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좋아 저것 싫어

사노요코 /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싫어, 싫어, 하며 기운차게 살아오긴 했지만, 무언가 잊어버린 기분이 든다.

 

공짜로 보는 영화’ - 꿈속에서도 너무 기뻐서 마치 꿈같다고 생각하며 그렇고 그런 분위기가 되기 일보직전이다라고 엉큼한 마음을 품었는데, 그 일보직전인 순간에 당신, 어린이집 시간 괜찮아?”(나의 평일 일상, CCTV에 찍힌줄 알았다) 저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습니다. 그 무렵 저는 어린이집 마중 시간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려있었습니다.(어미가 아닌 할미인 나도 그렇다. 60넘어 손주 스케줄에 시간 맞추는 여자를 미친년시리즈에서 보았다. 그래도 아이 본 공은 아이를 잘못 본 만 돌아온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다음 날부터 베개 아래에 제임스 딘이 실린 잡지를 깔아두었습니다. 어떤 악몽이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 꾸는 편이 몸에 좋습니다. 꿈과 현실이 동시 상영되어야 건강한 거겠지요. 살아 있기 때문에 꿈도 꿀 수 있는 거.

 

사사삭 - 인간에게 해가 된다 해서 일방적으로 말살해도 될까요. 나비는 사랑하고 바퀴벌레는 미워해도 될까요. 세상 남자들은 커다란 물고기를 부둥켜안고 씽긋 웃는 헤밍웨이를 동경하지 않나요. 제가 새까맣게 번들거리는 커다란 바퀴벌레를 잡았을 때의 기쁨과 같지 않나요. 역시 인간으로 죽는 것이 가장 길고도 괴로운 일생 같습니다. 백년이나 사는 동물이 또 있을까요.

 

말의 눈은 - 제겐 비밀이 있습니다. 몹시 부끄러운 일입니다. 승마 수업에 가서 말을 탔답니다.(요트를 탄다하면, 무조건 사치라고. 외제차를 타면 무조건 사치라고.) 벨벳 모자를 쓰고 승마 바지와 장화를 신고, 길고 날씬한 다리를 가진 말에 타는 건 부끄럽습니다. 자신의 출신을 배신한 것 같고 사기를 쳐서 다른 계급으로 몰래 들어간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약간의 돈으로 죄다 손에 들어옵니다. 그게 부끄럽습니다. 승마장은 절경 속에 있습니다. 지금 말을 탈 수 있다 해서 뭔가, 전쟁에 나갈 것도 아니고 쇼핑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경마 기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귀족 남자를 홀릴 젊음도 미모도 없다. 그런데도 이만큼 밑천을 들였으니 장화 앞코만큼은 능숙해지고 싶다. 라는 쩨쩨한 마음도 듭니다.

 

말은 어찌나 맑고 투명한 눈을 하고 있는지요. 날 때부터 말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인, 한없이 고요하고 슬픈 눈입니다. 말처럼 깊은 슬픔이 담긴 인간의 눈은 본 적 없습니다.

 

성모마리아와 아미타불 - 개의 세계는 남녀교제가 꽤나 자유로운 모양인지. 노리코와 모모코가 함께 산 이후 가끔 모모코를 만나면 정말로 예의상 꼬리 흔드는 것도 아깝다는 듯이 홱 떠나버렸습니다. 모모코가 병에 걸린 뒤 비탄에 잠긴 노리코는 식욕이 없어져 모모코에게 채소 죽을 만들어주고 소등심을 먹이고 집 안에서 담요를 덮어주었지만, 그래도 모모코는 오줌을 싸러 갈 때 힘없는 허리를 질질 끌고 신음을 내며 마당으로 나가 한가운데에서 힘이 빠져 늘어졌고, 그러면 노리코는 자신의 코트를 벗고 모모코와 마찬가지로 땅바닥에 가로누워 울면서 모모코를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두운 목소리로 오늘 새벽에오늘 밤 쓰야(通夜) 유족이나 조문객이 고인의 곁에서 밤을 새우는 것(임종)할거야

 

장례식 만두가 엄청나게 쌓여있고 조림이라든지 유부초밥도 수북했습니다. 모모코는 담요를 깐 현관 바닥에 안치되었습니다. 모모코는 머리에 복숭아꽃을 둥글게 엮어 만든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모모코는 가슴에 작은 성모마리아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머리 옆에는 조그만 성서도 있었습니다. 그 머리 옆 바닥에는 본적도 없는 두껍고 긴 선향(높이 30센티미터, 8밀리미터 정도)이 연기를 가늘게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 선향에는 아미타불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나무묘호렌쿄라고 梵字로 쓰여 있습니다. 그때 옆집 남편이 공양할게요.”라며, 반야심경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혼혈아 모모코는 온갖 신과 부처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복숭아꽃 관을 쓰고.

