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뭐라고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철학)

사노 요코 /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

빵이 다 떨어져 걸어서 커피숍. 돈만 내면 아침을 먹을 수 있다니 도시는 굉장하다. 작은 테이블이 딱 한 자리가 비었고, 전부 여자였다. 전부 할머니였다. 그 중 넷은 담배를 벅벅 피우고 있다. 전부 홀몸으로 보였다. 예전에 파리 변두리의 식당에서 매일 밤 같은 자리에 앉아 혼자 저녁을 먹는 노파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나이는 아흔쯤으로 보였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문밖의 빛 속으로 사라진 코트 뒷모습은 고집불통 고독의 덩어리였다.

그러나 지금 여기, 커피숍에서 아침을 먹는 할머니들은 파리의 노파를 서서히 닮아간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옷차림도 단정하다. 일흔 후반의 어느 할머니는 롱스커트에 커다란 연보랏빛 스카프를 어깨에 걸치고 여유롭게 커피숍을 나갔다. 그 옆의 할머니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밤색으로 물들였다. 검은 바지에 짧은 재킷을 입고 문고본을 읽는 모습이 정년퇴직한 커리어우먼 같다. 그 옆 사람은 옛날 영국의 가정교사처럼 보였다. 정말로 추억의 패션이다. 그리고 아무도 남들과 대화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장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에게는 생활의 롤모델이 없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며 어떻게 아침밥을 먹을지 스스로 모색해나가야 한다. 그대로 휘적휘적 걷는다. 덧없는 복고풍 분위기가 감도는 그 적적함이 오히려 아름답다.

 

요리에는 기세라는 게 있다 -

, 앞으로 몇 년이나 내 힘으로 돈을 찾을 수 있을까. 비록 속도는 느릴지언정 혼자서 돈을 인출할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자.

변두리 장터의 서민적인 맛이 내 입에 딱 맞았다.

먹다 남은 무절이 등을 쟁반에 받쳐 들고 어디서 밥을 먹었는가 하면, 멀쩡한 식탁을 놔두고 텔레비전 앞 소파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먹었다. 내 가족은 텔레비전임에 틀림없다.

탱크톱 아줌마가 때밀이 장갑으로 내 몸을 북북 문지른다. 이윽고 때가 부슬부슬 나와서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느긋하게 드러누운 나와는 반대로, 아줌마는 온 힘을 다해 때를 밀고 있다. ‘가마 타는 사람 따로, 메는 사람 따로아줌마의 땀도 부슬부슬 떨어진다.

 

아무래도 좋은 일 - 2003

벌떡 일어나서 신경안정제를 한 알 더 먹었다. 나는 약으로 조종되는 인형이다.

혼자서 , 이제 됐어하며 만족스러워했다.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지나치게 많지만, 사사코시에게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지나치게 많다. 사람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엄마는 부엌에 있었고 아버지는 붉으락푸르락하던 차였다. 섣달그믐에 어른들은 붉으락푸르락하고 아이들은 쭈뼛쭈뼛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원탁을 뒤집어엎었다. 상이 엎어지던 순간의 기억은 없다.

여하튼 텔레비전이 없었던 우리 집에서는 식사를 하면서 눈 돌릴 데가 없었다. 평상시 아버지는 자식들의 잡담을 금했고, 식사 시간에는 본인이 혼자서 설교를 늘어놓았다. 내 인생 가운데 가장 비참한 식사였다. 어린애였던 나는 그때, 가장 비참한 것 속에 익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무섭다.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을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는데.

 

붉은 수수죽도 귀한 음식이었다. 보릿겨라는 것도 먹었다. 보릿겨 경단은 끔찍했다. 톱밥을 빚어서 찌는 편이 더 맛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절에 설을 맞이했다. 자식이 다섯이나 되었다. 갓난아이도 있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버지는 패전 후에도 아기를 만들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그 시기다. 어이가 없다. 굶으면 굶을수록 인구가 늘어난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북한과 아프리카의 배만 불룩 튀어나온 갓난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온다. 그 장면을 보고 나는 어째서 아이를 낳느냐고 묻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아버지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일본으로 돌아오던 해에 네 살짜리 남동생이 죽었고, 그다음 해에는 오빠가 죽었다. 영양실조였을 것이다. 오빠가 죽은 이듬해 여름, 아버지는 엄마에게 또다시 자식을 낳게 했다. , 생명이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미국인은 비만 때문에 수명이 짧은데, 아프리카는 기아 때문에 평균수명이 짧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뚱뚱한 미국 애를 아프리카 애한테 먹이면 되잖아요.” 섬뜩하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낸다.

 

나의 체면 때문에 비디오 대여점 방문을 포개했다. 가게의 회색 비닐봉지 한가득 비디오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오우메카이도를 지나가는 섣달그믐의 내 모습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상상되었다. 나의 체면이란 世間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세간이 되지 않으려고 평생토록 무던히 애써왔다.

나는 노인이 된 이래 적어도 자세만은 똑바르게 걸으려고 언제나 신경 썼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딱 마주친 지인이 뭘 그리 거만하게 으스대며 걷는 거야.” 세간은 어렵다. (세간 : 세상 일반)

 

~, 일 안하고 싶다!’

