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배병삼 / 사계절
군자란 소인과 대칭되는 말로서 공자가 꿈꾼 도덕적으로 고매한 인격을 뜻한다.
논어를 깊숙이 읽어 보면, 본질적으로 가볍고 경쾌한 책이다.- 경쾌한 논어 읽기
논어란 ‘논하고 말하다.’라는 뜻이다.
‘학이’니 ‘요왈’이니 하는 편명은 깊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장의 머리글자를 따서 그냥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사건이 일어나자 논어는 급급하게 감추어야 할 금서의 처지가 되고 만다. 이때 공자의 후손들은 공자의 고택 담벼락에다 논어를 숨겨 두게 된다.
르네상스적 인간- 어려서 가난하여 많은 기예를 익혔다. 9:6 운전기사, 공장기술자, 목장 관리인, 육체노동. 세무나 재정 분야의 제일인자로 성장할 염유를 길러내고 건설부 장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다.
학이편,
배워야 사람이다.
학문에 들어가는 나들목이요 덕을 쌓아두는 마당.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 벗, 먼 곳, 동지 동반자 이처럼 나와 가치관이 같은 벗이 저 먼 곳에서 나를 찾아 와주니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클까. 벗이란 여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도 좋다. 단 한 번 만나도 속을 드러내어 함께 흐느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벗이다. 같은 길을 함께 걷는 사람, 더구나 저 머나먼 곳에서 음악 하나만을 보고 나를 찾아온 사람.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가 그에 합당하리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 남이 나를 나쁘게 평하면 속으로는 화가 나지만, 애써 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성나지 않는다.’라는 그야말로 남의 비평이나 칭찬으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내 속에 깃들인 진리(목표)와 더불어 묵묵히 살아가는 경지를 이른다.
늦은 봄, 봄옷이 다 지어지면 어른 대여섯, 아이들 예닐곱과 기수에서 멱 감고 무우에서 바람쐬다 노래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11:25 평범한 삶을 회복하고자 천지 사방을 돌아다니는 공자의 모습 상갓집 개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콩과 팥도 구별하지 못하는 주제에 선생은 무슨 놈의 선생 18:7 비웃음을 들어가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재건하기 위해 허위허위 걸어가는 공자의 모습. 정녕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랴’ 목멘 울음소리, ‘공자를 키운 건 팔 할이 묵 울음이다’
위정편,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지학 이립 불혹 지천명 이순 종심은 공자의 간략한 자서전이다.
제자인 염유가 “선생님의 도가 결코 기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따르자니 힘에 부칩니다요” “힘이 부족하다는 건, 힘껏 달리다가 지쳐 쓰러지는 것, 지금 자넨 옳게 한번 달려보지도 않은 채, 지레 선을 긋는구먼”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
나를 알아 달라고, 나에게 자리를 달라고 남에게 ‘껄떡댈 것이 아니라.’ 전문가가 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무엇인지를 주도하는 인간이 되기를.
‘눈’을 중시하는 서양의 전통과는 달리, 귀가 눈보다 더 신뢰할 수 있고 또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는 도구. ‘듣기’는 ‘말하기’보다 더 중요한.
팔일편,
문명은 숨을 쉰다.
팔일편은 편집자의 주체의식이 깃들어 있다. 예와 악이 그것이다. 악은 음악 시 춤 등 예술 일반. 악의 정신은 예술 정신이요,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자유’라고 보아도 좋다.
예는 매우 포괄적, 악수나 절, 개인 예절부터 관혼상제, 생활의례, 설, 단오, 추석 풍속 삼강오륜의 사회적 예의와 규범이 예에 속한다.
정치를 폭력이나 형벌로 하면 백성은 피하려고만 들고 잘못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노장 사상과 법가 사상의 한중간에 유교사상이 있다. 동시에 지식인들이 폭력을 피해 자연 속으로 도피하는(장저 걸닉) 이기주의적 속성.
