 눕고 싶다. 두툼한 땟장을 덮고, 산새 소리를 들으며, 철따라 정수리에 꽃을 피우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긴 길을 시름없이 내려다보았으면…. 철없던 시절이었다.
  내게는 이제 반들반들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가족 납골묘가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볼 때마다 그 형식이 영 탐탁치 않다. 우선 견고하고 무거운 돌로 둘러친 공간이 많이 갑갑해 보여서다. 영혼의 드나듬도 원천봉쇄할 것 같은 거기에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지레 숨길이 가빠진다. 그뿐인가. 삼대를 넉넉하게 수용할 그 돌상자 속에서 또 다시 이승에서 맺은 인연들과 부대껴야 할 것 같아 절로 손사래가 쳐진다. 그보다 돌무덤을 꺼리는 좀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흙무덤처럼 풍화되어 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집중포화를 맞지 않는 한 몇 백 년, 아니 천 년쯤은 족히 버틸 것 같은 대리석 무덤 속의 돌 항아리에 길이길이 남길 만큼 내 ‘가루’가 대단치 않아서이다.
  평소에 입맛이 당기는 건 풍장(風葬)이나 조장(鳥葬)처럼 자연의 호흡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 거칠 것 없는 너른 벌판이나 산정에서, 바람에 말라가는 나를 떠올려보면 생의 체증이 가라앉은 듯 가슴이 시원해진다. 여기에 황동규의 <풍장>의 권위를 빌려보자. “바람 이불 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 작정을 하면 죽음이 더할 수 없이 근사하게 다가온다. 이 방식이 끌리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덮어놓고 고집할 수가 없다. 내 시신을 처리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을 많이 번거롭게 할 것 같아서다. 우선 시체를 버려도 누가 되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비용도 그렇고 시간도 많이 할애해야 하니 경제적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는 방식이다.
  경제를 따지자면 시베리아 유목민처럼 마지막 살점 하나까지 가까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가는 합리적인 방식이 있다. 그런데 내 주위에는 시신의 살점을 기꺼이 받아먹을 만큼 굶주리거나 비위 좋은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점이다.
  존경하는 어떤 유명 인사는 그냥 거적에 둘둘 말아 해부용으로 병원에 넘기라고 했다. 이 방식은 의학 발전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고려해 볼만하다. 하필 이때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질 게 뭐람. 젊은 의학도들이 빙 둘러서서 벌거벗겨진 나를 이리저리 헤쳐본다고 생각하니 어째 좀 부끄럽고 민망하다. 아직 어쭙잖은 여성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수장에 무게를 둔 적도 있다. 그냥 물에 ‘휙’ 던져 수질을 오염시키라는 의미로 오해하지 마시길. 부언하자면 수목장(樹木葬), 산림장(山林葬)이라고 풀 수 있다. 따지고 보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세상에 별로 이롭지 못했으니 가면서 나무의 거름이라도 되는 게 그래도 생산적인 일이지 싶었다. 남쪽 지방에 사는 어떤 이는 자기를 묻고 은행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오래 살고 수형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데다 낙엽 질 때 찬란하고 열매까지 열려서란다. 그는 꽤 알아주는, 경지에 오른 예술가이니 좋은 수종(樹種)을 선택할 자격이 있다. 내 처지로는 취향을 입에 올리기도 면구스럽다. 길가의 복숭아나무 밑이건 깊은 산속의 참나무 밑이건 상관없다. 아주 푹 잘 썩어 실한 과실을 맺게 해 지나가는 길손에게 보시할 수 있거나, 다람쥐 배를 채워줄 수 있다면 아마 내가 한 일 중 제일 잘한 일이지 싶은데…. 그도 여의치 않다. 아무 나무 밑에나 묻어버리는 건 명백하게 국법을 어기는 범죄행위가 아닌가.
  그래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밥풀장’이다.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곱게 빻은 내 가루를 묻혀 숲 속에 뿌리는 거다. 출출한 새가 포르릉 내려 앉아 고물 묻은 밥풀을 물고 가는 걸 상상하니 흐믓하다.  