나는 일부러 개미집을 노려 소변을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몰래 쾌감에 취한 모습을 오빠에게 들켰다. “저리가라는 소리를 듣고 엉덩이를 비켜 앉았더니, 오빠는 반바지에서 고추를 꺼내 내가 발견한 개미집을 향해 높은 곳에서 오줌을 콸콸 쌌다. 정말로 분했다. 오빠가 열한 살로 죽어서 안타깝다. 개미집을 좀 더 많이 찾아내 오줌을 싸게 해주고 싶다고, 예순다섯의 할머니가 된 내가 수세식 화장실에 앉아 생각한다. 오빠는 가엾게도 영양실조로 죽었다.

 

*** 어릴 적부터 사람은 때가 되면 죽는다고 믿어 왔지만, 요즘은 때가 되어도 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점점 소신이라는 걸 가질 수가 없다.

 

베란다에 나가 보니 이웃집에 희고 붉은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아무래도 이웃은 부자인 것 같다. 매화 손질이 너무도 잘되어 있는 나머지 한 송이 꺾어 달라는 말도 못 꺼낼 정도였다.

일을 의뢰받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아, 싫다. 가능하면 안 하고 싶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먹고살질 못하니까. 마감 직전 혹은 마감 넘어서까지 양심의 가책과 싸워가며 버틴다. 그러는 내내 위장이 뒤집힐 듯 배배 고여서 이따금씩 위산이 역류하기도 한다. 몇 십 년을 매일같이, 위장의 재촉을 받으며 내 인생은 끝나리라. 일이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얼굴 한 번 보고 싶다. “넌 일단 시작하면 빠르잖아. 빨리빨리 해치우면 편할 텐데.” 상식적인 친구들이 충고를 하면 싫어, 그렇게 일하면 부자가 되는 걸.” “부자 되기 싫어?” “, 싫어. 근근이 먹고사는 게 적성에 맞아. 부자들 보면 얼굴이 비쩍 말랐잖아. 돈이 많으면 걱정이 늘어서 안절부절못하는 거라고.” ** 돈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 없다. 필요한 건 에너지다.

 

나는 옛날부터 부업을 좋아했다. 재단한 종이를 나무 주걱으로 접고 풀을 발라 봉투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리 하지 말하고 해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여하튼 나는 궁상맞은 일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캄> 류창희 수필

 

노노코는 40대 중반 무렵 희귀 난치병에 걸려서 신체장애 1급이 되었다. 노노코는 장애인인데도 거만하다. 언젠가 노노코에게 왜 그리 못되게 구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니잖아. 내가 못된 게 아니라, 병이 못된 거야.”

자식들에게도 며느리에게도 전혀 기대지 않는다. 의지가 안 되는 자식들이 아닌데도. “그 애들한테는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까 나는 페페오가 책임지는 게 당연하잖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문어는 섬뜩하고도 선정적인 풍속화를 연상시켰다.

노노코는 신체장애 1급이 된 이후 하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재활 치료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한다. 연주회에 나가는 것 같지만, 절대로 친구들을 부르지 않는다. 모두들 저렇게 건강한 병자는 처음 본다고 말한다. “노노코는 어째서 저렇게 활기가 넘칠까?” 페페오씨에게 물으니 친구들이랑 있을 때만 저래. 상태가 나빠지면 화를 내면서 어째서 병에 걸렸을 때 살린 거냐며, 왜 그때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느냐며 울어라고 했다.

 

세계에서 가장 성격 나쁜 인간 (2004) -

눈을 떴는데 몇 시인지 모르겠다. 또 침대에서 발로 커튼을 열어젖혔다. 시험 삼아 해보았더니 아직 다리로 커튼을 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병석에 드러눕기라도 하면 다리로 커튼을 열 수 있는 지금의 건강을 얼마나 눈물겹게 그리워하게 될까?

 

수도요금 때문에 수도국에 갔다. 제정신인데도 술 취한 듯 시비조로 다그쳤다. 화나서 내뱉은 말을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성격이 나쁜 인간은 바로 나라는 확신이 들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나는 화난다고 마구 내뱉지 못해 썩는다. 골병으로) 하지만 나에게도 나름대로 원칙이 있어 위사람 불러!”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아내와 자식이 있다. 수도국 직원은 재수가 없으려니까갱년기 히스테리 할망구!”라며 내 험담을 늘어놓겠지. 미안하지만 갱년기는 끝난 지 오래다. 늙은이는 공격적이고 언제나 저기압이다.

 

