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돌 위의 흰 고무신

바람에 단풍잎 한 장 날아들 듯 그리움을 모아 편지를 썼다. 그리움은 참으로 가혹하다. 그리움의 대상은 ‘인연’이니 좋은 인연은 소통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참 소식이란 원래 일자(一字)도 없는 것, 오히려 연(緣)을 만드는 문자가 없는 것이 좋은 소식이라’고 한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평소 안부도 묻지 않고 누가 건드릴세라 숨죽여 있다가, 문득 생각나면 전화를 하고 미처 통화하지 못했으면 문자를 보내고, 다시 이메일을 보내고 연말이면 먹을 갈아 연하장을 띄운다.
나를 지키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을 객이라 하고 머무는 사람을 주인이라 한다. 그럼 나는 주인인가 객인가. 내 집 작은 사립문은 닫아걸고 남의 집 대문이 활짝 열리기를 기다리며 줏대 없이 날마다 조급해 한다. 작고 궁색한들 어떤가. 내가 먼저 열지 않으면 나는 평생 나그네가 되어 떠돌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에게 찾아오면 맛있는 차를 대접하고, 가는 사람은 보내고 오는 사람은 맞이한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피곤하면 눈 붙이다 곡 한번하고 나면 끝나는 것이 인생이라 한다면 삶이란 참으로 부질없다. 그러나 그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일들에 마음가는대로 살 수 있는 삶 또한 꽤 괜찮을 성싶다.
나를 유교의 관습으로 꽁꽁 묶어 놓았던 어머님. 그 어머니 소매 자락을 놓쳐버렸다. 힘들었던 세월을 생각하면 차라리 해방이었다. 창자에서 쓴물이 올라오도록 통곡을 했었다. 그해 가을, 맑고 푸른 가을 하늘을 보지 못하고 시퍼렇게 멍든 하늘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다시는 누군가를 위해 나를 다 하지 않으리라. 그즈음부터 나는 대붕처럼 날기를 꿈꿨다.
내 마음대로 종교를 넘나들 수 있다면 유년기에는 달콤한 알사탕을 받으러 교회로 가고 싶다. 평생 착하게 살 것 같다. 청년기에는 유교의 질서로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조신한 삶을 살다가, 장년이 되면 이것저것 다 내려놓고 산과 들을 병풍 삼아 전원의 삶을 살고 싶다. 이 시기야말로 화양연화의 꽃다운 시절이 아니겠는가. 그럭저럭 노년기를 맞으면 석양에 국화를 바라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싶다. 그때쯤이면 고승들의 선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종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기도에 대하여 알 리가 없다. 기도는  부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그 말에 위안을 받는다. 내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지 않던가. 하루하루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살았다면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의지가 약한 나에게 딱 맞는 처방이다.
어느 날 TV에서 <살다보니>라는 제목의 방송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나이를 먹으려고 작정하고 산 것은 아니었는데, 살다보니 어느 날 문득 노년이 왔다는 이야기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나와서 말하고 있었다.
곱게 화장을 한 은발의 우아한 여인은 아침이면 장미 빛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조조영화 한편을 보고 홀로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혹시 소낙비라도 만나면 선 자리에서 빗소리를 핑계 삼아 참았던 외로움을 엉엉 소리 내어 다 토해버린다고 했다.
어느 원로 코미디언은 젊은 시절 하루저녁 지방공연에 집 한 채를 살 정도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당시 '배OO' 그의 이름만 말해도 남녀노소가 배를 잡고 웃음보를 터트리는 인기를 누렸다. 지금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에 나가도 왕년의 그가 누구였는지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고, 아내마저 각방에서 티브이를 보며 아침밥은 먹었는지 오후에 외출을 했었는지 조차도 관심이 없다며 특유의 익살로 껄껄 댄다. 그의 웃음소리에서 억새풀 밭의 바람소리가 들렸다.
그중의 한 장면이다. 산촌 농가의 앞마당에 남루한 영감이 땔감을 장만하고 있다. 얼굴의 주름이 말린 표고버섯처럼 골이 깊다. 그 옆에 영감과 꼭 닮은 마나님이 오누이처럼 앉아 삭정이를 줍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는 질문에 “고놈 잘 죽었다.” 소리 안 듣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감히 심안(心眼)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겠는가.《산사에서 부친 편지》를 읽었다. 글자가 어둠에 묻힐 때는 산사의 사진들을 보았다. 쓸어버리지 못하는 향기가 있듯이 차마 책을 덮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어 그림 한 장을 첨부한다.
키가 작고 어깨 좁은 보살 하나가 합장하며 산사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꼭 산사가 아니라도 좋다. 오두막의 방 한 칸이면 족하다. 그곳에 따뜻한 아랫목과 앉은뱅이책상 하나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연필과 노트 그리고 강아지풀 한 줄기 꽂아놓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여태까지 어떤 색깔의 옷을 입고 어떤 이력의 신을 신고 왔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혹, 신발 속의 낙엽들은 알고 있을까.
댓돌위의 흰 고무신이 달빛에 곱다.



지난 주 전남 땅끝마음 '대흥사'에 템플스테이 다녀왔습니다.

까만 밤

달빛에 도착했는데 숙소인 '奉香閣'으로 들어가니 툇마루에 달빛이 가득하였습니다.

신통하게도 <댓돌위에 흰고무신>이 두켤레가 나란히 있더라구요.

신발 속에는 노란 은행잎 빨간단풍잎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낙엽들끼리 소곤거리며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아

한쪽 발을 살풋 넣으니 "바스락"거리며 놀라기에 얼른 뺐습니다.



그날 밤

방다박은 절절 끓어 따뜻했습니다.

창호지 문의 달빛은 은은한데 문풍지가 적막을 간간히 흔들었습니다.

오랫만에 코끝이 시려운 방에서 자보니

아랫목의 이불은 타고 윗목의 물이 얼던 어릴 때의 생각이 났습니다.

절집은 적막강산이었습니다.

산사를 누렸습니다.

혼자만 淸福을 받았습니다.





읽은 도서명 ;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저  자 ; 피에르 쌍소
출판사 ; 현대신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고
                          
“어화 달공 이제가면 언제 오나 어화달공“
상두꾼 소리에 맞춰 상여가 나갈 때, 두 걸음 앞으로 한 걸음 뒤로, 못내 성큼 떠나지 못하는 이승이 있고, 차마 보내지 못하는 저승길의 발걸음이 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결국 삶의 마감 선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아니던가? 인생의 마감 선을 향해 바쁘게 항공으로 고속도로로 새마을호로 질주할 것까지는 무엇이 그리 바쁘던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름 같이 둥둥 뜬구름의 삶이 아기자기 즐거울 리는 없을 것이다.
학생시절 혹은 젊은 시절. 제도권에서 시간에 맞게 몸 크기에 맞게 한 걸음씩 늦추지 않아야 하는 시기가 주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아(自我)가 형성되고 자신이 가야 할 이정표(里程標)가 세워진 듯 하면 모든 기능성에서 내려, 한 포기의 풀이 자라는 과정을 살펴도 보고, 피어나는 들꽃을 즐겨도 보고, 풀벌레소리도 들으며 산책하고 도보하며 호젓한 오솔길로 접어들어, 절대적인 소요(逍遙)의 경지를 만끽 해 보는 여유 또한 삶의 꽃이 아니겠는가?
저자가 말하는 ‘느림’은 개인의 성격이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라고, 모든 계절을 아주 천천히 경건하고 주의 깊게 느껴가면서 살 것을 이야기한다.