 

*** 꾸준히, 꾸준히

저는 소심한 편인지 택시를 탔을 때 그 좁은 공간이 침묵으로 가득하면, 그만 견딜 수 없어져서 오늘은 춥네요.(스몰토크)” 말을 해버린다. 운전사는 줄곧 히터를 튼 차 안에 있었으니 그래요?” 그러면 요즘 경기가 어때요?”라며 아저씨 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언젠가 올라타자마자 운전사가 조용히!”라고 고함쳤다. 아직 목적지를 알리지 않았는데, 차는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좌석에서 다 틀렸어, 젠장, 젠장!” 라디오가 다급히 경마를 중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또 다른 운전사에게 경기는 어때요?” 물었다. "있죠, 손님, 경기가 좋든 나쁘든 인간은 꾸준히,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해야 해요. 그게 인생이랍니다. 꾸준히 일만 하면 결코 틀리는 법이 없어요. 착실함에 질리지 말고 꾸준히, 꾸준히.

 

** 드르륵, 드르륵

당신은 어느 무덤에 들어가나요? 장소를 고르는데 여긴 아침 해네. 하지만 난 저녁 해가 예쁘게 보이는 저기가 좋아죽고 나면 어차피 모를 텐데. 하지만 고르는 건 아직 살아있는 인간입니다. 그때 , 죽음이란 살아 있을 때의 일이구나. 너도 안 살래?” 저는 죽은 뒤 친구가 곁에 있으면 꽤 외롭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어서 몹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죽은 뒤 외롭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살아 있는 저입니다. 그곳은 터무니없이 경치가 좋았는데, 벚꽃 피는 계절이면 꽃잎이 묘석으로 떨어진다고 제 어깨에 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듯 기분이 좋아집니다. 죽으면 볕 따위 아무짝에 쓸모없는데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요코씨, 뼈는 엄청 딱딱해. 막자사발 따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산속에서 읍내까지 다시 나가서 큰 절구랑 나무공이를 사왔다니까. 다 같이 드르륵드르륵 갈았는데, 마늘 갈 때랑은 비교가 완 돼. 다섯 시간 정도 걸렸어. 건장한 남자가 땀투성이가 되어서 말이야, 게다가 바람이 불어와 뼛가루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려서, 다들 얼굴이 새하얘졌고 콧구멍만 동그랗고 까맣게 보이는 거야. 너무 이상했는데 아무도 안 웃더라고.”

, 나도 갈걸.”

그리고 말이지, 절구에서 튀어나오는 뼈도 있었는데 하면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먹더라고. 그때 생각했어. 내가 죽으면 좌우간 평범하게, 평범하게 장례를 치르는 게 남들이 가장 납득할 만한 길이라고. 죽는다는 건 자신의 문제가 아냐. 남겨진 인간의 문제거든. 남겨진 인간에게 맡겨야 해.”

 

“‘내 뼈는 아드리아 해에 뿌려줘이탈리아인지 어딘지 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아드리아 해까지는 헬리콥터 빌려서 가는 거야? 배 타는 거야? 유언을 들으면 실행을 안 할 수야 없는 노릇이잖아. 무덤이 없으니 제사도 안 지내겠지. 내 생각에 죽는다는 건 살아 있는 인간이 그 녀석 죽었구나, 라는 사실을 차츰차츰 받아들이는 일인 것 같아.” 저는 왠지 그때, 그 남자가 죽은 것이 기대되었습니다. 그 김에 저의 장례식도 기대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쪼그려 앉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앉을 수도 있고 책상다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목욕탕세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벌거벗은 일본 여자의 자세가 매우 요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쪼그려 앉아 똥을 싸는 민족은 쪼그려 앉을 수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는 신체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동남아시아도 점점 근대화되어 쪼그려 앉기가 사라질까요. (이제는 식당도 변하고 있다. 방석집보다는 의자식이다. 어른들도 관절염 때문에 의자 식을 선호하신다. 화장실도 변했다)