샌들을 질질 끌며 걷다 보니 내 발소리를 듣는 건 퍽 쓸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게 영감은 언제든 기분 좋은 법이 없다. 얼마 전 이 문방구에서 이부세 마스지가 쓰던 원고용지를 판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부세 마스지 원고용지 있어요?” “없소왠지 어색하고도 비굴한 기분이 들어 멍청히 서 있었다.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소.” “어떤 거였어요?” “회색 선이 그어진 거.” “가장자리에 이름이 인쇄되어 있어요?” 영감은 물어뜯을 기세로 이를 드러내며 선생은 그런 천박한 짓은 안 해라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름을 인쇄하는 건 정말로 천박하다. “워드프로세서가 보급되면서 원고용지 같은 건 안 팔리게 되었다고!” 세상 사람들이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를 쓰는 현상을 나 보고 책임지라는 말투다. “, 만년필 카트리지 주세요.” “만년필이 없으면 어느 카트리진지 모르잖소.” “가지고 왔어요. 이거예요영감은 되돌아와서 하고 중얼거렸다. 지금은 청흑색 잉크가 들어 있긴 하지만, “검정색 있어요?” “만년필은 청흑색이 당연하잖소.” 지당하신 말씀이다. 나는 왠지 영감이 좋아졌다. 작은 플라스틱 상자, 지우개 등을 사며 깎아주면 안되느냐고 묻고 잔돈을 뺐다가 큰돈을 내밀었다가 번복했다. 잔돈을 받아 가게를 나서자 어째서 물건을 한 번에 안 사는 거요. 당신 때문에 내가 세 번이나 돈을 넣었다. 뺐다 했다고!”라는 고함이 들렸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영감을 좋아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 늙은이는 정말로 항상 저기압이다. 마음속으로 영감님, 힘내요하고 응원했다.

 

부모님은 바나나를 꼭 반쪽씩만 주셨다. 한 개를 다 먹으면 이질에 걸린다고 했다. 베이징의 바나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타이완에서 왔을까? 죽기 전에 어떻게든 한 개를 온전히 먹고 싶었다.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는데, 친구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바나나를 반쪽씩만 먹었다고 한다. “이질 걸린대.”

그 뒤로 바나나는 자꾸만 저렴해졌다. 값이 싸지니 아무도 이질 같은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되고 나서야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아침 바나나 우유를 의무처럼 마신다. “, 맛없다.” 그래도 배는 든든하다.

 

아들이 한창 잘 먹던 시기에는 우리의 식탁은 물론이고 인생도 풍족했다.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알찼다.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을 추억하다 보면 마음이 아릴 정도로 슬퍼진다. 그 당시에는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기만 했는데.

 

난 죽어 마땅한 못된 할머니가 될 게 틀림없어.” “괜찮아, 누구나 때가 되면 죽은 법이니까. 괜찮아.” 노노코는 나를 위로했다. 뭐가 괜찮다는 걸까.

놀랍게도 문 앞에서는 나한테 손까지 흔들었다. 아아, 곤란하다. 나는 저 영감이 언제나 저기압이라서, 영감을 대할 때면 조심조심 있는 힘껏 용기를 쥐어짜야 해서 좋았던 것이다. 내일부터 살아갈 용기가 없어진 기분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건 필요 없어 - p98

암에 걸려서 머리카락이우수수 빠진다. 나는 암에 걸린 직후 머리를 2센티미터 정도로 짧게 잘랐다. 그런데도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빠진다. 아침밥을 먹고 미용실에 갔다. “나는 암 환자예요. 머리카락이 자구 빠져서요, 면도기로 밀어줄래요?” 소심한 남자 미용사는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졌다. “징그러우면 안 해줘도 괜찮아요.” “아니요, 아닙니다.” 미용사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라도 암에 걸릴 수 있는데.

눈 깜짝 할 사이에 민둥산이 되었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태어나서 이만큼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은 없었다는 것. 왠지 모르게 이게 바로 나라는 순수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놀라지만 않는다면 평생 까까머리로 지내고 싶을 정도다.

알고는 있었지만, 까까머리가 되자 10엔짜리 동전만 한 땜통이 드러났다. 이 상처는 어린 적 남동생이 내 머리카락을 죽을 둥 살 둥 잡아 뜯어 생긴 것이다. 하지만 남동생이 난폭하다고 속단해선 안 된다. 내가 성질 나쁜 애였던 거다. 얼마 전 예순 넘은 남동생에게 땜통을 보여주었다. “이거 기억나?” “, 미안. 기억이 안 나는데라고 변함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미안해했다. 살인자가 반드시 나쁜 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이게끔 부추기는 악한도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치 앞은 암흑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은 성질 급한 인간이다. 그러나 남동생은 훨씬 선량하게 이 세상을 믿었다.

 

그 착하고 얌전한 남동생이 요전에 우리 집에 왔을 때 아침은 빵인데 괜찮아?” 하고 묻자 , 헤헤, 하고 멋쩍게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나는 밥 아니면 안 되는데. 빵은 배가 안 차서” “된장국도 필요해?” “밥엔 된장국이지. 다른 건 필요 없어. 마무거나 괜찮아” “반찬은?” “샐러드 같은 것 말고. 채소는 나물이면 돼” “평소에는 뭘 먹는데?” “딱히 뭘 먹는다고 할 정도는 아닌데. 저기, 헤헤, 전갱이 구이정도야. 정말로 특별한 건 안 먹어” “말린 전갱이 먹을 땐 무도 갈아서 곁들여?” “누나, 그건 당연하잖아. 안 그래?” “그리고 또?” “데루코는 요리 솜씨가 없어서 낫토 정도밖에는 못 만들어” “낫토는 있어, 고명은 양하로 얹어도 되지?” “냄새나는 건 싫은데. 낫토엔 대파잖아. 쪽파는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다고. 고명은 대파 흰 부분으로 해야지. 진짜로 특별한 건 필요 없다니까.” “그리고 또?” “다시마조림 같은 게 있으면 좋지” “그런 거 없어. 김은 어때?” “좋지. 근데 난 맛김은 안 먹어맛김이 있었던 건데. “밑반찬은 무절이밖에 없어” “무절이는 너무 달아서뭐라고? 이 녀석은 심약한 인격자의 가면을 쓴 요지부동의 옹고집쟁이였다.