책의 차례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는 시간에 쫓기지 않기 위해서 행하는 한가로이 거닐기, 듣기, 고급스런 권태, 꿈꾸기, 기다리기, 내 마음의 시골고향, 글쓰기, 포도주 한잔의 지혜, 모데라토 칸타빌레.
두 번째는 리듬의 교체.
세 번째는 과정, 유토피아와 충고로 문화적 흥분, 뒤늦은 도시계획을 위해, 분주하기 말기,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 하루의 탄생으로 마치고 있다. 목차만 봐도 거의 잡힐 듯한 처세술로 주위에서 흔히 접하고 이론으로 뻔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도 밑줄을 그어가며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구 절절 가슴에 닿는 것은 간절하게 내가 추구하는 삶이지 않았을까? 하는 자신을 뒤돌아보는 ‘쉼터’가 되었다.
젊은 날. 바쁘게 살아온 댓가로 자유로운 실뭉치를 조금씩 풀어가며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누구나 공평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많은 과제들에 시달리는 부림을 당하여 앞으로만 질주하느라고 소홀했던, 잃어 버렸던 본연의 마음을 찾아보는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책에서 덤을 톡톡히 얻은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희미하게 퇴색되어 버린 부분, 시대에 맞지 않는 지나간 낡은 시간의 한 부분마다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 있었던 자리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된다. 결국은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의 주인공이 되는 정체성(正體性)을 찾는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되는 일들을 움켜잡고, 분주한 삶 속으로 빠져들어 허우적대는 것이 나의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내 팔자가 내게 운명지어 준 리듬에 맞추어, 인류에게 똑 같이 부여된 삶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고 외치며 나만의 정신적인 공간을 마련할 일이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 방랑시인 김삿갓이 누렸던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정신을 위해 시골길을 거닐며, 때론, 혼자서 논쟁을 벌이고 이의를 제기하고 추리하며 걷는 산책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 자와는 다를 것이다. 타박타박 타박네가 되어 봄들을 가을 들녘을 호젓하게 걷는 것은 홀가분한 걸음걸이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이 베어 있어 사색의 극치를 이루게 된다.
희미한 불빛이 우리의 길을 안내해 주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 기다림은 있는 정성과 힘을 다하고 난 다음, 자신을 맡겨 기다리며 쉬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평생을 학생의 기분으로 배움의 공간에 적을 두고, 내가 아직도 빛을 흡수할 수 있고, 그 빛의 힘에 의해 더욱 자랄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도전하고 시작하는 것만큼의 기다리는 자세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농부들이 논밭의 잡풀이 마구 자라지 못하도록 허리가 휘어지도록 김을 매듯, 우리의 마음에 잡생각이 깃들지 않도록, 자신을 성찰하고 겸손해질 수 있도록 마음의 밭을 가꾸듯, 이 땅에 사는 동안 내내 ‘게으름 피우지 않기’ 위해서 삶을 가꾸는 글 쓰기를 권하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재능을 과시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참모습에 더 접근하기 위함임이 중요하다.
일종의 의식(儀式)같은 포도주 한잔의 지혜로, 결혼을 하게될지, 아니면 결혼식에 초대해 줄지도 모르는 자녀를 위해 가장(家長)이 포도주를 준비하는 詩情어린 준비의 지혜를 이야기한다. 포도주를 보관하고 정돈하는 지하창고는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해마다 놋주발을 닦으며, 이부자리를 손질하며, 가족을 기다리는 마음의 조촐함. 비록 궁핍한 삶일지라도 몸에 배인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닦는 행위가 아닐까.
지금. 나는 원했든 아니든 간에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도 더 가지고 싶은 목록을 적으라면 어쩜 노트 한 권으로도 모자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가지는 일보다는 해야 할 일들을 자진해서 찾을 것을 권하고 있다. 적은 것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기술은 자신의 절제의지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소박한 기쁨을 자주 만들어내는 것이 으뜸이라는데 행복의 본질을 꼭꼭 새겨 작은 행복을 모를 일이다.
목표를 향해 곧장 달리기보다는 기분 좋게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더 좋아하며 누군가에게 금방 다가서기보다는, 다가가기 전에 잠깐 그 사람 앞에 멈춰 서서 바라보는 리듬의 교체를 막간의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자투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투리를 아낀다. 잠깐 잠깐의 남은 시간과 공간을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쓰여질 것을 바란다.
세속의 말로 머리가 총명하지 못하면 손발이 바쁘다고 했던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흉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흔한 처세술로 읽히지 않고, 나에게 한 권의 지침서가 됨은 뒤돌아 볼만큼의 나이가 들었다는 유세쯤으로 여겨본다.
순발력의 문제다. 나는 손이 순발력이 있는 편이다. 야채나 과일을 다루는 칼 솜씨, 바느질, 뜨개질, 콩나물발 따기, 밤 깎기 등이 제법 속도가 붙는다. 그에 비해 걸음걸이의 습관도 있겠지만 발은 조금 서두르기라도 할라치면 발끼리 엉겨 넘어지기 일쑤다. 그 때문일까? 한발한발 걸어 이루는 밟을 리(履)의 이력을 보면 보통 표준사람보다 2-30년은 늦다. 그러나 결코 늦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어떤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할 때, 나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그 나이에…’ 보다는 ‘지금 나이가…’가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살면서 겪어보고, 내 색깔인 것을 인식한 다음. 모시나 삼베의 자투리 홑 천으로 만드는 깨끼솔기의 마름질처럼, 뒤로 몇 땀 갔다가 앞으로 꿰매는, 그리고 다시 뒤로 몇 땀 가서 매듭을 맺지 않고 마무리한 조각 보(褓)처럼 살고 싶다.
어차피 기능성의 재봉틀 질주가 아니라면, 조금 속도가 늦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한 땀씩 왔다갔다하는 손길이 더 꼼꼼하고 운치 있는 모양새가 아니던가. ‘느림의 철학’은 천성적으로 행동이 굼뜨거나 게으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뒤돌아 볼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작가 피에르 쌍소가 소박한 사람들의 휴식처인 이발소를 예를 들었듯, 요즘처럼 온 국민이 바쁘게만 외치며 사는 이들에게 정박지(碇泊地) 구실을 충실하게 한다.

