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나는 비에 젖은 글들을

헹구지도 않고 여기저기 널고 있다.

빨리 빨래나 걷으라고 다급하게 짖어대던 갑순이.

갑순이는 지금 어디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박완서
가장 나종에 남는것

어미와 아들
20년만에 만나

'좋아보이시네요,
너도 그러네'


부모와 자식이 그리될수도 있구나

매일 하루에 열번 스무번
전화해서 전화가 고장났어

고장이 안 났기 때문에 지금 통화하는 거라고,

매일 같은 말을 하루에도 수차례씩 한다.

아니다” “기다”, 급기야 소리지른다.

이게 너하고 이승에서는 마지막 전화지?” 되물으신다.

몇십년만에 듣는 목소리처럼,

목소리 들어 반갑다
전화가 고장났다고, 고장타령한 지가 5년은 넘었다.
일상의 전화가 지척에서 혹은 마주앉아서도 똑 같다. 

어제도 가나안 요양병원에서

유리벽을 마주하고 1미터 지척에서 얼굴을 보며 전화로 이야기했다.

코로나가 펼쳐준 신풍속도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도 서너번 전화하여  '징징~ 징징' 대신다. 

전화가 고장나서너에게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못한다고.

 

전화가 고장나지 않아도 20분거리에 있는 내자식도 오지 않는다.

나도 20 후면,  마주앉아서도 "전화가 고장났다"며
목소리 듣고싶다고 하소연 하는 날이 있을까.

자궁 안에 있는 아이도 어미도 서로가 그립다. 전화는 탯줄이다.

 

박정자는 연극에서

A 죽기 직전에

20년만에 찾아온 아들을 만나는 장면을 가장 인상 깊었다고 꼽는다.

"어머니가 죽을 때가 되니 아들이 찾아와.

그런데 사람의 대화가 처음 만난 사람처럼 덤덤해.

'좋아보이시네요', '너도 그러네'.

자식과 부모가 거기까지 있구나. 이게 인생이구나."

 

나는 아직인생을 모른다.

훗날을 짐작만 해도 답답하다.

오늘은 바람개비를 사러 나가야겠다.

내뿜어야 살것만 같은, 내 심호흡이 가장 먼저다.

판결과 정의

대법원의 논쟁으로 한국사회를 보다

김영란 지음

 

1956년 부산 출생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부터 판사로 일했다. 2004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대법관이 되었다.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여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영란법, 김영란에게 묻다』 『문학과 법』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등이 있다.

 

197991.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시작. 두 반을 통틀어 여자연수생은 혼자였다. 198191. 서울민사지방법원의 판사로 부임. 결혼, 출산, 육아 등등 끊임없는 개인사와 함께 판사로서의 업무도 매너리즘 속에서 날들이 흘러갔다. 1986년 부산지방법원 부산 최초의 여성판사로 부임했다.

10년의 판사생활 동안 사건에는 정답이 있고 판결은 선택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왔는데, 대법원에 와보니 판결은 선택이 되기도 했다.

 

가부장제 변화의 현재 -

가부장제는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인류 발전단계의 한 형태. “아버지가 그 자녀에 대하여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처벌권한도 가지고 있다.” “딸을 출가시키거나 아들이나 딸 어느 쪽의 자녀들이라 하더라도 이혼시킬 수 있으며, 다른 가()에 입양시킬 수도 있었고, 심지어 그들을 팔수도 있었다.”

한편 혼인으로 가장은 부인의 인격 및 재산에 대한 여러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가장이 부인에 대한 권리를 얻게 될 때, 특기할 점은 그가 남편으로서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신분을 얻는다는 것이다. 부인이 가장의 딸과 같은 지위에 있다는 것, 가장은 부안을 합법적인 가부장의 통제아래 두게 되었다.

 

가장 강고한 위계질서 - ‘가족적인 분위기와 질서를 내세우는 많은 집단들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의 폭력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족적인 질서는 가장 느린 속도다.

 

조금씩 변화하는 판결의 방향 - 가족 내 가부장 질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아들과 딸 등 여러 관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작동한다. * 제사를 주재하는 자로 딸과 아내보다 아들과 손자를 우선시한 대법원 판결은 * 어머니보다 아들을 우위에 두었다. 이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제사를 모시는 사람으로 딸이나 처보다 아들이나 손자의 지위를 우선시하는 것이 사회통념이라고 판단함으로써 남자와 여자 사이의 위계에 대한 전통적인 사고를 공고하게 했다. (P25사진 - 미친, 꼬라지! 2019년 우리 집도 이 짓! 여자는 제사를 차리는 도구. 큰 동서의 밥은 손아래 동서들. 미친! 그러나 나는 솔을 치지 못한다. ‘은 나에게 너무도 높은 음이다.) 여성은 그동안 제사에서 철저하게 도구의 영역에 놓였을 뿐, 주재자로 자리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구도는 나라가 보장하는 합법적인 차별이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차별은 곳곳에서 답습되고 있다. (우린 아직도 제사가 끝나고 음복할 때도, 여자 남자 따로 밥을 먹는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만 해도 손자들까지 다 먹고 난후, 부엌에서 여자들만 따로 먹었다. 그렇다면 물질적 분배는 고르게 되었는가. 말하지 못한다. 그래 그래, ‘를 치려고 하는데, 낮은 로 손가락이 간다. 이제 장손으로 넘어가기만 기다린다. 그러면서 설 추석 제사 비는 왜 받는지, 그 것을 알고 싶다.)

 

여성을 문중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기 시작함으로써 부계혈족과 모계혈족을 차등하지 않는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적용될 수 있다는 판결도 사회 통념의 변화가 법정을 변화시킨 대표적이 사례가 될 수 있다.

 

부부 사이에 폭행,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성관계를 감내할 의무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혼인이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포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고,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을 인내하는 과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인지 감수성, 단지 피해자의 감성인가 -

판사 시절, 어떤 남성이 내게 마거릿 대처 수상은 한 나라의 수상인데도 매일 남편의 아침 식사를 차려준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라고 말했었다. 사실 그 말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맞벌이 여성들이 대처 수상만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말이었을까?

 

그들은 소녀로 살아본 적이 없다 - (37쪽 사진. ‘사바나 레딩 새포드 교육구 사건판결 당시 브라이어 대법관의 발언 - 성인지 감수성이 지위 고하와 상관없이 배우고 훈련해야만 발휘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대법관조차도 속옷을 벗는 것이, 어째서 이토록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아이들은 체육시간마다 옷을 갈아입지 않던가요? 제가 여덟 살, 열 살, 아니 열두 살 때였는지는 몰라도, 하루에 한 번 옷을 갈아입던 기억이 납니다.” 여성 대법관이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듣다못해 그 속옷을 남이 벗겼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브래지어까지 벗어서 흔들어보라는 요구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후 긴즈버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그들은 열세 살 소녀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민감한지, 전혀 모른다는 거죠” (신세계백화점 반디앤루니스에서 잠시 앉아 읽다가 읽다가 나는 울면서 나왔었다.

*** 그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혐오스러운 일인지, 남자 또는 가부장제에 세뇌된 여자 같은 대법관이 알 턱이 없다. 친아비도 어미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쁜 아비 나쁜 어미) 대법원은 소수의견 없이 학교가 레딩을 알몸 수색한 것은 헌법에 위반되는 행위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결코 똑같지 않다” - ‘감수성의 정의는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이다. 감수성이라는 용어는 감성이나 감정과는 달리 예민함이나 감도(感度)’라고 할 수 있다. 지배적인 성적 고정관념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을 성인지 감수성이다.

 

민주주의에 도구는 민주적인가 - 많은 사람이 이제 이 정도면 민주주의는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조직들의 내부로 들어가면 그렇지 않는 경우를 많이 발견하다. 공적인 성격을 지니는 기존의 정당이나 여러 기관조차 전혀 다르지 않다.

 

계약이 법보다 우선할 수 있는가 -

가습기살균제와 같은 위험한 생활용품 등은, 시판하기 전에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실험을 미리 거치는 것보다, 문제가 된 이후에 배상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면, 제조업체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생명이 달린 문제가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높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며, 이에 따라 약자들은 정치가의 말을 조금도 신뢰하지 못하고, 법률에도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법의 제도적 기능은 각자의 행위가 상식을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기준

 

의 자유방임에 책임은 없는가 -

강원 랜드. 베팅 한도액은 1회 최고 1000만 원이다. 그럼에도 이곳 딜러 등 직원들은 원고가 이른바 병정’(타인의 돈으로 타인을 위해 베팅만 대신해 주는 사람)을 이용해 최고 6000만 원까지 바카라 게임에 베팅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도박은 처벌이 되는 금지행위인데도, 국가가 폐광지역을 살리려는 목적으로 카지노를 조성하도록 허용한 이상, 좀 더 적극적인 보호책을 서야 한다고 보았다.

대법원의 판결이 자기책임의 원칙을 내세워, 카지노이용자보다 사업자를 보호한 결과를 가져온 데 있다. 자기책임의 원칙을 들어, 우월적 지위에 있는 한쪽 당사자와 다른 쪽 당사자를 대등하게 봄으로써, 결과적으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쪽 손을 들어 주는 판결.

의존식 계약이나 통제식 계약. 자유와 책임을 빼앗지 않은 채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즉 충성이 작동하는 새로운 변종 계약.

***개인들은 자기책임 하에 계약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대구조 속에서 주어진 선택자만을 가지고 게임을 하는 것. 공적 행위가 계약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매 학기마다 도서관 강사 이라는 복종계약을 내가 하고 있다.)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 독일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 알제리 등 여럿 있다. 독일의 나치즘, 프랑스 나치독일의 침략, 스페인은 프랑코의 통치, 러시아는 스탈린 독재,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군부독재, 남아공은 흑백 인종차별주의, 알제리는 프랑스의 신민지배의 역사적 경험이 과거사 청산의 과제가 되었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 남아공의 경우. 스스로 나서서 사실을 털어놓은 가해자에 대해서는 처벌이 아닌 사면을 제공하고, 민사적 책임까지 면제해주기로 결정한 점이다. “과거정권에서 저질러진 불법행위를 밝히는 동시에, 정권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20059월 취임사에서 권위주의 시대에 국민 위에 군림하던 그릇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고 했다.

2007년 유신시절 긴급조치 판결에 참여한 판사 492명의 실명을 공개, 방식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우리 사법부의 과거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2009년 말, 사법부가 역사 속의 사법부를 펴내면서 주요 시국사건들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그쳐버렸다. 용두사미에 그친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사법권의 독립이나 법적안정성이라는 기존의 가치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만 이루어진 결정이다. ‘고수해야 할 가치가 과거사 청산이라는 한계선을 긋게 한 것.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 - 2011년 정신상의 손해배상부분을 달리 보아야 한다고 판결하기 시작했다. 인혁당사건 피해자들의 경우, 77명에게 가지급된 위자로 491억여 원 중, 210억 원을 되돌려 줘야 하게 되었다.

 

또다시 박근혜 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국정원은 한술 더 떴다. 201377명에 대해 가족별로 동시에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을 걸었다. 국정원은 삭제된 30여 년 치 이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은 기간에 맞춰 연체이지까지 갚으라고 요구했다. 법원은 끝내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20%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연체이자율도 그때부터 적용됐다. 인혁당사건이 벌어진지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국가의 억압은 경제적 고문의 얼굴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김우종 선생이 2억 원을 박근혜 정부에서 반환을 이유로 착취해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과거사에 대한 사법부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은 양승태 대법원장 취임 이후부터 정리의 수순을 밟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청산 노력이 용두사미에 그쳐버렸다는 평가에서 힘이라도 얻은 듯, 과거사 문제를 덮는 수순으로 진행되는 조짐이 곳곳에서 보였다.

세상모르는판사들이 빠지는 함정 - 실용주의적 판결을 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로스쿨에서는 법관에게 작용하는 동기와 제약, 법관을 제한된 지성으로 불확실성의 바다를 항해한 인간이 아니라, 마치 컴퓨터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법관도 자연스레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자기 앞에 제출된 사건만 판단하는 데 익숙해지게 되고, 이는 법관들을 기이한 수동성에 빠뜨리게 된다.

 

변호사나 교수 등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판사가 되는 영미법 국가와는 다르게 * 우리나라는 그동안 직업 법관제를 채택해왔다. 직업 법관제란 경력의 전부를 직업법관으로 일하는 법률가들로 법원이 구성되는 시스템”. “법전이 정확하고 상세할수록 법관이 자신의 정치적 또는 기타 개인적인 선호에 빠져들 가능성이 작아진다.” 직업법관제 아래에 있는 법관들이 “‘때때로 입법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화된 영역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법리들일 뿐, 그 법리들과 그 법리들이 규율하는 제반 행위들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경향법률가들이, 때로 법만 따지고 현실을 무시하는 판결을 한다는 지적은, 바로 이런 법교육과 직업적인 법관으로서의 폐쇄성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정치적 판결, 무엇이 문제인가 -

삼성엑스파일 사건 판결의 다수의견이 정당행위의 해석을 종래의 해석보다, 훨씬 더 좁혀서 해석하고, 그 결론에 대한 책임은, 결국 고 노회찬 의원만이 지게 되었다. 2013214일 판결확정으로 국회의원 직을 상실하게 된 노회찬 의원은, 2016년 경남 창원시 성산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다시 국회로 돌아왔으나, 국회를 떠나 있던 기간 동안 받았던 정치자금이 문제 되어, 유명을 달리했고, 노회찬 의원의 죽음으로 반짝 떠올랐던 정치자금 문제는 다시 수면으로 가라앉아 잊힌 것처럼 보인다. (201쪽 사진. 노회찬 의원의 신념과 행동은 지금 우리 사회와 정치의 투명성에 대한 화두로 남아 있다)

 

 

판사들이 피할 수 없는 정치적 판단 -

힘과 힘이 겨루는 마당이며, “소수파는 자신이 틀리다는 점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소수파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복한다.”

