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옥편

지은이 정민

펴낸 곳 마음산책

발행년도 2007





책읽기와 글쓰기

독서의 보람 - 육신은 밥을 먹어 생명을 유지하고, 마음은 책을 먹고 생기를 지켜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통 밥에만 정신이 팔려있고, 먹고 살기 바빠서 책을 못 읽는 사람은 먹고살게 되어도 책을 안 읽는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절대로 가볍게 들떠 날리는 법이 없다. 그의 눈빛은 깊고 그의 몸짓은 안정감이 있다.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나면 만만히 보던 상대가 ‘어 이것 봐라!’ 하며 자세를 바꾼다.

글이 안 써지는 것은 머릿속에 든 생각이 없어서이지 글 솜씨나 글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다. 애초에 입력된 것. 즉 읽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으면 된다. 소리 내서 읽으면 더 좋다.

사람이 늙어도 계속 변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독서의 힘 때문이다. 독서는 남들이 다 보면서도 못 보던 것을 보게 해준다. 예전에 의미 없이 지나치던 것 앞에 발길을 멈춰 세우게 한다.

책을 읽는 일은 일종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이다. 촉수를 다듬어 안테나를 세우는 일이다.

선인들의 독서법 - 한 가지 책을 한 백번쯤 되풀이해서 읽으면 분명치 않던 의미가 저절로 환해진다는 뜻이다. 이때 읽는 다는 것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락을 얹어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의미는 항상 소리의 뒤를 따라왔다. 옛사람들이 다독을 했다는 말은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다기보다 몇 가지 책을 되풀이해서 읽었다는 뜻이다.

그날 배운 것은 집에 가서 입이 닳도록 다 외워서, 선생님 앞에서 다 외워야했다. 이것을 강(講)을 바친다고 한다. 돌아앉아 외운다고 해서 배송(背誦)이라고 한다.

소리를 따라 기운을 얻어야 터지는 문리 - 문리(文理)란 다른 게 아니라 한문 문장의 구문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한자란 것이 뜻글자라 놓이는 위치에 따라 명사도 되었다가 부사도 되었다가 동사도 되었다가 어조사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자꾸 비슷한 구문들을 읽고 외우다 보면, 이때는 이 글자를 무슨 뜻으로 새겨야 할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옛사람은 《맹자》를 천 번 소리 내서 읽으면 문리가 탁 소리를 내며 터진다고 믿었다. 옛글을 소리 내서 자꾸 읽으면 옛사람의 기운이 그 소리를 타고 내 속으로 들어온다. (그럴까?) 자꾸 읽다보면 그 글의 호흡이 내 호흡과 일치하게 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가 글을 지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글의 리듬과 호흡이 내 글 속에 스며들게 된다. (그랬으면 좋겠다.)

☆좋은 글과 나쁜 글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소리를 내서 읽었을 때 가락이 매끄럽고 호흡에 따라 자연스런 리듬이 타면 좋은 글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용이 아무리 훌륭해도 좋은 긍의 축에는 못 든다. 글에 리듬이 있다는 것은 가락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의 자연스런 결을 살려주고 있다는 말이다. 물에 물결이 있고, 바람에 바람결이 있듯, 글에도 결이 있다. 글의 결은 바로 소리 내서 읽었을 때 느끼는 자연스런 리듬이다. 현대의 문장도 예외가 아니다. 좋은 글은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묻고 따지고 베껴 쓰는, 손으로 읽는 초서(鈔書) - 초서란 책을 읽다가 중요한 부분을 밑줄 긋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베껴 쓰는 방법이다.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던 독서가 손으로 읽는 독서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다. 초서는 말하자면 메모를 해가면 읽는 독서다. 처음에는 그냥 책 내용을 발췌해서 베껴 쓰다가, 이것이 익숙해지면 다시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독서가 쌓여 비로소 식견(識見)이란 것이 생겨난다. 식견이란 세상을 보고 사물을 이해하는 안목이다. 책을 읽는 목적은 바로 이 안목을 세우기 위해서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더라도 식견이 생겨나니 않으면 읽지 않은 것과 아는 것이 없다. 식견이 생겨야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있다.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다면 취급하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 위태롭게 된다. 식견은 영어 실력과도 상관없고 수능 점수와도 관련이 없다. 식견은 오로지 독서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오거서단상 -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대장부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은 읽어야 한다고 했던 것은 두보다. 영어를 미국 사람보다 더 잘하고, 컴퓨터를 장난감 다루듯 해도, 가난해 굶기를 다반사로 하던 그네들이 느끼던 내면의 충족은 느낄 수가 없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꿈꾸던 진보인가?

