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공자
최인호/열림원
성서에 의하면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하여주십시오.’ 청하자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불교, 장례식에서 ‘한 사람의 산 사람을 수많은 죽은 사람들이 쫓아가고 있구나’ 인연에 얽매이는 것과 효와 같은 사사로운 집착이라 했다.
심지어 예수는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공자, 제자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부양하라. 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월이며, 다시 뵈올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안영은 키가 5척, “재상께서는 이 개구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개구멍만으로도 충분한 데 무엇 때문에 귀찮게 성문을 여닫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안영은 웃으며 “이것은 개가 출입하는 문이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 아닙니다. 개 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사람은 개문으로 출입해야 하고, 사람 나라에 사신으로 온 사람은 사람 문으로 출입해야 하는데 설마 초나라 개 나라는 아니겠지요.” 이에 안영은 당당하게 도성의 성문을 통해 입성. “제나라에는 인재가 그토록 없는가. 어찌하여 그대와 간이 작은 사람을 초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가?” “제나라에는 인구가 백만이나 되는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땀을 흘려 그 땀을 훔치면 마치 비가 오는 듯하여 행인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녀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오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우리나에서는 한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사신을 파견할 때에 현자는 현명한 나라에 대인은 대국에 파견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무능하고 부덕하면서 또한 가장 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나라로 파견될 수밖에 없었으니, 대왕께서는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있고?“ ”귤은 회수 이남에 심으면 달콤한 귤이 되나, 회수 이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는 것은 바로 기후, 풍토 때문입니다.
공자는 제나라에 계실 때에 순임금의 음악 소를 들으시고는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으셨다.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르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공자가 음악에 심취하였던 것은 호사스러운 취미생활이나 쾌락을 즐기려는 향락 때문이 아니라 천지의 조화로 예의 질서를 터득함. 공자가 금을 배우려는 것은 곡조나 이치나 뜻과 같은 기술이 아니라 그 곡을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 위함.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란 천지의 질서이다. 공자께서는 남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남이 잘 부르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반복게 하고는 그 뒤에 그와 맞춰 함께 부르셨다.
공자는 악경에서 “음악은 안으로부터 나오고 예는 밖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대한 음악은 평이하고 위대한 예는 반드시 간결하다.
안영의 마부는 어느 날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서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그의 아내가 보았다. 재상께서는 5자도 안 되지만 일국의 재상이 되어 몹시 겸손한 모습으로 수레 위에 오르시는데 당신은 키가 8자가 되면서도 마부밖에 못 되는 주제에 건방을 떨고 있으니 어찌 당신을 지아비로 모시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잘못했소. 앞으로는 분수에 맞게 겸손해 지겠소“ 의기양양(意氣揚揚)은 우쭐거리고 뽐낸다는 마부의 어리석은 행동에서 나온 말. 안영은 밥상에 두 종류의 고기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고, 아내에게도 비단옷을 입지 못하게 함.
공자의 음악관은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의 덕을 천지의 조화로 보고 있음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경공은 음악을 쾌락으로 여기고 있어 예쁜 여자 악공들을 뽑아 노래를 부르게 하고 춤도 추는 퇴폐적인 여악을 좋아하고 있었다.
안영은 “대체로 유자(儒者)란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바른 규범을 지키지 못하여 알맹이가 없는 법입니다. 안영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공자의 사상은 현실의 정책을 타파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아마추어리즘이라고 과소평가.
간언술, 군왕의 비위만을 맞춰 아첨하는 예스맨에서 벗어나 시시비비를 엄격히 가려 올바로 간언하였던 명재상 안영, 안영의 뛰어난 점은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임금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간언술로 더욱 빛난다. 훗날 궁녀들에게 남장을 시지는 경공의 엽기적인 취미를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이는 마치 문에다 소머리를 걸어놓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 ‘괘양두매구육‘ 안자는 표리(表裏)가 같은 사람이다. 표리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옷의 겉감과 안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행동과 속마음이 일치되는 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안영은 복숭아 두 개로 세 사람의 무사를 제거할 수 있었다. 복숭아 두 개로 세 명의 무사를 죽였다고 이도살삼사(二桃殺三死), 차도살인(借桃殺人) 오만한 힘을 가진 세 무사는 어쩌면 막강한 권력을 가지 어른일 수도 있고, 막강한 힘을 가지 압력단체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복숭아는 봉숭아인 것이다.