 

삼각형 양갱 -

구두쇠는 물건이나 돈에 쩨쩨한 게 아니라 근성 자체가 쩨쩨해서 남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고 정도 깊지 않다고 그 친구는 말합니다. 시각장애인이어서 전기료가 들지 않는다고 하며 텔레비전도 안 봅니다. 돈 따위 죄다 써버리자. 초밥이라도 먹으러 가자. 구두쇠이야기를 한 다음 우리는 낭비 쪽으로 우르르 밀려갑니다.

 

3대 위는 원숭이 -

다른 친구 하나가 사실 우리 조상은 천황가에 토지를 빌려줬던 oo신사야라고 했는데 그렇다 쳐도 너는 가난뱅이잖아라며 다들 웃었다. 일본은 전철을 타면 모두 같은 신분이며, 계급 따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훌륭.

 

땡땡 중얼중얼 -

어느 날 다다시는 기운 없이 논 옆의 돌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돌아올 때 발을 몹시 질질 끌었고, 금방 쪼그려 앉고 싶어 해서 저는 다다시의 손을 세차게 잡아챘습니다. 그러다 다다음 날 죽어버렸습니다. 다다시는 아마 쌀밥을 한 톨도 먹어보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5월의 논에서 남동생 손을 세차게 잡아챈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났지만 다음 날에는 태연해졌습니다. 그 일을 떠올릴 때만 줄줄 울었습니다. 요전 날 밤 다시 떠올리고 줄줄 울었고, 다음 날 아침에도 또 떠올리며 줄줄 울었습니다. 저는 지금 신경이 이상해서 다음 날 태연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추석 전, <교토에 다녀왔습니다>를 읽으며 추석만 지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 같아 책마다 글마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2018 설이 어제였는데 한심하고 유치한 대소가 동서간의 관계는 매듭이 더 크고 단단해졌다. 고를 풀지 않고 잘라버릴 것이다. 나는 싸우지 않고 이길 것이다.) 다다시의 위패는 엄마 집에 있지만 엄마는 벌써 몇 년이나 이승과 저승 사이를 떠돌며 남자애를 넷이나 낳았는데도 , 남자애는 낳은 것 없어라고 말씀하시니, 다다시를 아는 가족은 이제 저밖에 없습니다.

 

*** 신의 손 -

제 친구 중 꽃꽂이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풍으로 쓰러진 도라지꽃 같은 건 어머나하며 두 세 송이 꺾어서 검게 칠한 낡은 나무통에 쓱 꽂기만 하는데도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언젠가 그녀가 냄비를 만지기만 했는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맛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녀는 사업가로 성공했습니다. 냄비 같은 건 만지니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법의 손은 신의 실수가 아닐까요. 저 자신의 손을 지그시 곰곰이 바라보고 맙니다.

 

** 통통통 -

저는 밭에 들어가서 훔치기는 싫었습니다. 하수인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밭에 도착하자 나는 여기서 망을 볼게라며 비겁하게 굴었습니다. 그 순간 일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찰떡 호흡에 거의 황홀해졌습니다. 그때 이건 악행이기 때문에 호흡이 맞는 것이며, 선행으로는 이와 같은 스릴과 성취와 충실감은 맛보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악행은 어쩌면 이다지도 쾌락적일까요. 이 젊은 남자와 영원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매일 도둑질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때 잘 알았지만, 그 남자는 저와 도둑 회사를 설립할 마음은 없는 모양인지 이제는 집에 코빼기도 내밀지 않게 된 지 오래입니다.

 

* 지리멘의 추억 -

아버지는 저의 독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소매에 멋을 부리려고 어머니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는데, 고함까지 질렀으니 어지간히 열심이었던 거겠지요. 저는 하늘하늘 걷고 요상하게 눈을 치뜨기도 했습니다. 저를 금방 들이받곤 했던 오빠도 특별한 것을 보는 양, 먼발치에서 매우 소중하다는 듯 친절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히사에의 기모노는 진짜 지리멘(바탕이 오글쪼글한 비단)이었고 저의 기모노는 인견이었습니다. 만져보기 전부터 저게 진짜라고 알아차린 저는 얼마나 가엾고도 영리한 아이였는지요.