최명희의 <魂불>을 읽고
류 창희

환하게 보인다.
흡사 등잔불의 테두리마냥 둥그렇게 빛이 보인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눈두덩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꼭 눌러본다. 그리고 눈동자를 아래로 향해 내려다보면 희미하게 시작하여 점점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그걸 ‘혼불’이라고 칭한다. 혼불이 보인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확인이리라.
살아있음은 육체의 건재함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게다. 육체만 가지고 삶을 확인한다면 이 세상은 아마도 생명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저마다 나 여기 있수! 목소리를 내며 외친다. 강실이의 목소리는 애써 입만 벙긋거리다 사라지고, 효원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높낮이가 없이 감정을 좀 채로 드러내지 않는다. 강모의 유약함은 아무 소리도 내려고 하지 않는다. 옹구네는 시종일관 악을 써본다. 어느 누구의 목소리도 진솔하지 않음이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지키고 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한다.
동네를 수호하는 정자나무의 자태姿態로 정신을 이끌어 주는 어른의 목소리가 있다. 어른은 늘 선 자리에서 눈으로 입으로 행동으로 살아 있다는 자체로서 말을 대신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눈을 갖추어야 한다고, 사람의 정신 속에는 반드시 정신의 눈이라 할 穴이 있다고, 그 혈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을 세상에서는 ‘어른’이라 말하는 청암부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문의 울타리가 가족을 지켜준다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요즘이야 핵가족에다가 가장의 권위도 희미해지고, 사회도 국가도 개인의 능력과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정신을 관리하고 살기를 전해주고 있다. 비단같은 머리결, 산수의 빼어남보다 정신의 경치가 수려함은 자신을 귀격으로 높여 놓을 것이라고, 자신을 지키고 돌아보는 것이 숨쉬는 일처럼 몸에 익어 일상이 되도록 건사하라고, 청암부인을 통해 최명희는 구구 절절 어른의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진정 이 시대에 어른이다.
혼불을 읽다보면 많은 여인들을 만나게 된다. 여인들마다 한이 서려있지만 또한 염원도 들어있다. 그녀들의 애환이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정성스럽게 살 것을 말한다. 한 집안 문중의 정신이 잘 보존되려면 무엇보다 여자의 힘! 특히 며느리로 들어오는 안 주인의 마음씨에 달렸음을 이야기한다. 집안에 훈김 나고 냉기 도는 것은 다 여자 할 탓이란다. 그저 공 없이 내려온 것은 아니다라고 누대의 할아버지들 학덕에 힘쓸 때, 할머니들은 온 집안 구석구석 한 곳도 빈틈없이 섬기고 모시면서 성주님께 빌고 지신에 빌고 조상신에 빌고 대문신 외양신 뒷간신에 빌어서 우여곡절 다 겪으면서, 그 정성으로 공덕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많은 남의 이야기를 읽었다. 다른 소설들에 비해 혼불의 이야기가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다. 여느 문중 선산밑 동네에서라면 다 그렇게 고만고만하게 살았을 법한 보편적인 내용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쓰는 언어, 그들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예사롭기는커녕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말사전이고 속담사전이고 고사성어집이고 우리 민족의 정신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 속으로 빠져들어 읽노라면 책 속의 인물들과 나는 시종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 속에서 빠져 나와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자신도 모르게 토속어로 말하는 나를 발견한다.
순 우리말로 풀어놓는 세시 풍습은 해학적이다. 추억의 뒷 편에 썩은 대추나무를 도깨비불이라며 뒷간에 가지 못했던 어린 시절로 독자들을 옮겨다 놓는다.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는 이야기. 신발을 감춰놓고 잠자는 이야기는 하나의 풍속이, 아련한 추억이기 전에 전수하는 미풍양속이 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재미있으면서도 머리를 쭈빗하게 하는 젊고 예쁜 주당각시는 곱게 달래고 조심스럽게 위해야 하기 때문에 노염을 안 받으려고 뒷간 근처에서 어흠 어흐음 서너번 헛기침으로 통고하는 노크문화가 읽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섣달 스무나흔날의 한집안의 생 사 화 복의 근원인 부엌신인 조왕신을 모시는 대목에선 사는 건 다 삼가고 조신하게 공들인다는 것이다.
전쟁이후 산업사회로 급 성장한 경제에 발 맞춰 치닫던 우리의 중산층 문화와 과소비를 교훈되게도 한다. 분수도 모르고 흥청망청 네것 내것 안 가리고 문어발로 끌어다 쓰던 경제구조, 거기에 발맞춰 아이엠에프이전의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도 한다.
남의 것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음을. 가문 좋고 문벌 좋은 사람들은 가문에다 돈에다 자신을 걸지만. 내 것이 비록 한 자루의 초밖에 없다면, 단초 한 개피의 고리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연줄 연줄 이어지는 따뜻한 사회가 되어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인연은 흩어지는 민족 정서를 모아도 본다.
사람은 각자 자기 몫을 스스로 알아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한섬지기 농사꾼은 자기 가솔 굶기지 않으면 되지만, 열섬지기는 이웃이 굶는가 살펴야 하는 그릇이 있어야하듯, 핏줄만 가지고 종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핏줄이 지닌 책임으로 가족을 가문을 나라를, 세계에서 정신이 풍요로운 쪽으로 선망하는 국가가 되도록 인도한다.
쉽게 베풀음 또한 법도가 있음을. 사물은 제각기 할 일과 몫이 있는데 밥을 주었으면 그냥 주었지. 싱겁냐 쨔냐 참견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다만 헤아릴 뿐 묻지는 말아야 하는데 평생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섣부르게 베푸는 시늉을 부리면 원한의 근원이 되기가 쉽기 때문이라며 요즘 남북정상회담과 더불어 남북화해무드를 뒤돌아보게도 한다.
무조건 알뜰하게 하면 죽 거리가 밥거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큰 부자 안 되는 법. 알뜰 다르고 문견 다를진대, 없는 중에도 쪼개어 모양내고 가꾸는 것. 그것은 태깔과 격식에서 갖춰지는 것이다. 건너다 본 눈썰미와 내가 해본 손끝하고는 다르다고 작은 일도 손수 정성스럽게 해보는 실천을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면서 허황된 것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항상 지금 머무는 곳을 소중히 알아야 한다고. 고을이건 사람이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이 순간 만난 이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자신을 존중하며 살기를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
최명희는 갔다. 어떤 이들은 혼불이 꺼졌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이 시대의 어른이 갔다고 여긴다. 청암부인이 소설 속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도록 알려주고, 당신의 질서 속으로 홀연히 가듯, 최명희는 우리의 갈 길을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는 것을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그만의 질서 속으로 떠났다.
그런 최명희는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작가가 이렇도록 간절하게 잠 못 이루고 쫓기며 아파할 때, 나는 편안하게 눈으로만 호흡을 같이하며 변죽만 울렸더란 말인가.
흥미로 읽어갔던 시간들이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녀의 혼불은 벌써부터 소진해 가고 있었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혼불의 작품과 작가의 목숨이 바뀌어진 것은 무척이나 애석한 일이지만,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무엇이 소중한지도 모른 채 여러 많은 다른 작가 중에 한사람으로 기억했을 터이다.
17년간이나 인연의 끈을 쥐고 때론 절규하고 때론 모진 세월을 버텨냈던 소설 속의 인물들과 저승에서 만나 뒤풀이라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가끔은 육체에 이끌려 살아가다가 잠시 이상이 생겨 몸이라도 아플라치면 허둥지둥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나의 정신은 온전한가? 온전하게 살 준비가 되어 있는가? 를 확인하곤 한다. 소설 ‘혼불’은 삶의 질을 높은 데로 고귀한 정신 쪽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올려놓으려고 노력하는 나를 찾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가만히 눈두덩을 눌러본다. 그리고 혼불을 보려고 노력한다. 정신을 지키고 정성스럽게 살아가고저 하는 모든 이들의 눈과 마음속에서 최명희는 ‘혼불’을 밝혀 줄 것이다.

