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련 瑚璉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선집

류창희 2020. 11. 5. 21:54

 

 

 

호련 瑚璉

제 16회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

 

2020년 10월

 

 

 

 

수필을 벗 삼고

수필을 스승 삼는다.

 

 

류창희 柳昌熙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고,

부산시립도서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논어강독講讀을 하며 노닐다가

'코로나 19'로 잠정 언택트하다.

2001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매실의 초례청- 현대수필문학상.

문화체육관광부 표창(2010)

 

논어에세이 빈빈- 2015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16구름카페문학상’ - 선집 호련이 있다.

rch5606@hanmail.net

 

 

 

 

 

 

 

 

문학인은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불을 밝힌다.

무디어지는 펜촉을 어루만지며

감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수상의 영예로 이어질 때

'구름카페 문학상'은

자기가 갈고 닦은문학세계에 대한 보상이며 보람된 일이 된다.

- 윤재천 (한국수필학회 회장)

 


26 구름카페문고  /  호련 瑚璉

류창희 에세이   /   문학관 books


 

호련 瑚璉

뼈와 살 사이에 있는 틈을 젖히는

칼 다루는 법을 익히고 연마하여,

글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부드러워서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며,

복잡하기는 하지만 재미있어 읽어볼 만한

포정해우庖丁解牛같은 글을 쓰고 싶다.

- 류창희의 「욕파불능 欲罷不能중에서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류창희 지음  /  선우미디어 2019

 

수필의 돛을 세운 항해에서

 

나만의 패턴을 담은 수의 한 벌 마련하고,

'쓰다가다' 그거면 됐다.

혼백의 닻을 내리는 그날까지,

타타타~ 메타!

 

 

 

논어 강독을 20년 넘게 하고 있는

저자 류창희의 두 번째 '논어에세이'다.

 

2,500년 전의 논어구절을 접목하여

문학적 <메타논어>로 완했다.

 

지은 책으로 <매실의 초례청> 

논어에세이 <빈빈> <내비아씨의 프로방스>가 있다.

 

 

 

 

 

 

 

 

수필을 벗 삼고, 수필을 스승 삼는다. 

글은 나를 감싸주고 품과 격을 입혀주는 혼이다

글의 스타일도 빼어나게 잘 쓰기보다 타타타तथा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여 眞如하게

한편의 수필답게 잘살기를 꿈꾼다.




봄의 질주



류창희





스무 살 무렵, 내게 봄이 올 것 같지 않았었지요. 그해 봄날, 안톤 체호프의 연극 벚꽃동산을 같이 보았어요. 우린 그때부터 화사한 벚꽃동산을 꿈꿨을지 몰라요.




모든 걸 우물 속에 내동댕이치고 떠나는 거야.

그리곤 바람처럼 자유로워지는 거야.

너무 멋져.

나의 영혼은 밤이건 낮이건 어느 때를 막론하고

형용할 수 없는 예감에 넘쳐있어.

나는 행복을 예감해




- 체호프의 희극 벚꽃동산대사 중에서















-






지난여름, 독일에서 자동차를 렌트했어요. 남프랑스 지역 스물세 개의 야영장을 돌면서 원 텐트! 투 피플!” 줄곧 두 마디만 했죠. 그는 버킷리스트 중에 190킬로 이상 밟고 이태리 보르미오 스텔비오패스 그린젤패스와 스위스의 푸르카패스를 달리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멈춤이 좋아요. 풀꽃을 보는 것이 좋고, 텐트 안이 좋고, 미술관이 좋고, 꽃그늘이 좋고, 빈 의자가 좋아요. 전생에 숨차게 달렸었는지 쉬어도 쉬어도 쉬고 싶어요.

능소화 빛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노브래지어와 맨발로 니스해변을 걷고 싶었어요. 그는 베르동 협곡으로 들어가서야 숨 고름을 하더군요. 질주하는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되고 싶은가 봐요. 알프스를 향하여 탈출하듯 나폴레옹가도를 달렸어요.















프로방스는 마치 오픈카 전시장 같았지요. 클래식 오픈카를 운전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태양은 가득히주인공들처럼 보였죠. 우리는 손바닥만 한 햇볕도 가리는데 그들은 뜨거워도 화끈하게 노출하더군요. 태양의 신, 신전수준으로요. 올드 오픈카일수록 드렁드렁 멈춰볼까 말아볼까? 연륜의 쇳소리가 더 우렁찼어요.

왜 독일에서 차를 렌트하느냐고요? 독일은 고속도로를 쌩쌩 달려도 속도위반 벌금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는다는군요. 세계만방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저지른 독재를 사과하는 의미라는데, 정말 그럴까요? 결국, 독일 차 BMW나 벤츠가 잘나간다는 광고 효과를 얻어내니, 아직도 아우스비츄의 가스실처럼 독식으로 여겨집니다.

속도감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어요. 지그재그 길을 치고 내려오던 그들이 헬멧을 벗는 순간, 놀랐어요. ‘길 위에서 죽어도 좋아의 폭주족은 5~60대가 넘은 장년들이었어요. 남의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는 그들이 부러웠어요.

형형색색의 자동차와 공중에 매달려서 서서 앉아서 누워서 엎드려서, 날고 달리는 기구들. 경비행기 패러글라이딩, 카이트서핑, 요트 오토바이 자전거 스키 등을 타고 생의 마지막 순간처럼 질주하는 별별 사람들. 그 대열에 합류하여 우리는 꿈결처럼 알프스령을 넘었지요.


















벚꽃동산에서 도끼 소리가 들리는군요.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했던가요. 사나흘 고뿔 한번 앓고 나면 봄꽃은 지죠. 그와 나, 어느덧 화갑(花甲)입니다. 다시 봄. 𝄇, 도돌이표.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그곳에도 바람이 불더라구요. “그대여! 그대여! 그대여!” 봄바람 휘날리며,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군요, 알 수 없는 친구들이 많아요, 흩날리는 벚꽃잎이 많군요, 좋아요~벚꽃엔딩’. 연분홍 시절이 막을 내리니 다시 촉촉 차오르는 연둣빛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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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좋은수필'  2016-4


<이달의 화보>에 실렸습니다


스캔 떠서 올리는 것 처음해보니

한 나절 절절맸습니다



벌써, 봄이 연둣빛입니다.



 





 





2015년 세종 문학나눔 우수도서선정

논어에세이 빈빈

류창희 지음

도서출한 선우미디어





 






<<논어 에세이 빈빈>> 이

2015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논어수업을 하면서

써온 글들입니다

수업을 핑계삼아

제 공부를 알뜰하게 하고 있습니다

 

각 도서관에서

'논어 에세이'

수업을 들어주시는 선생님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해서 읽어주시는 독자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를 응원해주시는

가슴 따뜻한 님들

모든 님들의 덕분입니다


鞠躬,

국궁으로 인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들키고 싶은 비밀로 간직하기에는

제 마음이 벅차

지금 '자랑질'하는 중입니다

용서해 주실거죠?

 

류창희 드림

 

 



* 선정된 도서는 1천만원 (논어에세이 빈빈 970권)을

전국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사회복지시설 등에 배포 예정입니다

 

 

 

[한줄읽기] 조선일보


입력 : 2015.01.24 02:57




	[한줄읽기] '고대 로마제국 15000킬로미터를 가다' 외


논어에세이 빈빈(류창희 지음)=누군가 사주는 비싼 밥을 먹다가 공자가 말한 '거친 밥을 먹어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논어의 지혜를 빌려 일상의 삶을 이야기한다. 선우미디어, 1만2000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조선일보 한줄읽기 100자 평에 내책

- <논어에세이 빈빈> 류창희 지음 - 이 실렸다

실어준 기자께 고맙고 그리고 신기하다

기사를 복사해다 이렇게 올리는 법을 시도해본다

 

 

 


 







 












 

 

 

 

 

책 이미지 복사하는 법은 잘 모르겠다

 






논어 에세이 ,    류창희 지음

 

빈빈    彬

 

 



 

 

 

 

 






그렇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

안연처럼 공부하다 죽을 염려는 절대 없다.

이미 단명할 나이가 지났으니, 마음 놓고 공부해도 된다.

파릇파릇 이팔 청춘에 죽을 만큼 피를 토하며 아파도 보았고

매운맛의 시집도 살아보았다.


지난 날 칡뿌리 좀 씹어본 덕분에 ....

무슨 공부든 마음만 먹으면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시간,

나는 지금 '能久'의 시간을 맞이했다.

곳곳에서 마주치는 모든 일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

그들은 내게 스승 아닌 것이 없다.

세상은 온통 欲罷不能(욕파불능)의 도가니다.



-학운에 중독되다 중에서-


 





 

 

 

 

 

 

 

 

간결하고도 깊이 있는 절제미가 느껴지는 수필의 향기!

<<논어>>를 오랜 세월 읽고 가르치며 손에서 놓지 않는

저자의 논어 사랑 완결편일 수도 있는 에세이를 통해

리는 평범함 속에 감추어진 일상 도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논어를 제대로 읽고 공부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싶은 순수한 갈망에 행복해진다.

어려운 고전을 자신의 생활이야기로 쉽게 플어쓰고 재해석한

작가의 빼어난 글 솜씨가 읽는 이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더해준다.

이해인 (수녀 시인)



 

 

 

 

 

 



 

 

출간했습니다

 

동지섣달 꽃본듯이

 

 

어여쁘게 살펴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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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에세이 빈빈> 리뷰를 올립니다

손편지, 이메일, 축전, 문자, 카톡입니다

이름과 소속은 개인정보라 생략합니다

축하전화 생략입니다

 

리뷰 -1.   1만 원짜리 넘는 음식 대접받으면 설사한다고 해서 청국장 끓였다.

