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홀릭
박지영 글. 사진 /프르메
우리 동네엔 엠마 톰슨이 산다. 엠마 톰슨이 누구인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세계적인 배우다.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배용준 장동건 김하늘 최지우 권상우…. 예쁘긴 하되 만들어진 아름다움 같았고, 멋지긴 하되 뭔지 모를 거리감이 큰 벽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는 평범했다. 매니저, 보디가드, 코디네이터? 물론 없다. 그녀는 늘 혼자 다닌다. 펑퍼짐한 면바지에 철 지난 비닐 점퍼를 입고, 등에는 낡은 배낭을 멨다. 머리는 대충 빗어 넘기고 화장은 전혀 안 했다. 모두 그녀를 지하철 이용객으로, 꽃집 손님으로, 저녁거리를 사는 아줌마로 볼 뿐, 호들갑을 떨거나 어색하게 아는체하지 않는다. 스타는 대중 앞에 섰을 때만 스타일 뿐,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그저 평범한 생활인이 된다. 적어도 런던에선 그렇다.
사는 것과 여행은 다르다. 런던에 몇 주간, 혹은 몇 개월간 머물며 겪은 런던에 대해 쓴 책들을 보면서, 아, 이들은 너무나도 영국의 화려한 겉모습에 빠져 있구나, 잠시 들른 여행지는 아름답다. 경험해야 할 좋은 것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너무 많아서 다 보고 갈 수도 없다.
처음엔 모든 것이 좋았다. 환상적이고 산뜻한 도시, 미술관 2층버스, 동네마다 원시림 같은 공원이 있고 거리마다 다리가 아플 때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여 있다. 감동의 연속이다.
응급실에 가서는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의사를 겨우 볼 수 있다. 길 가던 흑인들은 “차이니즈!”라 소리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겁주고, 기절초풍할 물가에 허리가 휜다.
‘여기 가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요’ 식의 여행서는 아니다. 그저 저널리스트로, 아이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그리고 대학원생으로 런던에 살면서 부닥치고 느낀 삶의 소중한 편린들이다. 다만 그 편린들이 때론 엉뚱하고 때론 쌉싸래하다. 한국에서 35년간 경험한 것보다 몇 배는 즐겁고 멋진 인생을 맛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글쟁이는 글로 말한다.
유토피아를 향한 이카로스의 날개 <사회>
영국사람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 – 다인종 다민족 다언어 시내버스를 타보면 안다. ‘지구촌 버스’ ‘멜팅팟’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하나의 도시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현상. 그들은 영국 문화에 적응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지켜가며 산다. 여러 가지 채소가 섞여 각각의 맛과 향을 유지하는 샐러드처럼. 영국인들은 어디로 다 이민 가버렸는지, 객들만 들끓는다. 유치원 소풍, 각자 자기나라 말로 대화를 하다 보니 마치 각국을 대표하는 사절단이 모인 UN국제회의장 같다. 누구든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냥 눈짓과 표정으로 그 대화를 가늠할 뿐. 24명 정원에 21개국 아이들이 모였다. 대부분이 영국을 비자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유럽국가들에서 왔다. 나머지는 아시아와 남미, 남아프리카 출신. 파리에 가면 누구나 느낀다. 파리쟁들이 이방인을 몸서리치게 싫어한다. 이들이 사회의 품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배척하니 외지인은 겉돌 수밖에 없다. 영국의 포용정책은 이민자에게 철없이 반항하는 사춘기 아들에게 화 한 번 내지 않고 예쁘다, 너는 잘될 것이다, 라고 등을 쓰다듬으며 사랑을 쏟는 어머니의 마음 같다.
모두의 평등에 올인하다 - ‘서북쪽 아이들’ 부자 동네에 살고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엘리트코스를 밟는 아이들, 커서는 영국을 이끌 총리가 되거나 고액 연봉을 받는 은행장이 될 것이다. 기존 집의 개조나 리모델링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빅토리안 하우스에 살려면 3년에 한 번씩은 집을 완벽하게 다시 손봤다는 증명서를 구청에 제출해야 한다. 런던에서 아파트란 ‘돈 없는 사람이 사는 흉물스런 건물’ 정원도 없고, 조상의 손길도 닿지 않은 곳이다.
다 퍼주는 모범생 정부 – 만 3세부터 16세까지 무상교육. 대중교통 무료. 병원진료도 무료. 약값도 공짜. 흑인 엄마 한 명을 아이 일곱여명이 에워싸고 지나가고 있다. 포도알이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 가지처럼. 우리 세금 걷어다가 저 사람들 먹고 자는데 쓰다니. 정무가 일반 주거단지를 매입해 생활이 어려운 극빈층에게 제공. 난민들에게 매주 성인에게 35파운드 16세 이하 50파운드 영국의 실업자에게 지원하는 실업수당과 똑같은 기준. 단 실업자의 경우와 달리 난민은 가스 전기 수도세 모두 면제. 영국 시민이 단 될 바에야 차라리 난민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어라, 근데 한국인들도 매년 200명이 넘게 난민(혹은 망명자)자격으로 들어온다. 탈북자들과 남한의 동성애자들이다.