아침에 내가 먹을 우유에 냉동 바나나를 넣고 간 주스와 빵 한 쪽을 1분 만에 차린 다음, 남동생을 위해 30분이나 들여서 특별한 건 필요 없는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인도 바라나시 라가카페에서 서너 번 마주친 여자가 있다. 그의 일행들이 서너 명이었는데 나보다 서너 살은 위다. 그녀는 밤송이만큼 웃자란 까까머리인데 민낯과 근사하게 어울렸다. 어느 날, 내가 묵고 있는 숙소에 그녀 일행이 맥주를 마시러 왔다. 호주에서 왔다고 한다. 처음으로 싹싹 밀고 왔는데 그렇게 자랐다는 것이다. 그 순간, ‘, 여행패션으로는 최고다!’ 인도에 다시 가고 싶다. 한국에서 싹싹 밀고 말이다. 인도에 다시 갈 빌미다.)

 

엄마의 손가락은 짧고 굵었다. 아침상을 차리는 와중에 적어도 세 개 이상의 도시락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엄마의 대단한 멋인데, 아침밥을 먹을 때면 이미 말끔히 화장을 했다. 어디서 화장을 한 것일까? 거울도 없던 연립주택에서. 그러면 아버지는 배추절임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며 말하는 것이다. “분 냄새가 나는 군엄마는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골을 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차 싶은 표정이었다. 한겨울의 차가운 배추절임은 맛있었다. 내 인생은 배추절임을 만들지 않은 채 끝나버렸다.

 

, 일본인의 몸은 어찌 되는 걸까. 명품에는 눈이 뒤집히는 주제에, 사마귀같이 비쩍 말라 휘청거리는 몸으로 아기나 낳을 수 있을까. (2005년에 쓴 글이니 지금 2018년 우리 현실이다)

 

옛날에는 할머니들이 쪼그려 앉아 주름진 양손에 고이고이 찻잔을 감싸 들고 조심스레 차를 홀짝였다. 눈앞에서 제비가 날아가건 장맛비가 내리건 고양이 같은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한 녹차를 멍하니 마시고 있을 뿐이다. (요즘, 나다)

 

아버지는 남동생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죽었는데도, 저도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는 남동생을 보면 무섭다. 아버지는 남동생처럼 상냥하고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다. 면도칼, 살모사라고 불리던 사람이다. 지금 살모사라고 불리는 사람은 나다. 아버지는 잘생긴 편이었는데, 외모는 닮지 않고 눈에 안 보이는 살모사 기질만 닮았다.

 

점심 무렵이 지나서 엄마 요양원에 갔다. 민머리에 모자를 쓰고 갔다. 엄마는 쿨쿨 자고 있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피곤해서 엄마 침대로 파고들었다. 엄마는 내 민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기에 남잔지 여잔지 모를 사람이 있네.” “엄마 남편은 사노 라이치지?” “아무것도 안 한 지 한참 됐어.” 아무것도 라는 건 뭘까. 왠지 투명하게 느껴지는 엄마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도 엉큼하게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

*** 눈을 떴더니 몸이 씹다 버리기 직전의 껌처럼 이불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짧은 여행을 다녀와서 곧바로 책 300권에 사인을 했다. 마칠 때쯤에는 당연히 녹초가 되었지만, 나는 이걸로 먹고사는 것이다. 독자는 신입니다. 고맙습니다. 몸은 지쳤는데도 감사의 미소가 절로 우러나왔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속으로 연신 고개를 숙였다. 300번 이상 머리를 조아렸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서.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내 몸은 껌이 되었다.

 

1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암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눈을 끔뻑거리며 친절하게 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셋 중 하나는 암으로 죽는다. 나는 암보다 우울증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몇 배나 더 차가웠다. 주변의 사람들이 점점 없어졌다. 암은 좋은 병이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멜론 같은 걸 사 온다.

 

서른여섯 살 먹은 남자가 배낭을 짊어지고 병문안을 왔다. <겨울연가>비디오 전편을 오후 1시부터 박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보았다. 그 나라는 어쩌면 이다지도 정이 두터울까. 그들은 사랑을 믿는다. 일본인은 사랑을 믿으면 촌스럽다고 한다. 영화도 소설도 부유하는 인물뿐이다. 순애보를 비웃는다. 그 나라는 미국을 좋아한다. 정말로 좋아한다. 툭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미국으로 사라지고, 미국에서 돌아온다. 실수로라도 일본으론 유학 오지 않는다.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그렇다.