류창희 선생님이 우리를 찾아줘서 아주 감동적이다.

<옛날의 금잔디> 읽으며 울었다.

 



2.   격조 있다. 한참 재미있게 읽다가 뚝 그치는 느낌. 2집이 기다려진다.

 


3.  서문만 읽고 류창희 선생, 재주 있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이력으로 일하는지는 몰랐다.

단하다. 어찌 논어 수필 쓸 생각을 했는지.

나도 논어 한두 줄은 읽은 사람이라서.”

사실 선생님은 고전 한문 수필의 대가이시다.

 “선생님께서 제도권에서 하시는 선생님이시지만, 저는 민초들의 이야기,

선생님 댁이 바라보이는 개울건너에서 길 닦느라 풀 뽑고 돌멩이 골라내고 빗자루질하는 이야기

 

 


 4.   고마운 수필

 

 

5.    류창희 회장님,

 수필집 논어에세이 <빈빈> 출판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예전에 함께 근무하던 동료를 40년만에 만나서

송정에서 술을 한잔 하고 왔더니

또 다른 기쁜 소식인 <빈빈>이 와있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잘 읽을께요

 


 

6.  文質彬彬이라 했거늘 글 내용에도

빛나는 구절이 읽는 맛을 돋굽니다.

공부되는 작품집을 잘 읽겠습니다.

겨울철 건강 조심하시고

새해에는 더욱 왕성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감사합니다.

 



7.  색다른 책, 묵직하게 받습니다. 염치없이.

에세이문학 부산 행사 때 자갈치 시장에 서서 버스 안을 쳐다보시던 호리호리한 모습이 새삼 떠옯니다.

류창희 선생니의 속내가  굵고 단단하시리라는 건 흐린 눈, 무딘 감으로도 눈치 챘습니다만

이렇게 예쁘고 조촐하게 '빈빈'을 모아주시다니

우선 마음 호강합니다.

 하필 먼저 눈에 들어온 글이 타계하신 남동생의 그림(?)이라니!

제게 찔려오는 이유가 없을 수 없고

깊은 뜻 알아들을 수 있을지 염려는 됩니다만 기쁨니다.

 



8.  - 제가 짐작하는 바, 남다른 사유와 개성과 열정으로 멋진 삶을 채우시는

창희 선생님^^* '논어 에세이 彬彬' 발간 축하합니다.

 삶에서 길이 기억된 값진 순간을 표제작으로 묶으신

큰 의미가 가족은 물론 독자에게도 뜻깊은 선물인듯싶습니다.

 언제가는 뵐 날 있겠? ㅎㅎ

 부산문화재단 지원금 수혜도 축하드립니다.

거듭 감사로.

 



 9.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귀한 작품들을 읽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을미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10.       류창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지난번 송선생님 소개로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수필집과 "에세이 부산" 여러권을

보내 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일로만 해도, 선생님께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또 다시 선생님의 역작인 "논어에세이 빈빈"을 보니 기쁘고 고마운 마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으며,

또 이렇게 제가 받기만 해도 되는가 하는 송구 스러운 마음 또한 금할 수 없습니다.

저는 문학과 거리가 먼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친구의 영향으로 특히 수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틈틈이 수필집을 읽어오면서

근무지가 바뀔때 마다 그 지방 수필문학회 작품을 접해왔습니다.

제가 부산에 거주한 2년여 동안에는 "에세이부산 문학회"가 펴내는 수필집도 간간히 읽어왔습니다.

사실 저는 훌륭한 저자분들과 직접 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못했으며,

수필가 선생님들은 누구나 살면서 느끼고 간직한 나만의 가슴속 응어리를

유려한 필체로 속 시원하게 풀어내는 것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해외 로밍중이라고 해서 전화를 연결하지 않고 이렇게 짧게나마 이메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선생님께서 소망하시는 모든 꿈 이루시는

보람찬 한해가 되시기 바라겠습니다.감사합니다.




 

11.  지금은 다른 나라에 여행 중이신가요?

좋은 책 한 권 만들어서 감사드립니다.

다른 수필가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책입니다.

그동안의 강의 활동을 이렇게 글로 승화시키다니 부럽습니다.

 서문에 담긴 말씀도 그윽하게 와 닿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수필계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될 것 같아요.

책 만드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어요.

다시 한 번 더 축하합니다.

 

                  

12. - 논어에세이, 출간을 축하해요

울프씨는 어머니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받은 아드님이네요.

<텐프로>,< 통과>. 읽으면서 혼자 웃었답니다.

기발하고 참, 뭐라 표현할 말이 없네요.

쓰고 보니 광고 문구 같네요.

축하하면서, 유선생 새해에 좋은 일 많으시길

기원합니다.

 

 

13.  뜻과 맛과 멋을 갖춘 수필 잘 봅니다

 


14. 

- 안녕하세요?

논어에세이 <빈빈>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매실의 초례청> 책을 내실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제가 주제넘은 참견을 많이 했었는데

그것을 다 수용해 준 류창희 선생님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신 책이 전에보다 더 깊이가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어 선생님이 발전하는 모습이 눈부셔서 흐뭇합니다

훌륭한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대한 찬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이 들으실 것으로

알고 저는 더 붙이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시어 대가의 경지에 오르시길 기원합니다.


 

15   아하~!  이렇게도 읽울 수 있다니~~





류창희수필의 거듭 읽기:

『매실의 초례청』의 비평적 해체와 복원

박양근 (부경대 영문과교수, 문학평론가)

ykpark@pknu.ac.kr



초례청으로의 초대장

류창희 수필가는 누구인가. 그는 드문 이력의 작가이다.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논어를 가르치며 글을 쓰고 난을 치고 서예를 한다. 학예문(學藝文)을 섭렵한다랄까. 평자와 안면이 있다면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매실의 초례청>이라는 작품을 평한 적이 있을 뿐, 그 기억마저 의식의 산 너머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그 때 평자는 류창희의 수필이 언젠가는 문자향을 떨칠 것이라고 예감하였다. 매실즙을 만드는 과정을 신랑각시인 초야 치르기에 대입하면서도 격조 높은 문장과 질박한 어조라는 이중주로 엮어낸 솜씨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 매실즙이 익었는지, 마침내 47편의 수필이 독자를 위한 초례상 위에 차려졌다.

류창희 문학의 초석은 우선 녹녹하지 않은 격조를 지닌다. 어린 시절부터 “자~왈”의 분위기에 이끌렸던 만큼 수필마다 한학의 먹물이 배어있다. 고리타분한가. 그렇지 않다. 묵은 가지의 매화가 더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듯 그의 글은 동양적 감수성과 서구적인 분별성으로 직조되어 있다. 그리하여 다감한 감성을 겸비한 독자만이 『매실의 초례청』에 초대받을 수 있다.

작가의 역량은 무슨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있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세태를 셈하기보다 헤아리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작가는 남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다. 산사 기와가 아니라 “기와 위에서 자라는 세월의 싹”을 헤아리는 시선주기가 표의문자를 해독해온 습관에서 농익었기 때문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의 벗”으로서 수필독자를 위한 첫 서권(書卷)인『매실의 초례청』이 완성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알기위해서는 창작심리에 준거한 해체와 텍스트로의 재복원이 불가피하다.


피(血)의 그리움과 육(肉)의 뿌리 찾기

류창희의 수필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리움으로 꿰어진 주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그리움을 이미지화하면 청아한 달빛이고 고고한 현음에 해당한다. 그 썅겹이미지가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 <아버지의 방>일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방이 없다.”

이것은 <아버지의 방>의 첫 문장이다. 작가는 냉랭할 정도의 단호한 음성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선언한다. 그 없음은 육안으로 살핀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해석해낸 “비어있음” 이므로 찾으려 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빗금>이 등단작이고 <매실의 초례청>이 표제작일지라도 <아버지의 방>에서 더욱 깊은 울림이 번져나는 이유는 악기의 공명상자처럼 비어있기 때문이다. “하늘색 코로나 택시에서 내리는”아버지는 한 올의 연(緣)에 매어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일하는 남자, 가문을 세우는 가장, 자식을 지켜주는 부성과는 동떨어진 바람을 연상시켜준다. 독자는 주목할 것이다. 여기에 숨겨진 본질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이방인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아버지의 방에서 타인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첫 번째 해독하는 이유도 그 숨겨진 모습을 읽어내는 독자만이 류창희의 수필영토로 들어가는 패스포트를 발급받기 때문이다. 수필화자는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려 하지만 반응은 늘 “없다”이다. 소리 내어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호적등본에 이름은 올려져 있으나 실체가 없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눈을 마주친 기억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나의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는 혈육의 방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버지가 그립다. 온화한 마음으로 눈자위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아버지의 방’을 마련해 드리고 싶다. 아직 마음을 활짝 열어 따뜻한 방을 꾸밀 수야 없지만 그 방을 데울 장작개비를 모아보자. 속 좁은 소견머리로 생솔가지면 어떤가. 잘 타지 않아 매캐한 연기로 눈물이야 나겠지만, 자꾸자꾸 군불을 때다보면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날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방> 일부


부재의 회한이 정감의 수필을 잉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매실의 초례청>은 그리움의 울타리로 이루어진 문학적 정원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의 방>에서 태어난 <이월매조>와 <할머니의 축문(祝文)>과 <우담화의 제문(祭文)>은 3대에 걸쳐 전해오는 여성사이다. 여성이 주역이 된 세 작품은 여성이 거치는 비애와 품위와 아픔을 펼쳐내고 있다.

