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밀 / 돌베개
“본래부터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각을 바꾸면 똥거름과 기왓조각도 가장 요긴할 때가 있다. 공부도 그렇고, 살아가는 일도 그렇다. 나를 덜 외롭게 하고 세상을 더 따뜻하게 했으면 좋겠다. 연암의 합리적인 이성, 이덕무의 온유한 성품, 박제가의 뜨거운 이상을 품으려 한다. 요즘 관심 두는 주제는 글쓰기가 갖는 힘, 고전의 생태정신, 21세기 실학의 방향성이다.” -저자의 말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이에겐 글쓰기의 본보기가 될 만한 문학적 스승이나 선배가 있게 마련이다.
수십 년 전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기상은 세상을 가로지를 만하고 재주는 오랜 세월을 뛰어넘을 만하며 문장은 모든 것을 뒤엎을 만했다. 그는 세상에 있었고, 나도 이미 세상일을 잘 알았다. 홍길주(1786~1841)가 글쓰기에서 평생 흠모한 사람 연암집을 읽고 모든 인간이 ‘그때 저기’를 향해 갈 때 ‘지금 이곳’을 이야기하자고 한다. 지금 여기 현실에서 계승하고 발전시켜 가야 할 연암의 존재감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수식어는 ‘문장가’다.
연암은 법고창신(法古創新)에 바탕을 둔 그의 작문 정신에는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우아(雅)함과 속됨(俗), 미(美)와 추(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있다. 이른바 ‘경계’의 미학으로 불릴 만한 작법정신이다.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 연암의 글은 다양한 빛깔을 보여준다.
글쓰기의 본질
‘생태 글쓰기’란 생태적인 관점에 따라 쓰는 글쓰기를 말한다. 생태 글쓰기는 오늘날 도구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 가는 글쓰기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으며, 인간의 마음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언어 회복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21세기 지구는 온갖 오염과 이상 현상으로 중병에 걸려있다. 비단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정신적 환경도 크게 오염되었다.
연암은 글쓰기의 근원을 자연 사물에서 찾는다. 고전 시대의 문인들은 문자는 성인의 말씀을 전달하는 진리의 도구라 생각했다. 문장이란 이른바 도를 싣는 도구, 곧 재도지기(載道之器)라고 생각했다. 중국 고대의 경전을 모법으로 삼아 그 표현과 정신을 닮으려 노력했다. 경전을 달달달 암송하고 인용하는 능력은 지적 수준의 근거가 되었다. 오히려 한마디 말이라도 새롭게 쓴다거나 전에 쓴 적이 없는 새로운 표현을 쓰면 크게 비난받거나 심지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물렸다. 사문은 유교를 가리키는 말로,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란 뜻이다.
연암은 기존의 언어는 죽은 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옛글을 베껴 어렵고 산만한 글을 쓰면서 간결하고 예스럽다고 여긴다고 한탄했다. 육경의 글자로만 글을 엮는 행위는 사당에 숨어 사는 쥐와 다름없고, 남의 해석만 쓰는 건 벙어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연암은 말은 꼭 거창하게 꾸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참되면 그뿐이다. 참됨이란 자기 목소리를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진짜 글과 가짜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의 언어를 쓰는가, 남의 언어를 쓰는가에 달려있다. 비슷함을 좇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죽은 언어(死語)가 된 문자를 좇지 말고 자연사 물을 잘 배워 글로 옮기는 것이다. 자연의 원리가 글쓰기 원리다. (나는 연암의 생태하고는 반대일지 모른다. 그래도 한 권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 논어를 읽은 자존심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새로우며,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험함을 간직하고 있다. 풀, 꽃, 새, 벌레 같은 존재들도 지극한 이치가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자연의 현묘함이 있다. 연암은 생의(生意)로 가득한 자연과 어떻게 호흡하고 그 정수를 얻어야 하는지를 고만한다. (이 또한 공자님 말씀 “왜 너희는 문학을 하지 않는가?”)
만약 법이 좋고 제도가 아름답다면 진실로 오랑캐라도 나아가 본받아야 할 터인데,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마음 씀씀이의 정교함과 제작의 심원함과 문장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 대 이래 한 당 송 명의 옛 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유독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뽐내면서 ‘무찌르자 오랑캐’를 구가 대의로 내세워 청나라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던 세대에 청을 배우자고 말한다.
주희의 《주자어록》 세상의 사물들은 그 사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이를 이(理)라고 한다. 모든 일마다 각기 이치가 있으며 사물마다 제각기 명칭이 있는데, 각 사물은 사물마다 존재하는 이치와 명칭을 작조 마땅히 있어야 할 자신의 자리에 있다.