예가 횡행하는 곳에는 자칫 엄격한 계급의식이 발생하고 또 예로 말미암아 사람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루쉰이 유교를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 공자는 예가 타락하면 빠져들기 십상인 경직성과 형식주의를 제어할 방안이 필요했다. 그것이 악(樂)이다. 악은 예술이다. 이것들은 서로 구별하고 차별하는 예의 기능을 뛰어넘어 하나로 조화롭게 만든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 조국에 온후로 악이 바로잡혔다. 9:4 악의 정신은 시경 관저편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슬프지만 아프지 않다 3:20
즐거움과 음탕함의 사잇길, 슬픔과 아픔의 틈새, 공자의 악은 이 ‘가운데’를 지향한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치우치지도 않고 올바른 중용의 길, 악은 그 사잇길을 간다.
중용의 세계란 한마디로 화음 조화 화목을 뜻하는 (하모니) 화(和)이리라. 무엇이든 지나치면 독.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볕이 바르면 그림자가 짙다.’
이인편,
사랑의 길. 예수 사랑, 부처 자비, 공자 인(仁). 인이라고 하니 무슨 대단한 보물인 양 여길 수 있는데, 실은 인은 내 주변에 있을 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순간에, 친구 간에 우정을 나누는 곳에, 어린 사람을 아끼고 아픈 사람을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 자락에 인이 머문다. 인은 멀리 있지 않다. 내 곁에 있을 따름이다. (내 지갑 여는 순간, 내 손길 닿는 순간)
공야장편,
자공이라는 제자
말 잘하고, 돈 잘 버는 사람이 있었다. 사기의 화식(貨殖) 열전(列傳)에 실리기도 했다. 세속적 기준으로 이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공자 문하에 들어왔다. 어떤 목마름, 인생이란 눈에 보이는 거죽, 인류대학 좋은 직장, 잘 먹고 잘 사는 것 말고 무언가 있다. 사마천은 자공을 두고 “구변이 날카롭고 말이 공교하여 공자는 내내 그의 능변을 꺼렸다.”라고 전한다. 자공의 질문에 대해 공자는 무안할 정도로 잘못을 지적하는 대화가 많다. “자공은 타고난 부자가 아닌데도 재산을 잘 불리고 투자를 하면 꼭꼭 들어맞는다. 11:18
저는 어떤 수준의 인간입니까? 넌 그릇 정도지. 어떤 그릇? 제기그릇 호련(瑚璉) 2;12
가난하지만 알랑대지 않고, 넉넉하지만 뽐내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지. 그러나 가난한데도 즐기고, 넉넉한데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지. 나쁘지 않지는 가(可)를 풀이한 것.(괜찮다) ‘가’는 우리가 수우미양가중에 가로 새기는 것이 좋겠다. 아예 못 쓸 것은 아니어서 셈에 넣긴 하되 아직 통 여물지 못했다는 평가다.
옹야편,
멋진 녀석들
용기는 육신의 힘 자랑이 아니라 그 힘으로 얻는 공을 뻐기지 아니할 때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나를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용기의 집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은 힘이 장사여서 성문의 빗장을 들어 올릴 정도로 용맹스러운 용사였다고 한다. 공자 역시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하였으며 생김새는 우락부락하고 머리통은 울퉁불퉁한 짱구인 전형적인 무인의 모습. 우리는 자칫 공자를 샌님 풍의 백면서생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한 주먹’하는 무골풍이었다. 공자 학교의 제자들조차 한 삼 년쯤 공부하면 “어디 직장이 없나?”하고 두리번거리기가 일쑤였다. 8;12
술이편,
공자의 학교
오늘날 학교의 모습을 “돈만 내면 즉석에서 흔쾌히 모든 걸 전수해 주는 화끈한 사부님들”과 “아무 때나 발랄하게 하산”하는 제자들로 이뤄졌다고 조롱
열린학교 ; 스스로 ‘간단한 인사’를 차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누구에게든 가르침을 베풀었노라 7;7 束脩 말린고기 육포 쥐포 오징어포, 캔커피 한박스 주스 한 통, 요컨대 입학조건이 물건(학비)가 아니라 학생의 ‘배우려는 마음가짐’에 달렸었다는 뜻이다.