패전 후 혼란으로 인해 저, 그리고 일본 전체는 기모노나 지리멘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운명으로 살았습니다. 일본 문화의 역사는 고도의 질을 해왔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현해나간 훌륭한 기술과 감각을 지닌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토의 기온에 있는 작은 숙소, 기온의 풍습 상 어처구니없이 복잡한 수속이 필요했는데, 그에 대해 쓰면 이 책의 절반 분량이 되어버립니다.

얼핏 보기에도 예전에는 이 근처에서 요염한 장사를 하셨을 것이 틀림없는 분이, 관능적이면서도 빈틈없는 기모노 차림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 손님은 한 명밖에 안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2층의 방 하나로 안내 받았을 때, 눈에 확 들어온 것은 연두색 그러데이션 바탕에 주황색 직사각형이 한 면에 흩어져 있는 이불이었습니다. 한눈에 지리멘 기모노 옷감을 이불로 고쳐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다가가서 봤더니 연두색도 주황색도 바랜 상당히 낡은 이불이었지만, 우아한 관능미는 조금도 잃지 않았습니다. 지리멘 이불에서 자는 일은 이제 평생 없겠지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초밥 -

나는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초밥에 무아지경이었다. 그런 다음 열여덟 살 때 도쿄로 나왔지만 초밥을 먹는 신분은 아니었다. 아버지도 죽었다.

세월은 흘러갔다. 여차할 때 큰맘 먹고 초밥을 사 먹는 것쯤은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카운터에 앉아 좋아하는 초밥을 주문하기는 겁이 났다. 그러나 세상이 풍요로워져서 나도 차차 맛없는 초밥이라면 먹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열 살짜리 아들이 초밥집 앞을 지나 학교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어이, 너 인마, 초밥집해라. 내 뒤를 이어라. 내가 가르쳐 주마라는 말을 해서 아들은 얼마 동안 초밥 장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자그마한 등에 가게 이름만 쓰인 간판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어서 심오한 느낌이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아무나 들이는 곳이 아니야. 라는 분위기가 강하게 감돌았다. 저는 선택받아서 들어가려는 참이에요, 라는 기분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무엇부터 주문해야 옳을까? 머리가 빙빙 돌았지만, 주문 따위는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내주는 것을 잠자코 먹어야만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가게 주인이 위풍당당했다. 무언가 자신을 언짢게 하는 짓이라도 하면 버럭 화를 내며 내쫓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나저나 초밥은 엄청나게 맛있었다. 주문 없이도 나오는 초밥은 지금 나는 이것을 먹고 싶었구나, 라는 마음이 들도록 정확히 눈앞에 등장한다.

 

먹어주세요 남겨주세요 -

아버지는 더 이상 장어 사오너라라는 말도 하지 않게 되어, 죽었다.

장어 한 꼬치가 놓인 접시를 바라보며 나는 먹어줘, 전부 먹어줘라고 빌었고 남겨줘, 남겨서 먹게 해줘라고도 마음 한구석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장어가 남아 절망했던 어린 마음이 지금도 어딘가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건 아버지에게도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가 있었구나 싶어서 망토 차림의 사진을 보면 기묘한 그리움이 샘솟는다.

 

*** 먼로는 두 번 죽었다 -

환갑이 지났기 때문에 앞날이 없어서 바쁘다.

(2017. 10.20. 금요일 저녁. 플리츠 가디건과 리본모양의 스외르부스키 브롯치를 영근이에게 돌려주었다. 가디건은 올 봄, 브롯치는 몇 년 전 받은 선물이다. “영근아, 선물은 누구나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을 준다. 그러니, 내 정신 아직 멀쩡할 때, 너에게 돌려주는 거야. 내가 요즘 괜히 마음이 바쁘구나! 그동안 잘 썼다나는 요즘 날마다 쫓기고 있다. 사람구실 못하고 갈 것 같아 불안하다.)