<이월매조>는 ‘평생을 술지게미와 겨겁데기’로 살아온 친정어머니에 대한 글이다. 썼다기 보다 각인되어 있다. 여성이 회상하는 친정어머니는 늘 잿빛이듯이, 그리고 “화투짝이 웬수였다.”는 단문이 어머니의 설움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듯 모녀는 “석삼년을 오지 않는 엄마의 임”을 함께 기다린다. “어쩌면 엄마와 딸이 읍내에 나가 곱슬거리는 불파마를 하고 가족사진 한 장쯤 박아서 아버지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는 고백처럼 작가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딸이다. 작가는 지금 남편과 두 아들이라는 세 남자를 주변에 두고 있지만 그들은 미적 묘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화투짝의 열두 그림에 담긴 희로애락에서 멀찍이 떨어진 삶을 보낸 어머니가 있어서다. 이 사실은 그리움이야말로 작가적 필수아미노산임을 밝혀주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작가는 어머니의 딸이므로 시어머니의 며느리임을 부단하게 자각하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류창희의 스승이다.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단발머리”의 촌티 나는 각시를 “풀꽃여인”으로 부활시켰다. <우담화의 제문>을 읽는다면 그 이유는 시어미에게 바쳐진 열녀 제문이어서가 아니라 변신이라는 문학적 모티프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씨, 말씨, 솜씨, 맵시의 부덕을 고루 다 갖추신 어머님은 “한 치의 어긋남도 못 본 척 넘기지 못하는 성품”이셨습니다. 불호령과 저기압전선을 만들어 며느리들의 기강을 바로 잡으셨지요. 어머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늘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며 마음의 보초를 섰습니다. 심신은 고단했지만 운명처럼 그렇게 어머님과 합이 척척 맞았습니다.

<우담화의 제문>일부


인간은 누구나 사표의 존재를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신앙적 대상이거나 촌수 높은 혈육일 수도 있다. 류창희는 시어머니를 “운명의 합”으로 삼는다. <우담화의 제문>은 죽은 자에 대한 예찬이면서도 고부의 만남, 동행, 사별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때문에 대상의 인품은 오히려 고양되어 간다. 꽃보살이라고 불리는 시어머니는 작가를 “어머님의 며느리”로 교육시키려한다. 등단작 <빗금>에서 “사는 방법도 세습인가”, “시댁은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처럼 “집안의 법도를 동심결 매듭”으로 풀어낸 은유는 그들이 고부간이기 보다는 인생의 사제 간이 되었음을 예증한다. “어머님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정성껏 살았다”는 자평처럼 시어머니는 “영원히 피어있는 우담화”이다. 이러한 존재의 모방은 제 5장의 표제작인 <댓돌위의 흰 고무신>에서 재현된다.

류창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리움은 항상 여성성으로 육화되어진다. 황토 마당 사이에 놓인 댓돌과 흰 고무신이 그 육화에 해당한다. 황토색과 흰색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시적 이미지가 완결된 부분을 살펴본다.


산사가 아니라도 좋다. 오두막의 방 한 칸이면 족하다. 그곳에 따뜻한 아랫목과 앉은뱅이 책상 하나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연필과 노트 그리고 강아지풀 한 줄기 꽂아 놓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여태까지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어떤 이력의 신을 신고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 신발 속의 낙엽들은 알고 있을까. 댓돌 위의 흰 고무신이 달빛에 곱다.
<댓돌위의 흰 고무신> 일부


사유의 공간으로서 이만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까.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는 잠시 잊도록 하자. 노승인들, 속세를 버린 비구니인들, 아니면 이름 없는 작가인들 어떤가. 자연은 누구든 와서 앉게 한다. 산사 같은 분위기와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구는 결코 과욕이 아니다. 작가가 꿈꾸는 세계는 이처럼 소박하다. 류창희의 수필론을 압축한 댓돌위의 흰 고무신이야말로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 초시간적 인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출생, 성장, 혼인이라는 평이한 소재가 어떻게 수필의 리얼리티를 지니게 되는가. 작가는 그 해답에 근접하고 있다. ‘아버지의 빈방’이 있었음으로 자신의 방이 있게 된 깨침이 그것일 것이다.



묵향과 문자향의 교합, 그 시적 변용


문학은 수면 아래에 비치는 바깥 풍경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수면에 있다. 수면에 파문이 이는가 아닌가, 탁한가 맑은가, 깊은가 얕은가에 따라 문학적 재현은 달라진다. 그림자가 실제 사물보다 아름다우려면 수면은 고화질의 스크린이어야 한다. 수필가가 부단하게 삶의 근원을 모색하려 하지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연유도 여기에 있다. 등단작 <빗금>은 그럼 점에서 삶의 문학적 승화를 보여주는 수작에 속한다. 그 미적 긴장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날마다 달력에 빗금을 친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어느 날은 한꺼번에 몰아서 일주일 단위로 칠 때도 있다. 이런 날은 죽죽 친다. 가볍게 지나간 날들이다.”
<빗금> 일부


위 단락은『매실의 초례청』을 여는 첫 문장 이상으로 작가의 삶과 글쓰기의 방식을 일러주는 언어들이다. 언어가 표방하는 빗금긋기에서 주목할 점은 “오늘이 지났다”라는 시간성에는 과거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긴장미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든 덫과 같은 “용납할 수 없는 고집”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편은 “문학의 텃밭”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대부분의 수필가들도 그러니까. 하지만 류창희의 특이성은 유희의 전시장으로서 문장이 아니라 “사유의 뜰”로 설정된 서사성에 있다. 작가가 마련한 사유의 뜰은 “별들의 고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집”들로 이루어진 길음동에서 시작하여 “글 한편처럼 살고 싶은 삶”의 출구로 나온다. 그 그리움을 체화한 수필이 <그리움은 수목처럼 번지고>다. 이 글은 “간식이 아닌 밥다운 글”을 바라는 작가의 수필론과 “그리움의 저울에 얹혀 산다”는 인생론을 수묵화의 서정으로 동시에 표현한 작품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움은 나에게 어떤 한 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 울컥울컥 그리움을 행간에 써 내려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 스스로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어루만진다. <그리움은 수묵처럼 번지고> 일부


그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지 않으면 편지를 쓰거나 하다못해 남의 글을 읽는다. 그는 문학이 무엇이라는 현학에서 벗어나 글을 씀으로써 글의 영토를 확장해 간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묵향 그윽한 글 한편”이라는 절대적 향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일 수필에 예(禮)와 도(道)라는 명분이 있어야한다면, 류창희의 수필집은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 도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해온 중국문학이며 예는 시어머니의 며느리로써 익힌 서예와 난치기일 것이다. 류창희는 이러한 엄격한 생활을 문학과 예술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행복한 문인이다. 그 대표작인 <초사란>(焦思蘭)은 꼿꼿한 난을 통해 자존심을 지켜온 자신의 삶을 풀이한다. 여고 시절에는 풍지박살난을 만들까 숨을 가다듬었고, 민중의 삶을 살아온 작가로부터는 표연란(飄然蘭)의 기개를 배웠고 초로의 학우인 수녀에게서는 온란을, 결혼 후에는 안절부절란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고 읊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학난도 표연란도 온란도 나에겐 멀기만 하다”고 고백할지라도 “절벽에서 내리 꽂이는 획”같은 삶을 이어오고 있다.

모든 일이 “붓끝이나 손끝이 아니라 열린 마음에 있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난치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예화(禮化)이다. 그 품격이 전이된 완성작이 <매실의 초례청>이다. 매실의 제조과정과 초례라는 토속적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이작품은 격과 흥이 조화를 이룬 낯설기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좋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니, 마지막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매실의 초례청> 일부


<매실의 초례청>에는 풍요의 상징이 넘쳐난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출산과 다산, “검은 천”은 초야의 어둠을, “초가지붕의 하얀 박 넝쿨”은 육감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초야의 합방과 음양의 조화를 전달하는 어조는 향토적 흥취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이고~! 별꼴 다 보겠네. 매실에 무슨 수줍음이 있능겨.”라는 능청 때문에 “환한 대낮에 길거리로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살자”라는 짓물러 터진 부부애의 리얼리티는 미감의 언어로 순화되어 진다.

성정(性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이 조건을 인정하기 때문에 화자는 매화시와 저잣거리의 속언을 병치시키고 남녀 간의 성(性)을 매실과 설탕의 교(交)로 치환시켜 내었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지 않은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매실의 초례청> 일부


매실이 설탕과 합방하기 위해서는 고결한 시나 고담준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때로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다. 사랑의 진리도 오고 가는 냉혹한 세월에 실리고 홀로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수필에도 조금의 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생태계에서 펼쳐내는 어울림의 행위는 차라리 제 생긴 대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현실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매실의 초례청>은 성의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하면서도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물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떤 수필이 되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궁하면 통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심연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희망의 출구는 가까워진다. 예술과 문학도 마찬가지다. 절망으로 빚어낸 작품일수록, 더욱 밝은 빛을 낸다. 만일 류창희의 문학적 귀착점을 찾으려 한다면 그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한 삼태기의 흙>속에 있다.

한 삼태기의 흙을 포기하려 했던 자신의 몽매함이 설움처럼 토해져 목이 쉬도록 통곡을 했다. 아마 그때 그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울 일이 없어 드디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나마 어렵사리 고전을 계속해서 읽을 수 있는 청복(凊福)은 그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삼태기의 흙>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면 미래를 포기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닦달하여 재생의 에너지를 되찾는다. 작가가 좌절의 기로에서 찾아낸 화두는 “위산일궤(爲山一簣)”라는 고어이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만들지 못한다면 문학적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태만도 자신에게 있다. 그것을 깨달은 작가는 통곡을 터뜨린다. 꽃조차 고통 없이 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작가가 류창희이다.