1998년 12월 11일
최명희님 편안하십시요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합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당신을 아끼던 독자 류창희올림

상하이부르스
上海自助旅游實習

류창희(花樣年華)

8월20일 월

함께 여행한 사람들 1팀(김기봉 김의호 김은혜 홍순자 류창희)
                   2팀 (김영대 이금자 강미자 정혜운 김미선 류창희)
일정 2007년 8월 20일~8월 27일

金海空港出發 상하이 푸둥(포동공항도착)
스타렉스차가 나왔다. 한국보다 엄청 덥다.(한국 32도정도 중국 35도정도)
꾸베이古北 ‘임비곰비’식당으로 가서 깨끗한 한식으로 식사를 했다. 아직까지는 중국이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옛날 먹고살기 힘들어 북간도로 이주하여 터 잡은 조선족의 힘이 지금의 신선족으로 가득하다. 朝鮮族 (과거 못 살 때의 한국인)→ 新鮮族(한류열풍 이후의 한국인) 어디가나 한국간판 한국말 여기가 한국인가 중국인가.

은혜샘 언니가 운영하는 友莉米糕廠 <WOOREE RICE CAKE> ‘우리떡카페’으로 갔다. 떡 이름과 식혜 팥빙수 등의 메뉴가 한지에 적혀있다. 모시 발을 친 창가에 앉아 팥빙수를 먹었다. 대학생들이 상해여행 중 명소로 인터넷에 자주 올린다고 한다.

와이탄(外灘)으로 가 ‘동양의 빛나는 진주’라는 <東方明珠>탑.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상하이 역사를 재현해놓은 <近代史博物館>을 관람했다. 그동안 중국어를 공부해서 인지, 고향에 돌아온 듯 모두가 자연스럽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전 중국의 후예였던 것 같다.

우먼루 (澳門路)에 있는 <홍자지>(紅子鷄-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성난 남정네 거시기) 라는 중국음식점은 얼마나 큰지 종업원들이 음식을 들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닌다. 어마어마하면 뭘 하나. 물 차 음식 물수건 휴지를 일일이 다 계산을 한다. 한국은 밥만 먹으면 마음대로 물마시고, 빈 컵 사용하고, 과일 먹고, 커피까지 다 서비스로 마셨으니, 적응이 안 되어 뭐든지 “미엔페이”(免費) 공짜냐고 물어야하는 수고에 간이 오그라들기 시작.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물 인심 참 사납다.

저녁식사 후, 상하이 시내를 관통하는 황푸 강. 누런 흙탕물이 흐르는 ‘상하이의 젖줄’이라는 <푸동강>浦江游覽으로 야경을 보기위해 선착장으로 가는 도중 앞에 ‘實習’이라는 차가 보인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초보운전’ 표시란다. 상해택시의 고유글자는 ‘滬’자를 쓰는데 거리에 ‘蘇’자도 많이 보인다. 소자는 호자에 비해 10분의 1가량 등록세가 싸다는데, 그 대신 아침저녁 출퇴근시간에 고가도로 등의 편리한 길을 통행할 수 없다고 한다. 말이 사회주의지 도로에 차들도 돈대로 움직임이 보인다.

유람선에서 바라보이는 푸동浦東(강남)과 푸시浦西(강북)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를 그대로 간직하여 관광화 시키는 중국은 역시 華商(장사꾼)들이다. 휘황찬란한 건물들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건축미학이 세계 속에 ‘건축전시장’ 이라 하더니 아름답다. 그중 LG 간판이 가장 자랑스럽다.

상하이 꾸베이(古北)에서 가장 좋다는 ‘名都城’ 아파트단지에는 외국인이 80%라는데, 그중 한국인이 많다고 한다. 곳곳에 대일학원, 어학원, 24시불가마, 한국간판이 즐비하다. 우리가 머무는 곳은 <保利名苑>이다. 연희동이나 일산의 빌라쯤의 수준으로 1층은 거실, 2층은 식당과 주방이 있으며, 나와 남편이 머물 손님방이 있다. 3층은 부부침실과 아이들 방이 있는 잔디와 건물이 예쁜 주거단지다. 입구부터 경비원이 있어 일일이 드나들 때마다 방문을 확인하니, 문을 열어놓고 잘 수 있을 정도의 치안이 되어있다. 일단 여행준비로 들떴던 심신을 따뜻한 물에 씻어냈다. 물에서 중국의 흙냄새가 난다.

8월 21일 화요일
<우리떡집> 견학을 갔다. 한국에서 재래시장 안에 있는 떡 방앗간을 연상하고 갔는데 웬걸. 시내 외곽에 위치한 공장은 1800평의 대단지 공장이다. 공장안은 벽으로 칸 지어져, 곡식을 쌓는 창고, 자동화 기계로 가루를 부스는 방, 떡을 찌는 방, 등등 실험실 직원들 탈의실 균실험실 위생실 화장실 포장실 사무실 휴게실 등등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있다. 직원도 4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누가 중국을 더럽다고 했나. 시설을 다 갖추지 않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허가를 받은 후의 관리는 소홀하다고 한다. 언니부부는 1년씩의 연장으로 10년을 살고 있는데, 외국인이 지불해야하는 돈이 만만치 않다고. 결국 거대 중국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靑浦城區 <朱家角>으로 가는 길, 사방을 둘러봐도 평야다. 三國志의 근원지라고 하니, 그 넓은 곡창지대를 서로 차지하려고 왜들 싸우지 않았겠는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는 말이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라나. 주가각에서 배를 타고 옛 주택의 골목골목을 돌았다.
도시의 소란스러움에 지친 여행자들이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아늑한 곳이다. 아직 관광지로서는 개발이 덜된 편이라 화장실 시설이나 식당가가 다른 곳에 비해 낙후되어 불편했지만, 물과 옛날의 고가와 배를 탄 우리들이 어우러져 추억의 풍경화를 그려냈다.

