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질주
류창희
스무 살 무렵, 내게 봄이 올 것 같지 않았었지요. 그해 봄날, 안톤 체호프의 연극 《벚꽃동산》을 같이 보았어요. 우린 그때부터 화사한 벚꽃동산을 꿈꿨을지 몰라요.
모든 걸 우물 속에 내동댕이치고 떠나는 거야.
그리곤 바람처럼 자유로워지는 거야.
너무 멋져.
나의 영혼은 밤이건 낮이건 어느 때를 막론하고
형용할 수 없는 예감에 넘쳐있어.
나는 행복을 예감해
- 체호프의 희극 ‘벚꽃동산’ 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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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독일에서 자동차를 렌트했어요. 남프랑스 지역 스물세 개의 야영장을 돌면서 “원 텐트! 투 피플!” 줄곧 두 마디만 했죠. 그는 버킷리스트 중에 190킬로 이상 밟고 이태리 보르미오 스텔비오패스 그린젤패스와 스위스의 푸르카패스를 달리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멈춤이 좋아요. 풀꽃을 보는 것이 좋고, 텐트 안이 좋고, 미술관이 좋고, 꽃그늘이 좋고, 빈 의자가 좋아요. 전생에 숨차게 달렸었는지 쉬어도 쉬어도 쉬고 싶어요.
능소화 빛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노브래지어와 맨발로 니스해변을 걷고 싶었어요. 그는 베르동 협곡으로 들어가서야 숨 고름을 하더군요. 질주하는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되고 싶은가 봐요. 알프스를 향하여 탈출하듯 ‘나폴레옹가도’를 달렸어요.
프로방스는 마치 오픈카 전시장 같았지요. 클래식 오픈카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태양은 가득히’ 주인공들처럼 보였죠. 우리는 손바닥만 한 햇볕도 가리는데 그들은 뜨거워도 화끈하게 노출하더군요. 태양의 신, 신전수준으로요. 올드 오픈카일수록 드렁드렁 멈춰볼까 말아볼까? 연륜의 쇳소리가 더 우렁찼어요.
왜 독일에서 차를 렌트하느냐고요? 독일은 고속도로를 쌩쌩 달려도 속도위반 벌금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는다는군요. 세계만방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독재를 사과하는 의미라는데…, 정말 그럴까요? 결국, 독일 차 BMW나 벤츠가 잘나간다는 광고 효과를 얻어내니, 아직도 아우스비츄의 가스실처럼 독식으로 여겨집니다.
속도감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어요. 지그재그 길을 치고 내려오던 그들이 헬멧을 벗는 순간, 놀랐어요. ‘길 위에서 죽어도 좋아’의 폭주족은 5~60대가 넘은 장년들이었어요. 남의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는 그들이 부러웠어요.
형형색색의 자동차와 공중에 매달려서 서서 앉아서 누워서 엎드려서, 날고 달리는 기구들. 경비행기 패러글라이딩, 카이트서핑, 요트 오토바이 자전거 스키 등을 타고 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질주하는 별별 사람들. 그 대열에 합류하여 우리는 꿈결처럼 알프스령을 넘었지요.
벚꽃동산에서 도끼 소리가 들리는군요.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했던가요. 사나흘 고뿔 한번 앓고 나면 봄꽃은 지죠. 그와 나, 어느덧 화갑(花甲)입니다. 다시 봄. 𝄇, 도돌이표.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그곳에도 바람이 불더라구요.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봄바람 휘날리며,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군요,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흩날리는 벚꽃잎이 많군요, 좋아요~♬ ‘벚꽃엔딩’. 연분홍 시절이 막을 내리니 다시 촉촉 차오르는 연둣빛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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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수필' 2016-4
<이달의 화보>에 실렸습니다
스캔 떠서 올리는 것 처음해보니
한 나절 절절맸습니다
벌써, 봄이 연둣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