새로운 이데아를 향하여, 탈주와 변신의 욕망


문학의 주체는 작가이고 객체는 대상이며 매체는 언어다. 정신적 순례자로서 작가는 미적구조를 구축하여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려 한다. 자기표현의 욕망이야말로 존재의 의미라는 뜻이다. 글쓰기의 과정을 추적하면 먼저 작가의식이 갖추어지고 작품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독자와의 공명의식이 깔려지면 언어의 영토로 진입하게 된다. 숨은 진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수필론을 류창희의 작가세계에 적용하면 그의 언어 행위는 최적의 스타일을 생성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가 인물들의 행위에서 행동을, 사물에 대한 지각에서 자각을, 사건에 대한 인상에서 상상을 떼어내기 위해 언어를 교직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글쓰기 과정을 언어공학이라고 부른다.

류창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그의 영토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요약하면 류창희는 하루하루를 빗금으로 지웠다, 이제 <빗금>에서 그어졌던 빗금은 <발한>(發汗)에 다다라 새로운 언어로 변환되어 간다.

나만 보는 탁상용 달력이 있다. 한 달 단위로 새로운 표어를 정해 써 놓는다. 잘 지켜졌나를 확인한 적은 없다. 수많은 단어들이 달마다 적혀 있다.

‘내 마음과 같이’‘선택한 가난’‘어두운 밤하늘에 드문드문 빛나는 별처럼’ 이라고 적어놓은 글들은 주로 나를 단속하는 내용들이다.   <발한(發汗)> 일부


빗금이라는 부호가 “표어”라는 담론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녀는 “시멘트 담 밑에서도 뿌리만 내리면 방긋 웃는 노란 민들레꽃”다. 동시에 “무서운 며느리”이고 해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속이라고는 없는 년”이기도 하다. 외향과 실제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색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든 것을 말해야한다, 화를 내야한다 삿대질을 하며 싸워야 한다.” 는 다짐을 하지만 그녀는 “방에서는 혼자 가슴을 눌러가며 속울음”을 운다. 이러한 모순을 지닌 작가만이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깃발이 달린 영토를 지켜낼 수 있다.

다시 류창희의 문학에서 삶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삶으로의 회귀는 당연히 부성의 부재를 극복하려는 잠재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어머니가 된 작가는 아들의 취향과 소질을 최대로 존중하려고 한다. 어쩌면 아들조차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더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 <바람은 감각이다>이며 <너도 풀꽃과>는 그 추이를 더욱 진행시킨 작품이다. 들꽃을 좋아하는 작가는 “양지꽃, 제비꽃처럼 작은 풀꽃들을 보면 한두 송이 뜯어다 아이 방에 꽂아 준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문학적 영토에서 꿈꾸는 존재성을 자식에게 불어넣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무기를 버리다>는 해체된 여성의 역할과 변신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주부의 고유역할은 가족에게 밥을 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신성한 의무이면서 가족을 지배하는 수단이 기도하다. 그 역시 시류를 거역할 수 없다. 결국 “내 밥 먹기 싫은 사람 다 나가.”라는 불만을 터뜨리지만 사실은 외식 문화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신자아를 확립하려는 내성의 외침이 아닌가.


얼마 전까지 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무기는 기능을 잃고 장난감만도 못한 무딘 잔소리로 전락하였다. 어느 여름방학 한 달이나 집을 비웠었는데 아이들은 어미를 찾기는커녕 살이 통통 쪄서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서운한 말을 했다.  <무기를 버리다> 일부


한 달 동안 집안을 비워도 “아이들의 살이 통통했다.” 예상 밖의 결과를 맞이한 작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음식 만들기라는 무기를 포기하여야 했다. 이 시점에는 절묘한 반전이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무기를 버림으로써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꿈꾸어 왔던 “밥 하는 엄마가 아닌 우아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루 세끼 식사가 면제된 공간과 우아한 여류문인은 모든 여성이 꿈꾸는 이상향과 이상형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마술 같은 탈바꿈을 얻기 위해 “하루 일을 점검하는 빗금치기”를 그만 둘 수 없다. 왜 그런가.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방이 없었으므로 자식의 가슴에 어머니의 방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하늘색 코로나 택시에서 내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유일한 부성의 끈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너도 풀꽃과>에서 서술하듯이 아이 방에 들꽃을 꽂아준다. 아들이 간직한 작은 상자 속에서 산책길에 꽂아 주었던 풀꽃들을 발견했을 때 작가는 “한참을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다. 정이란 추상적 그리움만이 아니다. 언술만으로는 목마르고 허기지다. 그리하여 “어찌 나에게 문학 수업이 따로 있겠는가?”라고 자문자답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류창희만의 질문인가.


닫으며

수필은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언어라는 측면에서 수필을 해석하면 자유로운 표현의 영토로 나아가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하다. 들뢰즈는 “예술작품은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탈주선을 타는 언어의 항해자들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작가만이 수필을 문학답게 만들어간다.

이러한 문학적 담론을 우리는 류창희의 『매실의 초례청』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그가 서문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이라고 고백할 때의 그리움의 대상은 혈과 육, 그리고 삶을 거처 언어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한 변신의 과정이야말로 작가의 수필을 설명하는 담론일 것이다. 빗금으로 삶을 표백하고 호미질로 글로 표방하는 일은 수필가라면 누구나 행하여야 할 직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좌표에 얹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매실의 초례청』이 성찰과 사유로 가꾸어진 영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세이스트 2008년 5.6호 (통권 19)
박양근 교수가 쓴 <류창희 론>



강변학생   2008-07-26 08:00:45
감동을 준 수필평이군요
매실의 초례청을 밑줄 그으며 다시 보렴니다
류창희   2008-07-26 08:28:06
강변학생님 안녕하세요?
무더위 잘 지내시리라 '댓글'로 가늠합니다.


자주 답글 드리지 못하지만
챙겨보내주시는 자료 잘 보고 읽고 있습니다.

벌써 선들한 가을 학기가 기다려집니다.
찜통 더위속에서 ...


《매실의 초례청》저자 류창희 이야기
일시 : 2008년 6월 20일 (금요일)
      오후 4시~ 6시
주최 : 한원포럼
장소 : 서울 강남 개포동 도시개발공사 6층


류창희는 http://rchessay.com
경기도 포천출생 서울에서 성장하고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이고 두 아들의 어미이며, 2001년 수필가로 등단하여
08년 1월 《매실의 초례청》수필집을 냈습니다.
현재, 부산 다섯 개의 시립도서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10년 넘어
《논어》를 핑계 삼아 ‘공자수다’를 떨고 다닙니다.

서문 : 백아절현(伯牙絶絃) 춘추전국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와
그의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주었던 친구 종자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였습니다.
문득! 거문고 소리 바람결에 들리는 듯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선가 내 삶의 연주를 지켜보는 백아절현의 벗님들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이 ‘끼’가 아닐까요.


1. 나의 문학수업 시절
낮에는 뻐꾸기 밤에는 접동새 우는 고향에서

사랑채에 할아버지께서 특유한 가락으로 “자왈~” 책 읽는 소리와
할머니 등에 업혀 창가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 간다

메주가 뜨는 냄새와도 같고 밭두둑의 두엄 냄새와도 같고 누룩이 발효되는 냄새와도 같은
토속적인 아련함이 수묵처럼 번졌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것은 아마도 그리움을 만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움은 나에게 어떤 한 같은 정서를 남겨주었습니다. 김삿갓의 ‘행운유수(行雲流水)’와도 같은 방랑벽을 닮았던 아버지. 애절한 감성으로 화투장의 <이월 매조>가 되어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어머니, 어찌 나에게 문학수업이 따로 있었겠습니까. 혹, 나와 동생이 아버지가 남겨 놓은 시 한 수는 아닐는지요.


2.길음동에 입성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를 싸들고 길음동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서울의 달을 수호하는 별들의 고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언덕배기, 길음동 골목시장에서 금방 짜낸 고소한 참기름이나 향긋한 들기름 냄새 같기도 했던,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흘리는 땀 냄새를 맡으며, 지연 학연 뽐내는 사람들이 없는 시장 통에 사람들이 내는 ‘난타’ 소리를 들으며 살았습니다.

가진 것도 갖춰진 것도 없으면서 꼿꼿한 자존심을 무기로 먹물을 갈듯, 질척한 주변 환경을 갈고 또 갈았습니다. 마치 난을 치듯, 정성스럽게 배우라는 ‘학란’도 바람 앞에 굳건한 ‘표연란’도 초로 수녀님의 ‘온란’도 되지 못하고, 그동안 난화분을 옮기다 쨍그랑 ‘풍비박산란’이 될까 멀쩡한 난을 뿌리를  썪게 만들지 않으면, 잎을 말라 죽이기 일쑤인 ‘안절부절란’을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사람답게 품격 있게 살아 보려고 하니, 난향을 피워내는 일이 붓끝이나 손끝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생활이 마음만 바쁜 ‘노심초사란’을 치고 있는 격입니다.


3. 부산에 뿌리를 내리다
결혼 후, 날마다 달력에 빗금을 치며, 스스로를 단속하며 군대생활을 하듯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빗금이 하루의 마무리가 아닌 새롭게 도전하는 또 다른 기다림임을. 그곳은 내가 가꾸어야 할 문학의 텃밭임을 알았습니다. 날마다 치는 빗금을 빌려 사유의 뜰에 호미를 들이대었습니다.