건물 반 공원 반 – 공원은 사람 반, 개 반. 개나 사람이나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야 일생이 안락하다. 개는 가족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맘껏 즐기고. 그러나 사랑한답시고 털에 염색하고 괴상한 옷을 입힌 개는 보지 못했다. 영국 개들의 가장 호사스런 치장은 비가 억수로 올 때 등에 비닐 커버를 덮는 정도이다.
골더스힐 파크, 정말, 누구라도 가슴이 먹먹한 사람이 있다면 이 공원에 와보길 바란다. 벤치에 앉아 있자니 인생! 별것 있나, 다 괜찮다는 위안. 번잡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여, 뭔가 큰 결정할 일이 있으면, 대자연으로 들어가 보라. 아주 명확한 해답이 그곳에 있을지니. 영국인에게 자연을 가꾸고 보존하는 건 일종의 사명 같다. ‘잔디를 밟지 마시오.’ 없다. 아이들이 놀다 잔디가 패면 그저 메꾸면 되고, 자라면 또 깎으면 된다. 관광지라 해도 그 흔한 노점상도 없다.
대한민국, 런던에서 존재감 떨치기 - “한국이 뭐냐?” 뭐냐라니 그게 무슨 장난감이유. "아 유 재패니즈?" 엄청 반갑게 접근했다가 "노, 아이 엠 코리언" 친절하게 정정하는 내게 인사말 한마디 없이 쌩하니 가버리는 영국 아줌마들. 왜 한국 음식은 안 되고 일본 음식은 되는거야? 이 이야기를 하려면 책 한 권 분량도 모자란다. 내가 만나는 영국인들 모두 박지성의 플레이를 '천재적'이라고 말한다. 맨유는 싫어해도 박지성은 좋아한다. 정말 열심히 뛰는 선수, 머리를 쓸 줄 아는 선수.
문밖만 나서면 미술관, 박물과 – 고흐의 해바라기 공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캐치도 공짜, 이탈리안 거장 카날레토를 보는 것도 공짜다. 마치 옆집 친구네 놀러 가듯. 어느 나라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막대한 티켓 수입을 포기하고 무료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배짱을 부리겠는가, 단언컨대, 영국 말고는 없다. 아이들은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후앙 미로의 그림 앞에 앉거나 엎드려 그의 그림을 모사한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힘이다. 자라나는 새싹들이 살아 있는 지식을 배우고, 문화를 향유하고, 훗날 자신의 아이들 손을 잡고 다시 그곳에 들르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 말이다.
런더너의 일부는 아시안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들에게 아시안은 별로 잘난 것도 없으면서 이 나라에 와서 돈이나 평펑 쓰는 인간 군상으로 비춰진다. 일종의 열등감과 비뚤어진 우월감이다. 영국인들은 아시아 여성을 딱 두부류로 나눈다. 잘사는 일본인, 아니면 못사는 나머지 아시아인.
응급실엔 응급환자가 없다 – 얘네들은 엄청 오버를 해야 당일에 의사를 만나게 해준다. 보통의 경우 미리 예약 전화를 한 후 2~3주쯤 기다려야 의사를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간호사가 없다. 대신 의사가 직접 나와 환자를 에스코트한다. 아이가 코감기에 걸려 콧속에 커다란 덩어리가 가득 차도 “뛰어다니면 건강한 겁니다” 웬만해선 약도 처방해 주지 않는다. 이곳에선 무엇이든 오버를 해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영국에선 소리를 질러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 내내 응급실에서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두통 때문에 찾아간 응급실에서 아이는 장염 진단을 받고 ‘물을 많이 먹으라’는 처방만. 더럽고 치사하다. 공짜로 의료혜택을 받는 것 좋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앓느니 죽자. NHS라는 영국의 의료제도는 기본적으로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다. 나이 들고 돈도 없는데, 암에 걸렸을 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조직검사, 항암주사, 방사선치료, 입원비, 병원 내 식사비도 무료다. 영국의 한 신문에 의료기사, 충치를 앓고 있는 10대 소년이 5년째 진료를 기다리다가 이가 몽땅 썪어버렸다. 이것이 영국 의료계의 현실이다. 영국에 살 때는 아프지 말아야 한다. 병에 걸려서도 안 된다.