 

몇 십 년 전에 지인인 한국 남자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국 여자랑은 연애 안 해요. 한 번 자면 세상 끝까지 쫓아오니까요.” 하지만 그 역시 집념의 사나이였다. 첫사랑 여자에 대한 미련을 17년이나 가슴에 품고 있었다. “내가 카사노바가 된 건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럽 여자랑 연애하고 한국 여자랑 결혼할 겁니다.” 한국의 아내는 정조가 곧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자는 첫 사랑을 이미지로 기억하고, 마치 수채화 한 폭처럼. 예를 들어 강가에 나란히 자전거 타는 풍경으로. 남자는 자신이 처음으로 안은 여자, 몸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 말을 백번 공감한다. 나를 글씨 잘 쓰던 아이로 기억하는 키 큰 멍청한 소년)

 

껌이 된 채 나는 또다시 절절한 행복에 빠졌다. 지금의 나를, 예순여섯의 나를 이렇게나 행복하게 만드는 한국 드라마는 대체 무엇인가. 한국 드라마를 모른 채, 이 행복을 모른 채 죽었다면 나의 일생은, 아아, 그건 아마도 손해 본 일생이었으리라. 진심으로 고맙다.

 

** 괜찮을까, 돈도 드는데 -

땀에 젖어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실제로 깨어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치매에 걸리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치매의 기운을 감지하고는 황급하게 전화기를 든 순간 누구에게 알리려던 것인지 까먹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얼룩무늬로 변했고, 얼룩무늬와 뇌가 퍽 하고 터져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몸도 머리도 산산이 흩어져서, 오로지 하얀 얼룩무늬만이 우글우글 움직이고 있었다. 꿈속에서 , 엄마도 지금 이런 상태구나, 내가 그걸 몰랐네.’

 

나는 한국 드라마에 재산을 탕진했다. 사실 소심한 나는 무언가에 재산을 탕진한 적이 없었다. 명품에 미친 적도 없고 맛 집을 찾아다닌 적도 없다. 여행도 귀찮아했고 남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지도 않았다. 하지만 <겨울연가>DVD를 손에 넣은 이후로 욘사마가 우리 집에 있다는 안도감, 그때부터 DVD를 박스째 사들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한류를 주제로 수다 떨고 싶지만 하하하, 하고 비웃음만 당할 뿐. 고독하지만 행복했다.

 

* 일본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속 마그마처럼 쓰나미 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배웠다. 외교관도 훌륭한 학자도 예술가도 못한 일을 아줌마들이 해냈다. 나도 그 물결에 뒤늦게 올라타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 아줌마들은 외롭다. 할 일이 없다. 인생은 이제 내리막길이다. 집에는 꾀죄죄한 아저씨가 늘어져있다. 이제는 남편과 자기도 싫고, 섹스라면 지긋지긋하다. 남편뿐 아니라 그 누구와도 자기 싫은 것이다. 몸이라면 더 이상 안 써도 괜찮다. 귀찮고 성가시다. 하지만 사랑은 받고 싶다. 애정으로 한가득 채워지고 싶다. 대부분의 드라마에는 섹스 장면이 없다. 키스조차 드물다. 얼굴을 맞대고 껴안는 정도가 딱 좋다.

 

이성은 모순을 허락하지 않지만 감성은 모순의 마그마다.

일본 아줌마들은 자식의 결혼이나 연애에 참견하지 못한다. 피 끓는 청춘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도 두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다. 하지만 한국 부모들은 강하다. 자식들은 부모가 반대하면 절대로 결혼하지 못한다. 한국 부모의 강압적인 태도는 정말로 극성맞다. 일본 아줌마들이 한번쯤 해보고 싶어 하는 행동을 한국 아줌마들이 대신 해준다.

 

전쟁이 끝났을 때 엄마는 30대였고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다. 자식을 다섯이나 두다니 훌륭한 아줌마다. 전쟁이 끝나고 2년간 우리를 먹여 살린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가재도구를 팔러 암시장에 나갔다. 엄마가 암시장에 가면 아버지는 벽난로에 기대어 콧물을 흘리면서 자식들에게 안데르센 동화나 읽어주었다. 아버지는 종전으로 무기력해졌다. 엄마는 언제나 기운이 넘쳤고, 거기서 번 돈으로 산 수수며 콩깻묵을 보자기에서 꺼내면서 얼마나 장사를 잘했는지 자랑했다. 엄마는 일평생 중 그때가 가장 생기발랄했다.

 

트럭을 탄 중국인이 우리 집을 털러 온 적도 있다. 나와 남동생이 잠든 방 창문으로 훌쩍 들어왔다. 여름이어서 모기장을 쳤다. 아버지가 모기장 밖으로 나가려 하자 권총을 든 중국인이 중국어로 나가면 죽인다.”고 했다. 아버지는 얌전히 모기장 안에 있었다. 중국어를 몰랐던 엄마는 그 틈을 타 반대편으로 몰래 빠져나갔고, 부엌에서 프라이팬과 냄비 뚜껑을 챙겨 들고 다른 방 창가로 가서 두들기며 도둑이야! 도둑이야!” 그 소리에 놀란 도둑은 연두색 식탁보 한 장만 훔쳐 달아났다. 엄마는 기운이 넘쳤다.

 

시골에서 일곱째 아들로 태어나 인텔리의 길만 걸어온 아버지는 손재주가 좋았다. 한번은 집에서 넝마를 잘라 샌들을 자꾸자꾸 만들었다. 열 켤레쯤 완성되자 거리에 나가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 나에게 네가 팔아라.” 본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정거리며 지켜보았다.