커리큘럼; 공자는 표준말로 가르치셨다. 7;17 시경삼백편의 뜻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순수함’일 따름이다. 2;2 당체꽃이여, 바람에 휘날리는구나! 9;30 공자(공부)가 멀다고 핑계를 대는구나. 시에서 배우고 예에서 서고 악에서 완성 8;8 시는 문학 작품이기 이전에 정치 용어, 외교 교섭의 수단이며, 자연과 사물의 이름들이 가득한 백과사전.
태백편,
성왕의 계보
요순(堯舜)은 실존한 역사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공자가 혼란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장치로 봐야 한다.
크구나! 요임금 노릇하심이여. 높구나, 오직 하늘이 큰데 넓고 넓구나. 8;19 요는 크고 크구나. 하며 까마득하고 눈부신 존재이니 이것들은 내용을 가진 말이 아니라 감탄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혼돈 속에서 최초의 질서를 부여한 존재, 자연 속에서 문화를 처음으로 꽃피운 인물, 무와 유의 경계 선상에 존재하는 신화적이고도 역사적인 인물이 요임금. 우리로 보면 단군, 그리스로 보면 불을 처음 가져온 프로메테우스가 그다.
순임금,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 현명한 사람을 추천받아 그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이라고 한다.
“억지로 하지 않고도 잘 다스린 이는 아마 순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셨던 걸까? 몸을 삼가 남면 하셨을 따름이다. 15;4
무위(無爲) 정치는 올바른 사람을 뽑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부리는 일, 즉 용인(用人). 요순우탕문무주공,
자한편,
공자의 사생활
공자는 술에 대해서도 즐기면서도 탐닉하지 않는 낙이불음(樂而不淫).3;20
원헌이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벼슬을 살다가, 나라가 도를 잃었는데도 벼슬을 사는 것 14;1 부끄러움에 대한 문제의식.
공자께서 집에서 시간을 보낼 적엔 마치 해맑게 환한 듯하였고, 또 흐뭇한 듯하였다. 7;4 억지로 하는 일이 없었고 목표를 달성하려고 치달리는 욕망도 없었고, 또 남과 경쟁하면서 이기려 들지 않았으니, 하루하루가 일요일 아침처럼 한가하고 호젓하였다는 것이다.
“거친 밥과 맹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베어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나니, 의롭지 않은 재산과 명예는 내겐 한낱 뜬구름과 같도다” 7;15
따뜻하면서도 엄격하였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노여워하진 않았고, 공손하면서도 태연자약(泰然自若)하셨다. 7;37
향당편,
공자의 웰빙
웰빙이란 좋은 음식 먹고, 편안한 집에서 지내며,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것이다. 관찰자, 제자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디지털 카메라로 스냅 사진 찍듯 올려놓은 것들이다. 공자는 옛날 사람으로는 드문 73세라는 장수를 누렸다.
쉬거나 선 밥을 먹지 않았고 상한 물고기나 부패한 고기는 먹지 않았다. 또 색이 변한 것, 군내가 나는 것, 제대로 익히지 않은 제철이 아닌 것은 먹지 않았다. 10;82
공자는 먹는 것과 입는 것에도 섬세하였다. 여기서 공자가 꿈꾼 문명이 섬세한 미학적 바탕 위에 있음을 본다. 까칠한 남자. 베스트드레서 ‘앙드레 공자’ ‘춘추 시대 중국에서 가장 옷 잘 입는 남성’ 그러나 이런 멋스러움이 결코 예를 벗어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즉 ‘튀는 디자인’을 선호했다는 뜻은 아니다.
여름을 맞아 더울 적엔 홑겹의 갈 옷을 입되 반드시 속옷을 안에 입었다. 10;6 모시 두루마기
검은 옷을 입을 적엔 새끼 염소털 외투를 걸쳤으며, 흰 옷에는 담비털 외투, 누런 옷에는 여우털 외투를 입어 조화를 주었다. 10;6 멋스러운 감각.
집에서 막 입는 갖옷은 길었는데, 오른 소매는 짧게 10;6 일복은 실용성.
