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은 이름난 동네의 제철 과일이 좋지만, 여행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의 비수기가 좋다. 겨울 바닷가엔 여름에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것처럼, 유명한 명소라고 해도 비수기에 방문하면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바가지요금, 인파도 없으며, 자신을 뽐내야 할 것 같은 부담도 없다. 일반적으로 몽골 여행의 성수기는 6월에서 8월 사이로 알려져 있다. 말이 성수기지,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몽골을 여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골의 평균 해발은 1600m라 여름에도 서늘하고, 겨울에는 엄청나게 춥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1월 평균 기온은 섭씨 영하 27도로 모스크바보다도 더 춥다. 실제로 울란바토르는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다. 2010년 혹한이 찾아왔을 땐 50일 동안 영하 48도의 기온이 계속됐다. 겨울철엔 공장 관련 설비가 모두 얼어붙기 때문에 공산품이 없고 모든 것을 수입한다. 겨우내 모두가 숨죽이며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곳, 여름철에만 관광객이 찾아오고 9월 말에 첫눈이 내리는 나라. 그러한 이유로 가을과 겨울철 여행에 대한 정보가 없는 미지의 세계. 나는 조금 다른 풍경을 찾기 위해 11월의 몽골로 향했다. 확신할 수 없는 곳, 가본 적 없는 곳에도 길은 있으리라.
게르 안에서는 전기사용이 가능하다. 캠프촌의 게르는 보통 4명이 체류하는 구조로, 규모와 설비가 대부분 비슷하다. <사진 : 김울프>
말 타고 발길 닿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비행기 안에서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은 항공 여행의 묘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보고 몽골에 왔음을 실감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크고 작은 초원과 평원, 이미 첫 눈이 내린 늦가을이라 그런지 초록빛깔은 보이지 않고 온통 황토 빛을 띠고 있었다. 군데군데 눈과 얼음이 보이기는 했지만 양이 많지 않아 크게 춥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광이 이내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용기가 생겨났다. 제 시간에 이곳을 찾아 왔다는 생각에 이내 행복함을 느꼈다. 고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황량한 벌판 사이에 작은 도시가 나타났고 비행기는 몽골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국제공항이라고는 하지만 아주 작은 규모였고, 몇 대의 비행기들만이 활주로 근처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공항은 오래된 시골의 고속버스 터미널 느낌에 가까웠다.
울란바토르를 벗어나자 황량한 초원의 풍경이 이어졌다. 표지판도 신호등도 하나 둘 없어지더니 포장도로가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했다. 근처에 전봇대가 이어져 있다는 것으로 길이라는 것을 유추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이 허허벌판이 이어졌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는 운전기사는 길을 외우고 있기라도 한 걸까. 한참을 달려도 멀리 보이는 풍경은 변하지 않았고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로 속에 있는 느낌. 하지만 답답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전혀 모르는 곳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조금씩 마음이 놓였다. 창밖으로는 이따금씩 말이나 양과 같은 동물들이 보였는데 갑자기 그 숫자가 늘어나나 싶더니 결국엔 차가 멈춰 섰다. 수많은 염소와 양 무리가 줄을 지어 차도를 건너는 동안에도 양치기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농장이라고 하기엔 어디에도 펜스가 없었지만 여러 가축들은 나름의 질서를 지키며 움직이고 있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 사람이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면 그곳이 관광지가 됐다. 가축무리 사이 저 멀리 흙먼지가 일었고 말을 탄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말을 탄 채로 염소떼와 소를 몰고 있었는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민속촌의 보여주기식 관광 상품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우연히 날 것 그대로의 유목민의 삶을 보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한국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완전히 다른 세상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가 방문한 한 가정집에선 낯선 사람인 나에게 먼저 선뜻 따뜻한 차와 간식을 제공했다. 그것은 황량한 초원에서 이어지고 있는 유목민족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했다.
|
게르에 도착한 첫날, 전통의상을 입은 미인이 환영의 의미로 염소젖을 들고 방문객을 맞았다. <사진 : 김울프> | 테를지(Terelji) 국립공원에 도착해 게르에 짐을 풀었다. 게르는 몽골 유목민들의 이동형 주택인데, 원기둥 위에 원뿔 모양의 지붕을 덮은 형태다. 나무와 펠트(동물털 등으로 만든 천) 등으로 만들어진다. 게르 앞에는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미인이 염소젖을 들고 나와 환영의사를 표했고, 그 순간 나는 한 나라의 왕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형식적인 인사였겠지만 황량한 풍경 속에서 받은 환대가 큰 선물처럼 느껴졌다. 짐을 풀고 말을 타기로 했다. 마부가 몇 마리 말을 데리고 게르 앞으로 왔다. 언덕을 내려가 다른 언덕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한 마리 말의 주인이 돼 초원을 누볐다. 보통 승마 체험은 둥근 트랙을 몇 바퀴 도는 형식적인 방식이지만, 몽골의 승마는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실제로 몽골에서는 말을 사서 몇 달씩 여행하고 여행의 끝에 다시 말을 되파는 방식의 승마여행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단돈 몇 만원에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마음껏 자연 속을 뛰는 것만으로도 몽골에 다시 올 이유는 충분했다.