 

앤디 워홀이라고? , 그런 시대도 있었다. 뭔가 사이키델릭한 혼란과 기이한 에너지의 시대. 청춘이란 얼마나 부끄럽고도 마음 들뜨는 광란이었나. 아니, 그 시대에는 일본 전체가 들떠 있어서 부끄럽다. (지금 우리나라 여성들, 성형에 보톡스에 명품가방에 화장 떡칠에, 뭐 더 가질 것이 없나 휘번떡거린다. 이 좋은 세상을 주체할 수 없어 생광란미친년들이다. 자신만 온 황칠하면 되는데, 나보고 넌 왜 함께 더불어 미치지 않느냐고 왈왈 곳곳에서 짖어댄다)

 

이삼년 전 학생일 때는 35엔자리 라멘을 반씩 먹고 게다를 신던 녀석조차 있었다. 그랬던 녀석이 취직하자 몸에 딱 맞는 늘씬한 스리피스슈트를 입고 폭 좁은 넥타이로 목을 죄어, 같은 양복이라도 건신한 은행원과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달랐다. 그 집단은 어디를 보고 있었나. 뒤룩거리는 눈은 전부 미국을 향했다. 그들은 미국을 뭐라고 불렀나. ‘저기라든가 저쪽이라고 불렀다. ‘여기이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저쪽의 정보를 얻는데 혈안이 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저쪽잡지를 일 초라도 빨리 손에 넣는 일이었다. ‘이쪽디자이너들의 튼튼하고 조급한 이는 얼마나 탐욕스럽게 저쪽것을 게걸스레 먹었던가.

 

나는 감상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못했다. 매우 감탄하며 까다로운 이론을 늘어놓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이래도 돼?’ ‘이거 사치하는 거 아냐?’라는 기분이 샘솟았다. 시대를 골라 태어날 수는 없다. 나는 저 시대를 청춘이라 부르는 시간으로 살아야만 했다.

 

** 그때 -

그 병원은 다마 언덕에 갑자기 솟아난 듯 녹음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겉모습은 고속도로 입구에 늘어선 러브호텔 같았는데, 양식 같은 건 뒤죽박죽인, 살짝 고풍스러운 서양 건물이다.

나는 심한 신경증을 앓고 있어서 온몸이 톱으로 잘리고 절구로 갈려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사막에서 피투성이 심장을 끈으로 동여매어 질질 끌며 걷는 기분이었고, 그것 말고도 온몸이 내란이 일어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같았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매우 당당하고 훌륭한 의사가 있었다. 하나도 거만하지 않아서 나는 놀랐다. “여기에 입원시켜주실래요?" 했더니 호텔 대신으로 써주세요상냥한 눈빛으로 말했다. 병실에는 화장대까지 있었다. 호스피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몸은 어디도 나쁜 곳이 없으니 수면제만 받고 나머지는 통증을 참는 것뿐이라서, 하루 종일 꽃무늬 소파에 웅크려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전부 암이다. 내가 입원한 다음날, 개인 실에 환자가 들어왔다. 늘씬하고 지적인 오십대의 미인 부인은 틀림없이 스튜어디스였을 것이다. 의사에게 남은 날을 물었다. 의사는 2개월이라 대답했던 모양이다. “, 남편은 스스로 호스피스 자료를 모아서, 여기로 결정했죠. 그런 사람이니까요.”

 

내 침대에서는 밤이 되면 어두운 오렌지색 불빛이 보였고, 가족 중 누군가가 밤새 깨어 있는 기척이 가만히 느껴졌다. 옆방이 컴컴한 것보다, 불이 켜져 있고 인기척이 들리는 편이 내 마음도 따뜻해졌다. 딱 한 번, 반쯤 열린 문틈으로 환자의 발을 보았다. 푸른 줄무늬 파자마 밖으로 나온 정강이가 쿵 하고 반대쪽으로 쓰러졌다. 온몸이 슬퍼하는 듯 연약한 쓰러짐이었다. 다음날 밤이 되었는데도 옆방은 어두웠다. 이튿날 간호사에게 옆방이 조용하네요.”라고 했더니 , 옆방 환자분은 어제 돌아가셨어요.”