<新天地> 옛 프랑스 조계지의 일부가 홍콩자본으로 재탄생된 곳.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모여 있다. 상하이 다운타운에서 가장 먼저 도심개발을 한 지역으로 고급카페, 부티크 숍, 외국 계열의 레스토랑 등이 모여 있는 서울 강남의 로데오거리와 같다.
이곳은 중국 속의 유럽이다. 각 나라의 음식과 건물이 섞여 다국적의 동네다. 그 바로 옆 골목 도보로 5분 거리에 초라하게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있으니…, 고국이 없던 시절, 그때 우리가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실감이 난다. 지금은 꼬마에서 노인까지 “我是韓國人” 나는 한국 사람이다. 한마디면 모두 부러운 눈길로 반갑게 맞이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먼저 간 선열들에게 감사하다. 그들이 몸 바쳐 구한 나라를 우리가 누리고 있다. 명품거리를 둘러보고 스타벅스에서 커피한잔마시니 애국심은 어디 갔는지, 금세 국제적인 환경에 적응이 되어 콧노래 흥얼대니, 이 사람들 선생 맞나. 반성!

<黃山>은 安徽城 徽州에 있다. 과거에는 소금상인으로 부를 누렸다고 하나 부자들이 근거지를 항주로 옮기고 지금은 소박한 농촌이다. 비행기 타고 핫비合肥공항으로 갔다. 택시는 ‘晩’자를 쓴다. 벼는 이모작을 하고 산등성이마다 차밭이 있고 밭에는 목화와 하얀 소국(국화꽃)이 환하게 피었다. 황산 밑에 숙박.

8월 22일 수요일
‘황산에 오르니 천하에 산이 없더라 (歸來黃山不看岳)’ 라는 말처럼 수묵화의 신비로운 산봉우리와 여백이 살아 숨 쉰다는 황산! 새벽부터 설쳐 케불카 타고 산에 오르니, 헌량콰이! (청량함) 헌수프! (쾌적함) 늦가을 날씨처럼 서늘하다. 완전한 천연 콩티아오 (에어컨). 산책로는 모두 돌계단으로 되어있다. 이까짓 것쯤이야 슬슬 얕잡아 보고 걷기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다.
까얼푸(골프)로 몸짱을 만들었다는 의호선생님 다리 뭉치기 시작. 주말마다 등산으로 몇 년간 트레이닝 했다는 홍아샘 다리뭉치기 시작. 나의 남편만 싱싱하게 잘도 걷는다. 산에 가면 늘 민폐만 끼치는 나는 중국체질인지 아직은 견딜 만하다. 황산 정상 ‘北海飯店’에서, 맨몸으로 등지게 지고 음식재료들을 나른 짐꾼들이 있어 점심뷔페식이 특혜나 받은 듯 감사하다. 온 발아래가 구름의 바다 ‘雲海’다 어디 신선이 따로 있겠는가.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 있는 시간.
“왜 이리 인생이 멋진 거야” 북받치는 “헌까오씽” 이기지 못해, 김샘 홍샘(음악전공) 두 분이 듀엣으로 소프라노 엘토의 선율, 황산의 메아리도 감동받아 화답하는 경이로움 괜히 벅차 눈물이 난다.
행복행복 누릴 사이도 없이 청량하고 맑던 날씨는 어디가고 갑자기 산중에 장대비! 부랴부랴 걸어도 빗물에, 아~ 나는 ‘실루엣 선녀’가 되다. (덥다고 속옷을 입지 않은 나는 神農氏의 딸 ‘요희’ 런가. 아침이면 멋진 구름이 되어 산위를 휘젓다가 저녁에는 골짜기 찾아들어 외로움을 달래는 불꽃같은 ‘雲雨之情’을 즐겼다 하더니만… 정신 차리고!) 황산 청소부 순발력 있게 우비장사로 변신했다. 쫄딱 비 맞은 꼴에 흥정해볼 사이도 없다. 체온이라도 보존해야하니. 근데 뭐야! 입은 지 10분도 안되어 비 뚝 그치고 햇볕은 쨍쨍. 밑에 내려와 정말 맛없는 무늬만 한식으로 저녁 먹고 발마사지. 고놈들! 작은 놈들이 중국말로 말 시키니 신이 나서 꾹꾹 잘도 누른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宋老街> 宋나라 老街 걸으며, 나의 장난꾸러기 남편 장난기가 발동하여, 장난감 나무칼을 “얍!” 휘두르다 부러뜨렸다. 상인들이 떼거리로 몰려나와 물어내라 덤빈다. 오히려 “불량품을 판다”고 “꽁안 꽁안” 경찰을 부르겠다고 화를 내며 소리치니, 2천원 물어내라 외치던 상인들 천 원 천 원 하더니 기가 죽어 얼른 들어간다. 어찌 중국어로 경찰이 ‘꽁안’ 이라는 말은 외웠었는지, 나의남편 순발력 완전 ‘쩐빵!’ 새벽 1시넘어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8월23일 목요일
남편은 일이 있어 예정보다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기죽지 말아야 하는데, 하기야 규하선생님 없어도 홍아샘 씩씩하게 잘 지내니….
老거리 <七寶老街>를 갔다. 금방 손으로 비틀어 짜도 될 만큼 옷이 다 젖었다. 헉헉 숨이 막히도록 더우니, 어디 냉방이나 잘 된 곳에 들어가 한숨 쉬면 좋으련만, 좁은 거리를 비집고 들어가 청색면치파오를 70위안을 주고 사 입었다. 밖에 나오니 청색물감이 문신처럼 배이도록 도로 흠뻑 젖는다.
이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全身按摩를 받았다. “아~악! 살살 ~  더 쎄게~ ”  곱상하게 생긴 총각이 누르고 잡아당기고 문지르는데, ‘아~ 남편 너무 보고 싶다.’
허구한 날 엄살떨고 죽는 소리하는 아내와, 뭐라고 야단쳐도 귀담아 안 듣고 웃는 두 놈의 자식을 위해 오늘도 벌어먹여 살리느라, 80위안짜리 값싼 안마도 한번 못 받아보고… 중국을 떠나다니.
코끝이 찡하다. 구석구석 몽땅 부위별로 시원함을 느꼈던 부분을 외워 남편에게 실습할 생각을 해본다. 그나마 위로가 되어 맘껏 호사를 누렸다.
대만사람이 운영한다는 일식집에 가서 이모부가 튀김 초밥 생선회 등을 시켰다.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음식, 아무래도 바가지 옴팍 뒤집어쓰는 기분. 제대로 씹어지지도 않고 혀끝에 감촉도 없다. 1인당 100위안 이라니, 내가 차라리 중국 글을 모르던가, 아니면 중국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조금 배가 덜 아팠을라나. 맛있는 음식 앞에 입맛이 쓰다.

