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저고리의 욕망
이민주 지음
문학동네
조선 여성, 패션에 눈뜨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1762~1836)도 의복의 쓰임을 하나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채(文彩)를 만들어 몸을 가리는 것이라고 했다.
영조 때의 대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부인이 옷을 입는 것은 오로지 고운 맵시를 귀하게 여겨서 가는 허리를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시대’다. 시대는 다른 말로 ‘타이밍’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옷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촌스러운 옷, 혹은 특정 소수를 위한 전위적인 옷이 된다.
18세기 조선에서 새로운 패션 스타일을 원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기생이다. 사대부의 첩이 되길 갈망했던 기생의 패션 스타일은 어떻게 하면 남성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것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으로 가릴 것인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식욕과 색욕이다. 예기에서는 “마시고 먹는 음식과 남녀 간의 사랑은 사람의 가장 큰 욕망”이라고 했다.
성호 이익은 인간의 색욕이 금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비난했다. 가축도 서로 혼란스럽게 관계를 맺지 않고 정해진 짝이 있어, 분별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집에 처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다른 집에서 간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소나 양 같은 것들도 새끼를 배면 짝짓기를 그만두는데 인간은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짝을 택할 때에도 인간은 젊고 예쁜 것만을 취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남녀 할 것 없이 서로 어울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색을 즐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출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옷을 입고, 생식기능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에 성과 관련된 신체 부위를 숨긴다. 그런데 관습적으로 가리는 신체 부위는 이성으로 하여금 강한 성적 매력을 느끼게 하고 오히려 지속해서 성적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옷을 입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성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체 부위로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패션은 노출과 은폐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으며, 신체를 부분적으로 또는 단계적으로 드러내거나 숨기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얇고 가벼운 옷감을 이용하거나 옷을 몸에 딱 붙게 하여 신체를 드러내는 것은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보다 훨씬 섹슈얼리티를 강조하는 방법이다.
짧아지고 작아진 저고리 - ‘창피하다.’라는 우리말이 있다. 이는 옷에 띠를 매지 않은 모양을 일컫는다고 했으니 옷에 띠를 매지 않았다면 반드시 풀어헤친 모습일 것이다.
젊음의 상징, 가슴 - 유방은 여성에게 주어진 최고의 성적 무기이자 쾌락과 생식 능력의 상징이다. 17세기 중반, 빗장뼈와 가슴의 골을 드러낸 라인은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 유행했고, 여성의 가슴은 젊음과 아름다움의 상징이 되었다.
송수거사의 <미인도>을 보자 치마와 연결된 넓은 치마허리가 저고리 밑으로 허리선 부근까지 닿아 있다. 그러나 살짝 가슴이 보인다. 특히 왼쪽 겨드랑이 아래로 늘어뜨린 붉은색 안 고름은 가슴으로 시선을 유도한다. 가슴을 숨기려 했는지 드러내려 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붉은색 안 고름과 함께 살짝 드러난 속살은 노골적으로 드러낸 가슴보다 섹시할 뿐 아니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속살이 보일락 말락 하는 길이의 저고리와 움직임에 따라 흘러내린 치마허리가 의도하지 않은 듯 계획된 가슴 노출을 불러온 순간이다. 작자 미상의 <미인도>에서 저고리 틈으로 드러난 진분홍색 젖꼭지는 젊음을 상징하며 치마 위로 불거져 나온 유방은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보다 성적 매력을 훨씬 더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탱탱하고 둥근 가슴은 여성성을 표현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모든 남성이 이러한 스타일을 곱게 본 것은 아니다. 이덕무(1741~1793)는 저고리를 보고 요사스럽다 하여 ‘요복(妖服)’이라 평했다. ‘요’자는 ‘아리따울 요’ 자이면서 동시에 ‘괴이할 요’ 자다. 그러니 누가 입느냐에 따라 저고리는 아리따울 수도 있고 요사스러울 수도 있다.