 

*** ‘판결과 정의를 내고 인터뷰 내용

김영란 왈 : ‘개천에서서 용 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판사가 되는 문도 좁아지면서 상류층 비중이 커지고, 그들이 내리는 판결도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관해 김 전 대법관은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어려워지는 사회는 발전 없는 사회라는데 동의하며, 개천에서 용을 나게 하는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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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생. 나도 56년생이고 남편도 56년생이다. 둘 다 병신년에 태어났다. 나와 남편을 빼고, 1956년생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김영란이 있고, 최순실이 있고, 손석희도 있다. 해방둥이도 사변둥이도 58개띠들의 왈왈 산업의 주역도 아닌, 주목받지 못하는 56년생 낀세대다. 딱히 일궈낸 업적의 지칭대명사가 없다. 사회에서 인정을 받기보다 각자 스스로에게 훈장과 벌을 준다. 본래 병신년 원숭이는 자신이 재주를 부려야, 그나마 누군가 힐끗 쳐다봐주는 어설픈 몸짓을 지녔다.

그중 56년생 나는 혹시 나에게 너는 출신성분을 잘 타고 났다면, 누구처럼 살래? 라고 묻는다면, 예술의 종합적인 안목을 지니지 못했으니 난타를 두드릴 수는 없고, 국정농단을 할만한 배경도 베짱도 없으니, ‘정의의 길을 향하여 깃발을 들것 같다. 그러나 그 위치를 올라가려면 일백 번 고쳐죽어도 오르지 못할 고지다.

김영란, 같은 여자로서 같은 나이로서 멋지다. 그리고 그녀의 행적에 대하여 존경한다.

가장 나종에 지니인 것

 

박완서


아이들 엄마가 전화를 했다. 언제나 전화를 거는 쪽은 나였고, 전화 통화를 하더라도 언제나 혼자 마냥 지껄이다 끊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형님이 몸소 나에게 전화를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형님은 나와 전화통화를 때면 언제나 인기척 없이 나의 말을 듣고만 있다. 내가 형님에게 듣고 있냐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형님은 듣고 있다며 계속 얘기하라는 말만 할뿐이다. 형님은 그저께가 증조모님 제사였는데, 어찌 미리 자신에게 기별이라도 하지 않았냐며 몹시 언짢은 기색을 보이신다. 형님도 잊어버렸으니, 이번 제사는 지내고 넘어간 셈이다. 형님은 집안의 대소사를 며느리에게 믿고 맡기지 못한다. 그러니 며느리도 자신의 친정집 대소사는 챙기면서도 정작 시댁 증조모님 제사는 잊고 넘어가기가 다반사인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제사를 사대까지 지낼 필요 없이 이대까지로만 줄이는 것이 어떠냐고 형님께 말씀드렸다. 가정 의례준칙에도 이대까지만 지내도록 되어 있다는 예까지 들어가며 설명 드렸다. 나는 내가 형님께 알려 드리지 않으면 형님이 제삿날을 잊어버릴 몰랐다. 나는 다만 제삿날을 사흘이나 나흘쯤 앞두고 나박김치 담으러 날을 의논드린다는 자연히 제삿날을 아는 척하는 구실을 했을 뿐인데, 형님은 나만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 숫자 외우는 일을 못한다. 얼마 전에는 외출해서 집에 늦게 들어갈 것이라고 딸자식들에게 전화하려고 했다가 전화번호를 잊어서 한참을 고생했던 적도 있다. 거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나 요상하게 춤추는 불빛들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환상 같기만 했다. 아이들은 전화도 걸고 늦었다고 나에게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이들에게 나는 전화번호를 잊어버려서 전화 걸지 못했다는 말은 차마 하기 싫어 그냥 잠자코 있다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창희가 방까지 쫓아 들어와 오빠 죽은지가 벌써 년이나 넘었는데, 아직까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서 살아 있는 딸들마저 이렇게 마음 고생만 시키냐고 퍼붓는 것이다.


나는 한번도 죽은 창환이의 목숨을 제까짓 딸년들과 비교하거나 바꿔치기 한적이 없다고 형님께 말했다. 창환이는 전무후무한 하나뿐인 창환이고, 아무하고도 비교할 없이 잘났기 때문이다. 하긴 내딸을 나무랄 것도 없다. 내가 창환이를 잃고 나서 친척이고 친구고 멀쩡하게 아들 기른 사람들이 나에게 괜히 미안해했다. 아들 자랑하다가도 앞에서는 다물고, 장가보낼 나한테 청첩장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것이다. 나랑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 동창 명애만 하더라도 우리 창환이 죽었을 , 그렇게도 슬퍼했으면서 막상 자신의 아들이 장가갈 때에는 나한테 쉬쉬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렇게 창환이의 죽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을 당하는지 형님께 물었다. 나는 명애의 아들 결혼식에 가서도 환하게 웃으며 늠름하게 행동했다. 그런 여느 아이들은 창환이와 비교도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민가협 엄마들 덕에 의식화 덕분도 있어서 우리 창환이가 법관 보다 백배는 잘나 보였던 것이다.


형님 역시 우리 큰조카 창석이 결혼식 나에게 큰형님과 똑같은 예단을 오라고 며느리에게 시키고, 폐백 들일 때도 형님과 나란히 앉혔지만 과부가 나란히 앉아 있던 일도 다소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창환이를 창석이와 비교하는 마음을 가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창석이는 80년에 대학 들어가서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알바 없이 공부만 팠다는 사실에 인간성이 의심스럽지만, 우리 창환이는 창석이 보다 삼년 뒤에 대학에 들어가서 캠퍼스의 최루탄 냄새를 괴로워했다. 창환이는 운동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단순 가담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엔 나도 억울했다. 그놈의 쇠파이프가 앞장 열렬한 투사들 제쳐놓고 하필이면 우리 창환이를 택했는지도 없었다.


창환이의 죽음으로 인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집단의 열정 속으로 휩쓸리는 것이었다. 형님도 알다시피 백만학도가 창환이의 장엄한 장례식에 찾아와 창환이를 열사로 떠받들었다. 중요한 창환이가 운동권이었는지 아니었나가 아니라 죽음까지 횃불로 삼지 않을 없을 만큼 시대가 깜깜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후로 중요하게 생각해 것이 하나도 중요해지고, 하나도 중요하게 여겨 것이 중요해 지게 되었다. 증조모님의 제사도 중요하지 않아진 일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형님은 나에게 제삿날 말고 중요해진 뭐가 있느냐고 묻지만 그건 이루 말할 없이 많다. 이제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형님께 우리가 모진 세상을 살아온 것도 같다고 얘기하자 형님은 여지껏 꿋꿋하게 버티기에 극복한 알았더니 이제 와서 약한 소리냐고 한다. 그러나 정말 힘들었던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인지 모른다.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 명애가 나를 고등학교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동창의 달동네 집으로 데리고 갔던 적이 있다. 친구의 아들은 년전에 차사고를 당해 뇌와 척추를 다친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겹쳐 반송장의 상태로 단칸방에 누워 있었다. 오랜 병구완의 끝이라 가산도 탕진한 상태에서 친구는 우리 동창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파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명애는 죽는 보다 못한 꼴을 위로 받으라고 나를 거기까지 데리고 갔던 것이다. 아들에게 우리가 사간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이고 , 친구는 아들의 몸에 욕창이 생길까 널찍한 위에 누워 있는 아들을 공기돌 굴리듯이 이리 저리 굴렸다. 장대한 아들을 자유 자재로 굴리면서 바닥에 닿았던 부분을 마사지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친구가 하는 것을 도우려고 손을 내밀었다.


바로 순간 우리의 손이 몸에 닿자마자 환자가 이상한 괴성을 질렀다. 여지껏 흐리멍텅 공허하게 열려 있던 환자의 눈이 난폭해 우린 손이 오그라붙는 같았던 것이다. 그때 이전까지는 아들을 악다구니 받친 태도로 대하던 친구의 표정에서 씩씩하고 부드러운 자애를 읽을 있었다.


나는 별안간 친구가 부러워서 어쩔 몰랐다. 남의 아들이 아무리 잘나고 출세했어도 부러워 한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때까지 참고 참아 왔던 울음을 복받치는 대로 쏟아부워 버렸다. 울음을 통해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며칠 동안은 울고 싶을 우는 낙으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고 형님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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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글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이나 있었는지, 몇번을 읽었다.

박정자의 모노 연극도 보고 싶다.

 

 

호련 瑚璉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선집

류창희 2020. 11. 5. 21:54

 

 

 

호련 瑚璉

제 16회 구름카페 문학상 수상

 

2020년 10월

 

 

 

 

수필을 벗 삼고

수필을 스승 삼는다.

 

 

류창희 柳昌熙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고,

부산시립도서관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논어강독講讀을 하며 노닐다가

'코로나 19'로 잠정 언택트하다.

2001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매실의 초례청- 현대수필문학상.

문화체육관광부 표창(2010)

 

논어에세이 빈빈- 2015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내비아씨의 프로방스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16구름카페문학상’ - 선집 호련이 있다.

rch5606@hanmail.net

 

 

 

 

 

 

 

 

문학인은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불을 밝힌다.

무디어지는 펜촉을 어루만지며

감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 노력의 결과가 수상의 영예로 이어질 때

'구름카페 문학상'은

자기가 갈고 닦은문학세계에 대한 보상이며 보람된 일이 된다.

- 윤재천 (한국수필학회 회장)

 


26 구름카페문고  /  호련 瑚璉

류창희 에세이   /   문학관 books


 

호련 瑚璉

뼈와 살 사이에 있는 틈을 젖히는

칼 다루는 법을 익히고 연마하여,

글이 예리하기는 하지만 부드러워서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며,

복잡하기는 하지만 재미있어 읽어볼 만한

포정해우庖丁解牛같은 글을 쓰고 싶다.

- 류창희의 「욕파불능 欲罷不能중에서

 

 

 

 

<구름이 사는 카페>

윤재천 *

 

특별한 인연이 없어도 살갑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면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된다.

그의 체취가 자기 주변에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받아 잃었던 삶에 활기를 회복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집착에서 비롯되지만, 그 순기능 順機能 을 생각하면 애써 기피할 필요는 없다. 저마다 현실적인 문제에 매달려 정신을 쏟다보면 소중하게 생각되던 것마저 범상하게 여겨져 허허벌판에 혼자 있는 것 같은 공허감에 빠져들다가, 이전의 기억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 그 실체와 마주치게 되면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에 들뜰 때가 있다.

지금은 흐른 세월의 무게가 감당하기 어려워 겨우 흉내만 내지만, 이전에는 틈이 날 때마다 산에 오르고, 기회가 있으면 짐을 챙겨 길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소담한 모습으로, 자신만이 만들어내는 빛깔과 향내를 뿜어내며 서 있는 풀꽃을 비롯해, 지친 삶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과 만나 살아가는 숨결을 통해 순박함을 느끼기 위해서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오히려 정이 가는 것들, 나는 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보려고 애를 쓴다.

주말이면 동료들과 어울려 강원도 이름 없는 산 정상에 서 보기도하고, 관악산 바위 위에 걸터앉아 보기 위해, 곳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들과 이웃이 되기 위해, 그들 속에서 같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다.

그때마다 짐을 챙겨 더 가야할지, 서둘러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야 할지, 마음을 결정하는데 절대적 기여를 했던 것이 구름이다. 그는 내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말없이 그윽한 눈빛으로, 또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의사를 특유의 얼굴로 피력하곤 한다.

늘 나를 내려다보면서 내 짙은 외로움을 삭이는 일에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구름 - 구름은 내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이며,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던, 같은 구름으로만 보였다.

구름에 매료되고 동화되기 시작한 것은 1989 년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서 트랩을 내려오며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부터다. 영원히 와볼 수 없을 곳이라 생각했던 나라에 왔는데, 구름은 이미 먼저 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버릇처럼 바라본 하늘에서 조금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 구름의 표정,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다그쳐 물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말을 내게 하고 싶어 했다.

그 땅에도 구름이 올 수 있고, 코발트 빛깔의 하늘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곳을 여행하는 동안, 나는 줄곧 구름을 바라보는 일에만 열중했다. 보고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아서다.

내가 아호를 운정 雲亭 ’ - 구름 자에 정자 자로 하고, ‘구름카페 의 주인이 되고 싶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넓은 창과 길게 드리운 커튼, 고갱의 그림이 원시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무딘 첼로의 음률이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의 짙은 향내를 느끼게 하는 곳에서, 구름과 마주하고 싶어 붙여진 이름이고 소망이다 .

