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울프의 바다가 부른다
네 보드는 네가 잡아
‘하지 마라’가 아닌 ‘할 수 있어’를 장려하는 문화… 높은 파도에 도전하는 그 동네 아이들의 눈이 빛나는 이유
“힘이 약한 아이들이잖아요. 작은 파도를 양보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탈 수 있는 파도는 없어요. 그 아이가 곧 당신의 파도를 가로채는 어른이 될 거예요.” 인도네시아 발리의 유명한 서핑 명소인 울루 와투(Ulu watu) 포인트에서 들은 얘기다.
서핑은 파도가 부서지는 경사면을 따라 횡으로 내려오는 스포츠이고, 한 파도에 한 명만 탈 수 있기에 서핑 명소에선 파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아이들은 파도를 잡기 위해 경사면까지 다다르는 패들 힘이 어른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파도의 힘이 비교적 약한 가장자리 쪽에서 파도를 잡는다.
그런데 어른들이 큰 파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가장자리의 작은 파도를 잡으려는 꼬마들에게도 양보하지 않자 한 아이의 부모가 소리친 것이다. 놀랍게도 그곳의 분위기는 바뀌었고 가장자리 쪽의 약한 파도는 아이들의 차지가 되었다.
혼자 처음부터 인생을 얼마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이 키워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낯설고 외딴 바다에서 꿈꾸던 모습의 세상을 만난다. 내가 서핑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진화해온 문화 때문이다.
하와이 북쪽 해안의 겨울 파도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큰 너울이 들어올 때에는 어른 키의 몇 배가 되는 파도가 생기기도 한다. 그런 파도를 타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서퍼들이 몰려든다. 처음 그 풍경을 보았을 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 같았다.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생각을 해야 저렇게 큰 파도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풍경은 동네 꼬마들이 자연스럽게 그 파도에 도전하는 모습이었다.
“큰 파도는 위험해, 더 크면 하게 해줄게, 그쪽으로 가지 마, 이쪽으로 나와, 다른 아이들이 있는 안전한 곳에서 놀아.” 소리치는 한국 부모들 사이에서 대여섯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하와이 동네 꼬마가 들기도 버거운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한다. 바로 옆에 있는 부모가 해주는 말이라고는 다음과 같았다. “네 보드는 네가 잡아, 파도의 피크 부분만 조심하면 생각만큼 무섭지 않을 거야. 겁먹지 마, 넌 할 수 있어.”
무시무시한 파도가 있는 풍경을 가서는 안 될 공포의 공간이 아닌 즐거운 놀이터로 만들어주는 건 부모의 말 한마디였다. 아이는 자신이 즐기고 싶은 만큼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학습보다는 경험과 도전을 장려했다. 아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넘어져도 울지 않았다.
이런 문화가 오랜 시간 축적된 탓인지 모두가 노련했다. 그 누구도 안 된다고 막아서며 가르치려 들지 않았다. 어른들이 배려하고 양보해준 만큼 아이는 성장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동안 형성된 분위기가 다음 세대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것들이 선순환될 때 선진사회가 만들어진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모두 각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정하기 위해서는 외우고 배우는 것보다, 직접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한다.
전통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진다. 현재는 곧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경험, 기회가 아니라 동기다. 하지 말아야 할 것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장려하는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다음 세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낯설고 외딴 타국의 바닷가에서 중요한 이치를 생각했다.
김울프 프리랜서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