20년을 넘게 설, 추석명절 친정 한번을 가지 못하고, 오로지 시 어른들 곁에서 춥다 덥다 내색 한번을 내지 못한 채, 어른들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늘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며 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자학하며 오히려 그 관계를 즐긴다고도 했습니다.
남들보다 작은 키, 가벼운 몸무게, 그 구곡간장이 깊어본들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좁은 소견머리로 궁리를 하느라 두통을 앓고 가슴에 묻어 삭히고 발효시키느라고 썩어 문드러진 비위를 이제 힘차게 돌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박우담화제문>으로 어머님을 저승꽃밭으로 보내드리고 절대 자유를 꿈꿉니다. 마음대로 산책하고 차 마시고 ‘소요(逍遙)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花樣年華>가 되었습니다. 실제 영화 속의 장만옥처럼 치파오도 즐겨 입습니다.


4. 화양연화
화양연화로 거듭 태어나니 이래 좋고 저래 좋고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유미주의(唯美主義)’에 빠졌습니다.
그윽한 햇살 아래 ‘역광’을 꿈꾸기도 합니다.
강가에서 휘파람을 불어주던 키 큰 아이도 만나고 싶고, 혼자서 한 열흘 자유여행도 가고 싶고. 가슴파진 블라우스도 입고 싶고, 머리를 틀어 올리고도 싶습니다. 꽃다운 시절, 꽃이 지기 전에 꽃바람 불러일으킵니다. 위험수위 감당하기 힘들어 어느 날은 눈 감고 가슴 짓누르는 날도 있습니다.

이즈음, 크고 작은 문학모임 학술모임 동창모임 교류가 잦습니다. <술독>이나 <술이 고픈 날>에서 언급했듯, 맹세컨대 술 앞에서 내숭을 떨어본 적은 없습니다. 낮술로 반주를 하고 오후 수업을 진행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앉지요.
풍다우주(風茶雨酒) ‘바람 부는 날 차를 마시고 비가 오는 날 술을 마신다’고 했던가요. 혼자서도 곧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즐긴답니다. 달이 없는 밤은 이태백이 놀러오기도 하는데, 그 시간은 25時 저의 ‘술시’입니다.
<매실의 초례청>으로 공식적인 에로수필가로 유명해졌습니다. 수필은 인격이라 하여 감히 성을 다루지 않습니다. 매실을 빌려 초례청을 차리고 성의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했다는 문학성 확보에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속알머리>로 69냐 66이냐 체위 질문을 받기도 한답니다. 해학과 골계로 촌철살인으로 좋게 말해주는 이들에게서 힘을 얻습니다. 지천명(知天命)의 너그러움이 주는 여유인 것 같습니다.  

    
5. 책이 나온 후,
책에 대한 리뷰를 300여건 받았습니다.
전문성을 갖춘 평에서부터 주로 주례축사 같은 칭찬도 있지만 신랄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중 내 아우의 리뷰는 책 광고의 문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조각 천을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엮어놓은 보자기처럼 그 외형은 반듯해 보이나 내용은 저마다의 숨은 사연을 가지고 있음이 역력해 보인다.
수필은 자서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그러기에 오감을 만족시키는, 작가만의 감칠맛이 있어야한다. 그 맛은 누이가 살아온 인생이다. 어느 글귀에서는 내가 느끼는 신맛이 누이에게는 쓴맛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가족사에서 빚어지는 속 그늘의 긴속눈썹과 그윽한 눈매로 전국구 미인도 되었습니다. 결국은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돌잔치 결혼 회갑 고희 근조 등을 달기까지 삶의 마디 마디 축하하고 격려하고 위로 하듯이, 책을 내는 일은 늦둥이 딸자식 하나 낳아 시집보내는 일과 같습니다. 사돈집 음식은 저울에 달아서 갚듯, 모자람도 넘침도 없이 답례를 하느라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6. 정신적인 양식 ‘책읽기’
책을 읽는 것도 음식과 같아서 좋아하는 것만 먹으면 비만이 되고, 웰빙만 고집하여 철학서만 읽으면 다이어트는 되겠지만, 결코 S라인은 되지 못합니다. 단맛 쓴맛 담백한 맛 그중 씹는 재미도 상당합니다. 누구에겐 처세가 되는 독서가 누구에겐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양사가 건강을 위해 식단을 짜듯 하면 좋겠지만, 성별 나이 직업 취미가 모두 다르다 보니 닥 이것이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귀사의 사장님께서 필독서목록을 말씀 하셨다고 하는데, 저에겐 너무 어려운 숙제입니다. 아우의 막강한 뒷배경으로 KTX 라는 낙하산을 탄 이 자리인지라 저에게는 주제넘습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토론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부산독서아카데미】한글로 치시면 바로 나옵니다.

1999년 7월에 부산과 경남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만 매달려 사는 것에 교양적 소양을 갖추자고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울에 있는 ‘과학독서아카데미’의 부산지회로 출발하였으나 1999년 9월 회원들의 의사에 따라서 부산독서아카데미로 독립하였습니다.
현재 토론에 참석하는 회원은 20여며 정도 나이는 20대에서 60대까지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 주로 남자 분들입니다. 직업분포는 의사가 가장 많고 변호사 교수 교사 방송인 경찰 소설가 시인 신부 개인사업 세무사 등 다양하고 어쭙잖은 여류 수필가도 한명 끼어 있습니다.

그동안 읽힘을 당한 책( 읽고 자유 토론한 목록을 올립니다)
‘부산독서아카데미’ 까페에 들어오시면 독서토론한 책 목록과 책 소개와 토론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과거사를 보려면 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나 의 바로 미터는, 오늘 아침 나올 때 그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이 아닐까요. 그 사람의 생각 관심 앞으로의 미래가 다 엿보이는 것 같지 않나요.

제 서가요.
전 큰방을 서재로 쓰는데요. 부부 침대와 책상두개 창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이 모두 책꽂이인데… 우선 정신없이 지저분하군요.
제 등 뒤로는 문인들이 보내준 수필집이 거의고요. 그 옆에는 위의 독서회에서 읽었던 책들이 꽂혀있고요.
제 앞 높은 곳에 사서삼경 원본과 전집류들이 시커멓게 무게 잡고 서있네요. 폼은 그럴싸하지만 거의 안 읽는다는 뜻이죠. 그 밑에 책상에는 벼루와 붓 화선지 그곳도 먼지가 뽀얗군요. 저쪽 지식경영법, 한시미학산책, 스승의 옥편, 죽비소리, 마음을 비우는 지혜, 돌에 새긴 생각, 한서 이불과 논어병풍, 책에 미친바보, 미쳐야 미친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책 읽는 소리, 꽃들의 웃음 판, 많이 편독하고 있지요. 고전산문의 즐거움, 우리선비,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읽었는데 그게 그거 같아 생각이 잘 안 나는 미학 책들이… 그리고 대부분 중국관련 문학책과 전공 책들입니다.
바로 앞에 빈둥빈둥 누워 있거나 흩어져 있는 책들, 거의 매일 보는 거죠. 논어 고문진보 명심보감 장자 노자 한한대자전 허사사전 대부분 수업준비를 위한 밥 그릇 이고요. 국어사전,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우리문화 박물지, 나무열전… 아~ 그 사이에 컴퓨터 지가 내 책상 주인인척 떡 버티고 앉았네요. 정신 차려야지 제가 이놈한테 부림을 당해서야 쓰겠어요.

컴퓨터 옆에 붙여놓은 문구가 ‘웃기고 있네. 잘난 척좀 그만해라’ 는 듯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당신 책상 위 95%는 쓰레기… 당장 치워라 !



손영란   2008-06-30 08:13:39
잘 읽었습니다. 문학의 향기가 솔솔 절로 내뿜어지는 인생이요 삶인것 같아요. 축하드립니다.
류창희   2008-06-30 11:46:38
문학의 향기
저에겐 철없음 인것 같아요.
현실감각이 좀 없지요.
이대로 <흰머리 소녀>로
마감할 것 같아요^^*


에세이스트 2008년 5.6호 (통권 19)
박양근 교수가 쓴 <류창희 론>


류창희수필의 거듭 읽기:

『매실의 초례청』의 비평적 해체와 복원

박양근 (부경대 영문과교수, 문학평론가)

ykpark@pknu.ac.kr



초례청으로의 초대장

류창희 수필가는 누구인가. 그는 드문 이력의 작가이다. 대학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논어를 가르치며 글을 쓰고 난을 치고 서예를 한다. 학예문(學藝文)을 섭렵한다랄까. 평자와 안면이 있다면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매실의 초례청>이라는 작품을 평한 적이 있을 뿐, 그 기억마저 의식의 산 너머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그 때 평자는 류창희의 수필이 언젠가는 문자향을 떨칠 것이라고 예감하였다. 매실즙을 만드는 과정을 신랑각시인 초야 치르기에 대입하면서도 격조 높은 문장과 질박한 어조라는 이중주로 엮어낸 솜씨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 매실즙이 익었는지, 마침내 47편의 수필이 독자를 위한 초례상 위에 차려졌다.

류창희 문학의 초석은 우선 녹녹하지 않은 격조를 지닌다. 어린 시절부터 “자~왈”의 분위기에 이끌렸던 만큼 수필마다 한학의 먹물이 배어있다. 고리타분한가. 그렇지 않다. 묵은 가지의 매화가 더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듯 그의 글은 동양적 감수성과 서구적인 분별성으로 직조되어 있다. 그리하여 다감한 감성을 겸비한 독자만이 『매실의 초례청』에 초대받을 수 있다.

작가의 역량은 무슨 대상을 선택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있다.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세태를 셈하기보다 헤아리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작가는 남다른 장점을 지니고 있다. 산사 기와가 아니라 “기와 위에서 자라는 세월의 싹”을 헤아리는 시선주기가 표의문자를 해독해온 습관에서 농익었기 때문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의 벗”으로서 수필독자를 위한 첫 서권(書卷)인『매실의 초례청』이 완성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 과정을 알기위해서는 창작심리에 준거한 해체와 텍스트로의 재복원이 불가피하다.