정명주의(正名主義), 이름을 바로 잡는다. 정치란 바로 잡는 것이다. 명분부터 바로 잡겠다. 자로가 선생님은 우원迂遠하십니다. “어리석구나, 너는.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명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고,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안절부절. 그러므로 군자는 사실에 이름을 붙일 때에는 반드시 말로써 전달될 수 있어야 하며, 말로써 전달되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군자는 말에 구차스러운 바가 없어야 한다.
윗사람이 하는 말을 무조건 옳다고 부화뇌동하면서 아첨하는 사람은 결국 윗사람을 망치는 간신배에 불과한 것이다.
두 번째 출국- 노자와 공자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 46세가 되던 해였다.
공자는 노라라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은 은나라 최후의 임금 주왕의 성형이며, 그 시대의 어진 신하로 알려진 미자계에 이르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7세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공자가 떠난 이 여행은 인류사상 가장 극적이고 가장 신비스러운 여행이라고 일컬어 신과 신이 만나기 위해 벌인 ‘신들의 여행’ 신과 신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 벌인 인류가 낳은 3대 성인인 예수와 석가모니 그리고 공자는 시간적, 공간적인 격차로 서로 만난 적은 없다. 또한, 인류가 낳은 최고의 철인들인 소크라테스와 마호메트도 서로 만만 적은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공자와 노자가 서로 기원전 506년에 극적으로 해후를 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신비스러운 대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에 나오는 명화 중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공자와 노자의 만남도 낮을 지배하는 해와 밤을 지배하는 달이 서로 만나는 행성의 대격돌인 것이다.
노자. 공자와 더불어 중국이 낳은 최고의 사상가. 공자보다 오히려 광범위하게 중국의 민간신앙을 움직여 사상적 기초를 닦은 수수께끼의 인물. 그리하여 오늘날 중국의 정신을 지배하는 도교를 창시한 신비의 용. 일찍이 톨스토이는 번역된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그의 자서전에서 “나의 사상은 공자와 맹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노자로부터 받은 영향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지대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만물의 근원이 되는 가장 고귀한 것은 無이며 虛이며 전혀 불확정하고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또한 道라고 불렀다.
유럽인들은 노자의 이름을 문자 그래도 ‘늙은 자식’으로 표기하여 라틴어로 ‘아오시우스’라고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80년간이나 들어 있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백발로 그래서 이름도 ‘늙은 자식’이다. 노자가 공자보다 나이가 20~30세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 이 무렵 노자의 나이는 80세.
사기에 의하면 노자가 평생 공식적인 벼슬은 주나라의 수장실의 기록관인 史가 고작이었다. 수장실이라 하면 왕실 서고를 말한다. 오늘날의 중앙도서관을 지키는 사서였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배우고 대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 열 집이 있는 고을이라면 반드시 충성과 신의에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자의 태생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비극적인 운명. 숙량흘은 안씨의 딸과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아홉 명의 딸만을 낳았다. 다른 첩을 얻어 맹피를 얻었으나 어리석었다. 그뒤 60세의 나이에 안씨 집안의 셋째 딸인 안징재와 정을 통하여 낳은 것이 바로 공자. 숙량흘은 비록 나이가 들어 늙었지만, 집안이 좋고 힘이 세다. 인류사상 가장 뛰어난 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공자가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불륜의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기에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 실제로 공자는 제자들에게 “나는 젊어서 미천했던 까닭으로 비천한 일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노자의 성는 李 씨고, 이름은 耳다, 노자의 사상이 無爲, 無我, 無名을 숭상. 노자의 어머니가 임신한 지 72년 만에 출생했다는 설. 그는 어머니 왼편 겨드랑이를 째고 나왔고, 나면서부터 머리가 희었기 때문에 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자는 사람들의 인위적인 의식적인 모든 것을 부정. 사람들이 인위적이고, 의식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곧 ‘자연’인 것이다.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저절로 그러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타고난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곧 절대적인 자유의 추구한 것이다. 따라 현실적인 유가 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회 참여를 통하여 지상에서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군자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도가 사상은 필연적으로 자연 상태 속의 은둔생활을 통하여 신선이 되기를 목표로 하는 것. 유가 사상은 도가 사상을 ‘현실도피’라고 비난, 도가사상은 유가상상을 ‘지나친 세속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노자의 학문을 하는 자는 유학을 배척한다. 사마천의 기록. 공자를 비웃은 네 사람, 즉 장자와 걸익, 노인과 미치광이 접여 등은 초나라 바로 노자의 고양이다.