 

아무리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도,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본인조차 알 수 없다. 그때가 되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부인도 의사도 몰랐다. * 환자의 언어 건너편에 있는 언어화되지 않는 감정은 그때가 오지 않으면 모른다. 이성이나 언어는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그다지 강하지 않다. 나는 열하루 째에 병원을 나왔다.

 

덜렁덜렁 -

우리 일본인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남들과 똑같이 하는 것을 상식으로 삼고, 남들과 같은 생각을 도덕이라고까지 부르는 민족이다. 절대다수와 같은 의견으로 타협하는 것을 어른이라 말한다.

젊음이란 그런 어른에게 반항하는 힘으로 사는 것이었는데, 요즘 젊은 애들은(, 기분 좋다! 이 나이가 되니 요즘 젊은 애들이라고 말하는데 아무 저항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큰소리로 내뱉는 게 사회적 책임이라 생각한다.) 사회 어른들의 불결한 모습에 단결해서 분노하지 않게 되었다. 그게 평화라는 것이다. (평화, 그러려니)

 

적이 눈에 띄지 않는 것, 칠칠맞고 꼬질꼬질한 젊은 애들이 태연하고 멍청하게 지낼 수 있는 상태가 평화다. 우리가 평화를, 또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한 것은 곧 바보를 기르는 것이었다. 고맙다, 고마워. 소말리아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이렇게는 못 지낸다.

 

내면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 여자는 아름답다. 다리 길이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추녀가 적어졌다. 일본이 가난했을 때는 아름다운 사람은 보다 아름답게, 추녀는 보다 추녀로 보였다. 추레한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엽서 한 장도 -

그 무렵 몇 년 만에 요짱에게서 엽서 한 장이 팔랑팔랑 날아들었다.

- 들꽃이 아름답게 피는 곳에 당도했습니다 -

엽서 한 장이 내게 삶을 유지할 희망을 주었는데, 나는 요짱에게 무엇을 줄 수 있었던가.

 

여자 노인과 할머니 -

일본에서 노인은 멸구처럼, 솟구치는 불가연 쓰레기 같은 존재. 그러고 보면 미국에도 유럽에도 여자 노인, 남자 노인은 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오래도록 없지 않은가. 내가 아는 서양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동화 속에 있었다.

미국의 해안에 처음 갔을 때, ‘여자 노인들이 뒹굴뒹굴 구르며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고깃덩어리였는데 온몸에 뻣뻣한 금색 털이 빛났고, 기미와 주근깨를 성대하게 드러내고 조막만한 비키니 수영복도 에메랄드그린, 노란색, 빨간색이었으며 그보다 더 화려하고 커다랄 수 없는 무늬가 있었다. 손에는 굵은 쇠사슬이나 플리스틱 팔찌를 짤랑짤랑 차고 실로 당당하게 뒹굴고 있었다.

일본할머니처럼 눈에 띄지 않도록, 유난하지 않도록 수수하게 꾸미는 것은 시대착오다. (나이를 먹으면 피부가 지저분지니 밝은 색으로, 기운차게 꾀죄죄함을 날려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원색으로 늙음과 싸워야 한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일본의 할머니는 빈틈없이 아이새도를 주름 사이에 채워놓고, 립스틱을 입술 면적에서 1밀리미터쯤 삐져나오게 그리며, 화장을 두껍게 하고, 목에도 팔에도 금붙이를 짤랑이는 훌륭한 일본 여자 노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 일본에서 주제분수따위의 장벽은 전부 걷어치워져 있었다. 할머니가 아닌 일본의 여자 노인들은 육체를 치장하는 혁명을 완수해냈으며 게다가 복장, 화장 등 표면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내용물, 다시 말해 정신적인 주제분수도 겉모습과 같아졌다.

즉 늙음은 악이다. 생명은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이다. 설령, 죽을병에 걸려도 용기를 가지고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할머니가 되면 하루 종일 할머니일 테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모노를 일상복으로 삼아야 한다. 젊을 때는 살을 드러내는 게 아름답다. 문제는 아줌마부터 할머니까지의 시기다.

인도인은 당당하게 사리를 입고 전 세계를 활보하는데 그건 민족의 긍지일까, 아니면 근대화가 늦어진 것뿐일까, 나는 내 기모노를 가끔씩 쓰다듬으며 꾸물꾸물 하고 있다.