<찐회루 金滙路 上海虹橋大通陽商厦> 일명 <짝퉁시장>신천지 옆에 있던 상양시장이 1년 반쯤 전에 외각인 지하로 숨어들어 찐회루로 옮겨왔다는데, 무국적의 가짜 명품들. 없는 것이 없다. 나 같이 진짜 명품의 브랜드를 잘 모르는 족속은 열심히 봐 봐야 다리만 아프다.
“에이 친구! 이거 진짜 가짜!” 외친다. 딴에는 ‘진짜 같은 가짜다’라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연방 “싸다 싸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목에 핏대를 세워 흥정을 해본다. 그러다 불리하면 못 알아들은 척 “팅부동 (못 알아들었다)” 라고 말하면, 버럭 성을 내며 “너 지금 알아듣는 것 다 알고 있다. 왜 거짓말 하느냐”며 삿대질까지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팅부동” “뿌쯔다오” 모른다고 빡빡 우기다가 힘 빠지면, 서로 쳐다보고 웃는 재미, 물건 사는 것은 뒷전이고 신경전이 신난다. 그들과 오가는 묘한 눈길 억양 어투 목소리 정말 ‘헌요우이스야 (재미있다)’ 누구는 부르는 가격에 10분의 1만 지불하라는데, 그래도 초보자는 4분의1수준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김샘 홍샘은 기내용가방까지 갖춰진 까오얼푸채를 한 세트씩, 큰 가방 작은 가방 시계 핸드백 몇 개씩 샀다. 나는 며칠 후 나의 한국친구들이 또 올 것이니, 싸게 해 달라고 애교 섞인 말로 흥정을 하여 70위안짜리 꾸찌 슬리퍼와 50위안짜리 핸드백을 한개 샀다. 금세 짝퉁 족이 되었다. 괜히 어깨 으쓱하다. (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본성을 찾았나 보다)
저녁은 <수라>에 가서 한국보다 더 한식답게 갖춰진 한식을 푸짐하게 먹었다. 물도 물수건도 후식도 빈 접시도 물론 다 무료다. 값이야 어디 갔던지 의자가 아닌 방석에 퍼질러 앉아 맘 놓고 먹는 맛 맛있다.

<상해 이케야매장 宜家> 크다크다 해도 정말 중국답다. 스웨덴 이케야라는 사람의 브랜드인데, 인테리어 쇼핑몰로 전 세계에 체인을 갖고 있다. 저렴하고 실용적인 제품들로 유명한 곳인데 상하이 매장이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나. 들어가는 문 나오는 문이 따로 있는데, 단일브랜드로 이마트나 메가 마트보다 훨씬 대형이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빨간 담요를 29위안에 샀다.

8월 24일 금요일
아침부터 양샤우지에(일하는 아이)가 다리미질을 한다. 입고 나가면 금세 젖을 옷을 내가 벗어놓은 등산복 바지까지 깨끗이 빨아 다리고 있다. 된장찌개와 김치도 잘 담근다는데. 아침마다 잣죽은 일품이었다.

<CHINA DECO 나비장 옥돌장>- 40평쯤 되는 아파트 안에 나비장이 가득 전시되어있다. <궁> 이라는 연속극에 협찬을 한 물건이라는데, 궁을 안 봐서 모르겠고, 원색의 빨강나비 노랑나비 은색나비 온 집안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나야 아들만 둘이니 밍크코트나 짧은 것 긴 것 잘 봐두었다 받으면 그만이지만, (절대아님. 이런 말 한 죄로 손들고 벌서고 있음) 은혜샘 홍샘은 딸이 둘이니 열심히 도록을 보면서 가구들을 고른다. 택배비만도 1건당 1십만 원이라는데, 배(가구)보다 배꼽이 클 것 같다. 고 틈새 컴퓨터만 보이면 주인의 양해를 구해 우리중국어 카페에 소식을 전하며 ㅋㄷㅋㄷ, 글로벌세상 지구촌은 하나다. 어디서든 열기만 하면 열리는 세상. 쾌속의 빠른 속도를 쫓아가기 ‘쎄’가 빠진다.
꾸베이 쌈밥집에서 일행들과 헤어지는 점심을 먹고, 실버학교팀들이 쓸 런민삐를 받아들고 <뚱야환띠엔 東亞飯店 East Asia hotel>으로 출발. 핸드폰을 로밍해간 덕분으로 문자와 전화 수시로 확인하니 좋은 세상이다.

<뚱야환띠엔> 우리로 치면 서울 명동이나 소공동에 위치한 조선호텔처럼 지은 지 오래된 호텔이지만, 가장 번화가 <난징루뿌씽지에 南京東路步行街>에 있어, 문밖만 나가면 상해의 진국은 다 맛볼 수 있다. 이 호텔을 숙소로 정한 우리의 탁월한 선택은 여행의 달인들이다.
쨘! 드디어 우리 중국어팀 <남파(김영대) 산다화(강미자) 찐티엔(이금자) 리지앙(정혜윤) 예쮜(김미선)> 를 만나다. “러리에더 환잉환잉 광린!” 너희들이 온 것을 열렬하게 환영한다. 내 맘대로 지껄여도 눈치 안보이고, 얼굴 보기만 해도 좋은 우리 통쉐들. 얼싸안고 회포 풀고, 이리 좋은 걸. 지하철 타고 환승하여 동방명주를 중심으로 푸둥푸시를 다 다녔다. 상해 역으로 가서 소주 항주 주장 등의 기차표를 예매하려니 모두 매진되어 표가 없단다.

<찐마오빌딩 金茂大厦 하이얏트호텔> 여러모로 동방명주와 비교되는 건물이다. 맨 꼭대기 88층은 전망대로 쓰인다는 정보를 듣고, 88층으로 올라가는 도중 환승하는 층인 54층으로 가서 한 바퀴 돌며 커피값 술값 물어보고, 다시 88층 전망대에 올라가 레스토랑 지우바(酒吧) 순회, 물론 먹지는 않았다. 밖으로 내다보이는 야경 “쩐 피아올리앙-정말 아름답다” 지하로 내려와 키위쥬스 한잔씩 바닥에 퍼대앉아 마시니 중국이 실감난다. 원래 나의 상식은 4성급 5성급의 고급호텔은 1층 로비와 화장실 이용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쾌적한 환경에서 벗어나 푸둥강가에 인해전술 같은 사람들 속에 섞이니, 광안리 불꽃 축제를 보러온 인파에 섞인 듯 괜히 흥분이 된다. 중국인들의 특이한 땀 냄새 거리냄새가 마취성이 있는지. 아편 전쟁 없이도 몽롱하고 정신이 혼미하다. 난징루에 들어와 아픈 다리 질질 끌며 꼬마유람관광열차타고 호텔로 들어오는데 여행 속의 또 다른 여행의 운치가 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아니면 목소리 큰 은혜샘 형부에게서 벗어나서일까, 일시에 피곤이 밀려온다. 일정보다 하루 먼저 합류한 바람에 지야창加床(간이침대)에서, 기침 콧물 편도 열이 화끈화끈 빨간 담요 뒤집어쓰고 “꽁~ 꽁  ~” 앓음. 예쥐가 타이레놀을 주고 아스피린과 수면제를 같이 먹어도, 기침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다. 목소리는 아주 갔다. 아무래도 내일은 병원에 가서 주사(‘다쩐 打針)’ 를 맞아야 될까보다. “왜 다쩐 한대 맞지 그랬어~” 리지앙이 골골대는 나를 놀리느라 상해있는 동안 남편한테서 “주사 안 맞았어?” 묻는다. 난 주인이 무서워 손도 못 잡고 잤다고 엄살을 떨었다.
에어컨 빵빵한 호텔방에서 빨간 담요를 뒤집어쓰고, 중국의 4대 미인 중에 ‘王昭君’이 되었다. 아~ 나도 나의 미모가 버겁다. 감기에 걸려서까지도 이렇게 양귀비꽃 색깔처럼 선정적이라니…. 밤새 콜록거리며 에어컨을 조정하며 일행들 깰까봐 불도 못 켜고 오줌만 살살 누러 다녔다.


