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종에 지니인 것
박완서
아이들 큰 엄마가 전화를 했다. 언제나 전화를 거는 쪽은 나였고, 전화 통화를 하더라도 언제나 나 혼자 마냥 지껄이다 끊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형님이 몸소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형님은 나와 전화통화를 할 때면 언제나 인기척 없이 나의 말을 듣고만 있다. 내가 형님에게 듣고 있냐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형님은 듣고 있다며 계속 얘기하라는 말만 할뿐이다. 형님은 그저께가 증조모님 제사였는데, 어찌 미리 자신에게 기별이라도 하지 않았냐며 몹시 언짢은 기색을 보이신다. 형님도 잊어버렸으니, 이번 제사는 못 지내고 넘어간 셈이다. 형님은 집안의 대소사를 며느리에게 믿고 맡기지 못한다. 그러니 며느리도 자신의 친정집 대소사는 챙기면서도 정작 시댁 증조모님 제사는 잊고 넘어가기가 다반사인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제사를 사대까지 지낼 필요 없이 이대까지로만 줄이는 것이 어떠냐고 형님께 말씀드렸다. 가정 의례준칙에도 이대까지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는 예까지 들어가며 설명 드렸다. 나는 내가 형님께 알려 드리지 않으면 형님이 제삿날을 잊어버릴 줄 몰랐다. 나는 다만 제삿날을 사흘이나 나흘쯤 앞두고 나박김치 담으러 갈 날을 의논드린다는 게 자연히 제삿날을 아는 척하는 구실을 했을 뿐인데, 형님은 나만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숫자 외우는 일을 잘 못한다. 얼마 전에는 외출해서 집에 늦게 들어갈 것이라고 딸자식들에게 전화하려고 했다가 집 전화번호를 잊어서 한참을 고생했던 적도 있다.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나 요상하게 춤추는 불빛들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환상 같기만 했다. 아이들은 전화도 안 걸고 늦었다고 나에게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나는 전화번호를 잊어버려서 전화 걸지 못했다는 말은 차마 하기 싫어 그냥 잠자코 있다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딸 창희가 방까지 쫓아 들어와 오빠 죽은지가 벌써 칠 년이나 넘었는데, 아직까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서 살아 있는 딸들마저 이렇게 마음 고생만 시키냐고 퍼붓는 것이다.
나는 한번도 죽은 창환이의 목숨을 제까짓 딸년들과 비교하거나 바꿔치기 한적이 없다고 형님께 말했다. 창환이는 전무후무한 하나뿐인 창환이고,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이 잘났기 때문이다. 하긴 내딸을 나무랄 것도 없다. 내가 창환이를 잃고 나서 친척이고 친구고 멀쩡하게 아들 잘 기른 사람들이 나에게 괜히 미안해했다. 아들 자랑하다가도 내 앞에서는 입 다물고, 장가보낼 때 나한테 청첩장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다. 나랑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 동창 명애만 하더라도 우리 창환이 죽었을 때, 그렇게도 슬퍼했으면서 막상 자신의 아들이 장가갈 때에는 나한테 쉬쉬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렇게 창환이의 죽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을 당하는지 형님께 물었다. 나는 명애의 아들 결혼식에 가서도 환하게 웃으며 늠름하게 행동했다. 그런 여느 아이들은 창환이와 비교도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민가협 엄마들 덕에 의식화 된 덕분도 있어서 우리 창환이가 산 법관 보다 백배는 잘나 보였던 것이다.
형님 역시 우리 큰조카 창석이 결혼식 때 나에게 큰형님과 똑같은 예단을 해 오라고 며느리에게 시키고, 폐백 들일 때도 형님과 나란히 앉혔지만 두 과부가 나란히 앉아 있던 일도 다소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창환이를 창석이와 비교하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창석이는 80년에 대학 들어가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알바 없이 공부만 팠다는 사실에 인간성이 의심스럽지만, 우리 창환이는 창석이 보다 삼년 뒤에 대학에 들어가서 캠퍼스의 최루탄 냄새를 괴로워했다. 창환이는 운동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단순 가담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나도 억울했다. 그놈의 쇠파이프가 앞장 선 열렬한 투사들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우리 창환이를 택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창환이의 죽음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집단의 열정 속으로 휩쓸리는 것이었다. 형님도 알다시피 백만학도가 창환이의 장엄한 장례식에 찾아와 창환이를 열사로 떠받들었다. 중요한 건 창환이가 운동권이었는지 아니었나가 아니라 죽음까지 횃불로 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시대가 깜깜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이 하나도 안 중요해지고, 하나도 안 중요하게 여겨 온 것이 중요해 지게 되었다. 증조모님의 제사도 중요하지 않아진 일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형님은 나에게 제삿날 말고 또 중요해진 게 뭐가 있느냐고 묻지만 그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제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형님께 우리가 참 모진 세상을 살아온 것도 같다고 얘기하자 형님은 여지껏 꿋꿋하게 잘 버티기에 잘 극복한 줄 알았더니 이제 와서 웬 약한 소리냐고 한다. 그러나 정말 힘들었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인지 모른다.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 명애가 나를 고등학교 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동창의 달동네 집으로 데리고 갔던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아들은 몇 년전에 차사고를 당해 뇌와 척추를 다친 후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겹쳐 반송장의 상태로 단칸방에 누워 있었다. 오랜 병구완의 끝이라 가산도 다 탕진한 상태에서 그 친구는 우리 동창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파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명애는 죽는 것 보다 못한 꼴을 위로 받으라고 나를 거기까지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 아들에게 우리가 사간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이고 난 후, 그 친구는 아들의 몸에 욕창이 생길까 봐 널찍한 요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을 공기돌 굴리듯이 이리 저리 굴렸다. 그 장대한 아들을 자유 자재로 굴리면서 바닥에 닿았던 부분을 마사지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 친구가 하는 것을 도우려고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환자가 이상한 괴성을 질렀다. 여지껏 흐리멍텅 공허하게 열려 있던 환자의 눈이 난폭해 질 때 우린 손이 오그라붙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때 이전까지는 아들을 악다구니 받친 태도로 대하던 친구의 표정에서 씩씩하고 부드러운 자애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별안간 그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러워 한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난 그때까지 참고 참아 왔던 울음을 복받치는 대로 쏟아부워 버렸다. 난 그 울음을 통해 기를 쓰고 꾸민 내 자신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요 며칠 동안은 울고 싶을 때 우는 낙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의 내 얘기를 듣고 형님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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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글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었는지, 몇번을 읽었다.
박정자의 모노 연극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