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

김영주 글 사진



왜, 그리고 어떻게 ‘프로방스’가 갑자기 떠올려졌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마치 어둡고 깊은 산 속에서 별똥별의 광채를 발견한 것과 같다.

2년 전에 여행했던 나흘간의 기억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오르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프로방스의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 그립다. 아하, 여행을 떠나는 데 이보다 더 합당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욕심이 줄어드니 행복의 폭이 넓어지고, 긴장이 풀어지니 솔솔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이파리 하나에도 감동이 일었다.


<아비뇽>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간일 텐데, 이미 화장의 전 과정을 마친 얼굴에 당장 이브닝 파티에 참석하고도 남을 화려한 액세서리를 걸치고 있다. 프랑스 여자들은 아무리 사소한 자리라도 누군가의 초대를 받으면 이렇게 격식을 갖추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갓 구워낸 바게트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주인이 잘라서 나눠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법. 앙레는 냅킨으로 둘둘 만 바게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을 그 위에 댔다. 부드럽게 칼을 대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간다.



프로방스 날씨는 포도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 해가 좋고 적당히 비도 오고. 심지어 그 무서운 미스트랄마저도 도움이 된다. 벌레를 다 죽어 버린다. 미스트랄, 겨울이면 자살률이 쭉 올라간다. 미스트랄 때문에 모두 우울병에 걸린다.

라벤더와 양귀비 향이 넘치던 벌판, 청명한 하늘과 눈 부신 태양은 프로방스다.




<뤼베롱>

사람이든 물건이든 혹은 장소이든, 어느 순간 나를 한 번에 사로잡는 대상을 만날 때가 있다.
본능에만 충실하면 되므로 어떤 면에서는 효율성이 매우 뛰어나다.


“참, 메트시트는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적당히 낡은 벽과 바닥, 화려하지는 않으나 깨끗한 흰색 아사 커튼과 소박한 장식품들. 그리고 알맞게 단출한 가구와 따뜻한 그림 액자. 집안을 둘러보는 동안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상대방의 마음을 읽었다. 안락함과 즐거움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까지 공짜로 빌려주겠다니….



이끼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영장. 그런데 놀랍도록 이곳과 어울린다. 그 어설픔이 오히려 ‘집’의 소박함을 더해주고 있다. 모처럼 평화를 맞았다. 오히려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반가울 만큼 이 시간을 누렸다. 프로방스가 내 물건이라도 된 양, 어깨가 으쓱해졌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극작가 사무엘 베게트.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프로방스까지 오게 된다. 그러다가 우연히 루시옹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주저앉는다. 낯선 땅에서의 외롭고 위험한 방랑생활이 시작됐지만, 이곳에 머무는 2년 동안 그는 언덕 위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집에 틀어박혀 소설 <와트>를 완성한다. 전쟁의 긴장마저 순화시켜 버린 곳.



‘시 브림Sea bream'. 프랑스 어로는 ’도라드Daurade'라 불리는 바다 도미. 원하는 메뉴를 그 나라 단어로 외워놓지 않은 다른 관광객은 주문의 고초에 시달린다. 프로방스 사람들에게 있어 ‘영어로 된 메뉴’ 혹은 ‘웨이트리스의 영어 설명’은 곧 그들 언어에 대한 배신이다. 신기한 점은 그 어떤 관광객도 짜증을 내거나 영어 메뉴 내놓으라고 고함치지 않는다. 소고기인 줄 알고 시켰는데 오리고기가 나온들, 조개인 줄 알았는데 달팽이가 나온들, 프로방스로 여행 온 사람들은 두고두고 기억될 실수담으로 만족해하며 기꺼이 음식값을 지급한다. 사실 이국(異國)여행의 재미는 바로 그 땅의 습성에 최대한 가까이 가보는 게 아니겠는가.




길을 잃지 않으려면 1시간가량 넓게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지금 이 순간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듣고 가슴으로 호흡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인데 뭘 더 인생의 그늘진 구석을 떠올리겠는가.