반드시 잠옷을 따로 두었는데, 길이는 한 길 반이었다. 10;6
문명의 정체 : 문명이란 섬세함과 애틋함의 세계다. 야만은 거칢과 매정함으로 표현된다. 유교에서 꿈꾸는 ‘풍속이 두터운 세계 미풍양속(美風良俗)’이란 곧 거칠지 않은 섬세함의 세계, 또 매정하지 않고 애틋한 정감을 느낀 세계다. 그 가운데 애틋함은 부사로 표현되는데 이를테면 ‘차마 忍’ ‘감히 그럴 수는 없다 不敢’ ‘짐짓 固’와 같은 단어가 그런 예다. 우리는 논어와 맹자에서 이런 부사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이들 속에 유교가 꿈꾸는 문명 세계의 모습이 곁들어 있다. 이렇게 섬세하고 세련됨이야말로 무뚝뚝하고 질박하기만 한 원단 質이 아니라 그윽한 디자인 文의 세계를 꿈꾸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재료와 문채가 이상적으로 배합된 상태” 文質彬彬의 경지다.
웰빙이란 비싼 음식과 신선한 공기가 아니라, 섬세한 미적 감각을 일상생활 속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주변의 사소한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에서 웰빙이 이뤄지는 것이다.
선진편,
사제 ; 안연과 스승
공자 문하에는 덕행과 언어, 정치와 문학에 각각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공자는 안연의 학문적 수준이 자신과 다를 바 없다고 칭찬하였다.
스승의 안연생각 ; 안연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사람 자신은 기껏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 5;8 안연이 죽었다. 아이고! 하느님이 날 버리시는 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11;8 선생님의 곡소리가 지나치십니다. 내가 저 사람을 위해 울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울겠는가. 11; 9 어질구나 안연이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맹물로 배를 채우고서 지저분한 달동네에 살아도 느긋하기 이를 데 없구나 6;9
안연의 스승 생각 : 공자가 광 땅에서 어려움을 당했다 안연이 뒤에 처졌다가 겨우 합류하였다. “난 자네가 죽을 줄 알았네” “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먼저 죽겠습니까? 11;22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 높이 있고, 뚫으면 뚫을수록 더욱 단단하네. 앞에 계신가 하여 쳐다보면 문득 뒤에 계시네. 욕파불능(欲罷不能) 그만두고자 하여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 9; 10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 높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 仰之彌高(앙지미고). 이렇게 스승의 학술을 ‘높이’로 ‘견고함’으로, 그리고 ‘넓이’의 차원으로 두루 견주어 그 위대함을 찬탄하고 있다. “끝내 글로써 넓혀주시고 또 예로서 매듭을 지워주시다.”로 博我以文, 約我以禮“는 줄여서 박문약례(博文約禮)하고 하여 자주 쓰이는 문자다.
안연편,
진리 또는 ‘매트릭스’
안연이 공자에게 인을 여쭈었다. “극기복례, 공 내가 실체라는 생각을 넘어 관계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인이다.” 안연이 누군가. 공자의 수제자다. 수제자가 스승의 키워드 ‘인’이 무엇인지 물었으니, 이것은 ‘선생님, 당신은 누구입니까? 스승의 정체성을 묻는 셈이다. 줄탁동시,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이 줄이요,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트려 주는 것을 탁(啅)이라 한다. 사제간에 지혜가 전승되는 지극한 순간을 일컫는 말.
나(에고)를 버리고 상대방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는 경지, 그것이 공자가 예순에 도달한 경지 ‘이순(耳順)’이리라.
자로편,
정치란 무엇인가?
당시의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바는 농사 기술이 아니라, 농사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정치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 주는 데 있었다.
헌문편,
선비가 걸어온 길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다섯 계급 왕 천자(天子), 제후 공(公), 대부(大夫), 사(士), 백성. 다만,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는 왕이 허수아비가 되고, 제후들 간에 다툼이 빈번해지는 동시에 그 아래의 대부들이 제호를 넘보는 계급 변동의 시대였다.
사기 <화식열전> 공자 제자들 가운데 자공이 가장 부유하였다. 원헌이 쌀겨를 싫어하지 않고 달동네에 숨어 살았다면, 자공은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돈을 싸들고서 제후들을 방문하였다.
선비가 되는 길, 여기 남을 이기려 들고, 남에게 우쭐대고, 남을 원망하고, 또 욕심부리는 것들, 곧 극벌원욕(克伐怨慾)이란 두루 남을 의식하고 남과 경쟁하면서 나를 드러내려는 욕망이다.