북방 사람들은 투쟁적이며, 현실적인 데 반하여 남방 사람들은 부드럽고 평화로우며 낭만적이다. 물론 노자의 유일한 경서인 도덕경에는 공자에 대한 비난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장자에는 공자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내용이 전편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무릇 성인들의 종교나 철학을 전하는 데에는 탁월한 제자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만약 플라톤이 없었더라면 소크라테스는 존재할 수 없고, 아난이 없었더라면 부처의 경전은, 바오로가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맹자가 없었더라면 공자의 사상은 맥이 끊겼을지도 모르며, 장자가 없었더라면 노자는 다만 수수께끼인 인물로 사라졌을 것이다.
장자 이름은 주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학문은 나름대로 무척 박학다식하나 결국 그 요점은 노자의 학술로 귀착된다. 노자의 가르침에다 자신의 설명을 덧입힌 寓話로 일관한다. 당대의 어떤 대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비판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그의 언사는 너무나 방대했고, 자유분방했으며, 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았다.
초의 위왕이 장주가 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주군께서 선생님을 재상으로 보시고자 합니다”“천금이라면 막대한 금액인 데다가 재상 또한 존귀한 지위가 아닌가.”“자네, 郊祭에서 희생되는 소를 본적이 있는가?” “그 소를 어떻게 기르던가.” “몇 년 동안 잘 먹이고, 수놓은 옷을 입혀서 호화롭게 사육하지요.” “아무리 그렇지만 끝내는 태묘로 끌어가 죽게 되지.” 어서 그냥 돌아가게. 나를 더 욕되게 하지 말고. “차라리 나는 더러운 시궁창에서 유유하게 놀고 싶다네. 죽을 때까지 벼슬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마음대로 즐기며 살고 싶단 말일세.” 자신의 말처럼 왕과 같은 권력자에게 얽매이지 않고 더러운 시궁창에서 돼지처럼 유유히 놀다가 죽은 장주. 胡蝶몽. 장주는 어부, 도척, 거협 등의 글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판하면서 노자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다.
도척은 큰 도둑이다. 인간의 성정이라는 것이 눈은 아름다운 빛을 보려하고, 귀는 아리따운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또 입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들고, 의지는 욕망의 충족을 추구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의 일생은 기껏 백세며 이 중에서 병과 조상하는 시간과 근심에 잠기는 기간을 제외한다면, 입을 열어 웃을 수 있는 것은 한 달에 겨우 네댓새뿐이다. ‘병도 없는데 뜸을 뜨는’격. 공자를 조롱하는 내용 중 클라이맥스다.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도척의 입을 빌려 ‘도둑이라면 너만 한 도둑이 다시없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나만 도척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공자를 조롱함으로써 공자를 ‘큰 옷에 넓은 띠를 두르고, 터무니없는 말과 위선적 행위로 천자 군주들을 속여서 부귀를 얻고자 하는 지식의 도둑’이라 비웃고 있다. 장주가 공자를 노골적으로 비웃는 것과 달리 노자는 공자를 만났을 때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병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 인류가 낳은 최고의 역사가 사마천은 공자를 ‘지덕을 갖추어 더없이 뛰어난 성인’인 ‘지성’으로까지 부르고 있다.
남궁경숙과 주나라로 간 공자는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물었다. “부귀한 사람은 손님을 보낼 때에 재물로써 전송하고, 어진 사람은 손님을 보낼 때에 좋은 말로 전별한다고 하오.