남자는 펍으로 가고 여자는 혼자 달린다 <런더너>
남자의 자격, 영국 신사에게 배워라 –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짱가가 나타난다. 유모차를 끄는 아줌마에게 잘 생긴 남자들이 나타난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 산다. 영국 신사의 뿌리는 갑옷을 입고 칼을 찼으며 정의에 죽고 살던 중세시대의 귀족에 있다. 19세기에는 영국 신사의 기준을 혈통보다는 사회적 지위, 교육수준, 매너 등에서 찾았다. 그리고 20세기게 신사는 남에게 특히 여자에게 존경받을 만한 매너를 보여주는 사람으로 인식. 세상이 완전히 변했어도 나보다 약한 자를 존중하고 최대한 도와주려 하는 선한 마음과 매너가 있어야 한다. 영국 신사들은 은행에 들어갈 때면 육중한 문을 잡고서 노약자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은 맨 나중에 들어간다. 버스나 지하철 어김없이 ‘레이디 퍼스트’다.
기다리기 챔피언, 런던의 달인들 - ‘기다리기’다. 불판의 오징어처럼 몸을 비비꼬기를 서너시간, 비행기가 왜 연착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다섯 시간을 기다리라고? 누구 하나 이런 상황에 대해 불평하거나 난동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이것은 신이 나에게 내린 가벼운 벌칙이려니 생각하며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5파운드짜리 공짜 점심 쿠폰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자그마치 일곱 시간을 공항 대기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밋밋하고 지루한 일상이 곧 행복? - 가끔 공산국가에 살고있는 건 아닌가, 착각. 매일 똑같은 옷을 입은 노인들, 동네 옷가게의 우울한 인테리어, 그리고 어딜 가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퇴근길, 지하철이 역과 역 중간에서 갑자기 멈춰 서서 30분 이상 꼼짝을 안 해도 그냥 묵묵히 기다린다. 책을 읽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눈을 감고 명상을 하거나. 단 5미터 앞 반대편 도로로 오는데 자그마치 한 시간이 걸렸다. 진정한 블랙코미디의 진수다. 모근 불합리함을 참고 견뎌내는 전통은 대처수상 시절 ‘똘레랑스(견뎌내기 혹은 인내)’에서 비롯. 다 같이 고통을 분담하며 어려운 경제 상황을 헤쳐나가자는 국가적 비전이 영국인들의 몸에 깊이 각인된 것이다. 빨리빨리 민첩한 한국인이 절대 적응하는 못하는 ‘그 무엇’이다.
사실 영국인에게 삶의 행복이란 소박한 데서 온다. 오후에 티타임을 갖고, 개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고,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그릇과 가구를 후손에게 물려주고, 채소나 꽃을 키울 조그만 뒷마당이 있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 무엇도 심각할 게 없다.” 버스가 떠날 것 같다고 뛰어가지 말고, 그냥 오후의 티나 즐기자고. 참 낭만적이고도 여유롭지 않은가,
아마 영국에서 이렇게 평생을 장수하면서 사는 이유, 위트가 있기때문이다.
지루하고 밋밋한 일상이 곧 행복인 그들에게 ‘변화’는 평화로운 목장에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과 맞먹는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영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질색한다. 그들은 과거의 유물이 미래의 기술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빅토리안 시대에 지은 벽돌집이 지금 짓는 시멘트 건물보다 훨씬 튼튼하고 디자인도 세련됐다고 믿는다. 그래서 100년이 훨씬 넘은 집을 대대로 수리하면서 새집처럼 가꾸며 산다. 아마 이들은 런던의 빨간색 2층버스가 노란색으로 바뀐다면 모두 패닉에 빠져들 것이다. 영국인에게는 큰 변화 없는 일상이 삶의 가장 큰 축복이다.
영국인의 기다림과 줄서기는 올림픽 2관왕이다. 물론 불평불만은 제로에 가깝다.
불쌍한 남자들, 까칠한 여자들 – 영국 남자들에게 최고의 호사는 펍(영국의 전형적인 선술집)에 가는 것이다. 그것도 애 딸린 마누라는 떼어놓은 채 홀로 고독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역시나 이웃집에서 ‘탈출’한 남자와 맥주 한 병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그 흔한 회식문화도 없다. 회사에서 회식은 몇 달에 한 번 점심을 같이 먹는 정도다. 일 년에 단 한 번 정도 회사에서 마련한 연말 파티에서 술을 왕창먹고 와봐야 밤 열두시다. 월화수목금요일을 이렇게 보낸 런던의 직장남은 주말이면 더 바쁘다. 아주 전투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몸을 바친다. 아이와 축구를 하고, 모형 비행기를 띄우며 논다. 본인은 옆에서 책을 읽으며 일광욕을 즐긴다. 집 앞 공원에 가지 않는다면 1박2일 여행을 떠난다.