황토색은 우리를 원시시대로 돌아가게 한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하고 처음 사용한 자연색소이다.


양지와 그늘의 체감온도는 한여름과 늦가을이다.



오늘은 쉬면서 집안일을 하기로 했다. 점심도 집에서 해먹기로 했다. 나는 지쳤다. 번쩍거리는 태양 밑에서 두 다리 쭉 뻗고 책이나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나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각자의 시간이 필요해진 것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엎치락뒤치락, 좌충우돌, 예측불허의 나날들 아닌가.

모자, 여기 여자들 이런 거 하나씩 다 쓰고 다니네. 프로방스에서 안 해보면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어. 그래,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머뭇거리는 시간에 인생의 한 토막이 또 지나간다.




서로서로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시장 바닥에서는 점잖은 구경꾼이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재래시장의 어설픈 디스플레이와 능글맞은 동네 아저씨의 호객행위, 파는 사람이나 구경나온 사람이나 모두가 흥이 났다.



쇼윈도 안에는 파랑, 노랑, 빨강, 연두색의 꽃무늬가 화려하게 그려진 그릇들이 대충 쌓여 있는데도 그 자체가 모네의 정물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다. 그것들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자연스럽게’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미로처럼 얽히기고 설킨 길과 허름하지만, 풍취가 있는 집들 사이, 그 좁고 구불구불한 틈새에 앙증맞은 운하가 있다. 물과 맞닿은 벽에는 이끼가 잔뜩 끼어 있고 벽과 창문 주위를 담쟁이넝쿨이 휘감고 있으며 집 위 편 테라스에는 코앞에서 물줄기를 감상이라도 하려는 듯, 나무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아, 이것이었구나.” 사소하지만 유쾌한 것. 가볍지만 설레게 하는 것.



비록 빳빳하게 다려입은 하얀색 반바지에 폴로셔츠를 입은 웨이터의 칵테일 서비스는 없었지만 남의 눈치를 전혀 살피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자유가 있었다.




뤼베롱 《이방인》 의작가 알베르 카뮈의 무덤이 있는 곳. 마을 전체가 ‘뉴트럴’ 색감의 천국이다. 이제야 나는 알록달록한 천과 물건들은 숱하게 널렸지만 정작 원색의 꽃무늬 옷을 걸친 여자들이 이 프로방스 안에서 왜 눈에 띄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이미 색은 사방 천지에 깔렸었던 것이다. 하늘과 숲에서, 꽃으로 뒤덮인 벌판과 건물의 창문 틀에서, 테이블보에서. 인간은 겸손한 중간색으로 이 화려한 흥분들을 눌러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손으로 직접 염색하고 만든 모노톤의 커다란 천 가방들, 프로방스의 젊은 디자이너 작품이라는 카키와 베이지색의 리넨 원피스와 블라우스, 자연 색깔을 소재로 한 침실용품들, 두툼한 옥스퍼드 천에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납작한 신발들.



야외카페, 해가 서서히 기울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를 에워싼 공기, 몸에서 모든 긴장을 날려보내는 화사함, 누군가의 일상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소매 없는 원피스를 입은 내 몸에 햇살 대신 언덕 위의 바람이 선선히 와 닿기 시작한다.




<아를>

춥다. 도대체 이게 웬 천재지변인가. 내가 기대했던 아를의 첫 방문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어쩌면 빈센트 반 고흐가 심어준 낭만적인 선입관에 모든 것을 내맡겼는지도 모르겠다. 반 고흐가 거닐던 고즈넉한 골목길 카페에서 와인 한 잔 마시며 그의 예술적 영감과 인간적 고뇌를 공감했다. 맞아, 분명히 미스트랄이 온걸 거야. 이렇게 침대에 누워 창문 너머 하늘만 쳐다보다 가겠구나. 아를에 대한 모든 호기심이 정지 상태가 되었다. 나중에 얼마나 큰 기쁨을 주시려고 하필이면 나를 특별히 지목(몸살)하신 걸까.



