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을 묶다


길음동의 누추한 집에
남자친구가 오곤 했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햇볕이 좋은 날이었을 것이다.
어딘가 가자고 하며
툇마루에 앉아 운동화를 신는 내 앞에
넙죽 꿇어앉아 운동화 끈을 묶어 주곤 했었다.

난 예쁘지도 않으면서
꾸미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 맹물같은 여학생이었다.
더구나 피골이 상접한 꼴이라니
더 볼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딸을 나무라며,
늘 못 마땅해 하는 엄마는
눈매도 몸매도 가느다란
동양적인 미인이다.
엄마는 그날 딸앞에 무릅꿇는
딸의 남자친구의 모습에 감동하여
사윗감으로 점찍었다.

엄마같이 여성스럽고 예쁜 여자도 마다하고
집을 떠난 아버지가 있는데,
말라빠진 멋도 낼 줄 모르는 딸애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그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고 한다.

그때 그 남학생은 지금까지도
무엇이든 나를 위해 해주고 싶어 한다.
아마 내가 원한다면
하늘에 별도 따다 줄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아주 오래전 스쳐 지나간 일을 생각하며
빗소리가 듣고 싶다고 하는데도,
자다 말고 일어나
장대비 속에서도 베란다 창문을 열러 나간다.
태풍으로 바람이 너무 세면
창문을 붙들고 서서 빗소리만 들여놔준다.
그 옛날 엎드려 운동화 끈을 묶어주듯이,

그가 가끔
나의 '영혼까지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고
단언하는 말에,
나는 꼼짝달싹 못하게
그에게
영혼까지 묶여버렸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정작 끈을 푸는 데는 소질이 없다.
맨몸으로 아내를 안아주고 싶어도
결혼한 지 25년이나 된 지금 까지
브레지어 끈을 풀 줄 몰라 절절맨다.

이즈음 들어
호시탐탐 홀가분하고 싶다.
고정된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묶이는 것이 답답하다.
멀리 다른 곳을 쳐다보기 위해
엉뚱한 곳에 연기를 피워올려보기도 한다.

어느 날 막 집을 나서는데
나의 아들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나와
어미에게 인사를 하다말고
어줍은 손으로
등뒤에서 바바리 끈을
리본모양으로 묶어주고 있다.

‘아~ 이놈에게도
드디어 여자 친구가 생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