이것은 이미 내 마음 안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이기에, 소망이 아니고 현실로서의 카페다. 어려움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 마음 안에 그런 장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이 구름과 다르지 않고, 여생 동안 그와의 동행을 거부할 의사가 없다.

아무 말 없이 흘러가는 대로 가다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그리움을 삭이고, 분노를 빛과 소리로 분출하는 구름, 나는 비가 내리거나 번개와 천둥이 주변을 어지럽힐 때면 그의 표정을 살피며 한동안 카페의 넓은 창을 통해 서 있곤 한다. 울음이나 감정의 폭발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어서다.

훗날, 가능만 하면 나는 구름으로 태어나고 싶다.

내가 그동안 쓴 글이나 누군가와 나누었던 말, 상대를 의식하며 평생 동안 했던 강의까지도 구름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싶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인식되고,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상관하고 싶지 않다. 이미 나를 떠나 허공에 흩어진 것들이다. 그들이 비가 되어 목마른 생명의 목을 적실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 분노도 혼자만의 답답함이고 안타까움일 뿐,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구름처럼 살아온 것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누군가를 찾아 동행을 권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만족하며 살려고 한다.

맑은 날이면 밝은 차림으로 길을 나서서 갈 수 있는 데까지 유유히 산책하고, 물을 필요로 하는 생명이 있으면 어디선가 물을 가져와 생명을 살리고 싶다. 그러다 지치면 카페로 돌아와 조용히 쉬고 싶다.

어느 정도 피곤이 풀리면 그 자리에 장미 한 송이만 가져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 연약한 사람들을 초대해, 오래된 포도주를 꺼내 그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차를 끓여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싶다. 그들의 환한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촛불이나 등잔에 기름을 채워 불을 붙여놓을 것이다.

이것이 내 소망이다.

이제 무엇이 더 필요한가.

내 문학은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다.

지금도 구름이 내 곁에 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를 위해 어떤 준비도 할 필요가 없다.

일상의 모습처럼 그와 마주앉아 서로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작가 소개 >

1932 년생. 경기도 안성, 전 중앙대 교수. 한국수필학회 회장.

혁신적인 이론과 자유로운 정신, 수필문학의 창조성에 대한 열정과 예술을 한다는 것엔 무엇보다 순간순간 새로워져야 한다는 철칙을 가졌다.

계간 <현대수필 > 발행인

저서로는 수필문학론. 수필작품론. 현대수필작가론. 운정의 수필론, 수필집으로는 나를 만나는 시간에’. ‘청바지와 나’. ‘구름카페’.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 ’( / ). 등이 있다.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하여

맡고 있는 정기 강좌들이 셧다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업종이

'일단 멈춤'이다

 

지난 달, 해운대도서관의

<메타논어 논어에세이> 면대면 강의를 시작했으나,

나도 수강하시는 분들도

발열체크 핸드폰번호 인적사항 마스크 동선 등등

수강인원도 15명으로 제한되었다

 

집에 함께 사는 딱, 한 사람

그 분 마음을 사로잡기가 가장 힘들듯

적은 인원이 더 힘들다

 

이런 와중에 강연 제안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움직일 참이다

강의가 또 수강생이

내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귀한 사람들인지

고마운 마음을 담는다

 

 

 

2020 여성 문화예술 아카데미

부산광역시 여성문화회관

주제 : 업글인간 프로젝트

 

본래 150석인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하여

띄엄 띄엄 30명을 모신다고 한다.

 

 

 

 

 

 

 

 

 

 

비록, 투명 마스크를 끼고 강의하고

모두 마스크로 패션을 완성했지만,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함을 전한다. 

 

메타논어 타타타 메타

류창희 지음  /  선우미디어 2019

 

수필의 돛을 세운 항해에서

 

나만의 패턴을 담은 수의 한 벌 마련하고,

'쓰다가다' 그거면 됐다.

혼백의 닻을 내리는 그날까지,

타타타~ 메타!

 

 

 

논어 강독을 20년 넘게 하고 있는

저자 류창희의 두 번째 '논어에세이'다.

 

2,500년 전의 논어구절을 접목하여

문학적 <메타논어>로 완했다.

 

지은 책으로 <매실의 초례청> 

논어에세이 <빈빈> <내비아씨의 프로방스>가 있다.

 

 

 

 

 

 

 

 

수필을 벗 삼고, 수필을 스승 삼는다. 

글은 나를 감싸주고 품과 격을 입혀주는 혼이다

글의 스타일도 빼어나게 잘 쓰기보다 타타타तथा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여 眞如하게

한편의 수필답게 잘살기를 꿈꾼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미니 멀 라이프 연구회 지음 / 김윤경 옮김

 

 

 

프롤로그 - ‘최소한을 뜻하는 미니멀

 

청소, 이쪽에 자리 차지하고 있던 물건을 저쪽으로 옮기는 것.

 

지금 설령 가격이 비싸더라도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고른다.

 

방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 불필요한 물건을 갖지 않는 것.

단샤리(斷捨離 요가 수행법인 단행 사행 이행에서 따온 말로 일상생활에 불필요한 물건을 끊고, 버리고, 멀리하는 의식과 행동)

 

물건이 적은 상태에서 생활해보니 어라? 물건이 적어도 뜻밖에 쾌적하네!’

예를 들면 그녀는 직장에서 일할 때 입는 옷은 두 가지 패턴으로 제한하고, 구두도 네 켤레밖에 없다.

미니멀 리스트들은 사복의 제도화라고 부른다.

옷이 적으니,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단정한 차림새셔츠는 반드시 다림질해서 입고,

구두도 늘 깨끗이 닦고. 진정한 멋을 즐기고자 한다.

 

온갖 물건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 살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방을 정리하면 마음 까지 정리되는 효과.

 

좋아하는 일에만 시간을 쓴다.

꼭 필요한 물건만 남겨둔다.

소유물이 적을수록 자유롭고 좋은 건 분명하지만, 그로 인해 생활이 곤란해지는 걸 바라진 않는다.

전부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건은 남겨두고 단샤리.

 

* 물건으로 나를 과시하지 않는다 - 내게 필요한 물건인지 경계선은 일 년과감히 버린다.

기호(記號), 물건을 소유한다는 건 결국 사회적 신분이나 계급과 연결되는 기호를 가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미니멀한 생활에 눈뜬 계기는 동일본 대지진 (나는 바하보러 아이파크로 오면서).

 

미니멀리스트가 뭘까?

침낭에서 잔다.

짐은 여행용 트렁크에 들어갈 만큼만 갖는다.

홀가분하게 살기 위해 집 크기를 늘리지 않는다.

 (지금은 투룸이지만 다음은 원룸, 그 다음은 요양원 침대하나, 그 다음 다음은 ....)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내가 잠자는 방을 나의 작업실로. 그러기 위해서는 심플하게)

(집에 놀러온 친구가 목소리가 울려

 전에 메트로시티에 오는 사람들은 이사 갈건가? 이사 온 건가?” 물었다.

그 정도로 집안을 휑하게 치워놓고 살았다.

 

나의 부엌을 보고 모델하우스 같다며,

밥은 해 먹고 사느냐고 물었다.

밥뿐만 아니라 김장 오이지 장아찌 매실청 등 무엇이든 해먹고 살았다.)

미니멀리스트로 살고부터는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정말로 하나도 없다.

 

물건을 버리면 마음의 부담도 함께 가벼워진다.

*** 타인의 서선에서 벗어나 마음 편하게

 (집에 절대 누구 부르지 않겠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모두 다르다.

나와 다른 생각일지라도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더 힘이 나고 열심히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최선

(골동품 수집, 책을 도서관처럼, 아이들 추억을 더듬으며 살기, 아무튼 모으는 게 취미, 취향과 가치관의 차이)

정리의 시작은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

 

깨끗하면서도 불편하지 않게 - 정리하기를 좋아해야만 방이 깨끗해진다.

청소는 귀찮아하면서 깨끗한 방에 살고 싶어 하는 건 있을 수 없다.

근육 트레이닝도 중요한 일, 패션업계에서 살이 찌면 해고된다는 말, 반은 농담 반은 진담. 꾸준한 자기 관리.

방을 심플하게 바꾼 것이 규칙적으로 생활하게 된 이유.

이를테면 어디론가 사라질 수 있는 상태.

(가출하거나 죽고 싶어도 정리되지 않은 나의 서랍, 옷 방, 냉장고, 서가 또는 컴퓨터 프로그램 등.

그래서 집, 구석, 구석에 미련을 담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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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

이 책 내용의 반은 사진이다.

읽는 책이 아니라 보는 책이다.

2~30대에 독립하여 처음 직장에 나가는 싱글 젊은이들 책이다.

 

아이들 다 독립시킨 나도

남편과 더불어 각자 방하나, 거실하나에 정착했다.

 

 

렌트카 한 대 빌려, 이 나라 저 나라 둘이 여행하면서

"원텐트 투피플"로 슬리핑백 하나, 2인용 전기밥솥 하나로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사진이나 찍으며

프로방스 추억하듯, 일상생활도 그렇게 살고 싶은 꿈은 있었다.

 

그런데 매일 손자 보는 돌보미를 하고 있으니,

식사거리(아들 손자, 며느리)는 물론 기저귀와 휴지 옷 장난감이

주방과 거실에 갈수록 한 살림이다.

 

그래도 2년 전에 살림의 최소화를 실천했다.

장롱, 문갑, 서랍장, 피아노, 책장, , 이불, 그릇들을 거의 정리했다.

4개에서 2개로, 아파트 평수를 반으로 줄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실내가 휑하여 넓더니

요즘은 점점 좁아진다.

살림에, 생활에,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의지가 비장해봤자,

머지 않아 관 하나로 들어갈 텐데,

미리 유난 떨며,

스트레스 받으며,

억지로 적게 가지려고 궁상떠는 것도

부질없다.

 

* 나의 친정엄마도 지금, 살림 다이어트 중이시다.

삶의 다이어트다.

아프다, 이참, 저 참!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임경선 에세이 / 예담

 

서문 - 왜 어떤 가게들은 일부러 드러나지 않게 골목에 꼭꼭 숨어 있을까. 교토의 역사와 토양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습성, 일관되게 지켜온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 결코 변지 않을 어떤 의지와 마음가짐들 그리고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교토 고유의 정서들. 교토와 교토 사람들은 자부심이 드높았지만 동시에 겸손했다. 일견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강인.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인을 향한 예의를 중시.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결코 무리하지는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스스로 만들어갔고, 끝없는 욕망보다는 절제하는 자기만족을, 겉치레보다는 본질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감. 도쿄가 감각의 도시라면 교토는 정서의 도시. 살아가면서 생각의 중심을 놓칠 때, 내가 나답지 않다고 느낄 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 마음을 비워낼 필요가 있을 때, 왠지 이곳 교토가 무척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사색을 위한 기차 - 기차는 철도 위를 빠짐없이 꾹꾹 밟으며 달린다. 그 타협 없는 반듯한 전진 덕분에 원래 살던 장소에서 가장 멀리 가고 있다는 아득한 기분에 젖는다.

혼가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여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이야기를 내면에 숨겨놓은 것만 같다.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상기된 모습은 너무 애틋해서 그 모습 그대로 지켜주고 싶어진다.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에서 교토 시로 들어가는 기차의 이름은 하루카’. 기차가 사람들의 일상 공간 사이로 태연히 다닌다.

풍경 자체에선 생활감이 물씬 풍기는데 정작 그 풍경에 사람이 빠져 있다.

 

알고 찾아가는 정성 - 겨우 보일락 말락 한 흰색 글자, ‘io plus'. 어쩌면 이렇게 숨바꼭질하듯 찾기 어렵게 만드나 싶은 원망과, 드디어 찾아 낸 기쁨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일부러 눈에 잘 보이는 간판을 달지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찾기 어렵도록.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가게를 만들고 싶었어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에게 더 정성껏 집중하겠다는 태도는 단순히 물건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목적의식이 아닌, 손님과 가게의 인연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이 책의 글자크기 색깔도 그렇다. 내 나이, 내 눈으로는 돋보기 끼고도 좀 힘들다)

사람이 많이 몰리다 보면 주인이 원치 않는 유형의 사람들도 와버리고 일도 번잡해져, 자신이 바라던 서점의 모습을 잃을까 봐 우려했다. 지나다 우연히 들르는 손님보다 이 서점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일부러 찾아와주는 손님을 편애하기로 했다.

개인의 가게는 그 개인 고유의 삶의 방식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정교한 안목과 단단한 자부심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태도다.

만나야 할 인연은 어떻게든 반드시 서로에게 닿을 운명이기에.

 

세월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 10, 20년 된 가게는 아예 명함도 못 내민다. 최소한 3대에 걸쳐 지켜온 가게라야 교토에선 노포: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시니세)라는 영예로운 호칭이 주어진다. 노포가 의미하는 것은 신용이다. 한눈팔지 않고 전통을 지켜온 가게가 있고 거기에는 일편단심인 손님들이 존재한다.