피(血)의 그리움과 육(肉)의 뿌리 찾기

류창희의 수필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리움으로 꿰어진 주렴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의 그리움을 이미지화하면 청아한 달빛이고 고고한 현음에 해당한다. 그 썅겹이미지가 완벽하게 구현된 작품이 <아버지의 방>일 것이다.

“나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방이 없다.”

이것은 <아버지의 방>의 첫 문장이다. 작가는 냉랭할 정도의 단호한 음성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선언한다. 그 없음은 육안으로 살핀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해석해낸 “비어있음” 이므로 찾으려 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빗금>이 등단작이고 <매실의 초례청>이 표제작일지라도 <아버지의 방>에서 더욱 깊은 울림이 번져나는 이유는 악기의 공명상자처럼 비어있기 때문이다. “하늘색 코로나 택시에서 내리는”아버지는 한 올의 연(緣)에 매어져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모습은 일하는 남자, 가문을 세우는 가장, 자식을 지켜주는 부성과는 동떨어진 바람을 연상시켜준다. 독자는 주목할 것이다. 여기에 숨겨진 본질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이방인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아버지의 방에서 타인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첫 번째 해독하는 이유도 그 숨겨진 모습을 읽어내는 독자만이 류창희의 수필영토로 들어가는 패스포트를 발급받기 때문이다. 수필화자는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려 하지만 반응은 늘 “없다”이다. 소리 내어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호적등본에 이름은 올려져 있으나 실체가 없다.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눈을 마주친 기억도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나의 눈은 아버지를 닮았다”는 혈육의 방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아버지가 그립다. 온화한 마음으로 눈자위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아버지의 방’을 마련해 드리고 싶다. 아직 마음을 활짝 열어 따뜻한 방을 꾸밀 수야 없지만 그 방을 데울 장작개비를 모아보자. 속 좁은 소견머리로 생솔가지면 어떤가. 잘 타지 않아 매캐한 연기로 눈물이야 나겠지만, 자꾸자꾸 군불을 때다보면 아버지의 온기를 느낄 날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의 방> 일부


부재의 회한이 정감의 수필을 잉태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매실의 초례청>은 그리움의 울타리로 이루어진 문학적 정원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의 방>에서 태어난 <이월매조>와 <할머니의 축문(祝文)>과 <우담화의 제문(祭文)>은 3대에 걸쳐 전해오는 여성사이다. 여성이 주역이 된 세 작품은 여성이 거치는 비애와 품위와 아픔을 펼쳐내고 있다.

<이월매조>는 ‘평생을 술지게미와 겨겁데기’로 살아온 친정어머니에 대한 글이다. 썼다기 보다 각인되어 있다. 여성이 회상하는 친정어머니는 늘 잿빛이듯이, 그리고 “화투짝이 웬수였다.”는 단문이 어머니의 설움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듯 모녀는 “석삼년을 오지 않는 엄마의 임”을 함께 기다린다. “어쩌면 엄마와 딸이 읍내에 나가 곱슬거리는 불파마를 하고 가족사진 한 장쯤 박아서 아버지를 붙잡았을지도 모른다.”는 고백처럼 작가는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어머니의 딸이다. 작가는 지금 남편과 두 아들이라는 세 남자를 주변에 두고 있지만 그들은 미적 묘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화투짝의 열두 그림에 담긴 희로애락에서 멀찍이 떨어진 삶을 보낸 어머니가 있어서다. 이 사실은 그리움이야말로 작가적 필수아미노산임을 밝혀주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작가는 어머니의 딸이므로 시어머니의 며느리임을 부단하게 자각하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류창희의 스승이다.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단발머리”의 촌티 나는 각시를 “풀꽃여인”으로 부활시켰다. <우담화의 제문>을 읽는다면 그 이유는 시어미에게 바쳐진 열녀 제문이어서가 아니라 변신이라는 문학적 모티프를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씨, 말씨, 솜씨, 맵시의 부덕을 고루 다 갖추신 어머님은 “한 치의 어긋남도 못 본 척 넘기지 못하는 성품”이셨습니다. 불호령과 저기압전선을 만들어 며느리들의 기강을 바로 잡으셨지요. 어머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늘 조심스럽게 옷깃을 여미며 마음의 보초를 섰습니다. 심신은 고단했지만 운명처럼 그렇게 어머님과 합이 척척 맞았습니다.

<우담화의 제문>일부


인간은 누구나 사표의 존재를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신앙적 대상이거나 촌수 높은 혈육일 수도 있다. 류창희는 시어머니를 “운명의 합”으로 삼는다. <우담화의 제문>은 죽은 자에 대한 예찬이면서도 고부의 만남, 동행, 사별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때문에 대상의 인품은 오히려 고양되어 간다. 꽃보살이라고 불리는 시어머니는 작가를 “어머님의 며느리”로 교육시키려한다. 등단작 <빗금>에서 “사는 방법도 세습인가”, “시댁은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다.”처럼 “집안의 법도를 동심결 매듭”으로 풀어낸 은유는 그들이 고부간이기 보다는 인생의 사제 간이 되었음을 예증한다. “어머님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 정성껏 살았다”는 자평처럼 시어머니는 “영원히 피어있는 우담화”이다. 이러한 존재의 모방은 제 5장의 표제작인 <댓돌위의 흰 고무신>에서 재현된다.

류창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리움은 항상 여성성으로 육화되어진다. 황토 마당 사이에 놓인 댓돌과 흰 고무신이 그 육화에 해당한다. 황토색과 흰색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시적 이미지가 완결된 부분을 살펴본다.


산사가 아니라도 좋다. 오두막의 방 한 칸이면 족하다. 그곳에 따뜻한 아랫목과 앉은뱅이 책상 하나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연필과 노트 그리고 강아지풀 한 줄기 꽂아 놓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여태까지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어떤 이력의 신을 신고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 신발 속의 낙엽들은 알고 있을까. 댓돌 위의 흰 고무신이 달빛에 곱다.
<댓돌위의 흰 고무신> 일부


사유의 공간으로서 이만한 장소를 마련할 수 있을까.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가는 잠시 잊도록 하자. 노승인들, 속세를 버린 비구니인들, 아니면 이름 없는 작가인들 어떤가. 자연은 누구든 와서 앉게 한다. 산사 같은 분위기와 글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구는 결코 과욕이 아니다. 작가가 꿈꾸는 세계는 이처럼 소박하다. 류창희의 수필론을 압축한 댓돌위의 흰 고무신이야말로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 초시간적 인식의 세계를 보여준다. 출생, 성장, 혼인이라는 평이한 소재가 어떻게 수필의 리얼리티를 지니게 되는가. 작가는 그 해답에 근접하고 있다. ‘아버지의 빈방’이 있었음으로 자신의 방이 있게 된 깨침이 그것일 것이다.



묵향과 문자향의 교합, 그 시적 변용


문학은 수면 아래에 비치는 바깥 풍경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수면에 있다. 수면에 파문이 이는가 아닌가, 탁한가 맑은가, 깊은가 얕은가에 따라 문학적 재현은 달라진다. 그림자가 실제 사물보다 아름다우려면 수면은 고화질의 스크린이어야 한다. 수필가가 부단하게 삶의 근원을 모색하려 하지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연유도 여기에 있다. 등단작 <빗금>은 그럼 점에서 삶의 문학적 승화를 보여주는 수작에 속한다. 그 미적 긴장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날마다 달력에 빗금을 친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어느 날은 한꺼번에 몰아서 일주일 단위로 칠 때도 있다. 이런 날은 죽죽 친다. 가볍게 지나간 날들이다.”
<빗금> 일부


위 단락은『매실의 초례청』을 여는 첫 문장 이상으로 작가의 삶과 글쓰기의 방식을 일러주는 언어들이다. 언어가 표방하는 빗금긋기에서 주목할 점은 “오늘이 지났다”라는 시간성에는 과거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긴장미가 깔려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든 덫과 같은 “용납할 수 없는 고집”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방편은 “문학의 텃밭”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대부분의 수필가들도 그러니까. 하지만 류창희의 특이성은 유희의 전시장으로서 문장이 아니라 “사유의 뜰”로 설정된 서사성에 있다. 작가가 마련한 사유의 뜰은 “별들의 고향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집”들로 이루어진 길음동에서 시작하여 “글 한편처럼 살고 싶은 삶”의 출구로 나온다. 그 그리움을 체화한 수필이 <그리움은 수목처럼 번지고>다. 이 글은 “간식이 아닌 밥다운 글”을 바라는 작가의 수필론과 “그리움의 저울에 얹혀 산다”는 인생론을 수묵화의 서정으로 동시에 표현한 작품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리움은 나에게 어떤 한 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 울컥울컥 그리움을 행간에 써 내려가다 보면 속이 후련해진다. 내 스스로 비위를 맞추면서 나를 어루만진다. <그리움은 수묵처럼 번지고> 일부


그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글을 쓰지 않으면 편지를 쓰거나 하다못해 남의 글을 읽는다. 그는 문학이 무엇이라는 현학에서 벗어나 글을 씀으로써 글의 영토를 확장해 간다. 따라서 그의 수필은 “묵향 그윽한 글 한편”이라는 절대적 향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일 수필에 예(禮)와 도(道)라는 명분이 있어야한다면, 류창희의 수필집은 그 조건을 충족시킨다. 도는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해온 중국문학이며 예는 시어머니의 며느리로써 익힌 서예와 난치기일 것이다. 류창희는 이러한 엄격한 생활을 문학과 예술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행복한 문인이다. 그 대표작인 <초사란>(焦思蘭)은 꼿꼿한 난을 통해 자존심을 지켜온 자신의 삶을 풀이한다. 여고 시절에는 풍지박살난을 만들까 숨을 가다듬었고, 민중의 삶을 살아온 작가로부터는 표연란(飄然蘭)의 기개를 배웠고 초로의 학우인 수녀에게서는 온란을, 결혼 후에는 안절부절란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고 읊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학난도 표연란도 온란도 나에겐 멀기만 하다”고 고백할지라도 “절벽에서 내리 꽂이는 획”같은 삶을 이어오고 있다.