역사는 현재를 만든다. 아를에서 하루만 지내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오묘하고 복합적인 색깔을 지녔는지. 로마의 유적을 배경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상점 쇼윈도에는 스페인의 화려한 플라멩코의상이 보란 듯이 진열돼 있고, 프로방스의 전통적인 식당에서는 검은색 차도르를 온몸에 걸친 이슬람 여자가 유창한 프랑스 어로 음식을 주문한다.



관광명소가 표시된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도 번거로워졌다. 이렇게 걷다 보면 만나고 싶은 것들이 저절로 나타나지겠지. 낡고 왜소한, 그러나 비슷비슷한 이웃들 사이에서도 왠지 모를 광채가 나는 벽돌집 하나를 발견했다. 허름하게 부서진 담벼락, 틈새가 벌어진 돌계단, 긴 세월의 연륜이 묻어나는 창문틀. 저 평범한 2층짜리 회색 돌집에 왜 이끌리는지 이유도 모른 채 다가갔다. 몇몇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한 발짝 한 발짝 앞을 향해 가면서 나는 작은 나무의자 위에 온후하게 얹힌 노란색 그림을 보게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이다. 아를에서는 ‘빈센트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다.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과 태양을 찾아 아를로 향했던 반 고흐의 절절함이…. 몽마르트르와 센 강을 뒤로 하고 프랑스 남부의 고적한 도시 아를의 기차역에 내렸던 서른다섯 살 화가의 벅찬 가슴을…. 아를에 온 지 1년도 안 되어 결국 삶의 평정을 찾지 못한 반 고흐는 점점 극도의 신경쇠약과 광기에 빠져든다. 그리고 1888년 12월 23일, 오랫동안 꿈꿔온 ‘화가공동체’의 목적으로 초대한 폴 고갱과 예술적 언쟁을 벌이다가 면도칼을 집어 들어 그를 위협하고 자신의 왼쪽 아랫부분을 베어내고 만다. 피해망상과 환각 증세까지 있는 반 고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머리카락이 붉은 미친 사람’으로 불리며 이웃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경찰은 그의 ‘노란 집’을 폐쇄한다. ‘천재의 정신적 방황’보다는 ‘미친 사람의 광기’쪽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결국, 반 고르는 아를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생레미의 정신병원으로 갔다.




박물관에 걸린 수백 점의 풍경화들이 지금 이 순간 하나를 어떻게 대신할 수 있겠는가. 찰나가 주는 감동의 정도는 그만큼 푸짐하고 아찔하다.

몸 하나 겨우 들어설 정도로 좁은 나선형 계단을 빙빙 돌며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땀이 흐르고 호흡이 다소 가빠지며 허벅지가 뻐근해져 왔지만, 계단이 끝나고 지붕 위로 나간 순간, 이 모든 것들은 단숨에 날아갔다.




사회에서 받은 특혜와 이름 앞의 타이틀을 훌훌 벗어던진 채 다시 맨손이 되어 세상과 마주하고 나니 그 뒤에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알알하도록 대성통곡을 하고 나니 그제야 가슴 한구석을 누르고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다.

두 끼를 해결하기 위해 호텔 앞에 두 번 나갔다 온 것이 오늘 내가 움직인 전부다. 온종일 침대에서 버둥거려도 절대 지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나 오늘이 지나면 집중 폭격을 맞은 내 에너지도 다시 꿈틀거릴 것이다.



정문에서 입장권을 산 후 백여 미터를 걸어 들어가는 동안 나는 서서히 안식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반 고흐의 그림들이 부서진 돌담을 따라 쭉 걸려 있고 그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다. 세상을 떠나고 원 없이 태양과 하늘을 만끽하려는지 반 고흐의 동상이 마당 한편 초록색 나무들 곁에 호젓이 서 있다. 지치고 상처받은 그가 짐 가방을 들고 이 길을 처음 밟았을 때 상상이나 했을까. 120년 후, 세계 곳곳에서 찾아든 사람들이 요절한 화가의 흔적을 쫓아 이렇게 똑같이 돌 바닥을 걷게 된 줄을.