 

*** 나답게 죽은 이유 -

늙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당황해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뭐야?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이런 걸 하고 있지? 하고 섬뜩해져서 짧지 않은 육십 년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맴돈다. 이제 충분히 살았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나의 인생이었다. 목숨을 아쉬워할 일 따위는 전혀 없다.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렇지 않다.(2017.10.20.. 요즘, 내가 딱 이렇다. 자꾸 자꾸 멍청히 누워, 혹은 씽크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래, ‘충분하다.’ 이쯤에서 끝나도 여한이 없다고 되뇐다. 사실은 이쯤이 너무 겁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는 앞날이 두렵기 때문이다.)

일흔일곱 된 엄마가 치매에 걸렸을 때, 나는 우선 부모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는 문제는 뒤로 미뤄두자고 생각했다. 만사는 차례대로, 순서라는 것이 있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나는 신문의 다른 곳은 읽지 않아도 부고만은 훑어본다. 그리고 나이만 확인하다.(사노요코는 1938년에 태어나 201072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자도 73세의 나이로 갔다. 시어머님도 그쯤 가셨다. 조금 애석하다 싶을 때, 모두 참 괜찮게 가셨다. 나도 그러고 싶다, 지금 마음은!)

 

엄마가 아흔을 넘으면 나도 일흔을 넘는다. 일흔 넘어서 어떻게 노후 계획을 세우란 말인가. 정말로 사고라도 나서 승천하고 싶어진다. 장수는 진정 경사스러운 일일까. 풍요로운 노후 같은 게 실제로 존재할까.

 

그녀에게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즉 따라야 할 규율에 목숨을 맡기는 것이 빛나는 자부심이었다. 세간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거북해한다. “이웃은 뭐라도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당신 말이야, 지금은 이웃이 없다고. 복지에 떠넘기고, 남과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는단 말이야.

 

*** 나도 치매 걸린 엄마를 버렸다. 돈을 긁어모아서 내 노후를 뒤로 미뤄두고 돈과 함께 엄마를 유로 양로원에 버렸다. 노인 병원이라는 곳에도 휘적휘적 빨려 들어간다. 크게 열린 채 깜빡이지 않는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그 입은 예외 없이 벌어진 항문처럼 주름이 중심을 향해 모여 있다. 혹은 휠체어에 묶인 채 하루 종일 근사한 홀에 모여 있는, 특별한 돌봄을 받는 노인들. 그들은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가만히 있다.(정물화) 그들은 (모델이 없는 노후)를 망연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화장실 바닥이 빠져서 60미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그 할머니는 죽어도 자신의 집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썩은 집에 매달렸을 것이다. 복지를 오직 혼자서 거부한 것이다. 나도 가능하면 화장실 바닥을 헛디뎌서 굴러 떨어져 죽고 싶다. (에세이스트 대표 정경 선생님, 행복전도사 최윤희씨. 62~63. 참 아깝지만 그래서 더 애절한 나이에 간 것 같다. 죽음은 남들(기억창고)이 아깝게 생각해야 남는 장사다.)

 

세상은 합창한다. 자신답게 생생하게 살아갑시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답게 죽을 자유는 없는 것일까.(웰빙 & 웰다잉)

하루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귀중한 일일까. 나는 우왕좌왕할 뿐이다. 분명 죽을 때까지 우왕좌왕할 것이다.(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카네기 묘비명-)

 

아오이 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자손도 아닌데, 우리 가족은 슨푸성안에서 산 적이 있다. 슨푸성이라고는 해도 돌담으로 둘러싸인 네모반듯하고 휑뎅그렁한 들판이었다. 쇼와25(1950) 무렵이었다. 네모난 슨푸성에는 네 개의 다리가 있었다. 그중 하나를 건너면 아오이 문고라는 시립 도서관이 있었다. 아오이 문고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느꼈던 자랑스러움은 무엇이었을까.

