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요로코롬 예쁜 두녀석
학교에 갔다오는 짝지인것 같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핼로우~ 핼로우~ 마담^^"
ㅋㄷㅋㄷ
말을 건다
우리나라 사턍한개씩 나눠먹으니 환하게 웃는다
인도는 아이나 어른이나
외극인을 보면 말을 걸고 웃는다
델리에서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 갔다
남인도의 음식을 시켰더니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바삭바삭 카랑카랑
화려하다
안의 내용이라야 별로 없지만
색다른 경험이다
나는 얼굴은 팅팅 붓고
지쳐 금세 쓰러질듯 했지만
기분 꽤 괜찮았다
길거리 라시만 사 먹다가
정식 라시를 시켜 먹는데
역시 길거리 음식이 맛이 더 있다
마치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이 훨씬 맛있는 것처럼
세계적인 체인점이 몇십인가 몇백개라고 하는데
썩 만족했다
바라나시에서 델리로 가는 기차안의
1등국민,
ㅋ 도도하고 자만심에 가득찬 일등석 꼬마친구다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한편 떼어 쓸것이다
그 꼬마 친구가 찍어준 흔들리는 사진
델리역에 짐을 맡기고
선물용 홍차를 사러갔다
그곳은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많다
먼저 책자를 보고
그리고 시음한다
한국에 들어와 누구에게 선물하니
왜? 비싼차 안 사오고 "싼차"를 사왔느냐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간판에 '싼차'라고 적혔다
델리 시민공원이다
시내중심가에 동그란 모양으로 들어앉아 있다
그리고 동 서 남 북 으로 구분한다
카스트제도가 분명한 동네라 그런지
가는 곳곳마다 물이 다르다
젊은이 학생 아이가 있는 가족들 노인들 ...
자이뿌르 우다이뿌르 카주라호
등등에서 본 빨간 사리를 입은
토속적인 촌 사람들은 별로 없다
남자 여자 차별도 없다
이곳은 청바지와 자유와
각자 다른 빛깔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모인 델리다
인도의 마지막 사진은
귀요미 소녀들이다
이 소녀들의 옷차림과 눈빛과 미소는
전혀 이국적이지 않다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친근감이다
인도에 들어가는 사람들
처음에 델리 공항에 도착한 밤에
대부분 예상보다 훨씬 험악한 환경에 놀란다
다니면서 만난 여학생이나 여선생님들은
델리에 도착하여 울었다고 말했다
우리 부부도 첫날, 잔뜩 겁에 질려 절절맸던 기억이 있다
무법천지, 시끄러움, 성추행, 지저분함
자유여행 23일 만에 다시 제자리 델리로 돌아오니
해 냈다는 기쁨
인도를 두고 떠나야하는 아쉬움
만감이 교차한다
가지고 갔던 허름한 짐들
입고 있는 옷
무엇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경험했던 추억들
어느 것은 날아가고
어느 것은 싣고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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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공존의 도시 델리
아침 남인도식 음식. 우리가 인도에 머무는 동안, 가장 멋진 메뉴와 디스플레이가 훌륭했다. 그 음식점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인도 음식을 평생 무시했을 것 같다. 새벽 5시에 도착예정인 기차가 신통방통 기특하게도 4시간 밖에 연착을 안했다. 짐을 기차역 키핑룸에 맡기고 아침 겸 점싱을 먹고 홍차로 유명한 ‘산차’(델리 시내에 안내책자와 지명과 지도를 펼쳐보여도 릭샤꾼들이 잘 모른다.) 집에서 양손 가득, 티백 녹차를 샀다.
가격은 인도의 물가가 아주 저렴하지만(우리나라 녹차는 가격이 너무 비싸다), 인도 배낭여행객은 이쑤시개 하나도 짐이라고 생각할 만큼 고된데 부피가 장난이 아니다. 할 수 없이 인도식 비닐 큰 가방을 하나 사서 몽땅 주워담아 컨츄럴시티 공원에 갔다. 짜이나 커피장사보다 가방이 크다. 나는 남편보고 “삶은 계란이나 칠성 사이다 있어요.” 외치라고 놀렸다.
그 찻집에는 동양인보다 서양사람들이 더 많다. 영국의 홍차를 보급하는 회사다. 이럴 때는 집의 작은 아들 성욱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엄마, 뭐 선물 사려고 시간 빼앗기고 머리 아프지 마세요. 많이 보고 맛있는 것 먹고 무조건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아이는 여행의 첫째 조건이 '재미'라고 말한다. 한국에 있는 사람 상황 그런 것들을 싹 잊고 주어진 시간에 재미니즘이 되라는 지론이다.
그런데 입국하기 하루 이틀은 사람들이 다 떠으른다.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한 사람 한 사람 떠 올리다 보면, 사실 마음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 나중에는 단체모임까지 신경이 쓰인다. 우리 아이들은 하다못해 신혼여행 다녀오면서도 과자부스러기 하나도 사오지 않았다. 절 값까지 두둑하게 줬는데, 서운한 마음도 한켠 가져졌었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도 현명한 일이다. 다른 날 잘하면 되지, 생일 어버이날 명절날 돈 치레 격식 치레할 필요가 없다.