노자는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란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 그러니 그대도 제발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는 말일세.” 공자는 “그것이 예입니까?” 노자는 “그런 건 나도 몰라. 다만 예를 묻는 그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일세. 자, 인제 그만 가보게나.”
노자와 공자의 이 문답은 마치 인류가 낳은 성인이자 대사상가인 두 사람이 벌이는 이중창을 연상시킨다. 전혀 화음이 맞지 않는 이 듀엣은 그러나 기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장면을 보고 혹자는 노자의 승리고, 공자의 패배라고 분석하고 있지만, 이는 피상적이고, 대립적인 관점에서 본 유치한 발상이다. 공자는 오히려 차원이 다른 노자의 사상을 솔직히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다. 공자는 이를 초월하여 노자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예에 대해서 끝까지 집요하게 묻고 또 묻고 있는 것이다. 노자와 공자가 벌인 이 듀엣은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고, 어느 한쪽이 테너이며, 어느 한쪽이 바리톤인가 하는 이분법을 벗어난 최고의 병창인 것이다. 결국, 노자도 이기고 공자도 이긴 환상의 이중창인 것이다.
물은 만물을 도와서 생육시켜주지만,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따라서 자기 욕망을 끊고 물처럼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상선 약수다.
공자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의 예지와 같은 유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달리는 놈 헤엄치는 놈 나는 놈이라면 화살이나 주살로 쉽게 잡을 수가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용이 되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면 나로서도 그 행적은 알 길이 있겠나. 노자를 용으로 비유한 공자의 표현은 정곡을 찌른다. 공자는 평생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때로는 그물을 치고, 낚시하고,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노자는 그물로도 화살로도 그 무엇으로도 잡을 수 없는 용이었다.
그들은 얽매임 없는 경지에 노닐며, 자기 일신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도의 식량을 밭에서 얻고 남을 도와줄 여유도 없는 조그만 토지로 만족했다. 얽매임 없는 경지에 노니는지라 인위가 없고 간소한 생활에 만족한지라 살기가 쉬웠으며, 남을 도와주는 일이 없는지라 자기 것을 끌어내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노자는 “부를 긍정하는 자는 재물을 남에게 양보해주지 못한다. 명예를 긍정하는 자는 영성을 남에 양보해주지 못한다. 권세를 좋아하는 자는 권세를 남에게 양보해주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일단 그런 것들이 손에 들어오면 오직 잃을까 그것만을 근심하고, 잃으면 슬픔에 잠기기 마련이다.
어쨌든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견만을 확인하고 짧게 끝이 나고 만다. 오히려 두 성인은 짧은 만남을 토해 극단적인 두 갈래 길로 나뉘게 된다. 공자는 세상 밖으로 더욱 나가게 되었으며, 노자는 더욱더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자신을 숨김으로써 이름이 나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산속 어딘가에 매화가 활짝 피어 있으면, 아무리 자신을 숨긴다 해도 먼 곳에서 매화의 향기가 나는 법(산 앵두나무여!)
여기서 무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죽음이나 극단적인 게으름을 연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저절로 그렇게 됨을 뜻하는 것이다. 무위는 ‘자연’이란 말과 같은 개념이다. 노자의 무위는 ‘無爲無不爲’ 즉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못 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음’을 뜻한다.
노자는 언어니 문자니 하는 것을 존중하지 않았다. ‘도가도 비상도’
노자는 인위적으로 작위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환케 하고, 조용하게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도록 가르친 인물임은 틀림없다.
사마천은 이러한 수수께끼의 인물 노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음하고 있다. 노자가 떠난 후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했다.
제3장 황금시대
공자에 있어 도란 사람이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문조차 없는 無門이었다. 마치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큰길에는 문이 없다.’는 大道無門‘과 일맥상통한다.