내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자기 가게만의 고유한 색을 지켜나갈 뿐이다. 녹이 슨 듯한 세월의 흔적, 향수 어린 감성을 교토는 더 가치 있게 여긴다. ( 글도 삶도 이렇게 살고 싶지만)

가령 노포의 현관문을 열거나 장막을 걷고 들어갈 때 먼저 말을 거는 쪽은 가게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이렇게 손님이 먼저 가게 안쪽의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묻고 입장하는 것이 교토의 예절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인간 대 인간, 면 대 면으로 가치를 주고받는 진중한 행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수제품을 더 가치 있게 여겨 선택하는 것이 교토 사람들일 것이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는 것 - 동네 단골로 보이는 백발 단발머리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카운터 석 맨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평소 선호하는 일종의 지정석인 모양이다. “블렌드 커피죠?” 다 알면서도 한 번 더 친절한 미소로 확인하는. 바랜 푸른색 리넨 셔츠에 연회색 앞치마를 두른 정갈한 차림이었다. 주근깨를 그대로 드러낸 그녀의 꾸밈없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카페 홈페이지에 이런 글이 게재되었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인 동시에, 아빠이자 엄마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저희가 일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자양분이 되어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봄이 되면 이 카페 인근의 가모강변은 크로바 꽃이 초록빛 잔디밭에 한가득 피어나 마치 동화 속 나라처럼 환상적인 풍경이 된다. 이런 훌륭한 경치를 자신들만 즐기기가 아까워 요시다 부부는 가모강 피크닉 세트를 메뉴로 고안했다. 커피가 든 보온병, 머그, 구운 과자, 리넨 매트를 넣은 피크닉 바스켓과 함께 카페 밖 처마 밑에 걸린 미니 원목 테이블과 스튜를 원하는 손님들에게 대여하는 서비스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는 것은 거의 하루 종일 같이 지낸다는 의미다. 그렇게 일상이라는 이름의 모험을 함께 시작하고 생활이라는 이름의 신비를 알아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서점 -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면서 잠시 숨이 멎었을 것이다.

이미 검증 된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이거야라고 확신한 책을 차근차근 팔아나가자고, 우리 나름의 스터디 셀러를 만들어 나가자고 말이다.

점원들은 손 글씨로 책 소개 문구를 직접 써서 모든 책 안에 정성스럽게 집어넣었다. 마음을 담아 추천했기에 문구들은 설득력이 있었다.

일본 전역과 외국에서도, 사람들은 이 각별한 서점에 오기 위해 일부러 이 조용한 외곽 동네를 찾게 되었지만 동네서점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유명해졌어도 여전히,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웃 주민들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

, . 실내 촬영은 괜찮습니다만 책을 보고 있는 다른 손님들은 찍지 말아주세요.” 점원은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당부했다.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타인을 향한 세심한 배려는 내가 언젠가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호의이기도 하니까.

초판, 중판 그리고 절판 - 나는 에코백 애호가다.

절판은 더 이상 독자들이 찾지 않아 추가 인쇄를 포기한 책을 일컫는다. 자신이 쓰거나 만든 책이 절판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무서운 주인장들만의 매력 - 오니기리(삼각김밥)전문점, 좁고 기다란 5평 남짓한 공간에 고작 열 개의 카운터석 주인장의 아우라에 압도당한다. 30대 초반 머리카락은 완전히 다 밀었다. 눈은 보리새우처럼 작고 가장자리가 위로 찢어졌다. 얼굴 왼쪽 뺨엔 칼로 길게 베인 자국이 선명하다. 과묵한 이 남자, 많은 풍파를 겪었을 법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전직 야쿠자가 손을 씻고 나와 가장 근본 적인 을 만지는 느낌. 외모에 위축됐다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 이대로 나갔다간 오히려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메모지에 주문할 음식을 표시해주십시오.” 손님은 무조건 그가 시키는 대로 하는 하는 분위기다. 허리를 곧게 펴고 경건한 자세로 주인장이 오니기리를 집중해서 빚는 모습. 철 가마에 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쌀밥. (절도 있게 빈틈없이) 그의 험상궂은 인상이 풀리는가 싶더니 냉큼 받아가라는 뜻이다. 매일 와서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정이 느껴지는 손맛, 손님들이 다 먹어갈 때쯤 몸을 돌리더니 날카로운 저음으로, 밥을 다 먹고 나면 그릇은 자기 쪽으로 올려달라고. 손님들은 저도 모르게 칼같이 그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지만 주인장의 고압적인 태도가 어째 하나도 밉지가 않다. 가게 이름 아오 오니기리’ ‘파란 도깨비온 동네 어린이들이 밥이 나오길 기다리면서 지루해하거나 심심해할 무렵, ‘옛다, 내 얼굴이나 그리고 있어라종이와 필기기구를 건네주는 것이다. 그가 인상 쓰고 말을 하면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충성을 다해 그릴밖에!

처음에 주인장을 보고 조금 무서워했던 딸아이도 그림을 그리느라 그 얼굴을 계속 유심히 쳐다보다 보니 저절로 편안해진 것 같다. 여기 온 어린이들은 모두 도깨비에게 흘리듯이 매료되는지도 모르겠다. 일견 무뚝뚝하고 괴팍해 보이는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내가 원고 작업하러 가는 상수동 단골 카페의 남자 사장님도 무뚝뚝하고 잘 웃지도 않고, 웬만한 사람은 그 기에 눌릴 만큼 존재감이 강하다. 커피 값을 계산하고 집에 가려고 하면 불쑥 토마토나 옥수수나 감자 같은 것 두세 개를 갈색 종이 봉지에 넣어 태연하게 내민다. “너무 많으니까 좀 가져가세요.” 선물로 생색내기는커녕 처치 곤란 물품을 처리해버리려는 듯한 태도를 연기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코끝이 찡하여 책읽기 잠시) 손님들이 불평하거나 말거나 그는 늘 하던 대로 자신의 감독 의자에 편하게 앉아 읽고 있던 두꺼운 소설책으로 돌아갔다. 그런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카페 사장님이지만 정작 내가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언짢고 울적한 기분을 얼굴에 다 드러내며 원고 작업을 하고 있으면 역시 대수롭지 않게 평소 내가 좋아한다고 말해왔던 노래들을 슬그머니 틀어준다. 그러고 나선 으레 또 모른 척. (이 세상에 나의 존재를 묵언으로 응원해 주는 그 누군가 있다면, 참 살맛나지 아니한가!)

 

풍경을 위해서라면 - 교토 거리의 간판. ‘맥도날드교토에서만큼은 갈색 바탕에 채도가 낮은 노란색 로고, 그리고 흰색 바탕에 갈색 글자다. 교토에서는 검정색과 하얀색으로 절제되어 표현한다. 전통 거리의 정체성에 맞춰 ‘STARBUCKS'가 아닌 스타벅스

교토의 경관 조례법, 지나치게 화려한 간판 색깔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바랜 듯 이름의 글자 색상은 흰색, 검정색, 갈색 외에는 접수가 되지 않고 특히 선정적인 느낌의 빨간색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교토의 특정 거리는 아무리 높아도 대략 5층 건물을 넘어설 수는 없다. 전통 거리의 은은하고 서정적인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업의 간판 색깔은 얼마든지 바꾸겠다는 암묵적인 다짐.

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류가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전봇대를 땅 밑으로 넣어 전선 없는 거리로 만들어 놓고야마는 의지.

나 혼자 튀기보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려는 마음, 각자가 조금씩 양보하는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

 

가모강과 사람들 - “너의 글은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웅장한 바다가 아니라 잔잔한 물결을 머금은 강 같아. 겉보기엔 잔잔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보기보다 훨씬 깊은.”

규모가 작아도, 겉보기에는 색이 연해도, 테두리가 고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가가면 사색을 하게 만드는 존재.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폭이 좁아 중간 중간에 징검다리를 심어놓은 가모 강. 서울의 한강처럼 크지도 않고, 파리의 센 강처럼 밋밋하지도 않다.

정처 없이 교토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가모 강 근처에 가 있곤 한다.

어쩌면 가모 강은 깊게 내쉬는 한숨이기도 하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는 담배연기이기도 하다. 긴장을 풀고 잠시 나를 내려놓는다는 뜻 마음이 내키면 바로 시내 번화가에서 가모강변으로 빠져나오기만 하면 된다. 드넓은 하늘 아래 앉아서 여백을 음미하거나, 천천히 걷거나, 덩그러니 눕거나,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거나, 캔 커피를 마신다.(우선 5, 일주일, 보름, 한 달, 그 다음 집을 렌탈하여 1년 사계절을 살아보고 싶다. 강의 안 하고 바하 안 보고 아버님 안 계시면 꼭 그렇게 해보고 싶다.)

느릿느릿 걷다 보면 구석구석 빈틈으로 사유가 비집고 들어오기도 한다. 교토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고 싶다면 가모 강으로 가면 된다.

가모 강 강기슭에 같은 간격(2미터)을 두고 주욱 않아 있는 커플들의 풍경이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카페 소사이어티 - 카페나 다방은 생존이 아니다. 하지만 무용한 것들이 삶에 윤기를 준다. 교토 사람들은 카페라는 공간을 사랑해왔다. 카페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간이다. 제아무리 호화롭게 실내장식을 한들 카페를 이루는 핵심 요소는 바로 거기에 머무는 사람들이다. 그것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좋은 느낌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카페는 매력을 풍긴다.

출신도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 각자 한 공간에서 평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 조화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약간의 거리감을 가지고 모두 조심스럽게 예의를 지킨다.

교토의 카페만큼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수용한다. 카페만큼은 손님을 고르지 않고, 귀천을 따지지 않으며, 처음 온 손님이든 단골이든, 모든 만남을 그때그때 소중히 하고자 한다.

, 오셨어요?” 그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동석해서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단골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카페에 모였다가 흩어지며 하루의 일부를 공유한다.

카페 안은 만석이고 밖에는 손님들 대여섯 명이 대기 중이이어도 분위기는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손님들과 직원들도 전혀 쫓기는 기색이 없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만큼 카페에서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다 갈 자유가 있다.

익명의 사람들이 제 발로 모여들어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일. 이는 사람들의 삶에 여백과 에너지를 동시에 주는 역할을 한다. 불필요한 마음의 짐을 덜고, 머릿속을 비워내고, 혹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로운 힘을 얻어 거는 것. 이것이 카페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규칙적으로 카페에 나가 원고 작업을 하는 나로서도 이제는 카페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카페 순례 헤밍웨이(우리 집 캡틴 배 몰고 나간 사이, 마린시티의 카페에서 글 퇴고하는 여인은 또 하나의 풍경)

 

교토의 빵 사랑 - 체인점 빵집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개인이 운영하는 프랑스 불랑제리풍 빵집이다.(교토와 파리는 자매 도시 결연을 맺었다) 교토의 마데가와거리를 걷다보면 이런 빵집들이 장관을 이룬다.

교토 하면 일본 전통 도시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깔끔한 일본 음식만 먹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교토 사람들은 라멘과 교자(일본식 군만두), 서양에서 온 을 몹시도 사랑한다. 휴일이면 집 근처 커피 점에 모닝 세트(토스트와 계란, 커피로 구성된 간단한 조식메뉴)를 먹으러 온 가족이 출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기도 하다. (아이파크 아티제 모습)

 

교토의 아침 식사라고 하면, 뜨거운 녹차에 흰밥을 만 것에 절임 채소 반찬을 곁들여 먹는 정도. 여유 있게 아침밥을 차리거나 음미할 시간이 없었다. 설거지를 줄이기 위해 최소한의 그릇을 사용해서 끼니를 때우는 일. ‘밥은 저녁에나 먹으면 되지 뭐일하면서 한 손으로 빨리 먹을 수 있는 빵을 점심으로 선호. 교토 사람들은 생활의 편의에 따라 빵을 먹게 되었고, 익숙해지고 좋아하게 되었다. 빵에 대한 애정, 합리주의. 교토 사람들의 식생활은 검소하고 소탈하다. ‘오반자이검약정신과 선대의 지혜, 생활의 실용주의와 합리주의가 교토의 식문화.

 

물건에도 철학이 있다 - 일부러 찾아가기 불편한 장소, 손님들에게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든 찾아와줄 거리고 믿었기 때문 (류창희 수필산책 사이트처럼) 정직한 가게에서 정직한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나도 정직한 글을 써야지, 하는 초심이 돌아온다.

 

좋아하는 것이 이끄는 대로 - ‘사우나노 우메유’(사우나 매화탕이라는 뜻) 공중목욕탕(센토) 같이 대중목욕탕에 다닐 수 있는 사이란 얼마나 친밀한 사이일까.

 

한 번쯤은 다와라야 료칸에서 - 300년 역사. 교토에서 다와라야 료칸에 묵는 것은 하나의 명징한 로망. 객실 하나하나에 일본 고유의 문화가 고도로 농축되어 있다. 자연과 빛, 예술, 온화함과 정숙함이 어우러져 있고 객실에서는 유리 창문을 통해 청초한 일본 정원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분명 나머지 열일곱 개의 객실도 손님들로 곽 차 있을 텐데 작은 소음 하나 들리지 않는다. 이 고요함은 객실 배치나 복도의 동선, 가구 배치나 조명 상태 등, 양질의 고독함은 가장 섬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상태로 세심하게 계산되어 연출된다. 이 고급스러운 감각은, 혼자 있을 때의 고독보다 어쩌면 더 고독다울지도 모르겠다. 다와라야의 손님은 종업원들에게 그 마음읽히게되어 있다. 단 열여덟 개 객실의 손님들을 향한 예민한 촉. 손님이 그 순간 속으로 원하는 것을 읽어내고 그것을 신속히 제공하는 일에 유능하니 과연 명문 로칸답다.