작품 감상이나 지식을 습득해야 할 의무가 없으니 하염없이 마음을 비우고 꽃과 식물들의 자태를 구경하거나 ‘ㅁ’자 형으로 이어진 복도의 둥근 천장에 시선을 두면 된다.



대신, 건물 안 서점에 들어가 책과 엽서들을 보고 뒷마당으로 나가, 라벤더가 한가득 심어진 밭을 거닐며 담벼락에 전시된 반 고흐의 모작그림들을 감상했다. 그러다가 푸른 하늘 밑, 양지 바른 곳에 제대로 자리 잡고 앉아 해를 쪼였다.



삶 자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삼나무와 라벤더와 양귀비에 빠져들고, 밀밭과 포도밭에 미쳤으며, 별이 반짝이는 시골의 밤을 사랑했던 반 고흐. 발작과 우울증을 거듭하면서도 들판에 나가 앉아 붓을 놓지 않았고 그의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에’ 완성했던 외로운 천재화가. 나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에 감사하고 있다. 병원을 떠난 지 1년 만에 결국 권총자살로 3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이곳에 정열과 인내 그리고 신념을 심어 놓았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폴 세진느의 작품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프로방스를 떠나서도 내내 그 잔상에 시달려야 했었다.


어느 방향을 바라봐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는 반 고흐의 빛과 태양과 들판이 있다. 바흐의 첼로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이 울려대고 푸치니의 아리아가 노란색 해바라기 속에 젖어든다.

인간에게 주어진 평등한 혜택이자 산물인 ‘여행’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다.





<액상 프로방스>

“위, 위 네, 네”

액상 프로방스 최고의 관광자원은 바로 백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폴 세잔느였다. 네덜란드 출신인 반 고흐가 딱 1년 3개월 거주한 사실 하나로 아들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면, 엑스에서 태어나 자라 학교에 다니고 후에 파리에서 돌아와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향과 함께 한 세잔느의 경우라면 얼마나 보여줄 유적지와 들려줄 비화도 많겠는가? 내가 여기 온 가장 큰 이유도 단지 미라보 길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악착같이 일하는 것보다 여유로운 식사가 더 중요한 프로방스 사람들. 그들의 뚜렷한 인생철학을 배우려고 세계 방방곡곡에서 몰려든 사람들.



반들반들하게 닳은 마룻바닥 위에는 세잔느가 사용했던 그림도구와 가구들이 먼지에 쌓인 채 놓여 있다. 나는 카메라를 몰래 꺼내 겨우 한 컷을 찍었지만 엄격한 통제에 걸려 다시 집어넣었다.



프로방스의 전형적인 하늘 색깔. 저 파란 하늘만 보고 있으면 인생이 우울해질 틈이 없겠다. 절망이 벼랑 끝에서 유혹하다가도 투명하고 맑은 기운에 놀라 줄행랑을 칠 것만 같다.



거리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이벤트조차 절대 평범하지 않다. 프로방스에서 만난 일상의 색채들. 쇼윈도와 화병과 테이블보. 포스터의 글씨와 간판의 디자인들. 비누의 레이블과 빵 포장지. 딱 붙는 블루진에 납작한 신발을 신은 여자들의 상큼함. 박물관과 미술관의 독특한 기획전들. 부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연출되지 않은 종합공연패키지다. 입장료는 없고 골라보는 재미도 있다. 색소폰과 통기타의 재즈 연주 팬터마임 주인공에게 넋을 잃었다.





<라 시오타>

사진 한 장의 힘은 백 마디의 설명보다 더 생생하다.

라 시오타의 일요일 한낮은 르누아르의 수채화처럼 청담하다.