영국인들은 남편이 혼자서 돈을 벌어오는 집의 아내를 ‘레이디 오브 레저’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맛있는 것 사 먹는 아줌마라는 뜻이다. 이곳의 레이디 오브 레저들은 달리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정말, 팔자 늘어졌다. 남편들이 순한 양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영국 여자들이 기가 세기 때문이다. 여자아이들이 윽박지르면 남자아이들은 끽소리도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아이들은 여자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도전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힘도 세다. 그래서 영국 여자들과 언쟁을 벌이면 안 된다.
남자가 바람피우는 것에 너그러운 사람들 – 왜 바람기에 너그러운가 변화를 싫어하는 영국인들의 유전자 때문이다. 일상생활이 흐트러지고 결국은 헤어져 서로에게 상처를 주느니 그냥 현상을 유지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영국의 앙숙인 프랑스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프랑스 대통령과 영부인 발라 브루니가 맞바람을 피운다. 개인의 사생활을 철저히 사적인 것에 부치는 프랑스다. 영국은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다.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프랑스 상류층의 사랑, 참 쉽다. 그 쉬운 사랑이 영국에선 안 통한다. 바람은 곧 배신이자 명예의 종말이다. 영국 정치인의 제1 덕목은 화목한 가정이다. 이혼해봤자 이혼녀라는 딱지말고는 얻는 게 없다. 결혼생활을 유지하면 남편의 바람기를 용서한 착한 여자다. 영국 사람들이 의뭉스러운 건지, 대놓고 바람을 피우다 앗쌀하게 헤어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쿨한 건지 도통 모르겠다.
‘쏘리’는 ‘쏘리’가 아니다 – 런던에서 정말 미안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 이들은 정말로 미안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미안하다는 사과는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왜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할까. 그곳에는 내가 노력해도 되지 않는 제3의 힘이 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제3의 힘, 그걸로 상황 종료다,
명품족이세요? 참 촌스럽군요 – 엄청난 재산과 더불어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전형적인 상류층 사치를 부려도 누구 하나 뭐랄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항상 빛바랜 푸른색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다. 겉치장에 신경을 안 쓰는 대신 문화생활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아트 컬렉터다. ‘나도 저렇게 멋지게 늙어야겠다.’ 전시를 보러 갈 때나 메이페어에 있는 갭지 고든의 레스토랑에 갈 때 보스 양복에 프라다 코트를 걸친다. 그러나 구매 패턴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신상 말고 30년 전에 산 갈색 재킷에 10년 전에 산 회색 바지를 맞춰 입는 식으로 근사하게 차려입고 나들이를 간다.
런던 상류층에게 티타임은 오후의 필수 코스다. 유명 호텔의 야외 테라스나 미술관 마당의 레스토랑. 세 사람이 15만 원 한잔 마시는데 이런 거금을 쓰다니!
청담동 거리에 한 집 건너 ‘아름다운 가게’ 남들이 쓰던 옷과 집기들을 찝찝해서, 하지만 모두 아주 즐겁게 채터리 숍에 들러 쇼핑을 한다. 때로는 쓰다가 싫증 난 물건도 기부한다.
한국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도 명품 하나쯤은 있다. 명품을 걸치고 백화점에 가서 다시 명품을 산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으레 그렇게 해야 한다. 런던은 다르다. 실용성과 소박함이 사회 전체에 깔려있다. 다들 낡은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닌다. 비닐 가방을 들거나 배낭을 메고 다닌다. 편하고 가볍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명품족이다. 그들은 대신 그 돈을 문화생활에 투자한다. 영국의 힘은 바로 이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나온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 “한국에서 뭐 하셨어요?” “중앙일보에서 기자” “기자는 상대를 말아야지, 뒤에서 등쳐먹는다는데?” “그럼, 중앙일보에서 일했으면 중앙대 나오셨겠네요?” 조선일보 다니면 조선대, 서울신문사 다니면 서울대, 경향이나 한겨레신문은 검정고시 출신?
남의 눈에 띄는 게 죽기보다 싫다? - 영국인은 남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한다. 극도로 싫어한다. 영국인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자신이나 가족의 이야기는 절대로 먼저 꺼내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신상도 묻지 않는다. 그저 날씨 얘기나 못난 정부 욕이나 한다.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해서 호구조사부터 시작해야 하는 한국인의 습성. 런던 주택가를 걸어 다니면 가장 눈에 띄는, 혹은 눈에 거슬리는 창문마다 드리워진 커튼, 이놈의 커튼은 햇살이 반짝이는 대낮에도 묵묵히 창문을 가로막고 있다. 어쩌다 뒤가 당겨서 고개를 돌려보면 창문 안쪽에서 나를 몰래 바라보다 얼른 커튼을 쳐버리는 누군가의 시선과 움직임이 느껴진다. 우리는 다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산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이다. 수십 명이 비좁은 칸에 모여 있는데도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다. 게다가 서로 눈빛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각기 다른 곳을 쳐다본다. 낯선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최대한 바르게, 쳐다보지 말고 지나가야 한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바빠 보이고 서로 의심하는 것 같다.