오늘 누리기 위해 내일을 희생하기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인내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40(나는 60)에 이르니, 때로는 합리적인 소비같은 것을 깐깐하게 따지지 않고 그저 순순히 마음이 끌리는 것을 경험하고 싶다. (그래, 언제 한 번 해보나. 정신 맑게 육체 멀쩡하게 언제까지 살거라고.) 충동적인 일탈들이야말로 우리의 지루하고 반복적인 인생을 버티게 해주는 비일상의 희열이 아닐까.

 

우리가 몰랐던 화류가의 인생 - 교토의 상징, ‘게이코’ ‘게이샤수련한지 1년이 채 안 되는 신입마이코들은 붉은 립스틱을 아랫입술에만 칠한다. 얼굴에 흰 분을 바르는 관습은,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에 촛불 아래서도 그녀들의 미모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타 지역으로 출장을 가기 위해 신칸센 기차나 비행기로 이동할 때도 졸거나 잠이 들어서는 곤란하다. 마이코가 어린 여성 특유의 화사함이나 아리따움으로 승부했다면, 게이코의 위치에 오르는 순간부터 성숙하고 우아한 어른 여자’. 게이코의 기모노는 심플한 디자인에 무채색 계열로 차분해지고 머리 장식도 은은하고 단순한 것을 쓴다. (그렇다 해도 20키로 육박하는 기모노에 2키로 가발) 매혹정인 자태와 품성을 가지고 춤과 노래의 재능을 선보이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절제와 규율, 철저한 자기 통제를 거쳐야만 했고,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비로소 접대는 예술의 경지를 올라갈 수 있다. 그녀들은 오늘도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신비롭고 고고한 여성성의 전통을, 천 년 고도 교토를 배경으로 오롯이 지켜나간다.

 

처음 오신 분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게이코와 마이코가 손님을 접대하는 오차야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돈이 많은 대기업 사장님이라도, 누구나 얼굴을 알아보는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소개 없이는 단호하게 출입금지다. 교토의 텃새문화. 까탈스럽거나 도도하다고 보기보다는 가게를 최상의 상태로 보전하기 위한 장치. 오랜 인연을 맺어온 손님을 배웅할 때는 다녀오십시오다시 찾아도 마치 오늘 아침 배웅한 것처럼 이제 오셨어요라며 친근하게 맞이한다. 우리 가게의 물건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손님, 우리 물건의 가치를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은 손님, 신원을 알 수 없는 손님에게는 자신들의 물건을 팔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와 돈에 지지않는 사람의 방식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결기 있는 태도.

 

교토식 소통 법 - 여느 교토 가정집의 풍경. 어느덧 식사 때가 되어간다. 손님은 눈치껏 현관으로 향한다. “어머, 벌써 가시려고요? 오차쓰케라도 한 그릇 드시고 가시지 그러세요.” ‘슬슬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네요.’ “아유~ 그런 섭섭한 말씀 마시고믿어서는 안 된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얼른 퇴청해주는 것이 양식 있는 교토인의 자세다. 인근 오사카 사람들은 식사 때가 되어도 밥을 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교토의 이런 문화를 납득하지 못한다.

교토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내전. 철저한 사전 계획으로 식생활을 조율해나갔고 손님 방문으로 가족들이 굶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교토의 소통 법은 직설 금지교토 사람은 말을 모호하게 하고 알아듣기 어렵게 우회적으로 표현. 과거 몇 번이고 전투의 현장. 적과 아군이 구별조차 잘 되지 않는 시대를 하도 많이 겪다 보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호한 표현을 쓰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속을 드러내지 않는 간접 화법. ‘교토씩 언어는 신비하다는 찬사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두 얼굴의 화법.

식당주인이 카운터에서 멋진 시계를 차셨네요.” “저희 집 그릇에 흠집이 날지 모르니 식사할 때는 시계를 좀 빼주세요휴대전화소리,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전원 좀 꺼 주세요. 메뉴를 보며 추천해주실 만한 게 있나요?” “글쎄요촌스럽게 굴지 마라. 다 맛있다.

교토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제안했을 때, “고맙습니다, 그것 참 좋군요.”50프로 퇴자. “생각 좀 해볼게요.” 100프로 거절. 대놓고 싫다고 하면 상처를 입히니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 자신을 낮추고 몇 번을 꼬아서 말꼬리를 흘리듯이 말한다. 나도 상처받고 싶지 않지만 상대의 마음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

 

*** 진정한 호사 - 세월은 흘러 진짜 명품 브랜드 가방을 제대로 가져볼 새도 없이 에코 백만을 들고 다니게 되었다. 이런 모습이 가장 나다운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 이상 고급스럽거나 비싸 보이는 무언가로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교토는 명품 브랜드 매장의 거세가 현저히 약하다. 교토 사람들은 소비에 있어 검소하고 냉철하다. ‘내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사지 않는다. 교토인의 자연스러운 감각이다. 그들은 허세를 경계한다. ‘루이 비통 브랜드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부끄러움에 더 예민하다. 한편, 교토 사람들은 교토라는 단어 자체에 자랑할 만한 브랜드 가치가 있음을 내심 알고 있다. 교토에서는 무엇이 진짜일까? 학벌이나 회사의 명함, 얼마나 부자이고 많은 걸 가졌는지를 어떻게든 겉으로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함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레테르는 피상적인 상징에 불과하다. 진짜로 실력이 있다면 품위가 생기고, 품위가 있으면 성급하게 주장할 필요가 없다. ‘자기 자랑은 금물이다. 대놓고 하는 자랑만큼 창피하고 촌스러운 것은 없다. (반성, 프로필 쓸 때마다 근사하게 쓰려고 노력했었다)

*아무리 명예로운 성취라도 자기 입으로는 먼저 밝히지 않는다. 남에게 칭찬을 받으면 겸손하게 부정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이기도 하다. 교토 사람들은 돈보다 가치관이나 살아가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그들은 심플하고 온화한 삶의 방식을 지지한다. 교토라는 환경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근사하기에 나답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만족, 무엇이 나중에 깊은 충만감을 줄 수 있는지, 그것이 진짜인생. 진정한 호사란 내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그 삶의 방식을 정할 자유일 것이다.

 

아름다움을 지켜나가는 일 - ‘신신도 교토대학 북문 앞 지점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카페 안에는 손님 세 명이 각각 혼자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이따금 동작을 멈추고 천장 꼭대기나 창밖 풍경에 눈길을 주곤 했다. 비현실적인 정적이 실내에 감돌았다. 이 낯선 감각이 뭘까. , 이곳에선 음악을 틀지 않고 있다. 음악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손님들의 생각과 감각에 자극을 주고 있다. 이 공간에 모여들며 두루 섞어 앉아 따로 또 같이 커피와 고요를 음미한다. 이토록 침착한 분위기는 이곳 주인과 종업원들의 사려 깊은 서비스 덕분. 늘 편안한 미소로 자신의 할 일을 하되 손님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손님이 달랑 커피 한 잔만 시켜놓고 오랜 시간 눌어붙어 있어도 그것이 카페의 사명이라고 여김.

교토의 아침은 이노다의 커피 향기에서 시작한다.’ 커피문화. 원래 멋있었던 물건들은 다소 낡더라도 여전히 멋있다.(사람도)

 

진화하는 공동체 -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교토에서는 어디 새 가게가 생기면 한 다리 건너 지인이 차린 경우가 많다. 서로 알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로 돕는다. 교토는 손님을 빼앗아 오려고 경쟁하기는커녕 서로 손님을 보내주려고 한다. 동종 업계 사람들끼리 느슨하게 연대하여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모습은 이상적인 공동체의 구현이다. 교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자 성향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기주의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자전거와 청춘 -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변화하는 계절을 가장 먼저 예민하게 감지한다. 쌩쌩 달리다 보면 바람의 온도와 내음으로 그 변화를 느낀다.

 

차분하고 강인한 존재 - 교토는 아마도 여자일 것이다. 섬세함과 복잡함, 교토에서는 실제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돋보이는 존재다. 언뜻 봐서는 남자보다 약해 보이지만 유연해도 절대 부러지는 일이 없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심지 하나만은 여자가 굳세다. 교토의 여자들은 자기 의지로 씩씩하게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녀들의 남편들은 감히 아내를 향해 대체 누구 덕에 먹고 사는데!’의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다.

교토 여자들에겐 온화한 강인함이 있다. 눈앞의 이익을 좇거나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리기보다는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 신중해지고 인내하는 것을 선택한다. 내적으로도 성숙하지만 행동거지와 말투, 옷매무새 등 외적으로도 못지않게 신경을 쓴다. * 젊고 예쁜 외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기품 있는 몸의 움직일 것이다. 서 있는 자세나 걷는 모습, 인사할 때 손과 팔의 종작 등,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가운데 세련미가 풍겨 나온다. * 몸동작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화법조차도 우아하다. 평소에도 겸손하고 사려 깊은 언어를 구사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인 색상과 패턴의 균형부터 양산과 핸드백 등 액세서리 소품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걸친 것이 없다. 그 고호한 모습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하루하루 쌓아 올린 자기 관리의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교토 출신 여자라는 타이틀은 하나의 훈장이다. 예컨대 여성에게 출신지를 물어 봤을 때, ‘교토에요사람들은 오우~, 하고 감탄하면서 그녀를 보는 눈이 확 달라질 것이다. 고고하고 강인하면서도 혼자 견디는 법을 체득한 여자 주인공들. 그녀들은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선망을 한 몸에 받지만, 동시에 독립과 자유를 갈구하기에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저항한다. (바로, 나다.) ‘그리고 그녀는 교토의 여자였다라고 마무리를 해주면, 상황이 정리. (그녀는, 교토의 여자였다. , 이대 나온 여자야!)

 

교토 남자 - 교토 사람들이 오사카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영국인이 마음속으로 미국인을 경멸하는 것과 비슷하다. 교토 사람들은 오사카 사람들이 시끄럽고 단순 무식하며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반면 오사카 사람들은 교토 사람들이 까탈스럽고 자존심이 너무 강하다고 불만이다. 교토와 오사카는 예로부터 앙숙지간이다. 오사카 사람들은 교토를 진짜 실력도 없으면서 의뭉스럽고 허세만 가득한 도시라고 공격한다.

전 오사카 사람이 아닙니다.” “전 멀더라도 교토에서 오사카로 출근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오사카와 교토가 같은 간사이 지방으로 묶여도 교토부심으로 선을 긋는다.

교토 출신들은 한마디로 교토를 너무도 사랑한다. 평생 교토에 살고 싶다고 교토는 자극적인 변화무쌍함과는 거리가 멀다.

 

숙소의 주변 동네 - 여행지에서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곳은 숙소다. 숙소주변을 무작정 걸어보며 염탐하는 일은 그 숙소를 나의 집으로 삼으려는 행위다.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를 둘러보며 아침저녁으로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숙소 주변에 영역을 표시하다 보면, 어느새 그 풍경에 익숙해지고 정이 들어버린다. (네팔 포카라 다알리아 호텔 주변 일주일간 골목골목 동서남북 누볐더니, 골목도 카페도 풍경도 가게도 사람도 기질도삶도 그래서 또 가서 그곳의 주민이 되고 싶고. 인도 바라나시 숙소주변도 고향처럼 찾아가고 싶다.)

내가 선택한 숙소. 아무래도 좋다. 깔끔하고 세련된 장소들을 발견하면 감각이 자극받아 즐겁고, 개성 넘치고 번잡스러운 유흥가가 주변에 있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불량청소년이 된 듯 한 스릴이 있다.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소란스러운 동네일 수도 있고, 편의점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동네 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없으면 없는 대로의 호젓함과 우수를. 있으면 있는 대로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며 걸으면 된다. 일종의 가상현실.

책방에 손님이 없어, 할아버지 혼자 돋보기를 끼고 조용히 혼자 책을 읽으시려는 찰나에, 잠시 방해하고 내가 그날의 마지막 손님이 되어드리고 싶다. 할아버지 모습이 좋다. (내가 보는 작가 모습이 더 좋다.)

 

잊지 못할 배웅 - 어제오늘 친근하고 활달하게 말을 붙이던 치요 아주머니는 적어도 한 달은 이곳에서 지내다 가는 사람들을 아쉽게 보내는 것처럼 인사를 했다. 누가 우리를 부르는 것만 같은 기운이 등 뒤로 느껴져 휙 돌려보니 아까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때와 똑같은 자세로 서서 우리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절대신 서양식으로 캐주얼하게 손을 흔들었다. 자신이 접대한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인사를 하고 또 한다는 교토 오모테나시(대접)’ 이야기는 진짜였다. 단 한 번의 만남일지라도 (일기일회) 손님 역시도 그 너른 정성에 기꺼이 응답해야만 한다. 모퉁이를 돌기 전, 반드시 자신이 신세를 진 가게 쪽을 뒤돌아봐야한다. 겉으로는 조금 차가워 보일지 몰라도 실은 은근한 속정으로 여운을 남겨주기에 교토와 교토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 고요한 방, 고요한 멋 입구에 화장실, 싱크대, 창가에 작은 소파, 침대 가까이에 나무로 된 원형 탁자, 구석에 냉장고. 방 안의 모든 것이 지극히 소박하고 간단했지만 결코 밋밋하지는 않았다. -요코 오가와 완벽한 병실(원룸에 필요한 것, 완벽한 결국 인생은 관 하나로 끝난다!)