“유화는 안 해요. 이곳의 밝은 빛과 어울리지가 않아서. 라 시오타에 살다 보면 저절로 그림이 그리고 싶어지죠.”



프로방스는 기다림의 연속행진이다. 자리를 배정받으려고 어슬렁거리는데 2분. 웨이터가 메뉴를 갖다 주는데 5분. 그와 눈이 마주치는 데 5분. 눈이 마주친 웨이터가 내 자리로 와서 주문을 받기까지 5분. 음식이 나오는데 10분. 다 먹고 커피 한 잔 시키려고 웨이터와 다시 눈을 맞추는데 10분. 커피가 나오고 치워지는 데 각각 10분 ‘계산서 주세요!’라는 말 한마디를 하려고 웨이터와 또 눈을 맞추는데 5분. 계산서를 갖고 오는데 10분. 쏜살같이 계산서만 놓고 도망간 웨이터를 다시 부르는데 10분. 카드 기계를 갖고 오는 데 10분. 결재하는데 1분. 현찰일 경우 거스름돈이 오기까지 대략 10분이 더 걸린다.



프로방스의 식당 철학에 길이 들여질 만도 하련만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누구 하나 불평을 하거나 큰 소리로 웨이터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 카드에 사인을 끝내기가 무섭게 굳은 표정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시위였지만 “메르시 보쿠 마담, 오 르부아” 웨이터가 환한 얼굴로 미소까지 짓는다. 할 수 없이 나도 웃어줬다. 하긴 급한 약속도 없지 않은가.



하늘은 맑고 태양은 강렬했으며, 지중해의 수평선은 평온했고 프로방스의 공기는 싱그러웠다. 나는 완벽하게 쉬었다.



“내 마음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순간들은 바다 위에 내리는 저녁들과 황혼에서 달이 뜰 때로 옮겨가는 시간이다. -알베르 카뮈의 <여행일기 > 중-





<니스>

니스, 그저 걷기만 할 때는 길 위의 조용한 단역에 불과하지만 일단 뛰고 나니 무대에 올라간 느낌이다. 기후가 좋은 곳을 찾아 세계 방방곡곡을 뒤지는 데 가장 일가견이 있는 민족을 꼽으라면 단연 영국인일 것이다. 조약돌로 한가득 채워진 니스의 해변은 18세기 중반까지 무심하게 버려진 곳이었다. 영국인들은 남의 나라에 놀러 오면서도 탁월한 운영능력을 발휘했다. 니스 시에 아름다운 산책로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복숭앗빛과 핑크빛이 섞인 부드럽고 편편한 돌 바닥 위에는 자전거족과 러너들을 위해 흰색 줄이 그어짐으로써 행동의 편리함이 보장되었고, 바다를 향해 있는 흰색 벤치들은 앉고 싶은 사람들이 언제든 엉덩이를 붙이며 다리를 쉴 수 있도록 넉넉하게 설치되었다. 자연의 관대한 치마폭 안에서 잠시지만 현실의 돌을 내려놓고 도원경(桃源境)의 흥취를 누려보라는 배려다.



프로방스에서는 아무리 구석진 식당에 가도 맛에 있어서만큼은 배신당할 우려가 없다.