영국인과 친해지기 혹은 왕따 당하기 - “수돗물 주세요” 약간 비린 냄새가 싫다면 레몬 한 조각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50센트를 추가로 내고. 영국인과 친해지려면 제1원칙은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이다. 왕따가 될 수 있다. 영국인은 자신을 매우 낮춰서 말해야 매너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운이 좋아 그 자리를 얻게 됐다고 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내 아이는 축구를 잘 못한다고 속상해하고, 최근 다녀온 해외여행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말해야 영국인들은 동정심과 애정으로 그대를 친구로 받아줄 것이다. 대신 한번 친구가 되면 180도 돌변한다. 다 내주고 싶어한다. 속마음도 털어놓는다. 대화는 역시나 일본이야기로 시작해 흑인 이야기로 끝났다.
영국인들은 일본을 너무나도 좋아한다. 환상은 정말 대단하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미지의 나라다.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영국인들이다. 그런데 그 일본 옆에 있는 한국은 잘 모른다. 영국인과 친구가 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영국인들이 얼마나 타 인종을 배척하고 증오하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하지만 영국인답게 드러내놓고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언제나 방긋 웃는 매너를 보여준다. 영국은 아직도 과거의 찬란한 영광을 누리며 산다. 유럽 대륙의 선진국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고 일종의 섬나라 멘탈리티다. 유럽연합에 속해 있되 제도는 따르지 않는다. 독일, 이탈리아, 그리스, 프랑스 등이 자신의 화폐를 버리고 유로로 전환했음에도 꼬장꼬장한 영국은 아직도 파운드를 쓰고 있다. 다 같이 약속해놓고 혼자만 딴청을 부린다. 젊은이들이야 유로면 어떻고 파운드면 어떠랴. 노인 세대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대륙의 돈을 쓸 수 없다”고 쌍심지를 켠다. 영국의 그 뚝심이 부럽다.
알맹이는 가고 껍데기만 남았다. <경제>
손님은 밥이다 – 런던만큼 비즈니스하기 좋은 곳도 없다. 손님은 왕이다? 이런 말은 지구 반대편, 저 친절 공화국 한국으로 날려버려라. 영국에서 손님은 밥이다. 우편 서비스, 언제쯤 배달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행여나 샤워하다가, 혹은 잠깐 장 보러 나갔다가 물건이 배달되는 시간을 놓치면 또다시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우체국 택배 ‘고객님의 물품이 몇 시에 배달될 예정입니다.’ 휴대폰 메시지가 전송된다. 우편 서비스는 어느 나라 못지않게 신속하다. 다만 외국에서 오는 소포는 우체국인 아니 제3의 업체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설치, 굼벵이가 기어가는 속도보다도 느리다. 설치 신청을 한 후 빨라야 3주, 이날 또한 하루종일 화장실에도 가지 말고, 샤워도 하지 말고, 장도 보러 가지 말고, 설치기사가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런던 비즈니스 스쿨이 세계 톱이다. 고객의 심리를 꿰뚫어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광고 전략은 비즈니스의 핵이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백화점의 호객행위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대놓고 들이대는 광고 카피. 이 얼마나 지적이면서도 쇼핑을 장려하는 문구인가. 존재감은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앙증맞은 프라다 빨간색 클러치 백을 내 손에 쥐었을 때, 그 곳에 희열이 있고 내가 있다. 반대로 그 어여쁜 백을 만지작거리다 아쉬운 듯 놓고 나올 땐 내가 없다.
영국 TV광고의 특징은 연예인이 안 나온다. 일 년에 광고 몇 편 찍느냐로 개인의 인기와 부와 명성을 판단하는 한국 연예인들을 반성해야 한다.
런던살이 가계부 – 생활필수품 가격 죄다 비싸다. 대부분이 수입산이기 때문이다. 월세는 돈 먹는 하마다. 3년 넘게 1억원을 써버렸다. 물론 집 렌트비보다 더 비싼 아이 학비나 내 학비, 의류비, 유럽여행비, 자동차 기름값. 근검절약해서 살아도 한 달 생활비 5천파운드 약 9백만원, 우리 남편, 허리가 휘는 소리가 내 귓가에 웅웅거린다.