 

* 일본은 화려한 색깔, 반짝임, 과한 장식을 철저히 배제. 심미적인 것, 자연소재, 전통 종이 창호지 문으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 채도가 낮은 색채, 그늘진 구석 같은 소박함을 담은 집이 쾌적하고 사람에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맛이 담백할수록 세련된 요리 (재료를 그대로 먹거나 그대로 익힌 것)

안주, 접시 위에 그림 작은 접시에 꽃 모양으로 자른 오이, 삶은 메추라기 알 반쪽, 장밋빛 소스, 미지근한 사케 한잔, 옻칠한 젓가락과 젓가락 받침대 준비 생활이 예술이다. (우리 어머니는 늘 요리가 접시의 꽃무늬를 가리는 것을 지적하셨음)

 

*흔적 없는 향취 향수는 기모노에 은은하게 배게 한다. 향을 직접 발산하는 것은 무례한 일.

 

* 몸짓의 미학 행동 하나하나가 섬세함 그 자체. 새끼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으로 아세톤이 묻는 솜 집기, 두 손바닥에 세안용 비누를 올려놓고 거품 내기, 위에서부터 아래로 머리 빗기, 반대쪽 손으로 방향 가리키기 등 빈틈없는 몸짓. 소소하고 세심한 행동이 일상생활을 아름답고 세련되게 만든다.

 

* 일상생활에서 배어나오는 꼼꼼함 차를 준비하는 일, 다기를 닦는 일, 다기를 엎어 놓고 그 위에 뚜껑을 얹어 말리는 일. 삶의 예술로 알뜰함과 우아함. ‘세심하다라는 표현은 작고 단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쓰레기를 잘 접어 평평하게 만들어 깔끔하게 봉투 속에 눌러 담는다. 교토에서는 집 앞에 놓인 쓰레기봉투가 작을수록 그 집안의 평판이 좋아진다. (교토 오사카 고베 등을 가고 싶다.)

 

세심한 정리가 가져다주는 비밀스러운 기쁨 -

물건마다 제자리가 있고, 그 자리마다 맞는 물건이 있다 - 프랑스 속담 (세상에 내가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엽서 한 장 방 멋 참조) 설거지한 그릇을 말리고 정리하기, 매일 가스레인지를 청소하고 작은 행주를 빨기.

공공장소에서는 큰 꽃으로 장식, 가정에서는 작은 들꽃으로 장식. 아주 작은 것으로 자연의 위대함을 찬양. 이 게바아(일본식 꽃꽂이)는 최소한의 것으로 아름다움을 내는 기술. 데이지 한 송이 잎사귀 두 개, 이 빠진 잔 하나. 생활공간을 충분히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일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저녁 의식-

신은 작은 것 속에 깃들어 있다.- 귀스타브 폴로베르

일본 여성은 매일 저녁 주방을 청소하고, 목욕을 하고, 가운을 입는다. 그리고 무사히 마친 일과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예쁜 글씨로 또박또박 적는다. 일상을 은밀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습관이 되었으면 하겠지만, 지금 일부러 이렇게는 안하고 싶다. 하겠다는 자체가 또 다른 숙제)

여성의 미덕? 인내심. 절대로 징징대거나 화를 내지 않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름다움의 완성. 또한 아무리 큰 불행이 닥쳐도 미소를 짓는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준다고 배웠기 때문. 불행함을 한껏 내보인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고, 오히려 다음 만남을 피한다. (이런 것 지키고 싶다.)

 

진짜 부자는 부를 과시하지 않는다 - (프랑스나 독일은 국기조차 내걸지 않는다. 미국은 금목걸이 금팔찌 면 티셔츠 가슴에도 커다란 로고 집집이 깃발, 손짓 발짓 하는 행동도 거하게 으스댐이 몸에 배임. 슬며시는 없고 와락 OK) 마음이 빈곤한 사람이 진짜 가난한 사람이다.

 

절제미가 있는 옷 - 눈에 확 띄는 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절제만이 신비함을 준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교토에서 회색은 겸손함을 상징. 일본인은 우아함이 그 사람의 부가 아니라 기품에서 나온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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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조용히 스며들어

처음은 34, 그리고 한 달,

한 계절이 좋으면 사계절을 살아보고 싶다.

일본 고베출신인 시어머니께서는 평생 교토 여인처럼 사셨다.

따님이 없으셔 누군가 그 소박하고 조촐한 아름다움을 이어받지 못했다.

며느리들, 아니 한국여자들, 특히 부산여자들의 소란과 와락 반가워하는

정겨운 민낯을 늘 못마땅하게 여기셨다.

그 분이 사셨던 그 모습이 귀한 줄 뒤늦게 절절 가늠해 보며

다 내려놓으면 잠시 교토에 살아보고 싶다.

교토 전통가옥에서 순수한 교토 어른여자 사람의 생활을 보며 몸소 교토문화를 경험하고 싶다.

민가에서 민박하고 싶다, 생의 마지막 화두처럼 간절했다.

일본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어머님의 자태가 그리워서다

참으로 고우셨다, 닮고 싶은 분이었다.



그 꿈을 가지고, 지난 봄방학때

세 부부가 2박3일 자유여행을 갔다.

가모강가의 료칸으로.

가모 강가를 걸으며 관광을 하며 식당을 찾아가며 차를 마시며

물론, 위의 밑줄친 내용을 프린트해가서 나눠줬다.(오지랖)

그리고 깨달았다.

어디까지나 교토는 '타인의 취향'이라는 것을!

타인의 취향은 짝사랑이다.

 

 

 

 

 

이것 좋아 저것 싫어

사노요코 /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싫어, 싫어, 하며 기운차게 살아오긴 했지만, 무언가 잊어버린 기분이 든다.

 

공짜로 보는 영화’ - 꿈속에서도 너무 기뻐서 마치 꿈같다고 생각하며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되기 일보직전이다라고 엉큼한 마음을 품었는데, 그 일보직전인 순간에 당신, 어린이집 시간 괜찮아?”(나의 평일 일상, CCTV에 찍힌줄 알았다) 저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습니다. 그 무렵 저는 어린이집 마중 시간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있었습니다.(어미가 아닌 할미인 나도 그렇다. 60넘어 손주 스케줄에 시간 맞추는 여자를 미친년시리즈에서 보았다. 그래도 아이 본 공은 아이를 잘못 본 만 돌아온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다음 날부터 베개 아래에 제임스 딘이 실린 잡지를 깔아두었습니다. 어떤 악몽이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 꾸는 편이 몸에 좋습니다. 꿈과 현실이 동시 상영되어야 건강한 거겠지요. 살아 있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있는 거.

 

사사삭 - 인간에게 해가 된다 해서 일방적으로 말살해도 될까요. 나비는 사랑하고 바퀴벌레는 미워해도 될까요. 세상 남자들은 커다란 물고기를 부둥켜안고 씽긋 웃는 헤밍웨이를 동경하지 않나요. 제가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커다란 바퀴벌레를 잡았을 때의 기쁨과 같지 않나요. 역시 인간으로 죽는 것이 가장 길고도 괴로운 일생 같습니다. 백년이나 사는 동물이 또 있을까요.

 

말의 눈은 - 제겐 비밀이 있습니다. 몹시 부끄러운 일입니다. 승마 수업에 가서 말을 탔답니다.(요트를 탄다하면, 무조건 사치라고. 외제차를 타면 무조건 사치라고.) 벨벳 모자를 쓰고 승마 바지와 장화를 신고, 길고 날씬한 다리를 가진 말에 타는 건 부끄럽습니다. 자신의 출신을 배신한 것 같고 사기를 쳐서 다른 계급으로 몰래 들어간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약간의 돈으로 죄다 손에 들어옵니다. 그게 부끄럽습니다. 승마장은 절경 속에 있습니다. 지금 말을 탈 수 있다 해서 뭔가, 전쟁에 나갈 것도 아니고 쇼핑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경마 기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귀족 남자를 홀릴 젊음도 미모도 없다. 그런데도 이만큼 밑천을 들였으니 장화 앞코만큼은 능숙해지고 싶다. 라는 쩨쩨한 마음도 듭니다.

 

말은 어찌나 맑고 투명한 눈을 하고 있는지요. 날 때부터 말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인, 한없이 고요하고 슬픈 눈입니다. 말처럼 깊은 슬픔이 담긴 인간의 눈은 본 적 없습니다.

 

성모마리아와 아미타불 - 개의 세계는 남녀교제가 꽤나 자유로운 모양인지. 노리코와 모모코가 함께 산 이후 가끔 모모코를 만나면 정말로 예의상 꼬리 흔드는 것도 아깝다는 듯이 홱 떠나버렸습니다. 모모코가 병에 걸린 뒤 비탄에 잠긴 노리코는 식욕이 없어져 모모코에게 채소 죽을 만들어주고 소등심을 먹이고 집 안에서 담요를 덮어주었지만, 그래도 모모코는 오줌을 싸러 갈 때 힘없는 허리를 질질 끌고 신음을 내며 마당으로 나가 한가운데에서 힘이 빠져 늘어졌고, 그러면 노리코는 자신의 코트를 벗고 모모코와 마찬가지로 땅바닥에 가로누워 울면서 모모코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두운 목소리로 오늘 새벽에오늘 밤 쓰야(通夜) 유족이나 조문객이 고인의 곁에서 밤을 새우는 것(임종)할거야

 

장례식 만두가 엄청나게 쌓여있고 조림이라든지 유부초밥도 수북했습니다. 모모코는 담요를 깐 현관 바닥에 안치되었습니다. 모모코는 머리에 복숭아꽃을 둥글게 엮어 만든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모모코는 가슴에 작은 성모마리아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머리 옆에는 조그만 성서도 있었습니다. 그 머리 옆 바닥에는 본적도 없는 두껍고 긴 선향(높이 30센티미터, 8밀리미터 정도)이 연기를 가늘게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선향에는 아미타불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나무묘호렌쿄라고 梵字로 쓰여 있습니다. 그때 옆집 남편이 공양할게요.”라며, 반야심경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혼혈아 모모코는 온갖 신과 부처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복숭아꽃 관을 쓰고.

 

*** 꾸준히, 꾸준히

저는 소심한 편인지 택시를 탔을 때 그 좁은 공간이 침묵으로 가득하면, 그만 견딜 수 없어져서 오늘은 춥네요.(스몰토크)” 말을 해버린다. 운전사는 줄곧 히터를 튼 차 안에 있었으니 그래요?” 그러면 요즘 경기가 어때요?”라며 아저씨 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언젠가 올라타자마자 운전사가 조용히!”라고 고함쳤다. 아직 목적지를 알리지 않았는데, 차는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좌석에서 다 틀렸어, 젠장, 젠장!” 라디오가 다급히 경마를 중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또 다른 운전사에게 경기는 어때요?” 물었다. "있죠, 손님, 경기가 좋든 나쁘든 인간은 꾸준히,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해야 해요. 그게 인생이랍니다. 꾸준히 일만 하면 결코 틀리는 법이 없어요. 착실함에 질리지 말고 꾸준히, 꾸준히.

 

** 드르륵, 드르륵

당신은 어느 무덤에 들어가나요? 장소를 고르는데 여긴 아침 해네. 하지만 난 저녁 해가 예쁘게 보이는 저기가 좋아죽고 나면 어차피 모를 텐데. 하지만 고르는 건 아직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그때 , 죽음이란 살아 있을 때의 일이구나. 너도 안 살래?” 저는 죽은 뒤 친구가 곁에 있으면 꽤 외롭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몹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죽은 뒤 외롭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살아 있는 저입니다. 그곳은 터무니없이 경치가 좋았는데, 벚꽃 피는 계절이면 꽃잎이 묘석으로 떨어진다고 제 어깨에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죽으면 볕 따위 아무짝에 쓸모없는데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요코씨, 뼈는 엄청 딱딱해. 막자사발 따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산속에서 읍내까지 다시 나가서 큰 절구랑 나무공이를 사왔다니까. 다 같이 드르륵드르륵 갈았는데, 마늘 갈 때랑은 비교가 완 돼. 다섯 시간 정도 걸렸어. 건장한 남자가 땀투성이가 되어서 말이야, 게다가 바람이 불어와 뼛가루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려서, 다들 얼굴이 새하얘졌고 콧구멍만 동그랗고 까맣게 보이는 거야. 너무 이상했는데 아무도 안 웃더라고.”

, 나도 갈걸.”