근데 나는 아직, 인류애가 발동한다. 온 인류가 다 우리부부가 여행하는 것을 아는 것 같아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그중 가장 신경쓰이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시댁식구들이다. 다른 친지들에게 주듯이 티백이 아닌 그 매장에서 가장 고급 홍차를 샀다. 받는 사람은 별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매번 내 수준에서 가장 고급을 산다. 사실 나는 내가 선물하는 것들을 내 손에는 지닌 적이 별로 없다. 선물이라는 것은 그만큼 마음부담이 크다. 나도 꼭 하나 가지고 싶은 것을 선물한다. 그러나 내가 만만하게 가질 물건은 아니다.
짐 핑계를 대고 몇 시간째 잔디밭에 누웠다가 앉았다가 여유를 누리고 있다. 비행기 시간까지는 두 끼 해결할 시간 정도가 남았다. 일단, 이 공원에는 한국말이 안 들린다. 현지인도 주민들의 휴식처 같다. 담요를 뒤집어쓴 성자와 같은 사람들도 없고, 사리를 칭칭 감은 인도 여인들도 없다. 여느 유럽인들의 자유처럼 도시화한 곳이다. 잔디밭이 코너마다 여러 개가 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연령층 남녀 아이들이 있는 곳이 암암리에 나뉘어 있다.
남자들만 거리에 쏘다니고 외국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거지가 따라붙고 호객행위를 하고 뚫어지라 쳐다보던 인도인들의 시선따위는 없다. 삼삼오오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혼자 책을 읽거나, 각자 다 다른 짓을 한다. 그리고 관심도 아는 체도 안 한다. 한쪽 잔디밭에서는 춘화도를 보듯, 서로 엉겨붙어 애정행각도 자유롭다. 두리번거리며 촌스럽게 구경하는 족속은 나와 남편인 여행객 뿐이다. 센츄럴 파크 공원의 풍경은 또 다른 인도다.
길을 잃었을 때, 전혀 방향 감각이 없다. 여행객 중에 한국대학생들이 나침반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며 참 별나다는 생각을 했다. 신호등은 있으나 신호를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차선은 있으나 차선을 지키는 차도 없다. 차와 릭샤와 사이클릭사와 사람과 소가 같이 섞여,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니 내비게이션이 다 뭔가. 그중 가장 신기한 것은 차나 오트릭샤에 사이드미러가 없다. 있는 고급 차도 있기는 하지만 사이드미러로 보고 운전할 만큼 상황이 옆을 볼 여우가 없다. 사이드미러는 치고 지나가라는 신호 같다. 그래도 빵빵거리며 모두 운전을 잘한다. 어느 것도 내가 지나간다고 신호음을 안 내는 물건이 없다.
처음 인도에 내렸을 때 빵빵거리는 소음으로 인도는 적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거리환경이 열악해도 나는 그 가운데 나침반을 가진듯 안심하는 것이 있다. 거리에서 자주 흔히 볼 수 있는 현대자동차 로고이다. ‘저 차 뒤꽁무니만 쫓아가면, 어째도 울산까지는 안 가지겠나?’ 하는 안심이다. 까마귀도 고형까마귀는 반갑다고, 인도사람이 죽으러 바라나시로 향하듯이, 현대자동차는 울산현대공장으로 갈 것만 같다.
택배뿐만 아니라 지하철 버스 정기 노선, 아무튼 대중교통은 릭샤다. 릭샤가 문도 없고 사이드미러도 없고 비바람 다 맞아도 가장 믿음직스럽다. 사통팔달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들면 항의할 수도 있고 정 마음에 안 들면 후딱! 뛰어내릴 수도 있다. 다치지 않으면 죽는 것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 수단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길거리에 5~60권의 책을 소꿉놀이하듯, 죽 늘어놓고 판다. 그중 한글이 보여 얼른 집어들었다. ‘인도여행’ 이라는 한글에 꼭 세종대왕을 만났것처럼 설렌다. 누렇게 변하여 들춰보니 96도 판이다. 한 달 전에 다녀 온 인도도 변하는데 17년 전의 인도라니…. 역시, 인도답다.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강수연과 같은 여인을 바라나시에서 만났다. 식당에서 몇 번 마주칠 때 눈여겨봤다. 모자를 쓴 모습은 그냥 나보다 서너 살 위일것이다. 하지만 눈빛은 결코 예사롭지 아니한 그런 여인이었다. 모자를 벗는 순간 부럽게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까까머리'다. 그녀는 대여섯 명의 남녀 일행들과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 교육기관장들 같았다. 며칠 뒤 보니 우리가 묵는 숙소카페에서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신다.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인도생활 며칠 째냐? 그녀는 내가 여행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며 자신은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한다. 금세 친구가 되고 싶은 따뜻하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뾰족뾰족 까까머리가 제법 밤송이 같다.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인도로 들어오기 전날 박박 밀었다고 한다. “머리카락도 순톱과 발톱 같아서, 깎으면 자라는데 더 늙기 전에 한번 꼭 깎아보고 싶었다며 자신도 아주 만족해한다. 나는 그녀와 이야기 하는 순간, 또 하나의 꿈을 품었다. 꼭 머리 빡빡 밀고 인도를 다시 오자.