세금 폭탄 – 런던엔 열심히 죽도록 일하는 프로페셔널 바보만 산다. 정말 바보들만 세금을 낸다. 돈이 많은 영국의 백만장자들은 세금을 안 내기 위한 안전장치, 비거주자 지위를 이용한다. 영국에서 나서 영국에서 살고, 영국에서 사업하면서도 이들은 정부에 자신을 비거주자로 신고한다. 그러면 해외에서 번 돈에 대해선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세금은 영국이고 한국이고 월급쟁이 지갑만 만만하다.
사람을 홀리는 여름 & 겨울 빅 세일 – 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쇼핑한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자마자 폭탄세일! 쇼핑에 안달이 난 사람들아, 이곳 런던으로 오라. 당신의 존재감을 팍팍. 손에 쥐가 날 정도의 쇼핑백들은 덤이다.
런던의 패셔니스타들에겐 유행이란 없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을 뿐이다. 뚱뚱해도 과감하게, 한여름에도 모피. 오피스 레이디,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검은색 스타킹을 신운 뒤, 하얀색 운동화로 마무리! 배낭 속의 하이힐, 퇴근길이면 다시 운동화로 갈아 신을 것이다. 한국에서 모두 같은 옷에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닌다.
리전트 스트리트를 건너편 버버리 매장은 매니저와 문을 지키는 경비원만 푸른 눈이다.
맛없는 영국 음식이 세계를 제패하다 – 사람들은 욕을 많이 할수록 더 자극받고 더 즐거워한다. 일종의 마조히즘. 욕을 얻어먹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사람의 환희를 느끼는 비뚤어진 심리. TV만 보고 있자면 온 나라가 마치 요리에 미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닌가 싶다.
예술이 런던을 먹여 살린다 – 런던의 연극 무대는 활기를 띤다. 매번 객석이 꽉 찬다. 관광객들도 일조한다. 천천히 안경을 끼고 팜플랫을 읽어 내려가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심각한 표정인데도 아주 귀여워 보였다. 칠순 나이에도 멋지게 문화를 향유하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예술이 런던을 먹여 살린다.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는 뮤지컬관람이다. 런던과 뉴욕은 세계 미술 시장을 양분. 런던은 올드 마스터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뉴욕은 현대미술 시장. 2000년대부터 현대미술이 큰돈이 되면서 뉴욕 미술 시장은 세계 넘버원이 됐다. 그림을 파는 사람에게 10프로 그림을 사는 사람에게 12~20프로 수수료를 받는다. 문화는 돈 있는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다는 편견을 버려라. 전 국민의 3분의 2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서 문화를 즐긴다. 가난하든 부자든, 무식하든 유식하든 누구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하는 문화정책이 오늘날 엄청나게 삐걱거리는 영국 경제를 살리고 있다.
헐렁한 나라, 그래서 무서운 나라 < 범과 정치 >
프랑코스피어의 법은 강력한 법으로 촘촘하게 그물망을 짜 놓아 사회 안정을 꾀하고 시민을 보호한다. 반면, 애글로스피어의 법은 유연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다. 시민의 자율과 양심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리라고 한다.
런던의 도로엔 자율의 미학이 있다 – 런던에서는 내가 건너면 그곳이 곧 횡단보도가 된다. 런더너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고 사느냐고? 아니다. 그만큼 안전하기 때문이다. 도로에는 신호등이 별로 없다. 사람이 지나가려고 하면 차는 반드시 서야 한다. 그냥 운전자와 행인 간의 암묵적 약속이다. 100%다. 내가 건너가려고 도롯가에 서 있으면 차들은 항상 정차선 위에서 멈춘다. 영국은 참 불친절하다. 어느 관광지를 가건 그 장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안내지도가 없다. 그냥 거리를 무작정 걸으며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 런던엔 높은 산이 없다. 누구 하나 공격적인 사람 없이 모두 매너를 지켜가며 운전한다. 아무래도 런던 도로엔 해피 바이러스가 뿌려져 있나 보다.
알아서 돈 내라, 걸리면 끝장이다! - 버스 두 대를 붙여 가운데 연결 부분에 고무 주름을 넣은 벤드버스.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학생 루이뷔통 백에 화장을 아주 곱게 했다. 감시원이 없다는 걸 이용해 무임승차를 하다니.…. 그것도 화장을 곱게 한 루이뷔통 아가씨께서!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무지막지하게 창피했다. 한마디로 모든 게 개인의 자발적인 양심에 맡겨진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경우엔 엄청난 처벌이 기다린다. 본인이 조절할 수 없는 양의 자율은 각종 폐해를 낳는다. 사기와 편법이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런 코미디가 없다 < 교육 >
집 앞 유치원 보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 차일드마인더란 영국에서 보편적인 아이 돌보기 서비스로, 일반 가정주부가 자신의 집에서 낮 동안 10여 명의 아이를 돌봐주는 것이다. 사립유치원보다 비용은 훨씬 적게 든다. 런던의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어여쁜 20대 처자들을 볼 수 있다. 화장을 곱게 하고 누가 보기에도 처녀 같은 몸매다. 이들 대부분은 유모라고 보면 맞다.
