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허지웅 에세이 / 문학동네
천장이 슬프다 -
밖에 나서니 볕이 좋다.
천장이 슬프다.
서로가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믿고, 알고, 만족하고, 사랑한다.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의 비밀이 우리와 우리 밖의 세상 사이에 안전하기 짝이 없는 벽을 쌓아올린다고 생각한다. 벽은 갈수록 두터워져가고 문밖에서 폭탄이 터져도 우리 둘은 안전할 것만 같다. 네 살이 내 살처럼 아프고 내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스스로 어여쁘게 여긴다. 그리고 헤어진다. 그리고 삼천 번째 눈앞이 캄캄해지고 나면, 창밖으로 동이 트는 것을 발견하게 되겠지.
씨발, 대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이별이란. 그래서 쓰러지듯 나는 다시 몸을 눕혀본다.
천장이 슬프다. 천장의 비어 있는 저 귀퉁이들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비어 있는 귀퉁이들은 필연적으로 내려앉아 나를 누른다. 숨이 막히고 눈물이 새어나온다. 눈물이 무언가에 눌려 새어, 나온다. 울컥하고 시원하게 쏟아져 흘러준 것과 달리. 천장이 슬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늘이 내려앉아 쥐어짰고, 나는 텅 비고 말았다.
좋은 어른 -
내게는 문신이 있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까먹지 않으려고 굳이 살 위에 써 놓은 것인데, 그 의미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낭비가 아니겠는가. (IMF가 터졌는데 등록금 비싼 외고를 보낸다고 그녀가 빈정댔다. 언제든 속이 쑤시고 아픈 것은 그래서 보란 듯이 아이가 잘 되길 바랐었다.)
청소 -
정리의 묘미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있다. 내게 쓸모가 없는 건, 남들에게 필수품이라 해도 모으지 말아야 하고, 일단 모았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 청소란, 자기 혼자 힘으로 청소할 수 없는 크기의 집을 소유하면서부터 파멸이 시작된다.
손은 자주 씻는 편이지만 그건 내가 만지는 물건들, 특히 키보드에 기름기가 남을까봐. 원고를 쓸 때 키보드가 끈적거리면 멀쩡한 문장도 비문이 된다.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게 더 좋아서 같은 옷을 여러 벌 사놓고 돌려 입는다.(스티브잡스, 오바마 스타일)
여태 살아보니 본래 상태로 온전히 복구시킬 수 있는 거라고는 컴퓨터 백업파일과 청소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청소에 매달린다. 청소를 하면 회복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분개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모두 순순히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표현이 자주 보인다. 뒤엎는 어투. 내가 보기에는 성의 없어 보이는데, 20대 30대 청년의 수법은 문장의 환기작용을 하고 있다)
구애 -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순간도 닮은 점에 안도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점에 흥분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대게 후자였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랑했고, 너무 달라서 헤어졌다. ‘너무 달라서 정말 좋아!’가 ‘너무 다르니까 여기까지’로 돌변하기까지 우리들은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다. 물론 그래서 모든 게 끝난 이후에는 더 많이 아프고 더 오랫동안 슬프다. ‘사랑이란 완전히 미친 짓이지만, 그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안다고 해서 사랑을 안 할 수도 없잖아?’
모두가 언젠가는 배운다 - 심지어 영화처럼 그(녀)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언제나 실수는 반복되고 누구나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 하나 이 반복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한심한 것들은 반복되고, 좋은 것들은 기억에만 남는다. 우리는 특별하지 않다. 우리는 한심하다. 그렇다, 모두가 언젠가는 배운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단추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
재벌 4세들이며 무슨 대안 문화의 슈퍼전문가인 양 구는 게 취한 마음에 아니꼬웠다. 비아냥거리고 나와 집에 가면서 SNS에 자식이 스무 살을 넘기면 부모가 땡전 한 푼 주지 못하게 법으로 막아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지웠다. 술을 마시면 심사가 좀 더 쉽게 뒤틀리고 치사해진다. 그런데 새로 도착한 쪽지들 가운데 ‘니가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비겁하게 자신을 지목하지 않고 그런 글을 올려도 자신은 다 알고 있다. 우리 가족은 나를 비난할 수 있어도 너는 나를 비난할 수 없다. 비겁하게 숨어서 글이나 쓰지 말고 당당하게 만나서 붙자.