여행 기록과 사진 정리 등이 잔뜩 밀려 있다. 답답하고 추레한 방안이 일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창밖을 내다보며 감상에 빠질 시간을 절약해주고 뽀송뽀송한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싶은 욕망을 눌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수첩과 책과 지도 등 낯익은 물건들이 다 나왔지만 뭔가 허전하다. 지갑이 없다. 외국에서 신용카드 없이 여행한다는 건 마치 보험이나 연금 없이 노후를 맞이하는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방한 준비를 철저히 해온 주변의 다른 손님들은 두꺼운 패딩코트에 털목도리까지 둘둘 말고 있다. 찬바람은 이제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며 위세를 자랑하고 있다. ‘오늘만큼은 예쁜 옷 차려입고 촛불 있는 레스토랑에 앉아 와인 한 잔 마시며 최고의 정찬을 먹도록….’ 한 가지는 분명하다. 2008년 생일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1907년, 아내와 세 아들을 끌고 지중해 부근의 고적한 중세기 마을인 카뉴 쉬르 메르로 이주했다. 10여 년째 류머티즘에 시달려온 그는 따뜻한 기후가 절실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을 이루고 싶었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그의 아내는 텃밭을 일구며 온갖 채소를 키웠고 마당에는 장미와 올리브와 과일나무들을 심었다. 꽃이 여물면 그것을 따다가 부케를 만들었으며 올리브가 제맛을 낼 때쯤에는 신선한 요리를 했다. 그렇게 12년을 살았다. 비록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손가락에 붓을 동여맨 채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르누아르의 캔버스는 더 밝고 투명해졌으며 삶을 바라보는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했다. 그의 집은 이제 르누아르 박물관이 되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숲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정원을 지나 별채로 쓰였을 건물 가까이 가자 돌벽에 비스듬히 세워진 캔버스 속 여자가 너무나 낯이 익다. 길쭉한 얼굴과 치켜 올라간 눈. 그 당시 르누아르 아틀리에의 단골손님이지 서른다섯 살에 요절한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누드 그림이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마주치는 커다란 흑백사진 한 장, 르누아르 부부 사진.

해가 비추는 풀밭에서 피크닉을 하는 르누아르 가족의 그림과 그리고 꾸부정한 어깨에 붓을 손가락에 동여맨 채 그림을 그리는 르누아르의 초상화.

공기는 파삭파삭 소리가 나듯 상쾌하고 바람은 햇살의 온기 앞에서 주춤거린다.



안소니 홉킨스가 열연한 영화 속 피카소는 누구보다 탁월했지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인간’이었다.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파괴자이기도 했다. 남프랑스의 이미지와 스튜디오에서의 열정적인 작업모습, 피카소는 ‘허점 많은 개인’이 아닌 ‘완벽한 천재’ 코트다쥐르의 바다와 태양을 원 없이 누렸던 노년의 피카소. 그의 낙서 한 개도 ‘위대한 기록’이 되고 사소한 발자취 하나도 역사의 중심이 되고 있다. 1946년에 찍힌 빛바랜 흑백사진들 앞에 섰다. 65세의 노장과 19세의 젊은 애인인 프랑수아즈 진로와의 다정했던 한때. 마루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 길게 누워 휴식을 취하는 피카소.


자신이 구축한 것들에 금세 싫증을 내며 끝없이 실험을 계속했던 피카소는 ‘아트’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모든 분야에 관심을 뒀고 실행했다. “나에게 박물관을 통째로 달라, 그러면 내 작품으로 다 채워줄 것이다.” 마지막 방으로 들어섰을 때 길쭉한 벽 한 면이 온통 접시들로 가득하다. 사람의 표정, 웃고 울고 화내고 찡그리고 행복해하고 성내고 수줍어하고 토라진 얼굴이 52개의 화려한 도자기 위에서 살아 있듯 꿈틀거린다.



“나는 내가 본 것만큼 그리지 않는다. 그것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그린다.”-피카소-




<칸(Cannes)>

바다를 마주한 벤치에 할머니가 앉아 있다. 그녀의 늘어진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 있다.

여자들이 태초의 ‘이브’를 꿈꾸듯 바닥에 등을 대고 하늘을 향해 누워 있다. 공공장소에서 합법적으로 ‘유방’을 드러낼 기회를 원 없이 즐기고 있다. 칸의 여자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대담성마저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자연스럽고 자유로워 보인다.