모든 일이 “붓끝이나 손끝이 아니라 열린 마음에 있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난치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예화(禮化)이다. 그 품격이 전이된 완성작이 <매실의 초례청>이다. 매실의 제조과정과 초례라는 토속적 에로티시즘을 결합한 이작품은 격과 흥이 조화를 이룬 낯설기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좋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니, 마지막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     <매실의 초례청> 일부


<매실의 초례청>에는 풍요의 상징이 넘쳐난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출산과 다산, “검은 천”은 초야의 어둠을, “초가지붕의 하얀 박 넝쿨”은 육감적인 결합을 의미한다. 초야의 합방과 음양의 조화를 전달하는 어조는 향토적 흥취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이고~! 별꼴 다 보겠네. 매실에 무슨 수줍음이 있능겨.”라는 능청 때문에 “환한 대낮에 길거리로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살자”라는 짓물러 터진 부부애의 리얼리티는 미감의 언어로 순화되어 진다.

성정(性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이 조건을 인정하기 때문에 화자는 매화시와 저잣거리의 속언을 병치시키고 남녀 간의 성(性)을 매실과 설탕의 교(交)로 치환시켜 내었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지 않은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 <매실의 초례청> 일부


매실이 설탕과 합방하기 위해서는 고결한 시나 고담준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은 때로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이다. 사랑의 진리도 오고 가는 냉혹한 세월에 실리고 홀로 죽어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라면 수필에도 조금의 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생태계에서 펼쳐내는 어울림의 행위는 차라리 제 생긴 대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현실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매실의 초례청>은 성의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하면서도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사물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떤 수필이 되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궁하면 통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심연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희망의 출구는 가까워진다. 예술과 문학도 마찬가지다. 절망으로 빚어낸 작품일수록, 더욱 밝은 빛을 낸다. 만일 류창희의 문학적 귀착점을 찾으려 한다면 그 좌표는 어디에 있는가. <한 삼태기의 흙>속에 있다.

한 삼태기의 흙을 포기하려 했던 자신의 몽매함이 설움처럼 토해져 목이 쉬도록 통곡을 했다. 아마 그때 그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울 일이 없어 드디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나마 어렵사리 고전을 계속해서 읽을 수 있는 청복(凊福)은 그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삼태기의 흙>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면 미래를 포기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닦달하여 재생의 에너지를 되찾는다. 작가가 좌절의 기로에서 찾아낸 화두는 “위산일궤(爲山一簣)”라는 고어이다.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만들지 못한다면 문학적 자아를 완성하지 못한 태만도 자신에게 있다. 그것을 깨달은 작가는 통곡을 터뜨린다. 꽃조차 고통 없이 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작가가 류창희이다.



새로운 이데아를 향하여, 탈주와 변신의 욕망


문학의 주체는 작가이고 객체는 대상이며 매체는 언어다. 정신적 순례자로서 작가는 미적구조를 구축하여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려 한다. 자기표현의 욕망이야말로 존재의 의미라는 뜻이다. 글쓰기의 과정을 추적하면 먼저 작가의식이 갖추어지고 작품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독자와의 공명의식이 깔려지면 언어의 영토로 진입하게 된다. 숨은 진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이런 수필론을 류창희의 작가세계에 적용하면 그의 언어 행위는 최적의 스타일을 생성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가 인물들의 행위에서 행동을, 사물에 대한 지각에서 자각을, 사건에 대한 인상에서 상상을 떼어내기 위해 언어를 교직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글쓰기 과정을 언어공학이라고 부른다.

류창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그의 영토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요약하면 류창희는 하루하루를 빗금으로 지웠다, 이제 <빗금>에서 그어졌던 빗금은 <발한>(發汗)에 다다라 새로운 언어로 변환되어 간다.

나만 보는 탁상용 달력이 있다. 한 달 단위로 새로운 표어를 정해 써 놓는다. 잘 지켜졌나를 확인한 적은 없다. 수많은 단어들이 달마다 적혀 있다.

‘내 마음과 같이’‘선택한 가난’‘어두운 밤하늘에 드문드문 빛나는 별처럼’ 이라고 적어놓은 글들은 주로 나를 단속하는 내용들이다.   <발한(發汗)> 일부


빗금이라는 부호가 “표어”라는 담론으로 탈바꿈하였다. 그녀는 “시멘트 담 밑에서도 뿌리만 내리면 방긋 웃는 노란 민들레꽃”다. 동시에 “무서운 며느리”이고 해학적인 표현을 빌리면 “속이라고는 없는 년”이기도 하다. 외향과 실제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색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든 것을 말해야한다, 화를 내야한다 삿대질을 하며 싸워야 한다.” 는 다짐을 하지만 그녀는 “방에서는 혼자 가슴을 눌러가며 속울음”을 운다. 이러한 모순을 지닌 작가만이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깃발이 달린 영토를 지켜낼 수 있다.

다시 류창희의 문학에서 삶으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삶으로의 회귀는 당연히 부성의 부재를 극복하려는 잠재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어머니가 된 작가는 아들의 취향과 소질을 최대로 존중하려고 한다. 어쩌면 아들조차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더 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 <바람은 감각이다>이며 <너도 풀꽃과>는 그 추이를 더욱 진행시킨 작품이다. 들꽃을 좋아하는 작가는 “양지꽃, 제비꽃처럼 작은 풀꽃들을 보면 한두 송이 뜯어다 아이 방에 꽂아 준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문학적 영토에서 꿈꾸는 존재성을 자식에게 불어넣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무기를 버리다>는 해체된 여성의 역할과 변신의 욕망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주부의 고유역할은 가족에게 밥을 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신성한 의무이면서 가족을 지배하는 수단이 기도하다. 그 역시 시류를 거역할 수 없다. 결국 “내 밥 먹기 싫은 사람 다 나가.”라는 불만을 터뜨리지만 사실은 외식 문화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신자아를 확립하려는 내성의 외침이 아닌가.


얼마 전까지 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무기는 기능을 잃고 장난감만도 못한 무딘 잔소리로 전락하였다. 어느 여름방학 한 달이나 집을 비웠었는데 아이들은 어미를 찾기는커녕 살이 통통 쪄서는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서운한 말을 했다.  <무기를 버리다> 일부


한 달 동안 집안을 비워도 “아이들의 살이 통통했다.” 예상 밖의 결과를 맞이한 작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음식 만들기라는 무기를 포기하여야 했다. 이 시점에는 절묘한 반전이 장치되어 있다. 그것은 무기를 버림으로써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꿈꾸어 왔던 “밥 하는 엄마가 아닌 우아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루 세끼 식사가 면제된 공간과 우아한 여류문인은 모든 여성이 꿈꾸는 이상향과 이상형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 마술 같은 탈바꿈을 얻기 위해 “하루 일을 점검하는 빗금치기”를 그만 둘 수 없다. 왜 그런가.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방이 없었으므로 자식의 가슴에 어머니의 방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하늘색 코로나 택시에서 내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유일한 부성의 끈이었기 때문에 작가는 <너도 풀꽃과>에서 서술하듯이 아이 방에 들꽃을 꽂아준다. 아들이 간직한 작은 상자 속에서 산책길에 꽂아 주었던 풀꽃들을 발견했을 때 작가는 “한참을 꺼이꺼이” 울 수밖에 없다. 정이란 추상적 그리움만이 아니다. 언술만으로는 목마르고 허기지다. 그리하여 “어찌 나에게 문학 수업이 따로 있겠는가?”라고 자문자답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찌 류창희만의 질문인가.


닫으며

수필은 삶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언어라는 측면에서 수필을 해석하면 자유로운 표현의 영토로 나아가려는 욕망의 표현이기도하다. 들뢰즈는 “예술작품은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탈주선을 타는 언어의 항해자들이다. 그것을 실천하는 작가만이 수필을 문학답게 만들어간다.

이러한 문학적 담론을 우리는 류창희의 『매실의 초례청』에서 재발견할 수 있다. 그가 서문에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그리움을 만나는 일”이라고 고백할 때의 그리움의 대상은 혈과 육, 그리고 삶을 거처 언어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향하게 된다. 그러한 변신의 과정이야말로 작가의 수필을 설명하는 담론일 것이다. 빗금으로 삶을 표백하고 호미질로 글로 표방하는 일은 수필가라면 누구나 행하여야 할 직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삶의 좌표에 얹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매실의 초례청』이 성찰과 사유로 가꾸어진 영토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양근(부경대학교 영문학과 교수)평

류창희의 《매실의 초례청》


지난 1/2월호에서 주목할만한 작품으로는 <매실의 초례청>을 손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낯설게 하기를 실험한 점에서 관심을 끈다. 매실즙의 제조과정에 초례라는 토속적 에로티시즘을 도입한 서두가 인식의 새 지평을 연 것이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매실의 초례청이다. 나는 주례를 맡았다. 신랑신부 맞절을 시키듯, 청실홍실을 다루듯, 매실 한 켜 설탕 한 켜 비율로 차곡차곡 항아리에 넣었다. 축하세례로 남은 설탕을 초록매실 위에 하얗게 뿌리니, 마지막 초야를 치를 합방만 남았다.(동 367)




위 단락에는 풍요의 상징이 넘쳐난다. “배가 불룩한 오지항아리”는 출산과 다산을 의미한다. 청실홍실과 초야의 합방은 서구적 에로티시즘보다는 동양적 성애를 연상시키면서 풍요의 설화로 발전된다. 주목할 점은 화자의 수줍었던 초례가 체험의 형성화에 한 몫을 한다는 점이다. “온몸을 감싸 안았던 수줍음”이 세월을 거치면서 시서화詩書畵라는 예기로 승화되고, 음양의 조화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어투는 향토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하이고~! 별꼴 다 보겠네. 매실에 무슨 수줍음이 있는겨.” 이 능청스러움 때문에 “환한 대낮에 길거리로 나와, 그래 나 죽고 너 살자.”라는 짓물러터진 부부애와 조응을 이루게 되었다.