  장황한 사색의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해도 내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뒤처리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평생 부부가 불화하던 친척아저씨는 죽으면 절대 선산에 묻지 말라고 당부했다. 죽어서까지 또 아내와 나란히 자리하고 싶지 않다며 반드시 화장해서 산에 뿌리라고 자식들에게 오금을 박곤 했다. 만약 명을 어기면, 귀신이 되어 찾아와 해코지하겠다는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곁들였다. 아저씨가 먼저 죽자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지 않는 자식들은 아비를 선산에 ‘땅,땅’ 묻어버렸다. 남편 옆에 미리 마련한 자기 자리에 흡족해하며 아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나.
  아마 나도 도리와 편의에 따라, 인연이 지은 돌무덤에 길이길이 뼛가루를 남기기 십상이다.  이미 내가 없으니, 그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류창희   2008-10-15 07:54:36
송혜영님의 글을 올려달라는
애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우선 세편만 올렸습니다.
빙호   2008-10-16 12:13:35
그림을 보듯 선명하게 다가서는 영상이 있어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작가의 문장력과 사유가 탐나 몇 번을 읽어도
감히 흉내낼 수 없기에 아둔한 감성만 탓해 봅니다.
좋은 수필, 잘 읽었습니다.
풍경   2008-10-16 15:21:38
찬찬히 읽자고 아침에 프린트 해서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에 읽고 또 읽었네요.
작가는 그냥 척 앉으면 글을 술술 풀어낸 것 같이,
마주 앉아 이야기 하듯 쓴 것 같으면서도
읽고나면 아하! 이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류창희   2008-10-16 18:41:00
빙호님 풍경님
그리고 글을 올리도록 허락해주신 송혜영님
모두 고맙습니다.

가을햇살이 좋은 날
야외 조각공원을 가로질러 박물관이 있는
문화벨트에서
가을 하늘을 보고
고추잠자리도 보고
허브향도 맡고 ...
그리고 말했지요.

"글이 좋으면 언제 어디서든 살아있다고 ... "
호미   2008-10-16 19:45:17
글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동감이 가는 부분들에서 키들거리며 웃노라니
옆자리의 내 "말뚝"이가 제 컴터를 훔쳐 봅니다.
좋은 글을 읽는 행복감에 감사 드립니다.

류창희 쌤 덕분에
좋은 글 많이 읽게 되는군요.
모두에게 감사 드립니다.
송혜영   2008-10-16 20:47:22
빙호, 풍경, 호미님,
모자라는 글,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저는 재미없게 쓰면 누가 잡아간다고 을러대서 컴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답니다.
요즘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류쌤, 고선생님 응원 덕에 살아났습니다.
아! 다시 책상에 앉아야지.^ ^
호미   2008-10-20 20:32:09
송혜영 쌤!
(이렇게 호칭해도 되나요? 우리 쌤 칭구니까....)

덧글 달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콩달콩 맛이 살아나는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인연이 되면 쌤의 싸인이 담긴 책도 읽구 싶어요.
- 류 창희 쌤의 싸인은 너무 멋지더군요.

사진으로 뵙는 쌤의 미소가 엄청 정겨워요.
좋은 글 기대하며....
류창희   2008-10-21 19:00:23
호미님
송혜영님에게 꼭 친필로 이왕이면 보는자리에서
멋진 싸인하시라 할게요^^*
사진도 찍어드리면서...
감솨
자하연   2008-10-25 21:40:27
송혜영님.
절여 놓은 배추처럼 척척 처지는 제 글에 한 참 지쳐가고 있는데
선생님의 글을 따라 가다 보니 생기 있는 물기가 쭉 올라오는 듯 합니다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온 풀'을 보고 툭- 웃음이 터지네요
오래전 채마밭을 손좀 보라는 어머님 말씀에
풀인지 싹인지도 분간 못하는 새댁이
첩실 집 쳐들어간 조강지처처럼 온통 손에 잡히는 대로
머리채를 뽑아 난장을 부렸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올해 남은 시간동안
'그 여자의 말뜩' 같은 이야기 하나 풀어 낼 수 있다면
기꺼이 한 살 더 먹어 줄수 있을텐데...
우째 제 글방에는 빈 깡통소리만 더 요란합니다.
송혜영   2008-11-03 18:05:02
호미님께 사인 들어간 책 선물하기 위해서라고 열씸히 써야겠네요.^ ^
자하연님의 표현법이 저보다 한 수 위이십니다.
'첩실 집 쳐들어간 조강지처처럼'ㅎㅎ
뵙지는 않았지만 뵈온 듯 정겨운 분들 즐거운 나날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