인, 공자의 입장은 수련이 개인에 머물지 않고 자비(慈悲) 행으로 날아가는 방향성, “무릇 인이란 내가 서고 싶으면 남도 세워주고, 내가 알고 싶으면 남에게도 알려주는 것이지. 6;28
자장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완벽한 선비, 곧 달사(達士)가 될까요?” “무어냐, 자네가 말하는 ‘완벽한 선비’의 뜻이?” “온 나라와 온 집안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지요” “자네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선비’가 아니라 ‘이름난 선비’ 즉 문사(聞士)인 게지” “무릇 달사란? 인격이 정직하고 정의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듣고, 또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야. 또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사람이지. 이럴 적에야 온 나라에서 또 온 집안에서 달사라고 칭하게 되지. 자네가 말한 그 ‘문사’란 겉으로는 어진 척하면서도 실제는 완전히 다르고, 자기가 하는 짓을 반성할 줄 모르는, ‘사이비 선비’인 게지. 이런 자들이 요즘 온 나라 또 온 집안에서 떠들썩하게 이름난 자들의 정체인 것이지” 12;20
공자는 선비를 두 유형으로 나눈다. 달사와 문사다.
위령공편,
평천하의 길 ; 공자 대 자로
춘추시대는 한 마디로 ‘폭력의 세기’였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신하가 군주를,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무도한 시대. 한 움큼의 식량을 위해 낯모르는 사람을 해치는 시대, 급기야 사람이 무서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깊은 산골짜기에 목숨을 부지하려는 시대였다.
폭력을 통해 폭력을 잠재우는 ‘현실적인 길’이고, 또 하나는 매력(덕성)을 발휘하여 폭력을 빨아들이는 ‘돌아가는 길’이었다.
군자란 “가난한데도 (자기 길을) 즐길 줄 아는” 1;15 ‘짐짓 곤궁할 줄 아는 존재’ 여기 ‘짐짓 곤궁하다.’라고 할 때의 ‘짐짓 固 ’이란, 가난할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선택한 가난)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공자의 말은 그 얼마나 신선하고 또 따가운 채찍인가!
자로에게 군자란 다만 국록을 먹고 봉토를 소유한 정치 경제적 지배자일 뿐이다. 어쩌면 자로는 이런 지배 계층이 될 목적으로 공자 학교에 출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높이와 성향에 맞춰 공자가 구체적인 가르침을 내린다. 제자의 간절한 질문에만 답해주는 공자의 교수법. 핵심은 무엇보다 호학(好學)에 있다. 호학은 스스로 부족하다는 분한 마음과 열린 마음가짐, 그리고 꾸준한 노력을 미덕으로 하는 점증적, 과정적 개념이다. 실로 공자의 근본정신도 이 호학에 있을 따름이었다. 죽을 때까지 내내 배우기를 멈추지 아니함이야말로 호학의 주체화이다.
‘칼의 노래’에서 ‘현의 노래’로- ‘외향적 인간’ 자로에게 호학 또는 학문이란 아무래도 낯선 것이었다. 단순 담백 우직 이것들이 자로의 특징이었던 터다.
당시에 유통되던 군자라는 말의 뜻(정치적 지배층)과 공자의 군자라는 말의 뜻(인격적 완성자) 사이에서 그가 얼마나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는지를 증명해 준다.
스승은 수기이경(修己以敬), 즉 “자아을 성찰하는 존재”가 곧 군자라고 찔러 준다. 이건 공자가 자로를 안연만큼이나 아꼈다는 표시다. 즉 군자란 ‘낯익은 나’를 도리어 ‘낯설게 관찰함’으로써 닦아 비우고, 대신 그 자리에 남을 채우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럴 때 나의 뜻을 남에게 강요하는 힘, 즉 폭력은 거꾸로 따뜻한 매력으로 전환되고 또 그럴 적에야 올바른 리더십이 발휘되고, 역시 그럴 때만이 참된 평화가 이뤄진다는 비전을 자로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끝내 공자는 시침을 뚝 떼고 “만백성을 편안하게 안다는 건, 요순임금도 어렵게 여기셨는 걸!” 하곤 말끝을 잘라 버린다. 그는 죽는 날까지 폭력의 행사를 통한 질서의 확립, 그리고 자기를 알아준 사람(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는 맹목적 충성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자로의 군자는 ‘폭력 시대의 지도자’이다.