8월 25일 토요일
나는 호텔을 예약하지 않은 관계로 조식표가 없어 굶어야 할 판이다. 한국에서는 원래 미인체질이라 설사하느라 살이 안 쪘다. 매번 중국만 오면 식욕이 당기기 시작, 보는 이 마다 “그만 좀 먹어라” 할 때까지 강행군. 조식25위안에 눈이 번쩍. 아침뷔페에서 비닐봉지 준비는 필수, 젖은 음식은 뱃속에 채우고 마른 음식은 쭈워예(作業?)를 열심히 했다.

택시타고 <豫園>으로 갔는데 나만 택시비가 배로 나왔다. 축 쳐진 눈길이 착해보였나 보다. 그렇다. 운전사가 더 착하다. 본래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을 알아보게 마련이다.
<예원>은 1559년 명나라의 관료였던 반윤달이 아버지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정자와 누각 연못 공간 등을 연결하는 오솔길을 배치해 지어준 정원이라는데,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찾는 내 외국인이 모두 선망하는 곳이다. 일찍 서둘렀는데도 불구하고 줄줄이 깃발을 들고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밀려들어온다. 쇼우피아우추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바로 상하이 전통만두인 <샤오룽바오쯔 小龍包子>유명하다는 <남상만두집 南翔饅頭店>’ 예원표사는 줄보다 더 길게 서 있다. 우리 일행은 선채로 만두 두통을 꾸역꾸역 먹었다. 예원에서 이 팀 저 팀 뒤를 따라 다니며, 일본어로 듣고, 영어로 듣고, 중국어로 듣고. 한국어 팀이 없어 조금은 갑갑했다. 사실은 엄청 답답했다.

신천지로 나와 인도인이 하는 <上海錦江拉丁餐廳 Latina> 코쟁이들 속에 근사한 식사를 했다. 가지가지 고기를 들고 식탁까지 와서 근사한 폼을 잡아 썰어주는데, 촌놈들처럼 먼저 이것저것 먹어 그림의 떡이다. 이색적인 음식들 아깝다. 식사 값은 70위안정도. 생맥주도 맛있고. 신천지 걸어걸어 명품들 구경하는 재미 좋지만. 모두들 이케야 매장으로 가라하고, 난 더 이상 ‘못 걷겠다 꾀꼬리~’ 혼자 택시타고 호텔에 와 휴식. 과연 남은 날을 견딜 수 있을까.

<상하이 위스키>드디어 남파가 밤에 혼자 나가 드디어 사고를 쳤다.

이야기인즉, 예쁜 처자가 커피한잔 사달라고 해, 바에 들어가 두 명의 샤우지에에게 커피한잔씩과 상하이위스키 한잔씩을 사줬다는데, 가격이 2500위안이 나왔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터니 300위안 뿐이라 지불을 하고, 나머지 돈을 카드를 긁으니 비자카드가 안 긁어져, 급기야 똘마니처럼 생긴 지배인 이라는 사람과 한 아가씨를 데리고 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참고로 중국체류기간 1인당 경비로 2300씩 나눠주었음)
나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버리고, 리지앙은 문을 닫아버렸다. 예쥐와 산다화 진티엔언니가 해결사로 나갔는데, 시간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간이 작은 나는 한 1500위안쯤으로 합의 보면 안 될까 궁리를 하고, 리지앙은 상해의 사기공갈단 이야기를 한다. 이제 잠시 후면 우리 둘에게 엄청난 거금을 요구하러 올 것이다 며, 그동안 인터넷에서 읽은 카드까지 다 털리거나 장기까지 다 빼 갈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다 잡혀갔나. 어디 가서 두드려 맞나. 별아 별 생각에 걱정은 태산이지만, 우리라도 남아서 구출을 해야 하니 어쩌겠는가.
뒤에 들은 이야기, 그들이 보는데서 언니들이 남파를 후려쳐 들여보내고, 그들이 자기들 술집으로 가자는데, 예쥐가 “미쳤나” 소리 지르며 주문서와 계산서를 가지고 오라고 오히려 닦달을 해, 몇 번이나 거짓주문서와 영수증을 들고 와 신갱이를 하다가, 마침내 300원을 더 주는 것으로 해결을 봤단다.
말이 해결이지 현지에서 ‘뙤놈’들과 싸워 이기는 쾌거! 사기단을 호통 쳐 보내는 일이 어디 보통인가. 한국아줌마들의 그랑프리 위상이다.
그제야 리지앙과 나는 그 조폭 같은 놈들의 해코지가 두려워 호텔 프론트로 내겨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했다. 문제가 있으면 자기들이 해결해 준다고 전화하라는 말만 듣고 올라왔다. 쫓아왔던 한 중국아가씨는 그 와중에도 남파의 전신마사지를 하러왔다고 버티고 서있다.
남자! 남자들! 정말 문제다. 나이가 들어도 철이 없으니, 보면 모르나 사기인지 아닌지. 자꾸 공부하는 유학생이라고 그들 편을 든다. 중국은 명문대 생들도 아르바이트로 현지처 역할을 한다고는 들었으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기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절대 안 속는다.
여자는 총명하다. 남자 남자! 그들은 어리석다.

8월 26일 일요일
호텔에서 <人民廣場> 난징뚱루와 난징시루를 구분하는 런민광창은 명실상부한 상하이 중심이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상하이박물관 上海博物館>이 있다. 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라고 본 중국의 전통적 우주관이 반영된 건물이 인상적이다. 박물관이 시내복판에 있으니 찾기도 쉽고 교통이 편리하다. 규모와 전시물이 광대하다. 12만 3000여점의 유물을 약 21개 전시관에 나눠 전시한다는데 볼거리도 많고 사람들도 많다. 날은 덥고 박물관 안에서 식사 해결까지 깔끔하다.

<둥타이루골동시장 東臺路古玩市場> 60여 곳의 골동품 상점들이 모여 있는 시장. 오래된 도자기에는 청나라 황제들의 연호가 찍힌 것부터 금세 공장에서 만들어온 모조품 같은 녹 처리 가 된 물건이 그득하다. 50위안에 촛불을 넣어 운치를 더하는 등잔을 하나 샀다. 더워서 그런가 보러 나온 사람보다 파는 사람들이 더 많다. 잡동사니들이 다 버릴 쓰레기 같지만, 안목을 갖췄다면 ‘횡재수’도 있을 수 있겠다. 터무니없이 부르고 터무니없이 깎으니, 나를 보고 “따오매이 倒梅” 재수 없다고 가라고 소리친다.