노자의 도가 초월적이라면 공자의 도는 현실 참여적 (감상: 마치 내 노트를 잃어버린 것 같다. 꼭 최인호 선생이 내 강의록 노트를 훔쳐간 것 같다.)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하늘나라’에 목표를 두고 있고, 부처도 깨달음의 궁극을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드는 ‘彼岸’에 두고 있고, 노자도 도의 목표를 ‘無爲’두어 공자는 하늘나라가 아닌 지상의 자라에서, 피안이 아닌 此岸에서, 우주가 아닌 바로 전국시대의 난세에서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공자는 사상가라기보다는 교육자였으며, 성인이라기보다는 철인이었다.
달기, ‘은행알과 같은 눈에 복숭아 같은 뺨, 하얀 피부를 가졌으며, 桃花妝이란 연지를 바르고 주왕을 미혹시켰다.’ 오랑캐 나라인 유소씨국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에 빠진 주왕은 그렇게 찬탄하면서 종일 달기를 끼고 술을 마시며 주지육림 포락지형 경국지색을 일삼았다.
대사구의 재상직을 버리고 55세에 이상을 실현할 여행길에 오른다. 68세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13년 동안의 주유열국이다. 이 13년 동안의 세월은 공자의 황금 시절과는 전혀 다른 문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13년 동안이나 훗날 자신의 신세를 ‘상갓집의 개’인 喪家之狗로 표현할 만큼 초라한 신세로 주유천하를 하엿다.
제4장 세 번째 출국-喪家之狗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를 유세하였다.
공자는 왕도를 실현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여 명의 임금을 유세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예닐곱 나라로 압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분명히 과장이다.
중화민국 초의 양계초는 ‘사기’의 과장을 지적하고 “사실은 공자가 찾아갔던 나라는 주제위진이었으며 송조정 세 나라는 그냥 지나기만 하였다. 전부를 합쳐보면 지금의 산동 하남 두성의 경계 밖을 나가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무사했구나. 난 네가 벌써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유독 안회에 대해서만은 여러가지로 칭찬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나오고 있다. 안회를 수제자로 삼으려는 공자의 각별한 애정이 보인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쪽박 물을 마시면 누추한 거처에 살고 있다면 남들은 괴로움도 감당치 못할 것이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참으로 어질도다, 안회여.” 이처럼 안회는 너무 가난하게 살았던 탓일까. 아미 29세의 나이에 온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며, 스승 공자에 앞서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
영공의 부인 남자는 한마디로 음탕한 여인이었다. 남자는 송나라 제후의 딸로 정략결혼으로 나이 든 영공에 시집을 왔다. 그녀는 결혼 전부터 이복형제인 宋朝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송조는 소문에 의하면 뛰어난 미남으로 위나라로 시집온 후에도 송조를 잊지 못하여 남몰래 위나라로 불러 죽여 은밀하게 정을 나누곤 했다.
일찍이 왕손 가로부터 ‘아랫목에 아첨하기보다는 차라리 부뚜막에 아첨하라’는 어째서 아랫목이 아닌 치마폭을 스스로 찾아갔던 것일까. 그만큼 공자는 위나라에서 등용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때문일까. 남자의 치마폭이 왕손 가의 부뚜막보다 더 천하고 더러운 것임을 몰랐던 것일까.
밀실 안에서 단둘이 있던 공자와 남자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오늘날 그 어디에도 전해오지 않는다. 남자는 다만 성적 유혹을 하고 싶은 공자에 대한 호기심으로 만나자고 청하였으니, 젊고 미남자도 아닌 57세의 공자에 대해 첫눈에 실망하였을 것이다.
자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예로써 서로 응대했다.”라고 변명하지만, 오늘날의 성적 희롱과 같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공자의 생애를 보면 유일하게 스승의 부당함을 따지고 직언을 하는 제자는 자로다. 이는 마치 예수를 따르던 제자 중 성격이 급한 베드로를 연상케 한다.
“내 행동이 옳지 못하다면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버리실 것이다.” 라고 말하는 공자의 이런 태도는 공자의 인간미를 엿보게 한다. 예수와 석가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 단 한 번의 인간적인 실수나 약점이 보이지 않으나 유독 공자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불안전한 인간에게 있어 예수와 부처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처럼 느껴지나 공자는 신이 아니라 인간처럼 느껴지고 있다. 공자가 우리 인간처럼 끊임없이 실수하고 또 자신을 반성하여 수양을 통해 고쳐나가는 태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先人의 모범이다.