공간을 이해하는 법 -
내가 혼자 청소할 수 없는 크기의 집을 소유하는 건 괴상한 일이다.
그날 원주의 사무실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식을 부양하지 않았는지, 왜 등록금마저 주지 않았느냐고.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게 나는 반평생 슬프고 창피했다. 그래서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남에게 결코, 다시는 꼴사납게 도움을 구걸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버텨 살아내는 것만이 중요했다.
엄마, 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 -
방학이 오면 내내 그런 걸 여러 편 썼다. 여러 편을 썼지만 독자는 늘 한 사람이었다. 엄마였다. 그때는 엄마가 참으로 거대한 사람이었다. 이걸 써서 엄마에게 읽어주고, 엄마가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것을 듣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늘 재미있게 들어주었다. 나중에 고쳐 쓸 법도 했지만 당시 아버지와 다투고 난 직후였던 엄마가 내 소설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여 너무 큰 충격을 받고 나는 소설 쓰는 일을 집어치웠다. 아마 이건 엄마도 모를 거다.
엄마가 책을 사주지 않을 때가 가장 서러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책 없이 살지 못하는 아이가 된 건 엄마 탓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끼리 서로 폐 끼치지 않고 살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래도 없었다.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
지난 정권,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광장 위에 있었다. 밤이었다. 혼자였다. 광화문 앞의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누가 뒤에서 내 팔을 콱 움켜잡았다. 엄마가 웃으면서 서 있었다. 그 때 기억을 되짚어보면 엄마는, 엄마는 작았다. 엄마는 작고 나이 들고 약했다. 나는 화를 냈다. 아직 택시 할증 안 붙었으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를 두고 내 갈 길을 갔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작고 나이 들고 약한 사람이 여기 있는 게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작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는 이들 가운데 가장 작고 약한 사람이다. 엄마 생각을 하면 나는 늘 조금 울고 싶어진다. 엄마 무릎 위에서 울고 싶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못한다.
형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
형은 곧잘 철 지난 농담을 길게 늘어놓고는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무척 구박했다. 구박하는 재미가 있는 형이었다. 구박을 하면 소녀같이 부끄러워했다. 오래전 형이 결혼식 축가를 불러주었다. <일상으로의 초대>. 형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몇 번이고 음 이탈을 했다. 나는 그걸 가지고 두고두고 놀려먹었다.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재미없는 농담들이 자꾸 귀에 걸려 떠오른다. 나는 절대 울지 않을 거다. 나는 결코 울고 싶지 않다. 구박을 하고 싶다. 다시 한 번 형에게 구박을 하고 싶다. 친애하는 친구이자 놀려먹는 게 세상 최고로 재미있었던 나의 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형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다.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인데, 그걸 하지 못했다. 형이라서 말하지 못했다. 나라서 말하지 못했다. 간지러워서 하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해야 할 말을 제때 하지 않고 미루는 일이란 얼마나 한심한가,
형 사랑해. 언제까지나 사랑해. 형 사랑한다.