비록 지극히 미미한 사물들, 이를테면 풀, 꽃, 새, 벌레와 간은 것도 모두 지극한 경지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서 하늘이 부여한 자연의 현묘함을 엿볼 수 있다.
연암은 말이란 굳이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진리를 드러내는 데 소용된다면 기왓조각이나 벽돌도 쓸모 있다고 한다. 기왓조각, 벽돌은 사람들이 꺼리는 소재, 속된 말(어휘) 따위를 이른다. 그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따로 가려 쓰는 글자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좋은 장군(작가)을 얻으면 호미나 곰방메도 굳세고 날랜 무기가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면 깃발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건에 맞기만 하면 비속어인지 고상한 언어인지의 구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수식은 고문에서는 불필요한 언어의 낭비다. 고문은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지만 연암은 묘사의 글쓰기로 자연 사물의 생동감을 눈에 보여 주듯 구체적으로 재현해 낸다.
비유나 묘사를 활용해 자연 사물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작가의 마음을 대신 표현하는 글쓰기 역시 생태 글쓰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생태 글쓰기는 상생과 공존을 이야기한다.
시는 마음속에 있어 / 신령스런 작용이라 / 고금이 따로 없네 / 당상이니 원명이니 / 지나간 얘기일 뿐 / 산천초목 모든 것이 / 글자 없는 시구라네
상생하고 공존하기 위해선 이미 권력을 가진 것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차별받는 존재, 주변으로 밀려난 대상을 적극적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
박지원의 생태 글쓰기는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글쓰기 스승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빗대어 표현하는 생태 글쓰기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을 쓰려면 무엇보다 진실한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자연은 인간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연암은 자신을 ‘책만 보는 바보’ 간서치(看書痴))라고 부를 만큼 책을 좋아한다. 그에게 책은 자신의 존재 근거다. 그러나 그러한 책이 없더라도 구름과 노을, 갈매기, 홰나무, 귀뚜라미가 있으면 괜찮다고 한다. 누가 진짜 친구인가? 시기하지 않고 한결같으면 누구라도 친구다.
2부. 글쓰기의 기본방침
연암의 글쓰기는 진부함을 꺼린다.
상고(尙古) 정신과 용사(用事), 상고는 먼 옛날을 숭상하는 것이고, 용사는 옛일을 빌려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현의 말과 고전의 권위를 그대로 빌려 표현하는 행위를 당연하게 여겼으며, 그럴 능력을 갖추어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라도 조금 새롭다거나 한 글자라도 기이한 것이 나오면 ‘옛글에 이런 예가 있느냐?’ 없다고 하면 낯빛을 발끈하며 어떻게 감히 그렇게 쓰느냐고. 곧 경전에도 없는 새로운 표현을 쓰면 크게 비난받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글쓰기 태도였다.(나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도덕과 의례 경전으로 들어가니 고문운동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꼭 그런 책 한 권 쓰고 싶다. 왜? 세상은 너무 빨리 너무 새로우니까.)
진심의 글을 써라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만일 뿐이다. 제목을 앞에 두고 붓을 들 때마다 옛말을 떠올린다거나, 애써 경전의 뜻을 찾아내 그 뜻을 빌려 와서 근엄하게 만들며 글자마다 무게를 잡는 자는, 비유하자면 화공을 불러서 초상화를 그리게 할 때 용모를 가다듬고 화공 앞에 앉는 자와 같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고 옷의 주름은 쫙 펴져 있어 ‘평상시 모습’ 잃어버리니 그 참됨을 얻기는 어렵다. - 공작관문고 자서 -
말이란 꼭 거창할 필요가 없다. 도에 부합한다면 기왓조각이나 벽돌이라고 해서 왜 버리겠는가? 도올(檮杌)은 흉악한 짐승이었지만 초나라의 역사책에서는 그 이름을 사용했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여 매장하는 자는 아주 악한 도둑이지만 사마천과 반고는 그에 관해 썼다.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참되면 된다.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道)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내가 직접 듣고 보고 느낀 바를 ‘나의 글’이라고 한다. ‘나의 글’이란 내 생각을 말하고, 내가 경험한 것을 쓰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내 진심을 표현하면 그뿐이다. 글의 본질은 잘하는 데 있지 않고 멋있는 표현에 있지도 않다. 작가의 속생각이 저절로 드러나는 글, 평소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하는 글이 좋은 글이다. 폼잡는 말, 고상한 문체를 쓴다고 좋은 글이 아니다. 비속어나 일상의 말도 내 진심을 드러내는 데 소용된다면 써야 한다.