게르는 원기둥 위에 원뿔 모양의 지붕을 덮은 형태다. 내부에서는 물을 사용할 수 없어, 공용 건물에 가야 한다.
암흑 속에서 쏟아지는 별들
하루는 헤드랜턴과 장갑, 방한장비와 촬영장비를 모두 챙겨 게르 뒤로 보이는 언덕을 올라 보기로 했다. 딱히 길이랄 것도 없어 보이는, 추위에 딱딱하게 굳은 잔디가 끝없이 펼쳐진 오르막. 그곳에 올라 언덕 너머의 풍경사진을 찍을 셈이었다. 30분이면 오르기에 충분해 보였던 언덕은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었다. 서둘러 출발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지만 그냥 내려가기에는 아쉬웠다. 한참을 걸어 사람들이 쳐놓은 펜스(늑대의 침입을 막기 위한)를 두세 개 넘으며 완전한 야생 속을 걷다보니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늑대가 나타나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늑대 사진을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행운이 아닐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불안과 기대를 짊어지고 걷는 것은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몇 시간쯤 올랐을까. 언덕의 꼭대기 같은 능선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하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해는 이미 져버렸고 펼쳐지는 언덕 너머의 풍경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 풍경조차 완전한 암흑으로 바뀌고 헤드랜턴을 꺼내 돌아갈 준비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길을 가다 마주친 유목민의 모습. 마부가 가축들에게 물을 마시게 해주기 위해 한 곳으로 몰고 있다. <사진 : 김울프>
몽골에서의 승마는 뻔한 트랙을 몇 바퀴 도는 것이 아니다. 발길 닿는 곳 어디든지 말을 타고 갈 수 있다.
바람도 사람도 없는 곳, 홀로 수없이 많은 별들과 마주한 순간, 광활하고 강력한 풍경에 숨이 턱 막혔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외계인이라도 나타나 나를 잡아 갈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 그곳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고 아늑한 게르로 돌아갈까? 돌아갈 때까지 헤드랜턴의 배터리는 충분한 걸까? 늑대가 나타나면 어쩌지?’ 하지만 무섭다고 돌아가기에는 여기까지 붙들고 올라온 삶이 아까웠다. 큰맘 먹고 아까운 삶을 조각내어 온 여정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몇 시간 정도 좋은 풍경을 찾아 헤매다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밤새 별 궤적 촬영을 해 볼 생각이었다. 만약 괜찮은 사진 몇 장을 얻는다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여 여기까지 왔건만 어느새 계획이 바뀌었다. 멍한 기분으로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마주한 우주가 권하는 대로 대초원의 마른 풀잎 위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봤다. 가장 가볍고도 무거운 시간. 온 우주가 나의 나태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계획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주의 부지런함을 멀리서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삶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마음 가는 방향으로 힘껏 밀어붙여도 목표한 대로 제 시간에 도착하긴 힘들다. 쓸데없는 것에 많은 것을 빼앗기거나 다투는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기도 하고, 운이 좋아 엄청난 풍경을 마주해도 제대로 찍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는 겨우 그 정도의 그릇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쉽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생각해 볼수록, 치열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한 그 점이 좋았다. 별 수 없는 밤. 나는 천천히 마음 가는 대로 살 것이다. 이곳 몽골에서 흘러간 시간처럼.
TIP
1. 테를지 국립공원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3시간 떨어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약 7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몽골 방문을 위해서는 출국 전 몽골 대사관에서 사전 비자 발급이 필요하다. 게르에서 숙박을 하게 된다면 물 사용이 어려우니 임시 세수와 샤워를 위해 물티슈를 많이 챙겨가는 것이 좋다. 이외에도 삼시세끼 양고기를 먹으면 질릴 수도 있으니 각종 먹거리를 한국에서부터 미리 챙겨가는 것이 좋다. 현지에서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으므로 통역이 가능한 가이드를 구해야 한다.
2. 별을 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주위 빛의 간섭이 덜한 장소나 시간대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달이 뜨지 않는 날에 맞춰 방문하거나, 혹은 달이 뜨기 전 시간이나 지고 난 이후의 시간을 공략해야 한다. 달이 뜨기 전이라고 해도 노을이 채 가시지 않았거나, 달이 지고 난 후라고 해도 새벽이 밝아오면 별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일출·일몰 시간 전후는 별을 감상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고 해도 하늘에 구름이 많은 날이나 비나 눈이 오는 날은 별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일기예보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헤드랜턴과 방한장비는 필수다. 사진을 촬영할 예정이라면 삼각대도 꼭 챙기자. |
▒ 김울프 프리랜서 사진가 겸 여행작가, 해양스포츠·독립문화 칼럼니스트, MBC 마케팅팀 사진업무 담당,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공연 기록사진 및 각종 공연·대회 등의 사진촬영 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