지극히 흰 물질은 아무리 검게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섞어서 먹을 수 없는 박이 될 때까지 한군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매달려 있는 채 밥도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늘 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어디든 가서 도를 행하고 싶다.
위나라에서 어느 날 공자가 경을 연주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삼태기를 지고 공자의 문 앞을 지나다가 “마음속에 딴생각이 있구나. 저 경을 치는 품이.” “천하다. 각박한 소리를 내다니.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을 시경에 말했듯이 물이 깊으면 옷 벗어들고 얕으면 옷 걷고 건너야만 하는 것을. 물이 깊거나 말거나 옷을 입고 의관을 정제한 채 예를 갖추어 물을 건너려는 공자의 허세를 비웃고 있는 것이다.
사마귀, 저놈은 앞으로 날아갈 줄만 알았지 물러설 줄을 모르며, 제힘은 생각지 아니하고 모든 적을 가볍게 아는 저돌적인 벌레입니다. 장공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 벌레가 만약 사람이라면 반드시 천하제일의 용사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칭찬하고 수레를 돌려 사마귀를 피해가도록 하였다. 사마귀처럼 무모하게 권력자와 맞서서도 안 되고 호랑이를 기르듯 그의 성질을 따라 잘 길들여야 하며, 말을 다루듯 조심하여 권력자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란 간단한 것입니다. 정치란 먼 곳의 사람들은 흠모하여 찾아오도록 해야 하며, 가까운 곳의 사람은 기뻐하며 따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자의 대답은 다목적용이었다.
자로가 노인의 집에서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을 받았다. 이런 제자들이 걸인과 같은 모습을 보는 공자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평생을 믿고 따르는 스승 그대는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먹여주고 어떻게 재워주고 있는가를 따져 묻는 준엄한 질책이 바로 자로의 고백이었다.
시경은 황하 유역의 여러 나라에서 부르던 시가 3백5수.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할 수가 없다.’ “그대들은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감흥을 일으켜주고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며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며 은근히 불평할 수 있게 한다. 가깝게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줄 알게 하며, 새나 짐승, 풀 나무들의 이름도 많이 알게 한다.”
헐벗은 나무는 겨울을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림으로써 마침내 꽃을 피운다. 꽃은 인내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명분이 바로 이름이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正名主義’는 공자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철학이다.
그 무렵의 권력자들은 공자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자공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인류의 스승인 예수와 공자 그리고 석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에게는 불편한 존재이며 ‘박대받는 표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지닌 권력욕과 명예욕의 육의 속성 반대편에서 서서 영원의 진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염경은 자는 백우로 노나라사람. 제자 중 고행이 뛰어난 수제자. 그러나 그의 이름이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은 그가 나병에 거려 활동하지 못하였기 때문. “이럴 수가 없는데, 아아, 운명이로구나. 이런 사람에게 이런 병이 나타나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흥미로운 것은 공자가 석가, 예수와 더불어 세계 3대 성인이면서도 나병을 깨끗하게 낫게 하는 기적을 보여주었던 예수나 석가와는 달리 한 번도 기적을 보여준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의 손을 잡고도 그의 병을 고쳐주지 못한다. 공자가 예수나 석가처럼 깨달은 자로서 종교를 창시한 교주가 아니라 哲人임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이다.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튼다.’ 이 말은 곧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줄 만한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긴다는 것을 비유한다는 성어다. 공자는 오늘날로 보면 강박의 신경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인다. 일조의 노이로제 증상과 닮아있다.
밥은 고운 쌀, 회는 가늘게, 변한 것, 생선이 상한 것, 빛깔이 나쁜 것, 냄새가 나쁜 것, 제철음식이 아닌 것, 반듯하게 썰지 않은 것, 간이 맞지 않은 것을 드시지 않았다. 술만은 일정한 양 없이 드셨으나 난잡하게 취하는 일은 없으셨다. 받아온 술이나 육포는 드시지 않으셨다. 공자의 이런 까다로운 식성은 다른 성인들인 석가, 예수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석가는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인 육식을 철저히 금하라 하고 자신은 탁발(托鉢)하여 걸식하였다. 이는 식욕을 성욕과 같은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구도의 길을 갔다.