남을 아프게 하지도 가렵게 하지도 못하고, 구절마다 범범하고 데면데면해서 우유부단하기만 하다면 이런 글을 대체 어디다 쓰겠는가.
전통적인 문장론에서는 글이란 점잖고 고상하며, 운치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조선조 선비들은 글은 성인이나 현자의 정신세계가 담긴 것으로 생각했다.
글을 읽을 때는 《사기》의 문면(文面)을 읽지 말고 글을 쓴 작가의 마음을 읽으라고 했다. 사마천은 친구를 변호했다는 이유로 궁형(宮刑)을 당하고 나서 그 울분을 담아 사기를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뜻을 이루지 못한 아프고 속상한 마음을 형상화하는 행위다. 그것은 아프게 하고 가렵게 하는 글쓰기다.
연암이 생각하는 저술의 의미는 도덕과 인륜에 있지 않고, 뜻을 펴지 못한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발분(發憤)저서(著書)라고 한다. 편안한 상태에서는 참된 문학이 나올 수 없다.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는다”는 말을 이문위희(以文爲戱)라고 한다. 그렇지만 연구자들은 이문위희는 발분 전의 속내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것으로 이해한다.
연암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놀이었다. 그 놀이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가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프게 하는 글이란 인간과 사회의 비정상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찔러 마음을 쓰리게 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글이다. 가렵게 하는 글이란 무언가 근질거려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글,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쓰이는 글을 말한다. 그곳을 건들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글쓰기,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글쓰기다.
새로운 표현을 쓴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제자 이서구를 격려하며 준 글이다.
경전인 《서경》도 그 당시 유행하던 문장을 사용한 것이고, 서법의 모범인 이사와 왕희지의 서체도 그들이 살던 나라에서 유행하던 글씨를 쓴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전으로 배우는 시조니 고려 가요니 하는 장르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대중가요였고,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을 받는 셰익스피어의 문학 작품도 그 당시에 가장 유행하던 대중소설이었다. 그 당시엔 하나의 통속물일지라도 당대의 삶과 고민을 생생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훗날엔 고전의 지위를 얻는다.
글이란 시대를 반영하므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참된 글이 된다.
오호라! 《시경》에 담긴 300편의 시는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이 아닌 것이 없고, 민간 길거리의 남녀가 나눈 말에 지나지 않는다.
연암의 글을 통해 본 글쓰기 요령
1) 첫머리에서 논지를 분명하게 하라
첫머리를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첫인상이 정해진다. 독자는 인내심이 없는지라 처음이 흥미롭지 않으면 다음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첫머리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 내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성공적인 글쓰기로 나아간다.
처음에 과감하고 분명한 논지를 제기하라.
2) 장면을 초점화하라
- 슬프다!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 일 같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다. ~ 나는 화가 나 울면서 분에 먹을 섞고 거울에 침을 뱉었다.~ 연암의 글쓰기 요령을 적용해 보자면, 글을 쓸 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을 나열하면 안 된다. 특정한 상황이나 장면에 집중할 때 글에 생동감이 흐르고 강한 인상을 남긴다.
3) 관습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라
소나무나 매화는 늘 지조와 절개를 상징, 구름은 간신의 이미지를 북극성은 임금을 소쩍새는 한의 정서를 나타낸다. 고정적인 이미지.
3부. 글쓰기의 과정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다.
고전 시대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이 있었다. 술이부작이란 전달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병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언가와 싸워 이기기 위해 글을 썼음이 틀림없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것을 ‘요령’이라고 말한다.
관찰하기 - 글을 쓰는 사람의 중요한 덕목은 남과는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들여다본다. 좋은 작가는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 귀찮아서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본다. 낯설게 보기
제목 정하기 - 제목은 글을 쓸 때 제일 먼저 정하는 것이며, 글의 얼굴이다. 위숙자가 말하기를 “잘 짓는 것이 잘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잘 고치는 것은 잘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구절을 정하는 것은 뜻을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며, 뜻을 정하는 것은 제목을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독자는 먼저 제목을 보고 글 전체의 성격을 이해한다. 첫인상으로 사람의 호오(好惡)를 판가름하듯, 독자는 제목을 보고 글의 인상을 결정한다.
연암은 <문단의 붉은 기에 쓴 머리말>에서 제목을 적국이라고 말한다. 적국은 공략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다. 작가는 제목에서 글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수정하기- 김일손 “처음 초고를 잡을 때는 마음에 치우친 뜻이 있어 스스로 글의 결점과 문제점을 보기 어렵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처음 글을 쓸 때 가졌던 치우친 마음이 없어지고 객관적인 마음이 생겨 비로소 그 문장의 잘잘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열하일기의 경우도 3년 뒤 한꺼번에 탈고된 것이 아니라 몇 번의 수정과 개작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연암 자신뿐만 아니라 연암의 동료 및 후손에 의해서도 개작과 수정이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한 편의 글이 완성될 때마다 반드시 지계공에게 보이며 “나를 위해 비평을 좀 해 주게”하고 하셨다.