정녕 공자는 자로가 붙잡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수렁인 ‘폭력의 군자’로부터 ‘매력의 군자’로, 또 ‘힘의 발휘’로부터 ‘힘의 응축’으로, 그리고 ‘외향의 눈길’을 ‘내향의 눈길’로 되돌리려고 끝까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볼 때 공자는 자로를 몹시 아꼈던 것임이 분명하다.
공자는 끝까지 자로가 ‘칼의 노래’가 아닌 ‘현의 노래’를 부르기를, 힘이 아니라 매력을 통해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진정한 군자의 책무임을 가르쳐 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천성대로 제 생각대로 우직하게 살다가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의관을 바로 하고)
자로는 협객 스타일의 인물이었던 것이리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속언이 자로에게 합당하다. 깡패식 의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네 이놈! 군자는 ‘욕심나면 욕심이 난다.’라고 하지 않고, 꼭 둘러대는 것 미워하느니.
여기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할 호랑이와 코뿔소”는 권력자 계씨를 지칭하고, “보석함 속에 든 거북과 구슬”은 전유 땅을 상징하는 것이다. 염유가 계씨의 조정에서 퇴근하였을 때, 공자가 왜 늦었느냐고 물었던 데 대해, 염유가 “정치가 있었습니다”라고 답하자, 공자가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비즈니스에 불과하다고 격하한다. 공자는 염유에게 ‘인구 증가 - 경제 성장 - 도덕 문화 창달이라는 세 단계 정치 발전론을 가르쳐 주고 있다.
양화편
공자가 미워하는 것들
양화편은 인간 공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유혹에 흔들리고 그 흔들리는 마음을 변명하기도 하며, 또 어떤 대상을 미워하고 꾸짖기도 하는 ‘살아있는 공자’의 모습을 잘 묘사. “공자님 가운데 토막 같은 말씀이나 하는 점잖은 할아버지 모습이 아니라, 꾸짖어야 할 때 꾸짖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화난 마음을 다른 데서 풀지 않고,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6;2) 분노해야 할 대상에게는 뜨겁게 분노하는 것이 곧 성인의 풍모임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공자 왈: 자주 빛이 붉은색을 대신하는 것을 미워하고, 음탕한 음악이 정악을 어지럽히는 것 미워하며, 날카로운 구변이 나라를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 미워할 오(惡)자가 세 번이나 나오는 ‘증오의 장’이다. 오방색, 남쪽을 가리키는 붉은색, 북쪽은 검은색, 동쪽은 파란색, 서쪽은 흰색 그리고 한가운데는 누른 색으로 보았다.
공자 왈 : 천한 놈과 국가 대사를 함께할 수 있겠더냐? 그놈들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얻으려고 전전긍긍하다가, 일단 얻고 나면 잃을까 전전긍긍한다. 정녕코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들 땐, 못 하는 일이 없는 놈들이다. 17;15
‘탈 도덕적 기술주의’가 낳을 수 있는 치명적인 사태다. 공동체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한 몸의 안위를 위해 정치와 국가를 이용하는 것. 맹자의 어법을 빌자면 ‘교수’는 인작(人爵), 곧 사람이 만든 자리요, ‘학자’는 천작(天爵), 곧 하늘이 준 자리다. 맹자도 옛날 사람들은 천작을 행하다가 인작을 얻었는데 근간에는 인작을 꾀하느라 천작을 해친다고 개탄한 바다.
얼치기에 대한 증오 - 좀도둑 - 영화 <넘버3>에 나온 송광호의 똘마니들처럼 조폭조차 되지 못하는 얼치기들을 ‘날건달’이라고 부른다. 건달을 흉내 내지만 옳은 건달이 아닌 것이다. 또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거들먹거리는 것은 건방 축에도 못 끼는 ‘시건방’이다. 어설픈 것, 제대로 익지 못한 것이 ‘좀, 날, 시’와 같은 접두어 속에 들어 있다.