청장관전서에서 이덕무는 옛날에는 여자의 옷을 넉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시집올 때 입었던 옷을 소렴(小殮)할 때 쓸 수 있었다 한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새로 생긴 옷을 시험 삼아 입어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심한 경유에는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런 옷일까. 대저 복장에 있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게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성호 이익은 여인들의 의복 변화를 유행으로 이해하고 감상했다. - 말세가 되니, 부인의 의복이 소매는 좁고 옷자락은 짧은 것이 요사한 귀신에게 입히는 것처럼 되었다.
조금씩만 새롭게 -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한다. 이는 복고(復古)를 의미한다. 그러나 복고는 옛것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약간 변화시키는 것이다. 치마는 삼국시대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주름치마, 색동치마 다양하구나 - 삼국시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하의는 바지인 고(袴)였다. 하체를 완전히 가려주는 고는 남녀가 모두 입었다. 그러다 여자의 고는 치마 안에 받쳐 입는 속곳이 되었으며, 치마인 상(裳)을 그 위에 입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분이 높은 경우 치마를 겹쳐 입었다. 흥덕왕은 사치가 극심하여 법을 어기는 자는 형벌에 처하겠다는 교서를 내린다.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존비가 있어서 그에 따라 호칭이 같지 않고 의복도 다른 것이다.
치마를 만드는 데 사용한 옷감이 화려했을 뿐 아니라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가 극심했음을 알 수 있다. 치마를 내상과 표상으로 겹쳐 입는 것은 얇은 직물이 흘러내리는 데 따른 맵시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
언제나 사랑받는 주름치마 - 가을과 겨울에는 황견으로 된 여덟 폭의 치마를 겨드랑이까지 올려 입고, 특히 주름이 많은 옷을 좋아하여 부귀한 자들의 처첩은 치마를 만드는데 비단 7,8필을 쓴다고 한다. 주름이 많은 폭넓은 치마는 고려 시대에도 널이 유행했다. 서인이 가장 사치할 수 있는 치마의 폭은 속치마 10폭, 겉치마 12폭이라고 했으니 여자의 치마에 대해서는 법도 관대했던 것 같다. 전단후장형 치마는 16세기 남양홍씨(1534~1574) 파평윤씨 평산신씨 등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17세기 후반, 18세기부터는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치마를 가슴 위까지 올려 입게 되어 치마의 길이를 줄일 필요가 없어졌다. 치마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치마허리를 넓게 달아 짧아진 저고리 아래로 보이는 가슴을 가리는 데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 치마허리는 지금의 브래지어처럼 가슴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가슴을 가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1930년경 치마허리에 어깨끈을 달면서 치마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졌고 치마허리는 아무리 넓어도 가슴을 가릴 수 없다 보니 치마를 입는 방법에 변화가 생겼다. 치마허리를 단단히 묶어야 가슴이 보이지 않을 테니 당연히 납작해질 때까지 가슴을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단 10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다음 방법은 치마를 걷어 올려 겨드랑이에 끼우는 것이다. 그러나 가슴을 가리기 위한 착장법은 가슴을 가리는 대신 엉덩이를 커 보이게 하여 새로운 스타일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옷은 시각적 효과가 가장 큰 사물 가운데 하나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타인을 인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초라고 한다. 우리는 옷을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기도 하고, 유니폼을 통해 소속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 어떤 깃을 단 저고리를 입었는가 또는 어떤 모자를 썼는가는 소속을 알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단서였다.
버들잎 같은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 - 허리에 둘러 입던 치마의 디자인이 다양해지고 저고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허리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여성의 허리는 패션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여자는 자고로 허리가 가늘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는 허리는 여성미를 대표한다. 옷을 만드는 데에서도 허리를 강조하려면 엉덩이를 부풀리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서양에서는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 코르셋을 만들었다. 16세기에는 치마를 부풀리기 위해 만든 속치마인 파딩게일이 유명했다. 이는 철사나 고래수염, 등나무 등의 고리를 여러 단 엮어 만들었는데, 스커트의 밑단까지 넓게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17세기 말 ‘바구니’라는 뜻으로 이 역시 철사나 고래수염, 등나무 등으로 테를 만들고 허리에 끈을 묶어 여미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의복 형태는 여성의 몸가짐, 매너 등에 영향을 주었고 여성의 속옷은 여성미와 정숙의 상징이 되었다. 속옷은 또한 도발과 유혹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남성에게 위협을 당했을 때 여성은 코르셋의 살대를 꺼내 자신을 방어하는 무리고 사용했다. 코르셋이 엉덩이로 여성성을 극대화함으로써 남성들의 성욕을 자극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엉덩이를 어떻게 부풀렸을까? 조선 후기 여성들은 치마를 껴입음으로써 차체를 강조했다.