어떤 여자든 여차하면 아줌마로 변한다. (김광석 부인 서해순이 JTBC에 나와 손석희앵커를 보고 아줌마 건드리면 너도 죽는다.”)

 

엄마는 매일매일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변해간다. 엄마는 치매에 걸리고 나서 고와졌다. 신기하게도 기품마저 생겼다. 치매에 걸리기 전 엄마는 난폭하고 거친 데다 기운이 넘쳤다. 그때 나는 엄마의 옹고집 때문에 괴로웠다. 엄마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자, 비로소 엄마를 용서했다.

 

살아 있는 인간의 생활은 고되다 -

마감이 나흘이나 당겨졌다고 한다. “사노 선생님은 육필 원고라서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던 중 감기에 걸렸다. 감기니까 당당하게 잤다. 감기가 아닐 때도 나는 지면과 거의 평행한 상태로 지낸다. 나는 근 10년 동안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 1년 동안 누운 채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암 때문에 가슴을 잘랐으니까. 항암제의 불쾌함을 한류로 이겨냈다. 그렇다. 한국 드라마는 머리 쓸 필요 없이 마음만 움직이면 된다.

 

요즘 육필로 원고 쓰는 사람 많이 없어요?” “전혀 없어요.” 문득 돌아보니 내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나도 끝났다. 컴퓨터는 메이지유신보다 격렬하게 전 세계를 뒤바뀌었다. 국어라면 나는 언제나 수를 받았다. 남동생은 미 정도였는데도 딸과 문자를 주고받는다.

 

나는 내 사랑스러운 침대로부터 거의 50미터 반경 안에서 생활한다. 청춘이란 자신의 젊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최후의 여자 사무라이 -

나야, 오늘 집에 있어?” “” “그럼 갈게. 뭐 좀 있어?” “있어딸깍. 모모 언니는 전화로는 화난 것 같아도 사실 평소와 똑같다. 쓸데없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모모 언니와 전화할 때는 세 마디 이상 해본 적이 없다. “오늘 집에 있어?” “, 없어” “그래?” 딸깍.

모모 언니는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이다. 유행을 뛰어넘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스타일이 똑같지만, 옛날 느낌은 들지 않는다. 혹은 항상 옛날 느낌이다.

옷깃에 카메오 브로치가 달려있었다. “비싸 보이는 옷이네.” “당연히 비싸지, ** 이젠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지 모르잖아? 먹고 싶은 것 먹고 사고 싶은 것 팍팍 사기로 했어.” 모모 언니는 뭐든지 맛있게 덥석덥석 잘 먹는다. 먹는 속도도 굉장히 빠르다. 한 창 잘 먹어야 할 시기에 못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빨리 먹는다. “매일 먹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워

언니야말로 보릿겨 경단은 구경도 못 해봤지?” 언지는 왠지 분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건 못 먹어봤네.” 왠지 이긴 기분이다.

모모언니는 드라마도 영화도 소설도 좋아하지 않는다. 음악은 클래식만 듣는다. 아마 연예인은 한 사람도 모를 것이다. 10대에 바이올린을 시작해서 일흔이 넘도록 켰다. 나는 음약, 특히 서양음악이라면 클래식부터 재즈, 록 할 것 없이 전부 다 싫다. 나는 언어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서 가사가 있는 음악만 듣는다.

나는 어린이 된 후에 모모언니한테 서예를 배웠다. 습자를 가르치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언니는 정말로 아름다운 글씨를 쓴다. “서예는 왜 그만뒀어?” “난 글씨본대로 밖에 못 쓰겠더라. 내 글씨가 안 나와. 재능이 없었던 거지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끝내 인정하다니 대단하다.

나 이제 정년까지 261일 남았어. 자기 전에 달력에다 X표 친다니까.” “나는 돈을 받으니까 일할 때는 회사 소유야. 나라는 사람은 없어.” “난 전부 회사가 하라는 대로 했어. 출장 갈 땐 비행기도 탔다고.” 언니는 세상에서 비행기를 가장 싫어한다. “우와, 언니 비행기도 탔어?” “일이니까.” 언니는 돈을 쓸 시간조차 없었다.

넌 돈 많아서 좋겠다.’ 거나 넌 돈이 많으니까라고 한다니까. 40년을 일했으니 당연하잖아. 누가 거저 준 돈이 아니야. 내가 일해서 번 돈이라고.”

, 난 결혼 안 해서 다행이야, 요즘 정말 절실히 느낀다니까. 자식도 없어서 다행이야, 모두들 자식 때문에 고생하는 걸.”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두 번이나 결혼했고, 이혼했고, 변변찮은 자식까지 있다. 계속 침묵을 지켰다.

 

요코가 또 저런다 -

열 받는다. 그게 뭐든 간에 단어를 바꿔 부르면 화가 난다.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이라고 하거나 장님을 눈이 불편한 사람이라고들 한다. 호칭을 바꾼들 상태가 달라질 리 없다.

*** 나이를 먹으면 울화통 터지는 일이 는다. 외로운 독거노인은 주변에 화낼 소재가 떨어지면, 점차 천하와 국가를 논하며 울분을 토한다. (요즘 택극기 부대)

모모 언니는 줄곧 역정을 내고 있다. 모모 언니는 집으로 돌아갈 때 요코, 너 자식 참 잘 키웠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역시 모모 언니는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으니 낙천적이라서 좋겠다. 자식이 10년이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던 현실을 모르는구나.