사이비 지식인에 대한 증오
공자왈; 사이비 지식인(鄕原)은 덕을 해치는 도적이다 17;13
‘향원’이란 한마디로 사이비 지식인을 말하다. ‘비슷한데도 아닌 것’이다. 색깔을 두고 말하자면, 붉은색을 훔친 자주색이요, 청색을 훔치는 보라색이 그것이다 - 맹자
연암 박지원의 작품 <호질(虎叱)> 에 등장하는, 겉으론 점잖은 선비이면서 속으로는 동네 과부와 통정하는 ‘북곽 선생’이 곧 향원의 전형이다.
향원이란 더러운 세속에 몸을 담그고 탁한 세상과 호흡을 맞추어 살아간다. 향원과 반대되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참사랑’? 나무 가운데 가장 쓰임새 있는 것이 ‘참나무’요, 작아도 새 다운 것이 ‘참새’이듯, 사람도 사이비에 맞서는 참된 사람, 즉 ‘참사람’이 있을 법하다.(진국)
그러면 사람이 참사람이 되려면 어떤 미덕이 필요할까. ‘대학’의 가르침 “멈춰야 하는 곳에선 멈출 줄 아는 것 ‘지지(知止)’. 처한 곳이 추운 데라면 추위에 멈추고, 더운 곳이라면 더위와 더불어 버티는 것. 추위에 떨면서도 따뜻함을 구걸하지 않고, 더위 속에서는 또 뜨거움을 버텨나가는 것, 이것이 사이비가 아닌 ‘참’으로 가는 길이다.
미워할 대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미워하는 것, 이것이 공자의 또 한 특징이다. 자공은 윗사람에게 불손함, 즉 덤벼드는 것을 용기로 오해하는 싸가지 없는 짓, 그리고 고자질하는 것을 정직으로 오해하는 천한 짓을 들었다. (양을 훔친 아비를 관가에 고발한 자식을 두고 정직하다 여긴 섭공의 경우)
미자편
나의 길을 가련다
귀밝은 (곧 지혜가 있는) 현인이 위나라에 숨어 살고 있었다. ‘삼태기를 짊어진 것’을 숨어 사는 은둔자들의 상징적인 행색이다. 삼태기 속엔 차(茶)도구가 들어 있기도 하고, 간단한 식료품이나 연료로 쓸 소똥 같은 것이 들어 있기도 하다(삼국유사에서는 이들을 거사(居士)라고 부른다)
안 될 줄 알면서도 세상사에 개입하는 그 ‘비관적인 사회 참여’야 말로 공자의 특징이다. 이것이 사회를 비관하여 자연으로 물러나 버리는, 즉 비관주의에 매몰되어 버리는 은둔자의 세계관과 세상사를 비관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사회에 개입하려는 공자. 공자의 길은 바로 ‘그럼에도’ 몸을 일으켜 비관적인 인간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길이다. 그저 제 한 몸의 안락을 위해 이념과 지식을 파는 참여 일변도의 길도 아닌 그 사잇길, “안 될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뚜벅뚜벅 (정의를) 행하는” 이것이 공자의 길이다. 여기 문득 공자의 눈물이 또 후두둑 떨어진다.
자장편
우정이란 무엇인가?
자하는 사소한 것 같으나 진지하고, 자장은 번듯한 것 같으나 허하다. 자하는 조그만 원칙에 얽매이는 꼬장꼬장함이 있었던 것 같고, 자장은 겉멋이 들어 크고 웅장한 것을 좋아하지만, 실제는 이에 따르지 못하는 흠이 있었던 것 같다.