그리고 말이지, 절구에서 튀어나오는 뼈도 있었는데 하면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먹더라고. 그때 생각했어. 내가 죽으면 좌우간 평범하게, 평범하게 장례를 치르는 게 남들이 가장 납득할 만한 길이라고. 죽는다는 건 자신의 문제가 아냐. 남겨진 인간의 문제거든. 남겨진 인간에게 맡겨야 해.”

 

“‘내 뼈는 아드리아 해에 뿌려줘이탈리아인지 어딘지 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아드리아 해까지는 헬리콥터 빌려서 가는 거야? 배 타는 거야? 유언을 들으면 실행을 안 할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무덤이 없으니 제사도 안 지내겠지. 내 생각에 죽는다는 건 살아 있는 인간이 그 녀석 죽었구나, 라는 사실을 차츰차츰 받아들이는 일인 것 같아.” 저는 왠지 그때, 그 남자가 죽은 것이 기대되었습니다. 그 김에 저의 장례식도 기대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쪼그려 앉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앉을 수도 있고 책상다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목욕탕세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벌거벗은 일본 여자의 자세가 매우 요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쪼그려 앉아 똥을 싸는 민족은 쪼그려 앉을 수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는 신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동남아시아도 점점 근대화되어 쪼그려 앉기가 사라질까요. (이제는 식당도 변하고 있다. 방석집보다는 의자식이다. 어른들도 관절염 때문에 의자 식을 선호하신다. 화장실도 변했다)

 

삼각형 양갱 -

구두쇠는 물건이나 돈에 쩨쩨한 게 아니라 근성 자체가 쩨쩨해서 남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고 정도 깊지 않다고 그 친구는 말합니다. 시각장애인이어서 전기료가 들지 않는다고 하며 텔레비전도 안 봅니다. 돈 따위 죄다 써버리자. 초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구두쇠이야기를 한 다음 우리는 낭비 쪽으로 우르르 밀려갑니다.

 

3대 위는 원숭이 -

다른 친구 하나가 사실 우리 조상은 천황가에 토지를 빌려줬던 oo신사야라고 했는데 그렇다 쳐도 너는 가난뱅이잖아라며 다들 웃었다. 일본은 전철을 타면 모두 같은 신분이며, 계급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훌륭.

 

땡땡 중얼중얼 -

어느 날 다다시는 기운 없이 논 옆의 돌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 발을 몹시 질질 끌었고, 금방 쪼그려 앉고 싶어 해서 저는 다다시의 손을 세차게 잡아챘습니다. 그러다 다다음 날 죽어버렸습니다. 다다시는 아마 쌀밥을 한 톨도 먹어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5월의 논에서 남동생 손을 세차게 잡아챈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났지만 다음 날에는 태연해졌습니다. 그 일을 떠올릴 때만 줄줄 울었습니다. 요전 날 밤 다시 떠올리고 줄줄 울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또 떠올리며 줄줄 울었습니다. 저는 지금 신경이 이상해서 다음 날 태연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추석 전, <교토에 다녀왔습니다>를 읽으며 추석만 지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 같아 책마다 글마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2018 설이 어제였는데 한심하고 유치한 대소가 동서간의 관계는 매듭이 더 크고 단단해졌다. 고를 풀지 않고 잘라버릴 것이다. 나는 싸우지 않고 이길 것이다.) 다다시의 위패는 엄마 집에 있지만 엄마는 벌써 몇 년이나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돌며 남자애를 넷이나 낳았는데도 , 남자애는 낳은 것 없어라고 말씀하시니, 다다시를 아는 가족은 이제 저밖에 없습니다.

 

*** 신의 손 -

제 친구 중 꽃꽂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풍으로 쓰러진 도라지꽃 같은 건 어머나하며 두 세 송이 꺾어서 검게 칠한 낡은 나무통에 쓱 꽂기만 하는데도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냄비를 만지기만 했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맛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녀는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냄비 같은 건 만지니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법의 손은 신의 실수가 아닐까요. 저 자신의 손을 지그시 곰곰이 바라보고 맙니다.

 

** 통통통 -

저는 밭에 들어가서 훔치기는 싫었습니다. 하수인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밭에 도착하자 나는 여기서 망을 볼게라며 비겁하게 굴었습니다. 그 순간 일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찰떡 호흡에 거의 황홀해졌습니다. 그때 이건 악행이기 때문에 호흡이 맞는 것이며, 선행으로는 이와 같은 스릴과 성취와 충실감은 맛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악행은 어쩌면 이다지도 쾌락적일까요. 이 젊은 남자와 영원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매일 도둑질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때 잘 알았지만, 그 남자는 저와 도둑 회사를 설립할 마음은 없는 모양인지 이제는 집에 코빼기도 내밀지 않게 된 지 오래입니다.

 

* 지리멘의 추억 -

아버지는 저의 독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소매에 멋을 부리려고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는데, 고함까지 질렀으니 어지간히 열심이었던 거겠지요. 저는 하늘하늘 걷고 요상하게 눈을 치뜨기도 했습니다. 저를 금방 들이받곤 했던 오빠도 특별한 것을 보는 양, 먼발치에서 매우 소중하다는 듯 친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히사에의 기모노는 진짜 지리멘(바탕이 오글쪼글한 비단)이었고 저의 기모노는 인견이었습니다. 만져보기 전부터 저게 진짜라고 알아차린 저는 얼마나 가엾고도 영리한 아이였는지요.

패전 후 혼란으로 인해 저, 그리고 일본 전체는 기모노나 지리멘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운명으로 살았습니다. 일본 문화의 역사는 고도의 질을 해왔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현해나간 훌륭한 기술과 감각을 지닌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토의 기온에 있는 작은 숙소, 기온의 풍습 상 어처구니없이 복잡한 수속이 필요했는데, 그에 대해 쓰면 이 책의 절반 분량이 되어버립니다.

얼핏 보기에도 예전에는 이 근처에서 요염한 장사를 하셨을 것이 틀림없는 분이, 관능적이면서도 빈틈없는 기모노 차림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손님은 한 명밖에 안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2층의 방 하나로 안내 받았을 때,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연두색 그러데이션 바탕에 주황색 직사각형이 한 면에 흩어져 있는 이불이었습니다. 한눈에 지리멘 기모노 옷감을 이불로 고쳐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다가가서 봤더니 연두색도 주황색도 바랜 상당히 낡은 이불이었지만, 우아한 관능미는 조금도 잃지 않았습니다. 지리멘 이불에서 자는 일은 이제 평생 없겠지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초밥 -

나는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초밥에 무아지경이었다. 그런 다음 열여덟 살 때 도쿄로 나왔지만 초밥을 먹는 신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죽었다.

세월은 흘러갔다. 여차할 때 큰맘 먹고 초밥을 사 먹는 것쯤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카운터에 앉아 좋아하는 초밥을 주문하기는 겁이 났다. 그러나 세상이 풍요로워져서 나도 차차 맛없는 초밥이라면 먹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열 살짜리 아들이 초밥집 앞을 지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어이, 너 인마, 초밥집해라. 내 뒤를 이어라. 내가 가르쳐 주마라는 말을 해서 아들은 얼마 동안 초밥 장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그마한 등에 가게 이름만 쓰인 간판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서 심오한 느낌이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아무나 들이는 곳이 아니야. 라는 분위기가 강하게 감돌았다. 저는 선택받아서 들어가려는 참이에요, 라는 기분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무엇부터 주문해야 옳을까?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주문 따위는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내주는 것을 잠자코 먹어야만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가게 주인이 위풍당당했다. 무언가 자신을 언짢게 하는 짓이라도 하면 버럭 화를 내며 내쫓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초밥은 엄청나게 맛있었다. 주문 없이도 나오는 초밥은 지금 나는 이것을 먹고 싶었구나, 라는 마음이 들도록 정확히 눈앞에 등장한다.

 

먹어주세요 남겨주세요 -

아버지는 더 이상 장어 사오너라라는 말도 하지 않게 되어, 죽었다.

장어 한 꼬치가 놓인 접시를 바라보며 나는 먹어줘, 전부 먹어줘라고 빌었고 남겨줘, 남겨서 먹게 해줘라고도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장어가 남아 절망했던 어린 마음이 지금도 어딘가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건 아버지에게도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가 있었구나 싶어서 망토 차림의 사진을 보면 기묘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 먼로는 두 번 죽었다 -

환갑이 지났기 때문에 앞날이 없어서 바쁘다.

(2017. 10.20. 금요일 저녁. 플리츠 가디건과 리본모양의 스외르부스키 브롯치를 영근이에게 돌려주었다. 가디건은 올 봄, 브롯치는 몇 년 전 받은 선물이다. “영근아, 선물은 누구나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을 준다. 그러니, 내 정신 아직 멀쩡할 때, 너에게 돌려주는 거야. 내가 요즘 괜히 마음이 바쁘구나! 그동안 잘 썼다나는 요즘 날마다 쫓기고 있다. 사람구실 못하고 갈 것 같아 불안하다.)

 

앤디 워홀이라고? , 그런 시대도 있었다. 뭔가 사이키델릭한 혼란과 기이한 에너지의 시대. 청춘이란 얼마나 부끄럽고도 마음 들뜨는 광란이었나. 아니, 그 시대에는 일본 전체가 들떠 있어서 부끄럽다. (지금 우리나라 여성들, 성형에 보톡스에 명품가방에 화장 떡칠에, 뭐 더 가질 것이 없나 휘번떡거린다. 이 좋은 세상을 주체할 수 없어 생광란미친년들이다. 자신만 온 황칠하면 되는데, 나보고 넌 왜 함께 더불어 미치지 않느냐고 왈왈 곳곳에서 짖어댄다)

 

이삼년 전 학생일 때는 35엔자리 라멘을 반씩 먹고 게다를 신던 녀석조차 있었다. 그랬던 녀석이 취직하자 몸에 딱 맞는 늘씬한 스리피스슈트를 입고 폭 좁은 넥타이로 목을 죄어, 같은 양복이라도 건신한 은행원과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달랐다. 그 집단은 어디를 보고 있었나. 뒤룩거리는 눈은 전부 미국을 향했다. 그들은 미국을 뭐라고 불렀나. ‘저기라든가 저쪽이라고 불렀다. ‘여기이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저쪽의 정보를 얻는데 혈안이 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저쪽잡지를 일 초라도 빨리 손에 넣는 일이었다. ‘이쪽디자이너들의 튼튼하고 조급한 이는 얼마나 탐욕스럽게 저쪽것을 게걸스레 먹었던가.

 

나는 감상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못했다. 매우 감탄하며 까다로운 이론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이래도 돼?’ ‘이거 사치하는 거 아냐?’라는 기분이 샘솟았다. 시대를 골라 태어날 수는 없다. 나는 저 시대를 청춘이라 부르는 시간으로 살아야만 했다.

 

** 그때 -

그 병원은 다마 언덕에 갑자기 솟아난 듯 녹음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겉모습은 고속도로 입구에 늘어선 러브호텔 같았는데, 양식 같은 건 뒤죽박죽인, 살짝 고풍스러운 서양 건물이다.

나는 심한 신경증을 앓고 있어서 온몸이 톱으로 잘리고 절구로 갈려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사막에서 피투성이 심장을 끈으로 동여매어 질질 끌며 걷는 기분이었고, 그것 말고도 온몸이 내란이 일어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았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매우 당당하고 훌륭한 의사가 있었다. 하나도 거만하지 않아서 나는 놀랐다. “여기에 입원시켜주실래요?" 했더니 호텔 대신으로 써주세요상냥한 눈빛으로 말했다. 병실에는 화장대까지 있었다. 호스피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몸은 어디도 나쁜 곳이 없으니 수면제만 받고 나머지는 통증을 참는 것뿐이라서, 하루 종일 꽃무늬 소파에 웅크려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암이다. 내가 입원한 다음날, 개인 실에 환자가 들어왔다. 늘씬하고 지적인 오십대의 미인 부인은 틀림없이 스튜어디스였을 것이다. 의사에게 남은 날을 물었다. 의사는 2개월이라 대답했던 모양이다. “, 남편은 스스로 호스피스 자료를 모아서, 여기로 결정했죠. 그런 사람이니까요.”

 

내 침대에서는 밤이 되면 어두운 오렌지색 불빛이 보였고, 가족 중 누군가가 밤새 깨어 있는 기척이 가만히 느껴졌다. 옆방이 컴컴한 것보다,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이 들리는 편이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딱 한 번, 반쯤 열린 문틈으로 환자의 발을 보았다. 푸른 줄무늬 파자마 밖으로 나온 정강이가 쿵 하고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온몸이 슬퍼하는 듯 연약한 쓰러짐이었다. 다음날 밤이 되었는데도 옆방은 어두웠다. 이튿날 간호사에게 옆방이 조용하네요.”라고 했더니 , 옆방 환자분은 어제 돌아가셨어요.”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도,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본인조차 알 수 없다. 그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부인도 의사도 몰랐다. *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언어화되지 않는 감정은 그때가 오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그다지 강하지 않다. 나는 열하루 째에 병원을 나왔다.

 

덜렁덜렁 -

우리 일본인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남들과 똑같이 하는 것을 상식으로 삼고, 남들과 같은 생각을 도덕이라고까지 부르는 민족이다. 절대다수와 같은 의견으로 타협하는 것을 어른이라 말한다.