책 읽는 방법 - 이덕수(1673~1744)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게 되면 책과 내가 유화되어 하나가 된다. 푹 젖지 않으면 읽으면 읽는 대로 다 잊어버려, 읽은 사람이나 읽지 않은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읽기만 해서는 안 되고 생각으로 깨쳐야 한다. 글 쓴 사람의 마음까지 투철하게 읽어, 책속의 사람과 내가 대화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행간이 훤히 다 보이고, 낱낱의 맥락도 놓치지 않는 그런 독서를 말한다.

김창흡(1653~1722) 독서에는 죽은 독서가 있고 산독서가 있다. 책을 덮은 뒤 책 속의 내용이 눈앞에 또렷이 보이면 산독서이고, 책을 펴 놓았을 때는 알 것 같다가 책을 덮은 뒤에 아득해지면 죽은 독서다.

구슬을 꿰는 독서법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보배로운 구슬이 아무리 많아도 꿰지 않으면 흩어져 없어지고 만다. 좋은 일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지는데, 읽은 책의 내용이랴 말해 무엇 하겠는가.

책 읽는 사람의 병통 - 인성구기(因聲求氣 ), 즉 소리로 인하여 기운을 구한다 하여, 한글을 일고 또 읽고, 되풀이해 읽으면 그 글 속에 담긴 옛사람의 정신이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고 믿었다.

하홍도(1593~1666) 책은 많은데 읽은 것은 적다. 예전 배운 것은 몸에 익지 않았고, 새로 배운 것은 성글다. 한 글자마다 한 글자의 뜻을 찾아보고, 한 구절마다 한 구절의 의미를 따져보며, 한 단락을 이같이 하고, 한권을 이같이 한다. 책과 내가 하나가 된다. 온전히 내 호흡과 일치하여 투철하게 알아야한다. 기본 경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책은 책이요 나는 나일뿐이다. 둘 사이에 소통이 없다면 그것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

홍우원(1605~1687) ‘밤중에 앉아 책을 읽다가’ 창밖에선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 등불하나 책상머리에서 가물대고, 책상 위엔 책 한 권이 놓였다. 그 앞에 의관을 정제하고 사려 앉은 한사람. 낭랑하게 책을 읽는다. 소리를 따라 폐부로 파고드는 옛사람의 육성에 마음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온다. 눈이 활짝 열리고 정신이 번쩍 든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다시 고쳐 앉는다.

한 번을 다 읽었다. 가슴속에 파동치는 감동을 가눌 길어 없다.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친다. 두 번을 다 읽었다. 그래도 차마 책을 덮지 못한다.

책을 읽는 까닭 - 하루 종일 《논어》만 읽는다.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서 읽고, 다른 학자들의 풀이까지 꼼꼼히 따져 읽는다. 다 읽고 나서는 다시 첫 권으로 돌아가 하루 한 권씩 읽는다. 몇 차례 읽어 전체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하루에 한 번씩 논어 전체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요즘 학생들은 모르는 것이 없고, 안 배우는 것이 없다. 만화로 그려주고, 음성으로 들려준다. 끊임없이 읽고 쓰고 수행평가를 한다. 요령으로 가르쳐주고 핵심을 체크해준다. 하도 많은 문제를 풀어봐서, 문제만 보면 정답이 척 나오는 문제 풀기의 도사들이다. 제 말은 없고 남 말만하고, 제 생각은 없고 주워들은 생각만 있다.

무조건 외우기만 능사로 알았던 예전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생각에 놀라운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뜻도 모르고 외운 한 구절이 오늘 배운 새 구절과 연관되고, 이 책의 내용이 저 책의 내용과 연결되면서, 지식은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저희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전혀 다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같은 이야기인 줄을 깨닫는다. 예전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던 말이 또렷하게 가슴에 새겨진다. 따로 놀던 생각이 한 초점을 향해 달려간다. 하나만 들어도 열을 알게 된다. 이른바 문리(文理)가 난 것이다.

옛 문장론에서 배우는 것들-유몽인(1559~1663)《어우야담》무릇 글을 지음에 어려운 것은 뜻을 세우는 것이다, 문자에 이르러서는 붓 아래 있다.

박충원은 어려운 것이 뜻을 세우는 것이고, 문장을 엮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했다. 뜻을 세운다는 것은 주제를 정한다는 말이고, 문장을 엮는 것은 이른바 글의 구성을 말한다. 마음속에 정해둔 생각이 분명하면 글을 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생각하는 힘이 튼튼하면 글은 저절로 따라온다.