‘반은 정신 나간 여자로 보여라.’ 아이의 학교 배정을 받고 나서 심각한 우울증에 걸렸다. 매일 잠도 못 자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난다. (이때 눈물 한 방울 보여주고) 심지어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등의 충격발언을 쏟아내라고 했다. 그녀는 위원회에 가기 전 주치의에게 가서 내가 우울증에 걸려 반은 미쳐가고 있다는 소견서도 받아놓아야 한다고 했다. 영국 사람들은 증명 서류를 좋아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다시 구청에 전화해 아이를 어느 학교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폭탄선언, 담당 공무원은 심드렁하게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은 불법입니다.” 실패하고 난 몇 주 후, 구청에서 공문서가 날아왔다. “우리 구청에서는 학교 배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주민센타에 임시 학교를 마련했습니다. 9월부터 아이를 그곳으로 등교시키기 바랍니다.” 산 넘어 태산이다. 난 큰 걸 바란 게 아니다. 아이가 집 앞의 가까운 학교에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도서관은 놀이터다 - “몽구, 어디 가고 싶어?” “엄마, 도서관 가도 돼요?”
영국인들은 책을 끼고 산다. 공원에서 선탠할 때도 책을 읽고,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하다가 아이가 잠이 들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는다. 지하철, 잠자기 전 침대, 휴양지, 비행기 안에서도 책을 읽는다. 책장에 전집을 꽂아 놓은 집은 보질 못했다. 전집이란 개념도 없다. 책은 고이 모셔놓는 인테리어 용품이 아니다. 원하면 어느 때고 마음대로 꺼내보는 장난감이다. 어린이 도서관에서는 책을 한 번에 열두 권까지 3주간, 빌린 책을 더 오랫동안 읽고 싶으면 다섯 번까지 연장 가능. 영국인에게 책은 삶의 한 부분. 집의 책장은 빈약할지 모르지만 언제 어디서든 꾸준히 책을 읽는다.
말 많은 서양인들, 돌쇠 같은 동양인들 – 소더비 대학원의 강의실, 세 부류. 교수의 눈에 띄고 싶어 안달이 나 내용 없는 말을 속사포처럼 쏴대는 야망의 서양인들, 거울이나 보고 낙서나 하는 영국 귀족의 자녀들, 열심히 노트 필기하되 입에 군내가 나도록 말이 없는 동양인들. 세미나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밤새도록 공부한 돌쇠 같은 동양 애들은 빛도 못 보고, 수업시간 전 잠깐 짬을 내 인터넷으로 자료를 뒤적인 영어 래퍼들이 빛을 발한다.
달콤 쌉싸름한 회사 다닐 맛 <회사 다니기>
눈 오는 날 회사 나온 놈이 바보지 – 영국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비가 왔다가 해가 반짝이다 바람이 불다 우박이 내린다. 그러나 눈보라 태풍 지진 홍수 폭설 가뭄이란 게 없다. 우리처럼 매년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고 태풍에 온 나라가 피해를 보는 경우는 없다. 폭설에 대처하는 자세는 가만히 집에 앉아서 눈이 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런던은 누구 하나 눈을 치우러 나오는 사람도 없다. 도로에 제설차도 없다. 염화칼슘도 싫어한다. 눈은 그냥 놔두면 녹게 되어 있다. 국민성의 차이, 한국인은 어떻게든 역경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반면, 영국인은 뭔가를 의도적으로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둔다.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고 불편함을 견뎌낸다.
대영도서관, 오래된 고문서를 확대경으로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깨알같이 메모하는 영화배우 숀 코너리를 닮은 노신사도 있다. 옆자리 여자 친구가 예뻐 죽을 것 같아 공부는 뒷전인 남학생도 없다. 모두 정말 전투적으로 책을 읽고 메모를 한다. 대학 도서관도 마찬가지다. 100여 명의 열공생들이 대충 때운 점심 후에 햇살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광경을. 만약 우리나라에서 남친이 허술한 도시락을 내밀며 도서관 앞 시멘트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먹자고 한다. 그날로 그 커플은 끝이다. 여자는 그날 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돈 없는 찌질이 루저’라며 그 남자를 욕할 것이다.
내 머리 위의 유리 천장 - 인생이란 그런 거다. 아무리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게 있고, 어쩌다 걸려들어 대박이 나기도 한다.