드디어 <짝퉁시장> 두 번째 갔다. 전전날 만났던 상인들이 나를 보더니, 정말 친구들 데려왔다고 반가워한다. 아마 나를 가이드쯤으로 여기는가보다. 일행들은 가족들에게 선물할 어린이 치파오, 핸드백 종류를 보고, 진주가게에 갔는데 우리말을 배우는 중국아가씨가 “이거 싸다” “쩌거 이쁘다” 제법 발음이 그럴싸하다. 중간중간 “가나다라~ 아야어여~” 한국어를 연습을 하는 꼴이 곧 한국통이 될 것 같다.

잣이나 참깨 등을 사기위해 농산물시장(農貿市場)에 택시를 타고 갔는데 재래시장소리만 듣고 기사들이 <九星재래시장>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니다. 중국은 아파트나 집을 지을 때 시멘트 까지만 바르고 분양을 한다고 한다. 집을 산 사람이 벽지 바닥 욕조 등등을 모두 따로 사서 인테리어를 한다는데, 그 건축자재시장에다 내려주었으니, 지칠대로 지쳐 다리는 아프고 택시도 들어오지 않는 거리라 우린 인력거를 잡아타고 달렸다. 길을 잘못 찾은 덕분에 신바람이 바람을 불러 룰룰랄랄♪♬ 노래까지 나온다. 여행이 주는 여유다.
산다화님의 따님내외가 저녁을 초대해줬다. (鄕村土城 옛골토성)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니 친정여동생 만난 듯 반갑다. 더구나 한상 가득 음식까지 있으니, 염치불구하고 사위에게서 만땅이 되도록 대접을 받았다.

택시를 타고 <김씨 마트 虹中路>로 가서 참깨 참기름 잣 호두 삼베 모시를 샀다. 난 사지도 않았는데, 두 번 씩이나 방문한 나를 내일 뭔가를 챙겨 줄 테니 다시 오라한다. 싸다싸다를 되 뇌이며 샀는데도 뭔가 많이 남는 장사를 한 모양이다. 꾸베이 한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상점이라고 한다.  

8월27일 월요일
혼자 돌아오다.
시집의 증조할아버지 제사가 내일이라, 아쉬움을 남기고 혼자 귀국했다. 남편은 계속 조처를 다 취해 놓았으니, 안심하고 일행들과 같이 들어오라는 문자를 보내왔지만, 여자들에게 시집의 동서들이 그리 녹록하던가.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그립다. 만약 어머님이 살아 계셨다면 어떻게 협조를 구해보련만, 10년 전 북경에 갈 때처럼, 고추장볶음과 여비를 보태주시면서 응원을 해주셨을 텐데…, 어머님이 보고 싶다.
일행은 일일관광으로 쑤저우(蘇州)로 가는 기차를 타러가고, 나는 혼자 택시를 타고 롱양루(龍陽路)역으로 향했다. 큰 가방을 들고 난징루에 서있는 나를 보고 택시기사가 신바람 나 달려와 내 짐 가방을 뒷 트렁크에 싣는다. 지하철 롱양역에 가자고 했더니, 당신은 가방이 크기 때문에 공항까지 가야한다고 자꾸 말한다. 나는 상냥한 웃음을 거두고 표정을 근엄하게 바꾸었다.
“메이꽌시! 비에단신! 메이요우치엔! 부쓰지창 워쓰롱양루 니카이처바!” 문제없다. 걱정하지마라. 난 돈이 없으니 공항까지 안가고 룡양역으로 간다. 넌 운전이나 잘 해라. 를 몇 번이나 큰소리로 외쳤다.(사실 겁나고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 롱양루까지 43위안이 나왔다. 그곳에서 자기부상열차 (차비는 50위안인데 비행기 표를 보여주면 10위안 깎아준다) 를 타고 공항까지 쌩하니 7~8분 정도 소요. 빠르고 편리했다.
계획했던 일정이 바뀐 바람에 동방항공으로 대한항공으로 손짓 발짓 영어 중국어 한국어 총동원을 하여, 29일 표를 27일 표로 바꿔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다. 중국 배낭실습여행을 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일시에 피로가 밀려온다.
(아무도 우리들의 역할을 분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서로의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산다화 언니는 우리 일행의 어른이 되어 중심을 잡아주셨고, 진티엔 언니는 예쁜 웃음을 담은 사진을 찍어주셨으며, 남파님의 듬직한 보호자 역할은 그 목소리부터 무게가 있었다. 단지 남자가 혼자라 심하게 외로움을 탔다고나 할까. 다 우리 여학생들의 잘못이다.
가장 수고가 많았던 리지앙언니. 계획을 짜고 차질이 없도록 일정대로 진행했던 리지앙이 그렇게 똑똑한지 나는 처음 알았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교수들이 원어로 수업을 하면, 말귀를 못 알아듣고 곧바로 나에게 되묻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총명한 언니인줄도 모르고, 언니 앞에서 매 번 잘난 척을 참 많이 했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한다. 막내인 예쥐의 활약은 <상하이 위스키 건>에서 입증되었다.
방향감각과 숫자에 어두운 나는 택시비는 배로 내고 다녔지만, 덥고 다리 아플 때, 가장 좋은 매장에 들어가 중국인들의 혼을 다 빼 놓은 다음 우리일행을 황제가 앉았었다는 푹신한 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쉬게 하는 잔재주, 음식을 시키기 위해 남의 식탁에 가서 조금씩 얻어 오는 몰염치, 물건을 흥정하다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화기애애 서로 웃게 만드는 ‘원화의 쟈오류’ 文化的 交流. (강의실 안에서 교수들이 붙여준 내 별명은 ‘知識分子’였다) 나는 오나가나 ‘기쁨조역할’을 했다.
모두모두 감사하다. 중국어반과 다시 배낭여행을 하고 싶다. 같은 관심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나이와 성별을 떠나 우리는 영원한 한 강의실 안의 통쉐먼同學들이다.)
‘中國’!
중국은 지저분하다. 중국은 엄마만 빼고 다 가짜다. 중국은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만 빼고 다 먹고, 다리 있는 것은 책상만 빼고 다 먹는다고 비하한다.
그러나 나는 중국이 좋다. 중국어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만디한 느림도 좋고, 철학도 좋고, 문학도 좋고, 특히 중국 사람들이 좋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나의 사유가 깊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디 다시 누군가가 여행지를 택하라고 권한다면, 서슴없이 나는 또 중국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덤 같은 시간이 주어져 얼마간의 휴가를 얻는다면, 중국으로 숨어들고 싶다.
그곳에서 가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살다가 그럭저럭 무료해지면, 나는 다시 ‘胡蝶夢’호접몽을 꾸러 중국으로 날아갈 것이다. 가서 뭘 하느냐고?
그냥 중국의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