인도 델리의 빠아르간즈, 배낭여행객을 위 정거장 같은 곳, 숙소 찾는 것이 가장 힘들다. 남녀혼숙.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니면 그 남자의 향기를 기억하는 곳.
신에게 가는 길 바라나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 인도에 한번 갔다 오면 향수병에 걸린다고 한다.
나도 인도가 그리울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또렷한 시력으로 눈에 담아도 희미한 연필자국만 하겠는가.
사이클릭샤(미안함)에서 돈 벌어 오토릭샤를 사도록 경제를 평준화시켜야겠지만 애처롭다. 골목길을 소에게 양보. 길가에 누워있는 사두, 무슨 도를 닦아 신자들을 구원할 것인가. 사두나 밥 한 끼라도 먹고 살지 하는 오만한 생각이 들던 인도.
우리나라 교통 통신은 아무리 멀어도 다섯 시간 안이면 “와라!” 하면 가야 한다. 동방예의지국? 아니다 동방 '체면지국'이다. 자연사도 어렵다. 자식의 체면 때문에 병원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 해야 한다. 더러 비행기도 안 뜨고, 더러 15시간 정도 연착도 되고, 더러 전화도 끊기고, 더러 교통도 두절되어야 한다. 편안하게 강가를 거닐며 노년에서 죽음으로 가는 자유 ‘방랑기’를 누릴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영어 안해도 되고 한국말 안 해도 되고 경조사 안 챙겨도 되고, 아이들 형제들 시시콜콜 ...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옭아매져야 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인이 되어 방랑기를 보내다 기력 소진하면 소멸하고 싶다. 내가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 일에 연연하여 내 기를 빼앗기지 말자. 남의 시선에 신경 곤두세우지 말자.
뿌자의식에 참가하여 맨 앞자리 악사 옆에 앉아 한두 시간 붙어 앉아있어도, 이들은 나를 이방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우리의 산사 대웅전에 전혀 얼굴빛과 몸의 골격이 다른 외국인이 앉다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좋은 뜻이든 나쁜 시선이든 눈치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의 절은 너무 배타적이고 너무 정갈하고 너무 고요하다. 힌디의 사원은 하루 한번 음식을 무상으로 나눠줄 때도 주는 사람 받아먹는 사람이 다 같이 행복해 보인다. 얻어먹는 굴욕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쁨이 있다고 한다. 용산역사 뒤 밥을 받아먹는 노숙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면 반응이 어떨까. 괜히, 혼자 자격지심에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12억 인구, 한 달 월급이 30루피, 딸 하나 시집보내는데 3천 루피라고 한다. 살림과 예단 지참금 딸 하나 시집보내면 평생 아버지가 번 재산의 60퍼센트, 둘째 보내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다. 그러니 딸을 낳으면 촌에서는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현실이라고 한다. 여성인권위원. 여자는 오후에 나다니지 못해 거리에 인도여자는 실제 잘 없다. 어디 가나 식당에도 남자들이 일한다. 남자들 여자가 귀하니 성추행한다. 한국의 딸들, 한류가 확산하면서(참 인도에는 아직 한류를 모른다. 자기 별난 인구가 하도 많다 보니 한류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도 흥행할 수 없는 나라. 그 유명한 말 춤도 싸이도 모른다. 오가며 만나는 일본 대만 중국이나 유럽사람들이 한국말을 구사하며 다가온다.)
지방마다 인종도 다르고 풍습도 달라 사진찍기에 가장 좋은 나라가 인도다.
그리고 인도는 겁나는 곳이기도 했지만, 만만하고 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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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에 대한 보고 느낀 메모입니다. 어쩜 왜곡된 시선일 수도 있습니다. 인도에서 살고있는 현지인이나 원주민들이 보면 “네가 인도에 대해, 뭘알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장보고 밥해 먹고 일하면서 살았다면 일상이겠죠. 여행자의 시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환청처럼 들립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티보이보다 잠깐 졸 때, 놀라 일어나 창문을 엽니다. 내 귀에는 아직도 뿌자의식의 기도소리와 종소리 오트릭샤소리가 진동을 한답니다.
나에게 시간과 경제와 체력이 갖춰진다면 또 인도를 가고 싶습니다. 남인도도 가고 싶고, 네팔도 가고 싶습니다. 인도라는 말만 나와도 오감이 다 스멀거린답니다. 내가 인도에 대해 뭘 안다고 향수병일까요.
여섯 군데의 도시를, 기차를 차고 여행하는 동안, 인도의 고요는 한순간도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힌디들의 뿌자의식, 오토릭샤 방빵거리는 소리, 손님을 부르는 소리, 아수라장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고요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오직, 내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인도여행의 기행을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고맙습니다.
혹여 왜곡되고, 혹여 거슬리고, 혹여 잘못된 정보가 있을 지라도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취향과 생각이니,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구나 여기시고
너그렇게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