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블루
김랑/ 나무〔수〕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쯤은
랩소디 인 블루
‘푸름’에는 그 색깔만큼이나 셀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겨 있다.
풋풋한 사랑이 있고,
햇살 같은 웃음과 위안이 있고,
바다 같은 그리움이 있고,
부서지는 파도 같은 아픔이 있으며,
짜디짠 슬픔도 있다.
아드리아가 품고 있는 크로아티아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푸름’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 이름조차 파래서 생각만 해도 금세 ‘푸름’이 번지는 곳.
잘 지내나요? 꽃과 하늘을 닮은 사람. 이곳은 맑은 하늘과 붉은 꽃이 지천입니다. 그쪽도 ‘맑음’인가요?
붉은 지붕이 떠받친 하늘 아래, 숨이 멎을 것 같은 푸른 바다가 누웠다. 손끝에 번지는 아득한 그리움. 시간마저 멈춘 풍경 그 이상의 풍경. 두브로브니크.
시간이 멈췄고, 그들은 그렇게 풍경이 됐다. 같은 곳을 보는 방법을 그때도 알았다면, 그대와 나의 그 시간도 풍경으로 머물렀을 것을….
그리워서 떠나는 게 여행이라지만, 떠나고 보면 그리운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나는 언제나 네가 그립다
보라Bora가 맹위를 떨치는 겨울도 아니건만, 차가운 바람은 매섭게 골짜기를 훑어내렸다. 보라: 겨울철 알프스를 넘어 아드리아 해로 부는 차고 건조한 국지풍. 산을 넘어 산기슭으로 불어내리는 차고 건조한 바람을 통칭하기 함.
마음만 앞서 생각지도 않고 버스에서 덜렁 내려버린 게 실수였다. 우리는 결국 목적지인 마을 위까지 꼼짝없이 걸어가야 했다. 한 달 이상 여행하는 동안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빈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색, 빛, 소리, 바람, 그리고 안개. 가을이 익어가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풍성했다. 안개를 머금은 추색은 햇살과 어울려 산 아래까지 파도를 이루었고, 빛의 노래는 해가 진 뒤에도 그칠 줄 몰랐다.
꿈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안개가 사는 모토분의 숲처럼 까닭 모를 불안함이 똬리를 틀고는 했다. 대륙의 반대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늘 안갯속처럼 답답하고, 같이 있어도 불쑥불쑥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읽기에 우린 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여행에서 많이 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니다. 때로는 향기든, 기억이든, 마음이든, 무엇인가 남겨두는 편이 훨씬 더 좋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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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를 닮은
자그레브는 비엔나를 닮았다. 같은 강줄기(자그레브의 사바 강은 비엔나 도나우 강의 지류다)를품고 언덕에 기댄 도시지형, 대성당과 광장을 주심으로 형성된 도심에 노면 전차가 다니는 게 비슷했고, 각이 살아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과 그와 대비되는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도 비슷했다.
여행자에게는 자그레브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전체가 위험할 게 전혀 없다. 격렬한 내전을 겪으며 1990년대에야 독립한 나라지만 지금의 크로아티아는 세계에서 여행자에게 가장 안전한 나라 가운데 하나다. 늦은 밤 여자 여행자 혼자 거리를 돌아다녀도 아무 걱정 없는 나라가 크로아티아다.
나의 자그레브 탐험법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전차의 웅웅 소리가 내겐 이렇게 들려. Quizas, Quizas, Quizas, (글쎄, 글쎄, 글쎄). 너의 질문에 흘린, 입에 익은 나의 대답처럼. 반복되는 그 소리에 빠져들면 도시는 순간 흑백으로 변하지. 그 노래가 흘러나오던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처럼.
항상 난 그대에게 묻지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냐고. 그대는 늘 내게 대답하지요. 글쎄, 글쎄, 글쎄. - 영화 <화양연화>중
흑백의 세상은 곧 끊기고 말아. 자그레브의 전차는 색깔 맞추기 놀이를 할 수 있을 만큼 종류와 색깔이 다양하거든. 빨강, 하양, 파랑, 연파랑, 주홍, 자주, 검정. 페인트 덧칠이 다 보이는 낡은 것과 매끈한 새것, 둥근 것, 그리고 각진 것. 나는 빨간색 낡은 전차와 옅은 자주색 전차를 좋아해. 마음에 드는 색깔의 전차가 오면 훌렁 올라타. 정류장 끝과 끝을 오가거나, 마음에 드는 아무 곳에나 내려 골목을 걷곤 하지. 이렇게 빙빙빙 돌다 보면 지도에서는 읽을 수 없는 것들을 만날 수 있거든. 크로아티아인들이 키스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체크무늬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또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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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나라 알프스, 푸른 눈물
몇 개의 호수를 지나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거미줄처럼 늘어진 폭포 앞에서 파리한 낯빛의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때만 해도 그녀 때문에 이 한적한, 오후 6시만 지나면 모든 게 어둠에 묻혀버리는 산골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게 될지 몰랐다. 그녀는 잿빛 나무다리에서 퍼런 호수 위로, 호수보다 더 서늘한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그날 늦은 저녁 호텔의 카페 바에서였다. 아무 말 없이 걷는 내게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 했고, 나는 그저 얼굴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 안다. 내가 크로아티아에 온 이유도 별다르지 않기에. 가진 게 사랑밖에 없는 사람이 사랑을 놓은 그 마음 잘 안다.