좋은 새는 나무를 잘 살펴서 깃들고, 현명한 신하는 군주를 가려서 섬긴다. 이것이 13년 동안이나 둥지를 틀 나무를 찾아 헤맸던 좋은 새, 즉 공자의 마지막 귀거래사이다.
공자천주(孔子穿珠)
정치적 이상을 통해 국가를 바로잡으려는 외부적 노력보다 학문적 사상을 개발하여 내적 자아를 완성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가 73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6년간은 노나라의 정치에 뛰어들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오늘날 산동성 곡부에 있는 공자의 묘비문 ‘위대한 완성자, 최고의 성인, 문화를 전파하는 왕.’
13년의 천하 주유가 아홉 개의 구멍에 실을 꿰어주는 군주를 만나기 위한 순회였다면 조나라에 있었던 공자의 말년기 6년은 아홉 개의 구멍에 학문과 사상을 시로 꿰는 대발분의 절정기였다. 공자천주, ‘공자가 구슬을 꿰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함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거나 실없는 농지거리를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와 석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실을 비유로써 설명하고 풍부한 휴머니티가 넘쳤던 예수도 농담하거나 재미를 위한 빈말을 삼가고 있다. 심지어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중세까지 수도원에서는 웃음을 터부시했을 정도였다. 물론 성서를 보면 예수가 울었던 기록은 나온다.
제자 자유가 무성이라는 작은마을의 읍재가 되어 거리에서 현악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너는 어찌하여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저는 예전에 스승님께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지위가 낮고 높고 간에 모두 배워야 하므로 비록 작은 고을이기는 하지만 정도인 예악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일찍이 공자로부터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독실하게 이를 삼갔으나 규모가 협소하였으므로 미치지 못하는 단점’을 가졌다는 평가했던 지하였지만 자하는 스승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까지 전파시킨 일등공신이었다. 자하는 말년에 아들을 잃고 지나치게 애통해한 나머지 너무 울어 눈이 멀었다고 한다. 눈이 멀어 그로 인해 심안(心眼)은 더운 밝아졌다. 만약 맹인이었던 자하가 논어를 저술하지 않았더라면 공자의 사상은 이처럼 불타고 생매장되어버림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공자의 사후 백여 년 후에 태어난 ‘맹자’에게 바통터치를 함으로써 비로소 공자의 유가 사상은 공맹 사상으로 계승 발전될 수 있었다.
증삼(曾參)의 자는 자여(子輿) 공자보다 46세 아래로 자하와 더불어 막내 제자였다. 맹인 자하와 증삼은 흔히 공자의 사상을 전파한 쌍두마차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증자는 예수 스스로 뽑았던 열두 제자가 아니었으면서도 기독교를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하는 데 뛰어난 역할을 하였던 바오로를 연상시킨다. 증삼은 그의 아버지 증석과 함께 공자에게서 배웠다. 공자가 지은 ‘효경’도 공자가 증삼을 위해서 효도를 설명한 내용이라고 알려졌다.
작가의 말
《유림》이 완간된 것은 2007년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유림의 일관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유교’인 셈이었다.
무릇 소설은 어차피 사람이 주인공일 수밖에 없는 것. 그래서 언젠가는 한 사람씩 인물을 따로 추려내어 독립된 단행본을 별책으로 펴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덜컥 뜻밖의 병에 걸려 혹독한 투병 중이어서 감히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가톨릭 주보에 매주 쓰는 글 때문에 <공자>와 <맹자>를 다시 읽다가 갑자기 가슴에 열정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열정은 이런 것이었다. ‘2천5백 년 전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와 그로부터 백 년 후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가 오늘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꼬박 무리하면서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독립된 책을 펴내는 작업을 하였다.
아아, 이 신춘추전국의 어지러운 난세에 이 책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으련만. 그런 바람이야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헛맹세와 같은 것. 어차피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