젊음이란 그런 어른에게 반항하는 힘으로 사는 것이었는데, 요즘 젊은 애들은(, 기분 좋다! 이 나이가 되니 요즘 젊은 애들이라고 말하는데 아무 저항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큰소리로 내뱉는 게 사회적 책임이라 생각한다.) 사회 어른들의 불결한 모습에 단결해서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그게 평화라는 것이다. (평화, 그러려니)

 

적이 눈에 띄지 않는 것, 칠칠맞고 꼬질꼬질한 젊은 애들이 태연하고 멍청하게 지낼 수 있는 상태가 평화다. 우리가 평화를, 또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한 것은 곧 바보를 기르는 것이었다. 고맙다, 고마워. 소말리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이렇게는 못 지낸다.

 

내면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 여자는 아름답다. 다리 길이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추녀가 적어졌다. 일본이 가난했을 때는 아름다운 사람은 보다 아름답게, 추녀는 보다 추녀로 보였다. 추레한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엽서 한 장도 -

그 무렵 몇 년 만에 요짱에게서 엽서 한 장이 팔랑팔랑 날아들었다.

- 들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

엽서 한 장이 내게 삶을 유지할 희망을 주었는데, 나는 요짱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던가.

 

여자 노인과 할머니 -

일본에서 노인은 멸구처럼, 솟구치는 불가연 쓰레기 같은 존재. 그러고 보면 미국에도 유럽에도 여자 노인, 남자 노인은 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래도록 없지 않은가. 내가 아는 서양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동화 속에 있었다.

미국의 해안에 처음 갔을 때, ‘여자 노인들이 뒹굴뒹굴 구르며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고깃덩어리였는데 온몸에 뻣뻣한 금색 털이 빛났고, 기미와 주근깨를 성대하게 드러내고 조막만한 비키니 수영복도 에메랄드그린, 노란색, 빨간색이었으며 그보다 더 화려하고 커다랄 수 없는 무늬가 있었다. 손에는 굵은 쇠사슬이나 플리스틱 팔찌를 짤랑짤랑 차고 실로 당당하게 뒹굴고 있었다.

일본할머니처럼 눈에 띄지 않도록, 유난하지 않도록 수수하게 꾸미는 것은 시대착오다. (나이를 먹으면 피부가 지저분지니 밝은 색으로, 기운차게 꾀죄죄함을 날려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원색으로 늙음과 싸워야 한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일본의 할머니는 빈틈없이 아이새도를 주름 사이에 채워놓고, 립스틱을 입술 면적에서 1밀리미터쯤 삐져나오게 그리며, 화장을 두껍게 하고, 목에도 팔에도 금붙이를 짤랑이는 훌륭한 일본 여자 노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 일본에서 주제분수따위의 장벽은 전부 걷어치워져 있었다. 할머니가 아닌 일본의 여자 노인들은 육체를 치장하는 혁명을 완수해냈으며 게다가 복장, 화장 등 표면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내용물, 다시 말해 정신적인 주제분수도 겉모습과 같아졌다.

즉 늙음은 악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설령, 죽을병에 걸려도 용기를 가지고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할머니가 되면 하루 종일 할머니일 테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모노를 일상복으로 삼아야 한다. 젊을 때는 살을 드러내는 게 아름답다. 문제는 아줌마부터 할머니까지의 시기다.

인도인은 당당하게 사리를 입고 전 세계를 활보하는데 그건 민족의 긍지일까, 아니면 근대화가 늦어진 것뿐일까, 나는 내 기모노를 가끔씩 쓰다듬으며 꾸물꾸물 하고 있다.

 

*** 나답게 죽은 이유 -

늙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당황해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뭐야?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이런 걸 하고 있지? 하고 섬뜩해져서 짧지 않은 육십 년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이제 충분히 살았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나의 인생이었다. 목숨을 아쉬워할 일 따위는 전혀 없다.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렇지 않다.(2017.10.20.. 요즘, 내가 딱 이렇다. 자꾸 자꾸 멍청히 누워, 혹은 씽크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래, ‘충분하다.’ 이쯤에서 끝나도 여한이 없다고 되뇐다. 사실은 이쯤이 너무 겁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는 앞날이 두렵기 때문이다.)

일흔일곱 된 엄마가 치매에 걸렸을 때, 나는 우선 부모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는 문제는 뒤로 미뤄두자고 생각했다. 만사는 차례대로, 순서라는 것이 있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나는 신문의 다른 곳은 읽지 않아도 부고만은 훑어본다. 그리고 나이만 확인하다.(사노요코는 1938년에 태어나 201072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자도 73세의 나이로 갔다. 시어머님도 그쯤 가셨다. 조금 애석하다 싶을 때, 모두 참 괜찮게 가셨다. 나도 그러고 싶다, 지금 마음은!)

 

엄마가 아흔을 넘으면 나도 일흔을 넘는다. 일흔 넘어서 어떻게 노후 계획을 세우란 말인가. 정말로 사고라도 나서 승천하고 싶어진다. 장수는 진정 경사스러운 일일까. 풍요로운 노후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할까.

 

그녀에게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즉 따라야 할 규율에 목숨을 맡기는 것이 빛나는 자부심이었다. 세간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거북해한다. “이웃은 뭐라도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당신 말이야, 지금은 이웃이 없다고. 복지에 떠넘기고, 남과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는단 말이야.

 

*** 나도 치매 걸린 엄마를 버렸다. 돈을 긁어모아서 내 노후를 뒤로 미뤄두고 돈과 함께 엄마를 유로 양로원에 버렸다. 노인 병원이라는 곳에도 휘적휘적 빨려 들어간다. 크게 열린 채 깜빡이지 않는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그 입은 예외 없이 벌어진 항문처럼 주름이 중심을 향해 모여 있다. 혹은 휠체어에 묶인 채 하루 종일 근사한 홀에 모여 있는, 특별한 돌봄을 받는 노인들. 그들은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가만히 있다.(정물화) 그들은 (모델이 없는 노후)를 망연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화장실 바닥이 빠져서 60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그 할머니는 죽어도 자신의 집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썩은 집에 매달렸을 것이다. 복지를 오직 혼자서 거부한 것이다. 나도 가능하면 화장실 바닥을 헛디뎌서 굴러 떨어져 죽고 싶다. (에세이스트 대표 정경 선생님, 행복전도사 최윤희씨. 62~63. 참 아깝지만 그래서 더 애절한 나이에 간 것 같다. 죽음은 남들(기억창고)이 아깝게 생각해야 남는 장사다.)

 

세상은 합창한다. 자신답게 생생하게 살아갑시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답게 죽을 자유는 없는 것일까.(웰빙 & 웰다잉)

하루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귀중한 일일까. 나는 우왕좌왕할 뿐이다. 분명 죽을 때까지 우왕좌왕할 것이다.(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카네기 묘비명-)

 

아오이 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손도 아닌데, 우리 가족은 슨푸성안에서 산 적이 있다. 슨푸성이라고는 해도 돌담으로 둘러싸인 네모반듯하고 휑뎅그렁한 들판이었다. 쇼와25(1950) 무렵이었다. 네모난 슨푸성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건너면 아오이 문고라는 시립 도서관이 있었다. 아오이 문고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느꼈던 자랑스러움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전에 나온 훌륭한 장정의 낡은 책도 있었고 새 아동서도 있었다. 게다가 공짜로 빌려준다. 나는 그곳의 책을 전부 읽으리라 결심했다. 가장 구석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낡아빠진 책부터 시작했다. 조선의 민화였다. 줄줄이 늘어선 책은 어린이용 세계 민화집이었다. 조선 다음은 인도였고, 몽고 민화도 있었다. 나는 차례차례 닥치는 대로 빌렸는데 이제는 아무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미국문화 센터옆에는 형무소의 붉은 벽돌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형무소 담장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오이 문고로 돌아왔다. ‘아오이 문고미국 문화 센터도 벽돌담 형무소도 없어졌다. 풀이 무성했던 슨푸성도 훌륭한 공원이 되었다. 나에게 첫 도서관이 아오이 문고였다는 사실이 언제까지나 자랑스럽다. 읽은 책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 옆집에서 살고 싶어 -

모리 마리는 정말로 특이한 할머니였다. 모리 마리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상점가를 살랑살랑 걷고 있었다. 모리 마리는 매우 질 좋은 캐시미어로 만들어진, 스웨터라고 부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모리 마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바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무엇보다도 즐겁게 만드는 것은 독특한 유머. 그것도 참으로 고급스러운 유머다. 유머는 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아야 생겨난다. 나는 모리 마리의 옆집에 살고 싶다.

 

끝없는 바흐처럼 -

그나저나 사랑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니, 모리 마리가 받은 사랑이 굉장하다. 그녀는 평생 아버지에게 사랑받았다는 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한번, 아니 천 번, 아니 만 번 아버지에게 사랑받았다는 이야기를 쓰면 그곳에 부드럽고 풍부한 향을 지닌 분위기가, 독특한 세계가 생겨난다. 끝없는 바흐 같다.

지금 내가 모리 마리의 흉내를 내면 진짜 여자 부랑자 같아져서 고귀함이 쑥 빠진다. 내게는 그처럼 사랑받았던 경험이 쑥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귤 하나라도 몰래 먹으면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두들겨 맞았던 나와 마리는 최고야, 마리는 최고야, 마리가 하면 도둑질도 최고야라며 누군가가 등을 쓰다듬어주었던 사람의 차이다. 그러므로 나는 옹졸한 상식 인이 되었고 모리 마리는 위대한 나르시시스트 문학가가 될 수 있었다.

 

반한 게 잘못이다 -

청춘이란 무엇이었나. 그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우왕좌왕 두리번두리번하는 것이었다. 요란한 갈색 머리를 한 요즘 언니와 내면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로 가난했기 때문에 불량소녀가 브랜드 물건을 마구 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랜드 문고본을 마구 읽었다. 돈이 있었다면 나도 샤넬이나 베르사체를 걸치고 싶었을 것이다. 청춘이란 병이로구나.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에 대해 우리가 끊임없이 잘난 척하며 토론했던 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럽지만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하숙했던 집의 아주머니가 틈만 나면 게으르게 문고본을 읽는 내게 책은 읽어도 책에 먹히면 안 돼그 아주머니는 내가 건전하고 건설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올바른 사람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몸속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다자이를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우왕좌왕하는 것은 청춘이나 노년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장정은 책의 초상화 -

일본 영화는 궁상맞고 추레했습니다. 우리도 궁상맞고 추레했으니, 동경은 할리우드 영화를 향해 활짝 펼쳤습니다.

프랑스의 가난은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어떤 책이든 장정이라는 얼굴을 갖습니다. 우리는 내용물을 사는 것이나 얼굴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가끔은 장정이 너무 좋아서 사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면 장정이라는 역할을 뛰어넘어버린 멍청한 미인에게 손을 대고 만 멍청한 남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장정은 내용의 초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육아와 현대인의 고독 -

당신 인생 중에 가장 좋았던 일이 뭐였어?” “육아” “그럼 가장 힘들었던 일은?” “육아복스러운 자식을 가진 어머니에게조차 육아는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대사업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미쳐 날뛰는 육아였는데, 그 내용물 대한 보람은 충분하며, 이제 와서는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달콤하게 배어 나온다.

누구나 자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사람을 얼마나 갈망하는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심리학 책 따위는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이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하고 싶어 한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하고 싶어 한다.

 

문고판 후기- 부끄럽다 -

동화든 각본이든 머릿속에서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어떻게든 창작하는 것이라서 조금은 머리를 쓴다. 에세이 비슷한 글을 의뢰받았을 때 이건 일로 삼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것은 전부 찻집에서 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으면 못 그린다. 대체 이건 뭔가 싶지만 습관이란 무섭다.

대체로 무슨 잡지에서 의뢰를 받는 터라 매수가 정해져있다. 의뢰받기만 할 뿐 스스로 솔선해서 쓴 글이 아니다. 게다가 에세이는 가공의 이야기라 아니므로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써야하니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쓰지 않지만, 인간은 대부분의 것을 착각해서 기억한다.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만이 신세 상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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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인이 아니니,

사무라이처럼 장렬하게 갈 생각은 없다.

 

내 친정할머니가 그랬듯이

평생, 빠른 걸음으로 뛰지도 않고

맛있는 것 골라 잡수시거나 벌컥벌컥 들이 마시는 일도 없으셨고

누구를 향해 자 한번 입에 담는 일없이

사뿐사뿐 몸을 혹사시키지 않고 멈춰선 듯 고요한 그림자처럼 사셨다.

나처럼 똥배가 나올 일도, 얼굴에 여드름이나 기미가 낄 일도 없이

천상, 하늘에서 파견 나온 보살처럼 살다가셨다.

하루하루, 몸과 마음과 정신이 자연스럽게 소진되어

가볍게, 가볍게

마치 장다리 무꽃에 앉았던 

작은 흰나비가 날아가듯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요코처럼, 好不好 강하게

이것 좋아 저것 싫어 주장은 내 성정에도 차마 못할 일이다.

나는 할머니의 손녀딸이다

나의 할머니 홍대분, 남양홍씨 유인처럼 갈 수 있기를!

비 바람 햇살에 산화할수 있기를 願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