 

친구들은 이런 나와 어울려준다. 모두들 나를 참아가며 어울려주는 것이다. 모두들 아, 또 저런다. 남이 어떤 의견을 말하면 나는 반드시 휙 하고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린다.

**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어느 책을 보더라도 스스로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책을 읽을 때조차 반대편으로 휙 날아간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녀석 -

예순여덟은 한가하다. 예순여덟은 찾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럼, 예순여덟까지 기다리며 살아봐) 그렇다. 일흔이 가까워지니 거의 대부분의 남자가 귀엽다. 누구라도 껴안을 수 있다.

 

요즘(2006년 일본)은 개를 산책시킬 때 안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 지구는 망해가고 있다. 생명체로부터 본능을 빼앗으면 끝장이다.

 

나는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타지도 않은 택시 요금을 냈다.(아일랜드 더블린 이비스호텔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샛길 접어드는 것이 힘들어 1~2시간 정도 진입로를 못 찾고 헤매다가 결국 택시를 잡아 뒤좇아 갔다.)

 

링거를 다 맞고 진료를 기다리던 중에 간호사가 이거 두고 가셨어요.”라며 브래지어 패드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이 병원의 젊은 의사 선생은 근사하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젊은 선생과 만난다는 생각에 옷을 사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서냐고? 나 자신의 기분을 위해서다. “좀 어떠세요?” 의사들은 나쓰메 소세키 시대부터 줄곧 좀 어떠세요?”라고 묻는다. “이 부분이요?” 젊은 의사는 허벅지 부근을 어루만져주었다. 깜짝 놀랐다. 남자가 무릎을 만지는 게 도대체 몇 십 년 만인가. 그리웠던 손길은 한 순간에 끝났다. 앞으로 2년 뒤면 일흔이다.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 얼굴이 붉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 간 첫날 남자 대장에게 얻어맞았다. 교실로 돌아오자 반 전체 남자아이들이 차례로 나를 또 때렸다. 내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다 때린 다음 진짜 안 우네.”라고들 했다. 나는 태연했다. 괴롭힘을 당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대장은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을 때까지 짐받이를 붙들고 땀과 흙 범벅이 되어 함께 뛰어주었다.

 

누구냐! -

우리 집은 나 혼자 사는데도 텔레비전이 세 대다. 일할 때도 침실에도 나는 텔레비전에서 광고가 나올 때만 집안일을 한다. (나는 광고도 보는데, 요코는 절제할 줄 안다.) 텔레비전 앞에서도 집안일을 한다.

냄비도 텔레비전 앞에서 닦는다. 언젠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다 닦은 냄비가 옆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무릎 위의 반쯤 닦다 만 냄비도 같이. 그때는 조금 쓸쓸했다. 그 정도로 텔레비전이 재미있나? 하나도 재미없다. 텔레비전은 정말로 국가의 비밀정책일지도 모른다. 국민을 멍청이로 만든 다음 모종의 음모를 저지르려는 게 아닐까. 9.11 테러가 터진 날 에리코 씨가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에리코씨네는 텔레비전이 없다. 아무리 나라도 손님이 오면 텔레비전을 끈다.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빨리 텔레비전 켜봐!” 좁은 우리 집 거실에 비해 지나치게 큰 텔레비전이다. (아이파큰 우리 집)

 

계급이 역시 마음 편하다. 나는 가난한 서민의 딸이라서 분수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세상만사의 기준으로 삼는다. 프라다 가방을 사고도 좌불안석이다.(내 얘기 하는 줄, CCTV같다. 웃기는 것은 며느리에게 가방을 3개쯤 선물로 받았다. 셋 다 에코 백이다. 내가 만날 에코 백만 들고 다니니, 내가 에코 백만 좋아하는 줄 안다. 근데, 사실 에코백이 가장 가볍고 당당하긴 하다.)

 

*** 늙은이의 보고서 -

나 역시 젊은 시절, 마음만은 화사(설렘, , 낭만)했다. 나도 모르게, 정말로 부지불식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순이 넘었다. 화사한 생명 같은 건 완전히 잊었다.

 

결혼식은 어쩐지 애처로운 기분이 든다. 생활이란 화사한 생명과 연을 끊는 것이다. 혼인 신고서를 제출해봤자 단지 같이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생활은 수수하고 시시한 일의 연속이다. 화사한 마음이 생기면 불륜이다. 부부 생활 중 몇 십 년은 몹시도 괴로우리라는 것을. 하지만 고통스러워도 그 생활을 유지하는 이유는 노후 때문이다. 더 이상 아무에게도 화사한 마음을 건네받지 못하는 동지끼리 툇마루에서 말없이 감을 깎아 먹고 차를 마실 날을 위해서다.

그런 두 사람은 망중한을 즐긴다. 편안하고 안락하다. 화사한 마음 따윈 잊어버렸다. 세월만이 길러낼 수 있는 신뢰, 꽃도 태풍도 뛰어넘어 망중한을 즐길 날을 위해 결혼하는 것이다.