가이드북을 펼쳐들고 일일이 찾아다닐 생각도 없다. 그냥 편하고 싶다. 칸의 공기가 그렇게 만든다. 테라스가 있는 하얀색 맨션들을 바라보며 언젠가 저곳에서 맞이할 멋진 휴가를 상상한다. 칸영화제 행사장 계단의 레드카펫 위에서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5월의 밤을, 투명한 바닷물 앞에서는 늦은 밤까지도 해가 지지 않는다는 7월의 뜨거운 바람을 떠올린다. 잘생긴 야자수가 모래밭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아이들은 온몸에 모래를 묻히며 집짓기를 한다. 어른들은 책을 읽고 노인들은 수평선을 향해 앉아 있다. 개들은 주인의 뒤를 느리게 따라가고 해변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빛나는 정오다.



니스의 올드 타운에서는 모든 것들이 솔직하고 담대하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모두가 보헤미안이 된다. 닫혔던 감성들이 자유로워지고 움츠렸던 신경들이 유연해진다. 나는 그렇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푹 빠져 나풀거리듯 골목 사이를 누볐다.





<모나코(Monaco)>

"모나코 익스프레스! 모나코 익스프레스!“

해변에서 일광욕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바늘과 바다, 언덕 위의 성당과 형형색색의 가게들, 가파른 골목과 야회카페. 이제는 오히려 너무나 익숙해진 탓에 일상으로 다가온다.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는 것도 싫증이 났다.



간사하게도 여행의 끄트머리에서 ‘여행’이 싫어진 것이다. 이방인이기에 느낄 수 있었던 ‘호기심’보다는 거주자가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 더 좋다. 갑자기 발길을 돌렸다. 니스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낯선 곳으로 여행 와서 다시 낯선 곳을 배회할 여유가 없다.



‘마흔일곱이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알아버린 나이, 고매한 명분이든 여자든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나이. 쉰 살이 가까워지면 매일매일 늙는 게 두렵고 화가 나 죽음보다 치명적인 우울증에 걸릴 거라 여겼었다. 뜀박질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주제에 그만 또 다른 희망사항을 품고 말았다. 아, 이제 돌아가면 수채화를 다시 배워야겠다.



마티스, 1918년, 파리에서 니스로 이주하면서 인생의 숨표를 찍으려 했던 마른 아홉 살의 마티스. 니스에 안착하고 니스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36년간 그의 곁을 맴돈 것은 아방가르드와 파격이 아닌, 고전과 자연으로의 회귀였다. 삶에 대해 유쾌하고 간결한 접근이었다. 코트다쥐르의 햇살과 지중해의 푸근함은 그에게 밝음의 미학을 선사한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모조지를 위해 놓고 수십 장을 베껴가며 따라 해 보려 했던 작품들. 마티스에 빠져 들여 살던 그때, 자신의 재질이나 능력을 완전히 무시한 채 덜컥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붓 한 자루, 데생연필 한 개도 다시는 손에 들지 않았다.



몸이 극도로 불편해진 마티스가 더는 손에 붓을 들고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 대신 선택한 방법, 바로 ‘가위로 그린 소묘’ 신기하게도 색종이의 오려진 선들은 더 뺄 것도 보탤 것이 없는,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하다.



달력과 엽서, 포스터와 연필까지. 한가득 손에 쥐고 나오면서 괜히 기분이 들떴다. 마티스는 하늘나라에 가서도 이승 사람들에게 ‘봄날의 가벼운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샤갈,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의 피가 흘렀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파리로 이주했고 러시아 혁명 시절에는 고향에서,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나치를 피해 미국에서, 그리고 말년에는 남프랑스의 생 폴에서 여생을 보냈던 샤갈. 소용돌이치는 세계사에 고스란히 몸을 담가야만 했지만, 그의 감성은 행복과 낙천성에서 결코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조차 그에게는 고난이 아닌 간직해야 할 삶의 뿌리였다.



여행의 끝은 다른 떠남의 시작이기도 하다. 아쉬운 추억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다.



푸른색의 영롱함이 천지를 뒤덮었다. 마티스, 피카소, 샤갈도 모두 저 하늘과 바다를 보며 그들만의 천국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프로방스



“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꽃들이 펼쳐져 있다.” -앙리 마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