외국인에 대한 편견, 소통의 부재, 기회의 불평 등등, 설기현이나 나나 우리 남편 모두 각자의 활동 무대에서 적잖은 차별을 견뎌야 한다.
천재에 버금가는 재능을 갖지 않은 이상 외국인이 이 땅에서 취직하기란,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기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비영어권 출신 직원들은 디자인 실력이 월등해도 소장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대신 디자인 실력은 떨어지더라도 영어가 유창한 영국인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취직 못 하는 이유 - ‘워크 퍼밋 디펜던느’ 노동자 허가서를 받아 영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기러기로 살지 않도록 아내와 어린 아들도 자유롭게 영국을 드나들 수 있도록 허락하는 가족 비자.
유럽이 내 손안에 있다 – 여행 -
베니스 비엔날레를 가다 – 또다시 길을 잃었다. 남편의 얼굴은 급기야 홍당무가 되었다.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면 간단한 것을 왜 저렇게 지도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까. 베니스에 온 지 이틀째, 남편은 아직 까지도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길만 나서면 헤매고 있다. 저 ‘걸어 다니는 네비게이터’가 베니스만 오면 작동을 멈춰버린다. 이 도시는 마치 조물주가 숨바꼭질을 한바탕 해보라고 지어놓은 미로 같다. 게다가 그 흔한 길거리 표지판도 없다. ‘산 마르코 광장 가는 길’ 희미한 글자는 ‘이 길을 따라가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면 어쩌다 운 좋게 산 마르코 광장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임. 꼭 이 방향으로 간다고 산 마르코 광장에 갈 수 있다는 보장은 못함’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미로에 들어선 쥐 마냥 베니스에만 있는 매력이자 마력이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홀수 해에는 미술전이 열리고 짝수 해에는 건축전이 열린다. 베니스 골목길 어귀마다 각종 기념품점이 수두룩했다. 주로 파티에 쓰는 화려한 가면이나 도자기 용품을 파는 가게다, 이탈리아에 오면 안경을 사야 한다. 프라다, 페라가모, 페라리, 람보르기기니 등 디자인의 선붕에 선 나라답게 안경 디자인도 남다르다. 이탈리아 하면 형형색색의 안경테를 떠올려야 마땅하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해를 거듭할수록 실망스럽다. “전시장 작품보다 길거리 빨래가 더 예술 같다.”
덴마크 암스텔담, 미술관 반고흐 미술관은 돈은 많이 벌었을지 몰라도 관람객의 마음을 훔치는 데는 실패했다. 미술관 직원들은 경직됐고 때론 공격적이었다.
에필로그
그곳에서 나는 선진국을 보았다. 또 이사를 했다. 인생 3대 스트레스가 이직, 배우자와 사별, 그리고 이사. 한 집에서 3년이나 살다 보니 좀 지겹기도 했고, 무엇보다 보일러를 빵빵 틀어도 너무 추었다. 여름에는 얇은 내복을 입고 양말을 신고 있어야 했다. 창문 때문이다. 3년쯤 살다 보면 이 체제에 녹아들 때도 됐는데, 즐길 일만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점점 싸움닭이 되어가고 있다. ‘환상적인 런던’은 이주일, 혹은 몇 달간 여행을 왔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나 같은 외국인이 런던에서 살려면 잔 다르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이유로 이곳을 떠나기엔 런던은 너무나도 매력적인 도시다. 나는 이 모든 역경을 공원과 맞바꿀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슬픔을 미술관과 맞바꿀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불합리함을 이곳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와 맞바꿀 수 있다. 그뿐인가, 매일 저녁 일곱 시면 집에 돌아와 요리도 도와주고 아이와 실컷 놀아주는 100점짜리 남편도 있고, 루이뷔통 가방이 없다고 나를 우습게 보는 백화점 직원도 없고, 나를 툭 치고도 뻔뻔하게 지나가는 행인도 없다.
백만장자조차도 10년은 더 된 낡은 옷을 즐겨 입고 동네 채터리 숍에서 쇼핑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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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고, 여행 좀 한다고 다소 으스대던 여자,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런던홀릭>>에 대책없이 절망하고 꼼짝없이 빠져들었다.
논어에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뭔가 나타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 후배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글 빨 좋은 후배들이 겁난다. 감히, 후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온 연식이 더 되었기에 후배라 칭한다.
쳐들어올까 봐 겁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포기하게 될까 봐 겁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7월 2일 출국하여 7월 25일 입국할 예정이던 영국행 항공권을 취소한 것이다.
그놈의 듣도 못하던 '메르스'라는 균이 대한민국을 강타한 바람에,
나는 운없게도 의심환자로 분리되어, 자가격리를 하며 혼자 열을 막아냈다.
그 강, 메르스의 강 입구까지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