 

못마땅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아들은 손자가 생겨도 데리고 오지 않는다. 두 사람은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는 마음을 한 컵에 담긴 물처럼 공유한다.

 

무엇을 깨닫건 간에 이제 일흔이라니 이미 늦었다. 나는 남자를 애인보다 친구로 삼기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남자 친구들이 무척 많아졌고, 점차 그들의 가족 모두와 교류하게 되었다. 너랑 안 자서 다행이야.” “잤으면 헤어져야만 했을걸.”

 

스무 살의 남자와 서른 살의 여자가 화사한 마음을 품는 건 괜찮다. 하지만 같은 열 살 차이라도 일흔에 가까운 여자와 예순이 다 된 남자는 안 된다. 할아버지가 인기 있을 조건은 돈과 명예뿐이다.

 

NHK에서 <한시 기행>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나조차도 아는 두보나 이백의 한시를 배우 에모리 도루가 제법 묵직하면서도 격조 있게 읽어나간다. 우리 집은 문풍지가 찢어지면 아버지가 붓으로 한시를 써서 처덕처덕 발랐다.

아버지는 돌돌 말린 두루마리를 스륵스륵 펼쳐가며 외할아버지에게 구혼의 편지를 썼다. 너무도 달필이었던 나머지 외할아버지가 놀라서 엄마를 시집보냈다고 하니, 아버지에게 글씨는 자랑거리였으리라. 에모리가 장중하게 읊는다.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한 잔 한 잔에 거듭되는 또 한 잔이라.” 나는 갑자기 죽은 아버지가 그리워져서 <NHK 한시 기행 100> DVD열편을 전부 사고 말았다. (웃긴데 이해가 간다. 그 아버지는 나와 같은과다.)

예술은 죄다 에로틱하다. 나는 에모리 도루의 낭독에서 화사한 마음을 찾으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의학에서도 뇌가 죽으면 죽음을 인정한다. 나는 반쯤 죽은 사람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사고는 , 이 책 읽었는데라고 마지막에 가서야 떠 올린다.

저거, 그거, 저쪽, 이쪽, 대명사의 연발이다. 동년배끼리 모이면 이거, 그거, 저거, 반쯤 죽은 사람들의 모임이 된다. 모두들 화사한 마음은 어찌한 것일까.

전철을 타고 둘러보면 젊고 예쁜 여자 앞에는 반드시 할아버지가 서 있다. 저도 모르게 이끌려가는 것이다.

 

할머니는 젊은 미남한테 이끌려가서는 안 된다. 가방을 고쳐 잡거나 창밖을 두리번거리는 사람 앞에 서야 한다. 앉기 위해서다. 화사한 마음보다는 실용을 택한다. 변태 할아범은 공인되어 있다. 하지만 변태 할멈은 실성한 사람이다. (2018. 요즘 매일 보도되는 미투’(고은 이윤택 김기덕 조민기 조재현 등등)를 보며 2007년 사노 요코가 쓴 문구가 보인다.)

 

***** 생활의 발견 -

사노 씨, 앞으로 1년 정도면 죽는데 무섭지 않아?”

전혀, 언젠가는 죽는 걸. 모두 아는 사실이잖아.”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야? 두렵지 않아?” “안 무섭다니까. 오히려 기뻐. 생각해봐. 죽으면 더 이상 돈이 필요 없다고. 돈을 안 벌어도 되는 거야.” “정말로 안 무서워?” “그렇다니까. 게다가 암은 정말로 좋은 병이야. 때가 되면 죽으니까.”

나는 행운아다. 담당 의사가 근사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일흔의 할머니가 근사한 남자를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쁜가?

몇 년이나 남았나요?” “호스피스에 들어가면 2년 정도일까요.” “죽을 때까지 돈은 얼마나 드나요?” “1천만 엔.” “알겠어요, 항암제는 주시지 말고요. 목숨은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럭키!”, 나는 프리랜서라 연금이 없으니 아흔까지 살면 어쩌나 싶어 악착같이 저금을 했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나는 국수주의자라서 지금껏 오기로라도 절대 외제 차를 타지 않았다. 배달된 재규어에 올라탄 순간 , 나는 이런 남자를 평생 찾아다녔지만 이제 늦었구나!’라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타는 차가 재규어라니 나는 운이 좋다. 나는 일흔에 죽는 게 꿈이었다. 신은 존재한다. 나는 틀림없이 착한 아이였던 것이다.

산 지 일주일 만에 재규어는 너덜너덜해졌다. 나는 주차가 서투른데 우리 집 주차장은 좁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해졌을 뿐만 아니라 까마귀가 보닛 위에 매일 똥을 쌌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도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 수 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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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그리고 겨울. 나는 사노 요코의 책을 읽고 밑줄 그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축복이다

오늘 밥을 먹는 것, 오늘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 것,

오늘 햇살을 받는 것, 오늘 새소리를 듣는 것

그런 소소한 것들에 소소한 감흥이 일어난다.



어떤 일들이 가슴을 짓누르면 숨이 멎을 것 같다.

전에는 이런 때, 혼자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지금은 탄산수를 마시고  트림으로 시름을 내 뱉는다.

그리고 사노요코의 글을 다시 뒤적여본다.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자식이 뭐라고, 이것 좋아 저것 싫어,

요코의 글은 시원한 트림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