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미술관
1982년 3월 31일 우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종로예식장
야외조각상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탈 없이 사이좋게 잘 살았는가
중간 점검을 하는 셈이다.
프랑스 로댕미술관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다시 사진을 찍는다.
아직은 그런대로 건재하다.
로댕 앞에서 까미유끄로텔 앞에서 관능을 읽는다
‘더 키스’ 앞에서
로댕의 손길이 까미유의 곡선을 그린다
우리도 가벼운 키스로 인사했다.
까미유 끄로텔의 깊고 슬픈 눈 앞에서
관광객은 웃는다
방명록에 간단한 감상과 사연쓴다
로댕미술관이 된 비롱 저택은
18세기에 세워졌으며 비롱원수가 살았었다.
이 호화로운 저택을 로댕은 국가 소유가 된 이후부터
자신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사용권을 얻었다.
7월 말 가장 더운 여름인데
어찌나 서늘한지
낙엽이 다 떨어졌다
로댕, 영감쟁이의 힘도 좋다.
농후함이 온몸을 화끈거리게 했다.
로댕의 제자이면서 연인이었던 ‘까미유끄로텔’.
로댕은 그녀를 한 조각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병동에서 죽어가는 순간까지
아주 독한 에고다
그 예쁜
재능있는 예술가를 세상에 묻어버리고
자신의 여자로만 살다가 죽게 했다
'차도남'이다
이곳의 후원, 이 한적한 환경을 매우 좋아한 로댕은
1917년에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작품제작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
로댕미술관 야외공원에는 한국말만 들리는 것 같았다.
한국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 정말 많았다.
우리나라 미술교육 정말 대단하다.
스케치하고 있는 학생들은 다 한국말을 썼다.
부모복이 많은 아이들를 보며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일을 하는 집의 큰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 2011, 7, 30 토
<로댕미술관>
파리시내에는 단체 한국관광객이 많다.
우린 20일 ‘자유여행’이라고 하면 “우~ 와~, 좋겠다.”
미술품보다 탄성을 나오게 하는 조건이다.
나는 귀엣말로 살짝 귀띔해준다.
“남편과 같이만 아니라면…”
듣는 여학생 여직원 여인들 손가락 치켜들고
“와~” 감탄사 연발한다.
남편은 무슨 상황인 줄도 모르고 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여행이라는 것, 좋다.
만방에 너그러울 수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