‘맥심’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을 맡아달라고 했다. 경력관리 측면에서 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였지만, 별로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하자고 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빨리, 너무 깊게 친해져버렸다. 그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늦은 저녁이었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너 이혼했다며” 이 거지같은 새끼야. 타박을 해야 할 건 이쪽인데, 뜻밖의 공격을 받고 나는 그만 더듬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나를 너무 잘 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십 수 개월의 시간차가 사라지고 이음매 없이 맞춰졌다. “야 너는 내가 젊었을 때랑 굉장히 닮았다”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하지 마라, 내가 훨씬 더 잘생겼어. 그런 도무지 초점 없는 대화들을 하다가 다음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기절해버렸다.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투사였다.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광장의 음악이었다. 누군가에게 신해철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젊은 시절의 섬광이었다.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것들 -
나를 안마하다보면 땀이 많이 나는데, 시술자가 땀이 나면 안마 받는 사람에게 기를 빼앗기는 거라고 한다. 나는 유물론자라서 그런 거 안 믿는다고 했더니, 하긴 자기 자신만 믿으면 되죠.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이고 선생님, 실은 저는 저를 제일 믿지 못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까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까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까지 함께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까먹은 중요한 것들은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반드시 훗날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위대한 무표정의 사내
키튼의 전성기 영화를 보면 그가 전혀 웃지 않는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웃지 않는다. 차라리 울상에 가까운 무표정이다. 무대 공연 시절 자기가 웃지 않으면 않을수록 관객의 웃음이 더 커진다는 경험치를 발휘한 결과물이었다. 이 위대한 무표정의 사내에게는, 그의 안에는, 남에게 주고 싶은 감정들이 그렇게도 많았던 것이다.
세월호 -
세월호는 한국 사회윤리의 아우슈비츠다.
악의 평범성 -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가장 쉽고 간편한 답변은 교수가 미친놈이기 때문이다. 그는 왜 피해자에게 인분을 먹이고 폭행을 하고 고문에 가까운 체벌을 가했나. 사이코패스이기 때문에, 간단한 설명이다. 인분을 먹인 교수와 인분을 먹은 제자는 그들이 만들어낸 감옥 안의 간수와 죄수였는지 모른다. 교수는 ‘그래도 되는’ 그만의 감옥 안에서 자기 당위에 심취해 마음껏 폭력을 행사했다. 제자는 ‘그래야 하는’ 그곳에서 교수의 일상적인 폭력과 너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 앞에 정신이 완전히 무너졌다.
요컨대 나도, 우리도 누군가에게 이미 인분 교수이거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듯한 상황과 환경이 주어지면 사랑을, 혈연을, 우정을, 금전을, 위계를 빌미로 악을 행사한다. 악은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것.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란 그렇게 힘들다. 정지, STOP!
(Amor fati, 아모리 파티? 운명애(運命愛)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받아들여라. 온몸으로 맞이하고 껴안아라. 2017. 1. 그 여자아이의 카톡 메인 문구. 무너진다. 인간은 믿어서 될 일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견딜 수 없이 힘들다. 그러니 내 아이는 오죽하겠는가? 형벌이다)
탈주하는 여자들 -
어렵고 힘들게 얻은 걸 까먹고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
<미생>의 가장 큰 장점은 균형감각. 청년과 기성의 질서 어느 한쪽을 절대적인 선이나 악으로 몰지 않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중립 -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인간적 고통 앞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확실한 사실관계를 두고도 무게 중심을 찾는다며 진영논리를 끄집어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그들은 용돈을 받았다.
좀비 -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난다.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폭하기보다 설득하고 싸워나가기를 포기할 수 없다.
이 시민들을 담기에는 나라가 너무 옹졸하다 -
자기 검열, 무엇을 잘못 했기에 스스로를 살핀다. 해답 없는 질문이 그치고 나면 이제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말조심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문화를 정책적으로 융성하겠다.’는 말은 또 다른 눈먼 돈 잔치를 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정권 퇴진을 목적으로 100만 명이 한 공간에 모였는데,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회 해산이 선언되자마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다 빠져나갔다. 쓰레기도 없었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 시민들을 담기에는 나라가 너무 옹졸하다. 한국의 역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복해내고 자랑할 만한 유산을 만들어 낸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였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다시, 그 끓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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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의 글을 오버랩되는 얼굴이 있다.
외로움과 슬픔이 번져온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
삶의 방식이 서투르다.
그 다름은 누구와 함께 살기에는 自己愛가 너무 많다.
그래서 천장이 슬플 것이다.
회갑이 넘은 이 나이에 천장을 자주 바라본다.
마음이 너무 아프면 나도 천장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