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 조선비즈K | Tech Chosun | 조선일보

 > 지난호보기 > 2016년05월호 > CEO 라운지
 
         
[travel]



낮에는 봄볕, 밤에는 달빛에 취하는 경주

기사입력 2016.04.04 03:24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니 이내 봄이 왔다. 봄에는 꽃이 피고 싹이 트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생의 의지가 싹튼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 같다. 봄이 시키는 대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밖을 둘러보며 손을 쭉 뻗어본다. 따뜻함. 손끝, 코끝에서 봄의 향기가 스친다. 아마 스치듯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봄이 아까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둘러 운동화 끈을 묶고 반바지를 입고 나가 봄바람과 봄볕에 취해 반나절을 달리다 서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는 무릎이 쑤셔 며칠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달리는 데 욕심을 내다가 마음껏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다니, 그사이 흘러가는 봄이 아까웠다. 쑤신 무릎이 나아지면 걷기 좋은 곳으로 떠나리. 그렇게 걷기 위해 경주로 떠나게 됐다.





불국사



신라의 달밤

신선암
차로 몇 시간을 달려 경주역사유적지구의 월성지구에 있는 동궁과 월지(임해전지)에 도착했다. 잘 놓인 경관 조명 덕분에 어두운 밤에도 걷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서쪽에 있는 왕자의 동궁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멍하게 앉아 달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전부인데도 귀한 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월지는 동궁의 앞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이다. 동궁과 월지를 사진으로 남길 수 있는 적절한 장소를 찾기 위해 호안을 한 바퀴 빙 둘러봐도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바퀴를 직접 돌아야만 곳곳의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로 크지 않은 연못이지만 1300m에 달하는 호안에는 다양한 경관이 있다.


서편 호안은 직선으로 뻗은 구조로 겉으로 보기엔 정방형의 각진 모습이지만, 동편 호안은 해안가처럼 굴곡지게 만들어 놓았다. 크고 작은 섬도 세 개나 있다. 과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각이라는 뜻의 임해전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연못치고는 물이 지나치게 맑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흐르는 연못으로 설계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돌로 만들어진 웅덩이를 통해 정화된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르고 작은 구멍을 통해 이물질을 걸러 연못으로 내보내는 장치가 연못의 입구에 있다. 그뿐 아니라 직선 같아 보이지만 모서리가 없이 굽이굽이 곡선으로 설계돼 물이 고이지 않고, 한 바퀴를 돌며 정화되기에 언제나 연못 물이 맑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주변에 현대식 건물도 오가는 차량도 보이지 않는다. 현재가 아닌 시간의 터널 어디쯤 있는 것처럼 기분이 묘하다.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고, 걸음을 멈추고 다시 걷는 사이 인연과 운명 몇 개가 스쳐 지나고 여기쯤까지 왔을 것이다.





삼릉원 소나무 숲



푸른빛이 도는 삼릉 소나무 숲길

경주 마동 삼층석탑
경주에서 일출은 어디에서 보면 좋을까? 자료를 찾다가 산 위, 바위에 놓인 불상에 아침 빛이 스미는 사진을 봤다. 경주 남산에 있는 신선암이라는 곳으로 칠불암에서 10분 정도 더 걸어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주차장에서부터 칠불암까지는 대략 한 시간 걸어야 한다. 남산 일대에 둘레길이 조성돼 방문객들을 위한 배려가 곳곳에 보인다. 칠불암을 지나서야 뻥 뚫린 풍경이 나타난다. 하지만 날이 흐려 한참을 기다려도 해가 뜨지 않는다. 일출 시각은 40분이나 지났는데, 두꺼운 구름 뒤에 해는 분명 있을 것이다. 일출을 기대하며 뛰어올랐던 모습에 코웃음이 나왔다. 내려오는 사이 여러 가지 잡생각이 사라졌다. 아무래도 올라오길 잘한 느낌이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는 경주 남산 아래 자락에 있는 배동 삼릉 입구 소나무 숲길을 걸었다. 유명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의 소나무 사진이 이 숲에서 촬영됐다. 이 사진은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한국 사진작가 작품 중 최고가에 팔렸다.

구불구불 자라나면서도 비슷한 모양새를 갖춘 이곳 소나무에는 묘한 힘이 있다. 그는 이 숲길을 몇 번이나 걸었을까? 망자의 영혼에 친구가 되어주라는 의미로 심어진 도래솔이 작품이 되기까지 천 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보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봉곳이 솟은 능과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제법 잘 어울린다. 해가 좀 떠서 빛이 스미면 더 좋으련만, 아쉬운 풍경에 렌즈에 입김을 불어 안개라도 억지로 만들어 사진을 찍었다.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좋다.





대릉원



생자와 사자가 함께 있는 도시 경주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6500㎡(3만8266평)의 넓은 공간에 미추왕릉을 비롯해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곳과 달리 경주의 고분군은 온통 평지에 널려있다. 생자(生者)와 사자(死者)가 함께 있는 도시 경주. 작은 동산처럼 생긴 무덤들은 시대를 떠나 주변 경관과 꽤 잘 어울린다. 무덤가를 걷는 것은 으스스할 법도 한데 그 풍광이 우아해 오히려 왕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취한다. 이곳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도 산수유나무의 꽃망울에서도 조금씩 봄이 오는 것을 느낀다.

길을 걸으며 ‘걷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 걸으면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좋고 함께 걸으면 발걸음에 맞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에 좋다. 혼자라는 것을, 함께하는 것을,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며 걸을수록 한 걸음씩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길을 걸으며 고뇌하고 이야기 나눴던가. 걸어온 길에 추억이 그득하다. 보문호수를 따라 걸어도 좋고, 불국사를 거쳐 석굴암을 다녀와도 좋다. 걷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천천히 제 박자에 맞춰 걸으면 누구도 힘에 부치지 않는다. 가장 걷기 좋은 계절, 봄에는 걷기 좋은 경주로 가보자.





보문정


▒ 김울프
프리랜서 사진가 겸 여행작가, 해양스포츠 독립문화 칼럼니스트, MBC 마케팅팀 사진업무 담당,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공연 기록사진 및 각종 공연, 대회 등의 사진촬영 진행




TIP
보문정 경주 보문관광단지 내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CNN에서‘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명소’11위로 선정한 곳이기도 하다. 봄에는 벚꽃이, 여름에는 연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눈이 연못을 꾸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동궁과 월지(임해전지) 연중무휴로 입장료는 어른 2000원, 군인과 청소년은 1200원, 어린이는 600원이다. 저녁 10시까지 문을 연다. 저녁 9시 20분 전까지는 입장해야 한다.
글: 김울프 여행작가
사진: 김울프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