프로클란스코호수로 흘러드는 어귀에 놓인 나의 아름다운 작은 마을, 그곳에서 3일을 머물렀다. 한 달 음이면 다 돌아볼 작은 마을의 아늑한 골목길을 돌고 또 돌며 기억에 새겨넣었다. 집 뒤로 백여 걸음을 걸어가면 아이스크림을 듬뿍 얹어주는 아이스커피를 파는 카페가 있고, 그 앞에는 내 이야기를 신기한 듯 들어주는, 열아홉 레베카가 지키는 작은 식당이 있다.
자신의 이름과 같은 마르코 폴로처럼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했던 마르코는 유독 내 카메라들에 관심을 보였다. 스크라딘을 떠나던 날, 낡은 기계식 카메라와 열 통의 필름을 마르코에게 남겼다. 나에겐 어린 남매의 환한 웃음이 낡은 카메라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인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세 가지 질문> 중에서 -톨스토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드는 꼬맹이들이 인사에 작고 아름다운 나의 마을을 떠나는 발걸음이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처럼 자꾸만 늘어졌다. 가슴이 따뜻했고, 또 서늘했다. 종잡을 수 없이 어느 날 문득 치미는 내 ‘그리움 병’이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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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풍경보다 아름다운
진짜 여행은 혼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든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내주는 친구들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이 세상 모든 여행자의 고향
섬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다. 가족들은 그를 에밀리오네라고 불렀다. 소년은 아버지와 삼촌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가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사내는 집이 그리워졌다. 사내는 마흔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얼마후, 사내는 전쟁에 휘말려 갇힌 몸이 됐다. 사내는 몇 년 뒤 풀려났고, 사람들은 그의 신비한 모험담을 좋아하고, 한편으로는 그의 이름을 따서 허풍쟁이 ‘백만’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는 다시 그가 살던 곳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다른 세상을 꿈꿨다. 사내의 이름은 마르코 폴로였고, 탐험가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사내의 집은 베네치아였으며, 고향은 코르출라였다.
-꼬마는 소년이 되었고, 바닷가에서 살게 됐고, 섬을 좋아하게 됐다. 소년은 이제 바다 건너의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지도를 보는 게 더 좋았다.
바닷가 마을, 비비녜
공터에는 마을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녹슨 대포가 버려져 있다. 내전 중에 쓰던 것이라 했고, 몇몇은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상처를 이야기했다. 눈동자에서는 슬픈 빛이 읽혔지만, 그들은 이제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그들은 구슬치기보다 여행자에게 관심이 더 많았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섞은 포도주에 낯빛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중에 버스에서 만난 여행자가 비비녜는 장기여행자들이 좋아하는 곳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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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빛의 마을
얼마 전 유럽인이 꼽은 유럽의 낙원으로 크로아티아가 첫손에 꼽혔다고 하는데, 프리모스텐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아름다운 마을로 첫손에 꼽는 곳이다. 오후에는 들꽃을 따러 나온 어린 소녀들이 가르쳐준 비비녜에 마음이 묶이고, 석양에 물든 비오그라드의 바닷가 벤치에 몸이 묶였다.
마을이 온갖 색으로 가득하다. 연중 날씨가 화창해서일까. 달마티아 사람들은 색에 민감하다. 골목에 덜렁 놓인 낡은 자동차, 길바닥에 손으로 그린 안내표시, 담벼락에 붙은 간판, 담장을 넘어 바다를 행해 핀 꽃… 골목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완벽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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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마음, 쉬베니크
노랗게 저물어 가는 옛 도시 언덕, 여린 바람에도 흔들리는 개양귀비꽃 몇 송이. 흔한 꽃이 오늘따라 마음을 끄는 건, 꽃말처럼 여린 사랑 때문일까.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 여름 한 철 처절하게 피었다 지더라도, 비 오고 해 돋으면 내년에는 흐드러지겠지. 누군가 알아보고 이렇게 머물다 가겠지. 누군가 또 이렇게 마음을 심어두겠지.
진짜 여행은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 시작되는 걸 알고 있으니까.
바위가 만든 마을
신이시여, 이 땅에 산다는 것에 감사드리나이다. 오미쉬 마을의 작은 르네상스 궁전에 새겨진 글이다.
두브로브니크
드디어 다시 왔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곳입니다. 가슴에 두고서도 차마 그립다 말하기조차 쉽지 않은 곳입니다. 첫사랑 같은 곳입니다. 여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두브로브니크입니다.
사람들은 베네치아를 두고 아드리아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두브로브니크는 아드리아의 공주입니다. 사람들은 아드리아의 진주라고도 합니다. 성문을 넘어서는 그 순간, 그 누구라도 이 아름다운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두브로브니크는 누가 담아도 다 엽서 같은 사진이 됩니다. 언제나 엽서 속 사진, 그 이상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곧 그리움이 되는 곳입니다. 자그락대는 자갈을 밟듯 뛰는 가슴을 누르고 고성으로 향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섞인 이상한 세계입니다. 긴 한숨을 토해낸 뒤에야 겨우 귀가 트입니다. 계단 위에 널린 빨래가 전혀 남루해 보이지 않습니다. 성 안의 해안가로 나가 밤바람을 안주 삼아 크로아티아 와인을 마셔볼까 합니다. 기다림만 있는 오늘 밤은 너무나 길 테니까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곳, 마치 첫사랑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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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가슴 한켠이 시리다
김랑이라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슴 한켠이 시린사람일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렇게 독자를 시리게 해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슴이 시릴 때는 크로아티아가 떠 오르도록.
시리다는 다른 단어가 있다면,
지붕은 붉은 빛이지만, 마음은 더 시려운 '블루'이어야 한다
시린 가슴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