“군자는 글로써 벗을 만들고, 벗을 통해 인을 보충한다. 12;24
글을 통해 서로를 사귀는 문인과 같은 교류를 참된 것으로 보았다. 글을 통한 교유는 궁극적으로 인간다움을 북돋는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관계는 무얼 주고받는 계약적 관계가 아니라 남김없이 도와주어도 나에게는 손해나지 않는 관계다. ‘모른 것을 깨우쳐 주는 학문적 관계’가 대표적이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나름대로 ‘거리’가 있어야 한다. 친구가 잘못한다고 지나치게 끌어안고서 안달복달할 것은 없다, 몇 번 충고해 보다가 고치지 않으면 그냥 ‘이제부터 나와는 길을 달리하니 친구가 아니다.’라고 절교하면 그만이다. 구태여 친구의 소맷자락을 부여잡고 ‘의리가 어쩌고, 우정이 어쩌고’ 해가면서 나서다간, 괜한 봉변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렇게 봉변을 당한 다음에야 ‘넌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절교해 본들 맞는 뺨만 더 아플 뿐이다. (형제는 한 핏줄로 태어난 동기이니 하늘이 맺어준 자연적 관계, 즉 천륜(天倫)이요, 친구의 의(義), 즉 뜻이 맞아서 맺어진 사회적 관계, 즉 인륜(人倫)이니 차이가 있다.)
자공이 우정을 여쭈었다. 공자왈 : 충고를 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되,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스스로 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12;23
좋은 길로 이끈답시고 오지랖 넓게 나서서 가타부타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친구란 나와 뜻을 같이하여 길을 함께 하는 동지(同志) 또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의 선물은 그것이 아무리 값비싸고, 귀한 것일지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왼손이 오른손으로부터 물건을 받으면서 인사하지 않듯 말이다.
요왈편
자장편과 더불어 공자의 사후에 편집된 것이 분명하다.
중용이란 무엇인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지나치지 않고 모자라지도 않음을 뜻하는 최적의 상태, 곧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용의 관건이다. 말하자면 비만도 아니요 영양실조도 아닌 한중간, 이것이 건강이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논어의 마지막 장. 공자왈 :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고 이를 수 없으리라. 예를 알지 못하면 서지 못하고,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하느니 20;3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고 이를 수 없다고 운을 뗀다. ‘천명을 앎’이란 ‘지명(知命)을 옮긴 것이다. 군자란 하늘의 명과 더불어 사람의 길을 함께 헤아릴 때만이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즉 몸이 빚어 내는 욕망, 마음이 추구하는 바람, 남을 미워하는 원망에 시달리고 휘둘려서는 군자라고 할 수 없다. 맨 끝장인 ‘말을 안다. - 사람을 안다.’라는 대목은 ‘도돌이표’ 혹은 ‘반환점’일 따름이다. 이로 말미암아 논어는 그 자체로 끝없이 순환한다. 이 순환을 통해서 논어는 우리에게 진리가 저 그윽하고 먼 곳이 아니라, 저잣거리와 일상 속에서 숨 쉬고 있음을 퉁겨주고, 그것을 나선형으로 점점(漸漸) 차(次次)차 체험하도록 인도한다. 이런 ‘배우고 익히는’ 순환 과정은 죽을 때까지 끝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하여 논어의 인생이란 ‘내내 배우고 또 배우며 살다가 가는 삶’(학생부군 신위)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에필로그
논어에 비춰 진 인간은 서구 근대의 ‘존재론적 인간’이 아니라 ‘관계적 인간’이라 할 만하다. ‘내’가 있고 난 다음 ‘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 (타인)이 있어야 비로소 ‘내’가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유교는 ‘관계’의 바탕 위에 지은 집이다.
망net의 작동work, 곧 네트워크에 성공하는 사람이 군자요, 실패하는 사람이 소인이다. 한마디로 논어는 나아가 유교는 네트워크의 체계다. (소통이다)
가족을 넘어 세계로
이정(鯉庭)- 진항이 아들 백어에게 뭐 특별교육? 마당에서 시를 배웠는가 예를 배웠는가.(소통하는 법) 하나를 물어 셋을 얻었구나. 시를 들었고 예를 들었고, 또 군자가 그 자식을 멀리함을 들었노라.
자기 자식이라고 하여 사사로이 아끼지 않는다는 뜻이니 자식에게까지 공공성을 적용시킨다는 뜻이다. 공자가 자식에게 견지한 엄격함이다.
---------------
훌륭한 글을 읽으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그렇다고 내가 그 훌륭함을 따라 갖출 수는 없다. 그냥 생긴 대로 내 글 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