고전 문장가들의 글쓰기 비결
오늘날 글쓰기 교육에선 기교나 수사적 장치에만 관심을 기울여 깊이는 갖추지 못하고 요령만 익히는 일이 많지만, 과거의 작문법에서는 작가의 살아있는 정신을 요구했다.
‘글쓰기에는 법도가 있습니다. 소송하는 사람이 물증이 있어야 하고 장사치가 물건을 들고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진술이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물증이 없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글을 쓰는 사람은 경전을 여기저기 인용해 자기 생각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무리 저급한 명칭이라도 꺼리지 말고, 아무리 비속한 이야기라고 없애지 말아야 합니다. 맹자는 말합니다. “성은 다 같이 쓰지만, 이름은 홀로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문자는 다 같이 쓰지만, 글은 홀로 쓰는 것이다.” - 박지원 창애에게 답함-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간청할 때의 마음과, 고아 된 아들과 과부 된 여인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함께 글의 소리(聲)를 논의할 수 없다.
‘글을 잘 쓰는 자는 병법을 아는 걸까? 비유하자면 글자는 군사고, 글의 뜻은 장수다. 제목은 적국이고, 고사를 끌어들이는 것은 싸움터의 보루다. 글자를 묶어 구절을 만들고 구절을 모아 문장을 이루는 일은 대오를 이루어 진을 치는 것과 같다. 운(韻)에 맞춰 소리를 내고 문채(文彩)로 빛을 내는 것은 징과 북을 울리고 깃발을 날리는 것과 같다. 조응(照應)은 봉화고, 비유는 유격병이다. 억양(抑揚) 반복(反覆)은 맞붙어 싸워 모조리 죽이는 것이고, 글의 첫머리에 제목의 의미를 밝히는 파제(破題)를 하고 마무리를 하는 것은 성벽에 먼저 올라 적을 사로잡는 것이다. 함축을 귀하게 여김은 늙은 병사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고, 여운을 남기는 것은 군대를 정돈해 개선하는 것이다.’ -박지원 ‘문단의 붉은 기에 쓴 머리말 -
뜻이 확립되고 나면 말을 다듬어야 합니다. 무릇 말을 다듬는 것은 글이 어우러지고 아름다우며 깔끔하고 정밀하게 할 따름입니다.
옛사람의 뜻을 취하면서 아울러 그 말까지 취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사람과 그 책의 이름을 써서 구별해 내 말과 섞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진부해지거나 표절한 글이 됩니다. -이건창 ‘답우인논작서’
글을 끝마쳤으면 잠시 내버려 글 상자에 넣고 두고, 눈으로 보지 말고 또 가슴에서 깨끗이 씻어 몰아내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룻밤 또는 2, 3일을 잔 뒤에 일어나 다시 그것을 취해봅니다.
맥락의 글쓰기, 전략의 글쓰기
율곡(栗谷) 퇴계(退溪) 다산(茶山) 연암(燕巖) 완당(阮堂) 성호(星湖) 등 고전에서 익히 알려진 호(號)인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나, 자신이 사는 거처를 호로 삼은 것이다. 집과 고향은 자신의 몸이자 존재의 근거였다. 자신이 사는 집, 사는 동네를 자와 호로 삼아 자기 정체성으로 삼고, 인품과 같은 것으로 여겼다. 집과 동네는 친밀한 장소였고 자궁과도 같은 곳이었다. 산수에 대해 흔히 풍월(風月)주인이(主人)라고 해 소유의식을 드러냄으로써 나를 둘러싼 공간을 정신적으로 소유하려는 의식을 보여 주기도 했다.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장소였고, 인품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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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잘 쓰고 싶다.
어찌하면 쉽고 재미있게 글을 잘 쓸까?
독자가 술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면 된다.
말이 쉽지, 쉽지 않다.
전에 밑줄 그어놓은 책을 뒤적이며 정리해 봤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따로 가려 쓰는 글자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좋은 장군(작가)을 얻으면 호미나 곰방메도 굳세고 날랜 무기가 되고,
헝겊을 찢어 장대에 매달면 깃발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조건에 맞기만 하면 비속어인지 고상한 언어인지의 구별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일단, 쓰자!
골라내고 퇴고하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