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이따금씩 지루해진다. 일상이 반복되고, 삶의 무게가 무거워지면 다른 곳에서의 시간을 꿈꾸게 된다. 각자의 취향대로 제각기 다른 곳들로 떠났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잠깐이지만 낯선 곳,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이거나 혹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낯선 음식과 낯선 문화를 체험하며 보내는 시간은 신기하게도 삶의 위로가 된다.
태평양의 숨겨진 낙원, 로타
사이판으로 대표되는 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에는 로타(Rota)섬이 있다. 로타는 미국 자치령으로 한국에서 비행으로 약 4시간 떨어진 서태평양에 위치한 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섬이다. 전화도 잘 터지고 렌터카도 대여가 가능하고, 식당도 있기에 섬 전체를 탐험하는 재미가 있다.
나는 로타의 스위밍홀에서 낙원 같은 풍경을 만났다. 스위밍홀은 로타섬에 위치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에메랄드빛 천연 수영장이다. 마치 사람을 위해 자연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스위밍홀의 바깥쪽은 야자나무로 가려져 있고, 바닥에는 하얗고 고운 산호모래가 깔려있다. 수심은 깊지도 얕지도 않아 수영을 즐기기에 딱 알맞은 느낌이었다. 바닷물은 바위의 위와 아래로 계속 순환되고 있어 맑았고, 큰 파도는 바다 방향의 바위가 막아 주었다. 관리자도 없고 지켜보는 사람도, 이용요금도 없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낙원을 통째로 빌린 기분이었다.
로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사이판에서 30분 정도 경비행기를 타고 가야 한다. 비행기 티켓은 사이판 공항에서 구매하면 된다. 사이판 공항에서 로타로 가는 비행기는 하루에도 여러 편이 운행된다. 요금은 수하물 요금까지 1인당 10만원이 채 되지 않아 부담이 없다. 경비행기가 주는 묘한 매력도 있다. 좁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아늑함과 낮은 상공에서 보이는 섬과 바다의 풍경들은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기장과 부기장이 조종하는 모습을 바로 뒤에서 지켜볼 수 있고, 착륙 후에는 착륙이 좋았다고 직접 칭찬해 줄 수도 있다.
삶의 여유란 이런 것
로타에는 대중교통이 없다. 하지만 운전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도 로타에서의 운전은 어렵지 않다. 신호등이 없고, 보행자도 차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지도에 나와 있는 도로는 헷갈리기 힘들 만큼 단순하다. 실제로 로타에 등록된 차량 수는 131대밖에 없다.
길에서 다른 차를 만나면 반가운 느낌이 들 정도로 도로는 한적했다. 운전을 하는데 마주 오는 차들의 운전자들이 창밖으로 손을 살짝 내밀거나 핸들 위로 손을 펴서 인사한다. 처음에는 ‘뭐지? 사람을 잘못 본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차들이 그렇게 인사를 해왔다. 나 역시 금방 학습되어 운전하면서 다른 차를 보고 인사해봤는데 어김없이 답인사를 해왔다. 인사는 받을 때, 할 때 모두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이다. 운전하며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즐거워, 왔던 길을 계속 돌아다니며 다른 차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렇듯 한적한 섬의 여유로움은 운전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여유로움에서 오는 행복감 때문일까. 로타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심지어 이따금씩 마주치는 다른 여행자들도 사람 만난 것을 반가워하며 안부를 건넸다. ‘천그루 야자나무 공원’에서 만난 현지인 부부와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천그루 야자나무 공원은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미국 정부가 1000그루의 야자나무를 심어서 조성한 곳으로 로타의 명소 중 하나다. 피나탕(Pinatang) 공원에서 마주친 존 아저씨는 조깅을 하던 도중 나를 발견하고 자처해서 섬의 숨은 곳들을 알려주었다. 아름다운 섬, 평화로운 마을 분위기에 대한 자부심과 이 섬에서 살고 있는 행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리조트의 직원들, 식당에서 만나는 사람들, 슈퍼마켓과 기념품 가게의 점원들까지 얼굴을 기억하고 안부 인사를 건넸다.
로타가 속한 마리아나 제도는 사계절 내내 기온의 변화가 거의 없고, 습도가 낮은 쾌적한 기후라 언제든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느낌이 들만큼 행복하다.
위로받고 싶다면 로타섬으로
로타에는 몇 군데의 슈퍼마켓과 식당이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거의 송송마을(songsong town)에 위치하고 있다. 리조트에서 편안하게 하는 식사도 좋지만, 지역 식당을 체험해 보는 것이 묘미다. 넘쳐나는 정보와 ̒무늬만̓ 맛집들이 즐비한 다른 여행지에서는 식당을 고르는 것조차 피곤한 일이지만, 로타에서는 먹고 싶은 메뉴를 정하면 갈 수 있는 식당이 한두 군데밖에 없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도쿄엔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일본 식당의 맛이 훌륭했다. 생참치회, 일본 본토의 맛집에 버금가는 훌륭한 수준의 라멘을 비롯한 일식 요리를 외딴 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로타에서는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다. 알려지지 않은 섬의 곳곳을 탐험하는 것도 재미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림 같은 풍경에서 가만히 쉬는 것이 로타의 묘미다. 필요한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화기를 끄고 지역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듣거나 바람소리, 파도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로타는 여행이 주는 많은 기쁨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언젠가 복잡한 도시와 사람들에게 지쳐 떠나고 싶은 날, 다시 로타에서 위로받을 것이다.
TIP
마리아나 제도는 크고 작은 40여개의 섬으로 구성됐다. 대표적인 섬은 사이판, 티니안, 로타이다. 로타와 함께 티니안섬도 꼭 들러볼 것을 권한다. 티니안섬에서는 블로우 홀(Blow Hole)이라는 천연 분수쇼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바다거북도 자주 목격된다. 또 마리아나 제도의 유일한 카지노인 티니안 다이너스티 카지노가 이곳에 있다. |
▒ 김울프 프리랜서 사진가 겸 여행작가, 해양스포츠·독립문화 칼럼니스트, MBC 마케팅팀,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공연 기록사진 및 각종 공연·대회 등의 사진촬영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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