은폐는 또 다른 노출 - 때로는 그래도 드러내기보다 과장되게 가림으로써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즉, 은폐는 또 다른 노출이다.
겹겹이 껴입은 속옷 - 사실 속옷을 여러 겹 입었을 때 겉으로 표현되는 실루엣은 오히려 치마를 넉넉하게 부풀려 여성성을 극대화한다. 저고리 안에 적삼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의는 어떠한가? 여섯 벌의 하의를 껴입었다.
그럼 속옷의 종류를 살펴보자, 하의로 맨 안쪽, 살이 닿는 부분에 입는 것은 지금의 팬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다리속곳이다. 다리속곳은 크기가 큰 속옷들을 자주 빨아 입는 번거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계절에 상관없이 흰 목면으로 만들었으며, 홑겹으로 된 긴 감을 허리띠에 달아 찼다. 그 모양은 사다리꼴을 이루며 가랑이 아래 안쪽은 한 겹을 덧대어 두 겹으로 구성했다. 다리속곳 위에는 속속곳을 입는다. 속속곳은 속녀의로 단속곳과 같이 바지통이 넓은 속옷이다. 이 위에 바지통이 좁은 속바지를 입는다. 속바지 안에 바지통이 넓은 속속곳을 입어 속바지가 부풀려진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 위에 다시 단속곳을 입음으로써 도 한 번 부풀려진 속옷이 그 형태를 유지하면서 엉덩이 주변을 커 보이게 한다. 이때 단속곳은 치마만큼이나 좋은 옷감을 사용한다. 치마를 걷어 입을 때 보이는 것이 바로 단속곳이기 때문이다.
이들 속곳들은 치마를 부풀리는 용도인 동시에 치마를 걷어 올렸을 때는 겉옷의 역할도 했으므로 세탁 후 쟁을 쳐서 입었다. 쟁은 풀을 먹여 반반하게 펴서 말리거나 다리는 것으로 쟁을 친 옷감은 때가 덜 타기도 하고 광택이 나서 고급스러워 보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무족치마다. 무족치마는 모시인 저포(苧布) 여러 폭을 이어붙인 후 각각 다른 길이의 치마를 3층, 5층, 7층, 9층 등 층층으로 허리에 달아 만든다.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한 무족치마는 치마를 부풀리는 데 자주 효과적이었다. 무적치마는 궁궐 밖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무족치마 위에는 대슘치마를 입는다. 대슘치마는 풀 먹인 모시를 이어 만들고 밑단에 4센티미터 너비의 창호지 백 비단을 붙인 치마로 백 비단에도 풀을 먹여 빳빳하게 만들면 겉에 긴치마를 입었을 때 치마를 넓게 펴지게 하는 효과를 낸다,
조선 시대 여인들은 여름에는 모시나 베를 사용했다. 모시나 베는 뻣뻣하여 밖으로 뻗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치마를 부풀리는 데 적합했다. 또 누비를 활용하기도 했다. 누비는 간격과 솜을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부푸는 느낌이 달라진다.
누비는 날씬해 보여야 하는 곳과 넉넉해 보여야 하는 곳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누비의 매력이다. 속바지나 단속곳을 누빌 때 윗부분은 굵게, 아랫부분은 가늘게 누비면 엉덩이 부문을 더 강조할 수 있다. 모두 서양의 페티코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월하정인>은 여인은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런데 그림 속 여인은 얼굴을 가렸어도 속옷은 드러내놓고 있다. 속옷을 드러내는 것이 이미 하나의 패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여성들이 속옷의 다양성과 장식성에 관심을 두고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데 거침없었음을 보여준다.