성정性情은 가장 인간적인 본성에 속한다. 이것을 인정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격조있는 매화시 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의 속언에 함축되어진다. 막된 사랑가가 속되지 않는다면 남녀의 성性을 매실과 설탕의 교交로 치환시켰기 때문이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직 비녀와 옷고름은 풀지도 못한 채 속곳부터 벗기려했는가. 설탕이 몽땅 기진맥진하여 항아리 밑바닥에 굳어있지 않은가. 밤마다 실랑이만 벌이다 날이 밝은 게 틀림없다.(동 369)




매실이 설탕과 제대로 합방하기 위해서는 고결한 매화시 따위는 필요하지않다. 고담준론은 겉멋에 불과하다. 매실과 설탕을 두터운 비닐에 함께 넣고 발길질로 걷어차야 맛 좋은 매실즙이 만들어진다. 생태계에서 펼쳐지는 어울림의 행위에서는 제 생긴 대로 다루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필쓰기도 소재와 주제 사이의 초례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 적는 글이 더 나으리라. 작가의 변증법적 논리가 적절했다.

수필에서 성은 다루기 힘든 소재에 속한다. 그 현실에서 <매실의 초례청>은 성의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했다. 그럼에도 매화라는 기품있는 이미지 덕분에 작품은 문학성을 확보하였다. 사물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떤 수필이 되는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다.

《수필과 비평 2004년 3/4월호》


<여송한자방>과 다움 네이버 까페에 실린글


《매실의 초례청》 류창희 수필집 에세이문학출판부
Soogoo Ahn님|2008.05.01 책 읽은기간 13일  |   10  |0
春野[춘야] 선생님의 수필집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초례를 거친 매실처럼 알알이 그 진액이 녹아 감칠맛을 더합니다.
그 속에 소박한 삶이 있고 인고의 강인함이 있으며 아련한 추억이 맴돌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는 다 다르지만 책 속으로 들어가면 애틋한 꿈이 있고
향내 나는 들판이 있으며 마음껏 날아다니는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단숨에 다 읽어 버리기가 아까워 게으름을 피우며 보고 또 봅니다.
백합의 고운 자태가 눈에 아른거립니다.
화사하지는 않더라도 너무나 아련한 그리움이 배어나옵니다.
마디마다 절제된 카타르시스에 잠깐씩 숨을 멈추기도 합니다.
저 멀리 내 쉬는 숨소리 하나하나에 나도 숨이 턱 막힙니다.
여러분을 이 만남에 초대하오니
함께하시어 데이트를 즐기시면 기분이 상큼해지실 것입니다.





<부산독서아카데미> 까페와 다움과 네이버 검색에 실린 글

도서명 : 매실의 초례청
저   자 : 류 창 희
출판사 : 에세이문학출판부
출판일 : 2008년 1월
정   가 :10,000원

그리움은 恨이 되고, 그 恨은 아름다움이 되었네.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날 정도로, 2008년 1월 중순의 겨울 날씨는 따뜻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따뜻한 겨울에 방심하던 중, 갑작스레 찾아온 동장군의 호령과, 모처럼 만에 흩날리는 눈에 다들 당황해하고
어수선을 떨던 때였다. 서울에서 내리는 눈은 雪雪 거리며 내렸고, 그 눈은 차들을 설설거리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나의 터전인 부산에서는 눈이라고 하기에는 뭣한 진눈깨비가 흩날렸는데, 이것도 눈이라고 사람들은 좋아서 부산을 떠니,
그래서 부산인 것이리라.

항상 늦기만 한 퇴근 이후, 잠들기 전 습관처럼 펼쳐드는 책에서 일말의 기쁨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에, 류창희 선생의
수필집을 펼쳐 들고서는 읽기 시작하였다. 초반 몇 몇의 에피소드를 지나면서, 책을 덮고 잠깐 멈추었다가 읽고,
또 멈추었다가 다시 읽기를 여러 번 반복하였는데, 그것은 이렇게 추운 겨울날 두꺼운 이불을 덮어쓰고 따뜻한 구들장에
누워서 읽는 책이 아니라, 포근한 봄날의 햇살과 기운을 마음껏 받으면서 읽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수필집이라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였기에 그런 것 이었다.

즉, 글 곳곳에서 봄의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이러한 느낌은 본문 중에 나오는 저자의 여러 호(號) 중에서도 ‘春野’ (봄의 뜰,
봄의 들판이 아니다) 라는 호로 가장 많이 불리어 졌다는 내용에서 나의 느낌이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이전에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였었는데, 그 때는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코 끝에서
녹차향이 느껴지더니, 계속 읽어 나갈수록 법당에서 정성스레 사루는 향(香)내음이 느껴졌었다. 이 때의 느낌을 서평으로
적어 놓았었다.)

한편으로, 글 속에는 우리네 삶에서 결코 뗄레야 뗄 수 없는 恨의 정서가, 읽는 내내 가슴 시리도록 다가왔는데, 류창희 선생이 살아오신 즐거운 추억과 아쉬웠던 순간들, 때로는 힘들었던 순간들이 바로 엊그제의 일들처럼 선하게 그려져 있다.
저자는 그러한 것들은 그리움이며, 그리움은 자신에게 어떤 恨같은 정서를 남겨 주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러한 기억들에
집착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지나간 것에 감사하며, 모든 기억들을(기억 자체가 恨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리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애틋한 글들은, 바르고 이쁘게 살아오신 저자의 삶 만큼이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아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고, 평안함을 주고 있다.

이 땅의 아름다운 시어(詩語)에 욕심을 낸 하늘의 선녀가 있었다. 그 선녀는 아름다운 시어들만을 골라, 할머니의 누에가
뽑아낸 실로 만든 비단 주머니에 시어들을 가득 채우고서는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가득찬 시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비단 주머니는 터져 버리고, 그 안에 있던 아름다운 시어들은 여기 저기 흩뿌려졌다.
여기 저기 흩뿌려져서 반짝이는, 절제된 시어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글 곳곳에서 찾아내어 음미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촌철살인과 같은 절제된 문장의 미학이 어디 일본의 하이꾸(俳句)에만 있으랴.

008.01.22   세속도시


  
花樣年華 어찌 하오리까. 이 북받치는 감동을.... 미천한 글를 쓴 사람에게 이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겠는가.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둥둥거림.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않아 가슴에 묻어야겠군요. 08.01.22 09:21

세속도시 화양연화님 글이 미천하시면 다른 글들은..^^;; 가슴에 묻어두시면 다시 그리움이되고 한이되고 아름다움이 되시겠네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만드시는 연금술사이십니다..^^* 08.01.23 07:13

花樣年華 눈이 온다기에 함박눈 한번 맞아 보려고 서울에 왔더니 '어제 내린 눈 오늘 앞길만 질척이게 한다' 더니, 나의 첫사랑처럼 마음만 질척이게 하는군요. 네이버 책 검색에 '리뷰' 또 감동 감동. 지속태 유지할만한 저력이 있어야 할텐데 .... 감사합니다. 08.01.24 08:25

하늘마음 "부럽습니다. /오가는 마음밭이, /감동이네요." //....??? 08.01.22 19:31
세속도시 여기 카페에는 어쩜 이리도 이쁜 대화명이 많으신지..보는 제가 넉넉한 마음이 절로 납니다..^^ 08.01.23 07:15



토마스 아퀴나스 <BSKS2> 까페에 실린 글

류창희 님의 『매실의 초례청』.

이 수필집을 읽으면 마음 속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는 우울한 샹송과 멜랑꼴리한
우수의 그림자가 한여름의 벼락처럼 도망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통해 나 자신이 더 밝아지고 맑아지고 착해졌으면 합니다. 임의 글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예감합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이 수필집을  별이 초롱초롱한 한 밤중에 읽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읽을 때만은 낙동강 변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글은 왜 씁니까? 영혼이 고독해서 입니까? 등산가는 자기 영혼이
고독할 때 산에 오릅니다. 그렇다면, 수필가가 자기 영혼이 고독할 때 그 고독한
영혼의 눈으로 포착한 대상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의 임무인 동시에 최고의 문화행위입니다.
임은 벌써 그것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에세이 플러스 4월과 5월 광고

조각천을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엮어놓은 보자기처럼 그 외형은 반듯해 보이나
내용은 저마다의 숨은 사연을 가지고 있음이 역력해 보인다.
수필은 자서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그러기에 오감을 만족시키는 작가만의 감칠맛이 있어야 한다.
그 맛은 누이가 살아온 인생이다.
어느 글귀에서는 내가 느끼는 신맛이 누이에게는 쓴맛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수필의 전반에는 봄 들녘에 피어난 제비꽃 무리처럼 찾아야 볼 수 있는 소박한 누이만의 정취가 있다.
그 정취는 도저히 디지털적이지 못하다.
그러기에 누이의 아니로그적 삶에는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수필의 향을 맡는 것은 아닌지.
누이가 가진 보자기만큼의 여유로움을 탐닉하고 나니 한나절 나른해진다.

류권현(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