송나라 주돈이 같은 이는 글은 도를 실어나르는 수레와 같다고 보고, 수레는 짐을 잘 실어 나르는 것이 중요하지, 바퀴의 장식이 화려한가 화려하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하물며 물건을 싣지 않은 빈 수레는 존재 가치도 없다고 보았다.

글에는 정신이 스며있다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 하여, 글은 그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정조(正祖)는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소설투의 패관소품체를 젊은 학자들이 즐겨 읽고, 그것을 흉내 내어 글을 짓는 것에 질색을 했다. 임금이 직접 문체를 바로잡겠다고 문체반정(文體反正)을 국가적 시책으로 추진해나갔다.

글쓰기는 단순히 작문상의 개인 취향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한유(韓愈)의 유명한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 한유는 그 정신을 본받고, 그 표현은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신을 본받는 것은 원리를 본받는다는 말이다. 표현을 본받는다는 것은 껍데기를 흉내 낸다는 말이다.

상동구이(尙同求異) 같아지려고 하되 다름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거기에 담기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나의 목소리, 나의 개성이어야 한다.

미문의 악취 - 당 나라 때 한유는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아서는 안 되고, 간략하나 한 글자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豊而不餘一字, 約而不失一辭) 요컨대 한 글자만 보태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을 쓰라는 주문이다. 할 말을 다 하되 군더더기 하나 없고, 할 말만 했지만 보탤 것 없는 그런 글이 좋은 글이다.

오늘 우리의 글쓰기는 어떤가? 현란한 수사, 문체의 과잉은 고질이 된 지 오래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알고 나면 더 허탈해지는 미문의 홍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몽롱한 수사로 글쓴이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는 좌충우돌 횡설수설의 글이 적지 않다.

덮어놓고 짧기만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짧게 할 수 있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은 나쁘다.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돌려서 한다. 한번 읽으면 멋있어 보이지만, 두 번 읽으면 헷갈린다.

국적불명의 문채. 서양서의 번역에 가까운 정체를 알 수 없는 글. 일상 언어와는 별도의 세계를 완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어법들. 몽환적 어휘 속에 떠도는 나르시시즘. 형용사화 부사가 둥둥 떠다닌다.

번드르하게 바르는 것을 문사로 생각하고 아로새겨 꾸미는 것을 글이라고 여긴다.

글을 짓는 체가 셋이 있다. 첫째 간결함, 둘째 참됨, 셋째 바름.

할 말만 하는 간결, 이것과 저것을 가늠하는 참됨,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바름 이  세 가지가 글쓰기의 바탕이 되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나 제 생각을 남에게 오해 없이 충분히 전달하려면, 때로 말이 길어질 수도 있고, 비유를 끌어오기도 하며, 역설이나 대조의 수사를 동원하기도 한다. 비유나 수사는 뜻을 전하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이 가늠을 하지 못해 글이 추하게 된다. 지저분해진다.

송나라 때 문장가 구양수는 자신의 글이 한유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고백한바 있다. 하지만 정작 구양수의 문장을 보면 한유와 비슷한 데라곤 한 군데도 없다. 한유의 글쓰기 정신, 글 쓰는 자세, 표현의 개성을 배웠다.

글의 표정 - 암호문과 다를 바 없는 시, 자기도취에 빠진 소설, 목적도 없이 생각사이를 헤매는 비평. 이들의 공통점은 소통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남들이 알아듣든 말든 혼자 떠드는 잠꼬대는 시가 아니라 배설물이다. 소설가도 종종 횡설수설을 의식의 흐름으로 착각하고, 해괴망측을 실험정신으로 오해한다. 이런 작품들은 쓰기도 힘들었겠지만 읽기가 더 괴롭다.

글을 쓰다 생각이 꽉 막혀 조금도 나아갈 수 없을 때, 머리나 식히자고 우연히 펴든 평소 잘 보지도 않던 책갈피에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내가 원하는 정보들이 줄을 지어 나온다. 이들은 마치 왜 이제야 내게 눈길을 주느냐고 원망하는 것만 같다. 이럴 때 나는 괴성을 지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연구실을 왔다갔다. 한다. 마치 정신나간사람 같다. 며칠째 막혀 있던 생각은 봇물이 터져, 이제 자판을 두드리는 손의 속도도 그 서슬을 따라잡지 못한다. 밥상에 앉아 밥을 기다리다가 섬광처럼 스친 생각에 앉은 자리에서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몇 장의 글을 숨도 못 쉬고 쓴다. 이럴 때는 벼락을 맞은 것 같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