기생은 내외법 때문이라 장식 목적으로 쓰개 류를 사용했다. 이는 자신의 얼굴을 타인에게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니 숨기기를 통해 타인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려 했다.
흰색의 넓은 치마허리를 이마 위에 둘러써서 얼굴을 가리는데 시선은 오히려 얼굴로 집중된다. 거기엔 ‘내 얼굴 한번 봐달라’는 은근한 표현이 담겨있다. 장옷도 이런 혐의를 벗기 어렵다. 17세기까지 장옷은 여성이 포로 착용했다. 소매의 겨드랑이 밑에는 당(襠)이라는 삼각형의 작은 무가 달려 있다. 신체의 움직임이 많은 곳이나 트인 부분에 작은 삼각형, 사다리꼴, 마름모꼴, 사각형 등의 당을 덧대러 활동과 착용이 편리하도록 했다. 당은 실용적인 목적에서뿐 아니라 장식적인 요소로도 활용되었다.
숨은 욕망 앞으로
하후상박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신분을 초월하여 여성들 사이에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생이야 그렇다 쳐도 누구보다 정숙을 강요받았던 반가 부녀자는 물론 먹고살기 바빴을 서민 여성까지 하후상박 스타일을 선호했다.
몸값 좀 올려보자 - 남의 시선을 끌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누구나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즉 타인과 달라 보이고 싶은 것이다. 특히 기생이 그러한 욕구가 강했다. 직업상 남들 앞에서 돋보여야 했고 기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의 첩이 되려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해야 했다. 특수한 신분, 그들에 대한 복식 특혜는 사회적으로 낮은 그들의 신분 지위에 대한 보상 역할을 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은 옷을 통해 자기과시를 할 수 있었다.
기녀의 비단옷은 홍색, 녹색, 황색, 감색 등의 원색을 많이 사용하여 화려했고, 기녀에게는 가죽신과 금, 은 구슬 옥 등 악종 장신구도 허용되었다. 그렇지만 반가 부녀자에게는 허용된 겹치마와 삼회장저고리 등의 착용은 여전히 금지되었다.
조선 시대 천역 사노비, 중,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이 있었다. 기생은 팔천 중 하나였지만 사대부와 교제할 수 있었으며, 합법적으로 남성의 접근이 허용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난 연예인으로서 자연히 남성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한평생 남자들의 노리개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가치가 없어지면 냉혹하게 버림받는 비운을 감수해야 하는 묘한 신분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부분 기생은 일반인으로 살고 싶어 했으며, 벼슬아치의 첩이 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다.
기생에게 몸은 곧 자산이다. 기생은 인격체가 아니라 판매되는 물품이다.
기생은 천인이지만 복식에서는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갖은 속옷과 함께 화려한 비단옷을 입었는데, 차체를 장식한 비녀와 금봉채, 패물을 단 노리개는 기생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수단이었다. 허리를 졸라 동여맨 몸매는 남성들의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춘향전에 나오는 기생의 모습 : 명월이는 나군자락을 거듬거듬 걷어다가 세요흉당에 딱 붙이고 아장아장 들어오고, 다음으로 도홍이는 홍상자락을 걷어 안고 아장아장 조촘조촘 걸어들어오고, 연심이는 나상을 걷어 안고 비단 버선과 수놓은 신발을 끌면서 아장아장 걸어 가만가만 들어온다.
나도 여자라오 -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은 여성의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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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사이 그림이 있어 보는 재미가 좋았다.
이런 책은 읽지 않고 눈요기로 봐야 더 재미있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보는 나로서는 조금 감질이 났지만, 그래서 더 은밀한 엿보기의 효과가 극대했던 것 같다.
아~ 옷 잘 입어 나의 여성성을 살리고 싶다.
그런데 누가 나를 ‘여성성’으로 봐 줄까?
봄, 봄이다
여성성의 패션으로 외출하여
봄, 봄을 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