전쟁 전에 나온 훌륭한 장정의 낡은 책도 있었고 새 아동서도 있었다. 게다가 공짜로 빌려준다. 나는 그곳의 책을 전부 읽으리라 결심했다. 가장 구석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낡아빠진 책부터 시작했다. 조선의 민화였다. 줄줄이 늘어선 책은 어린이용 세계 민화집이었다. 조선 다음은 인도였고, 몽고 민화도 있었다. 나는 차례차례 닥치는 대로 빌렸는데 이제는 아무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미국문화 센터옆에는 형무소의 붉은 벽돌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형무소 담장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오이 문고로 돌아왔다. ‘아오이 문고미국 문화 센터도 벽돌담 형무소도 없어졌다. 풀이 무성했던 슨푸성도 훌륭한 공원이 되었다. 나에게 첫 도서관이 아오이 문고였다는 사실이 언제까지나 자랑스럽다. 읽은 책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

 

*** 옆집에서 살고 싶어 -

모리 마리는 정말로 특이한 할머니였다. 모리 마리는 바구니를 손에 들고 상점가를 살랑살랑 걷고 있었다. 모리 마리는 매우 질 좋은 캐시미어로 만들어진, 스웨터라고 부르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모리 마리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바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무엇보다도 즐겁게 만드는 것은 독특한 유머. 그것도 참으로 고급스러운 유머다. 유머는 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아야 생겨난다. 나는 모리 마리의 옆집에 살고 싶다.

 

끝없는 바흐처럼 -

그나저나 사랑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아니, 모리 마리가 받은 사랑이 굉장하다. 그녀는 평생 아버지에게 사랑받았다는 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한번, 아니 천 번, 아니 만 번 아버지에게 사랑받았다는 이야기를 쓰면 그곳에 부드럽고 풍부한 향을 지닌 분위기가, 독특한 세계가 생겨난다. 끝없는 바흐 같다.

지금 내가 모리 마리의 흉내를 내면 진짜 여자 부랑자 같아져서 고귀함이 쑥 빠진다. 내게는 그처럼 사랑받았던 경험이 쑥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귤 하나라도 몰래 먹으면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두들겨 맞았던 나와 마리는 최고야, 마리는 최고야, 마리가 하면 도둑질도 최고야라며 누군가가 등을 쓰다듬어주었던 사람의 차이다. 그러므로 나는 옹졸한 상식 인이 되었고 모리 마리는 위대한 나르시시스트 문학가가 될 수 있었다.

 

반한 게 잘못이다 -

청춘이란 무엇이었나. 그저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우왕좌왕 두리번두리번하는 것이었다. 요란한 갈색 머리를 한 요즘 언니와 내면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로 가난했기 때문에 불량소녀가 브랜드 물건을 마구 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랜드 문고본을 마구 읽었다. 돈이 있었다면 나도 샤넬이나 베르사체를 걸치고 싶었을 것이다. 청춘이란 병이로구나.

안나 카레니나의 브론스키에 대해 우리가 끊임없이 잘난 척하며 토론했던 일은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럽지만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하숙했던 집의 아주머니가 틈만 나면 게으르게 문고본을 읽는 내게 책은 읽어도 책에 먹히면 안 돼그 아주머니는 내가 건전하고 건설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랐던 올바른 사람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는 몸속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다자이를 읽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우왕좌왕하는 것은 청춘이나 노년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장정은 책의 초상화 -

일본 영화는 궁상맞고 추레했습니다. 우리도 궁상맞고 추레했으니, 동경은 할리우드 영화를 향해 활짝 펼쳤습니다.

프랑스의 가난은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어떤 책이든 장정이라는 얼굴을 갖습니다. 우리는 내용물을 사는 것이나 얼굴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가끔은 장정이 너무 좋아서 사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면 장정이라는 역할을 뛰어넘어버린 멍청한 미인에게 손을 대고 만 멍청한 남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장정은 내용의 초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육아와 현대인의 고독 -

당신 인생 중에 가장 좋았던 일이 뭐였어?” “육아” “그럼 가장 힘들었던 일은?” “육아복스러운 자식을 가진 어머니에게조차 육아는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대사업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미쳐 날뛰는 육아였는데, 그 내용물 대한 보람은 충분하며, 이제 와서는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달콤하게 배어 나온다.

누구나 자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줄 사람을 얼마나 갈망하는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심리학 책 따위는 읽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이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하고 싶어 한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하고 싶어 한다.

 

문고판 후기- 부끄럽다 -

동화든 각본이든 머릿속에서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것,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어떻게든 창작하는 것이라서 조금은 머리를 쓴다. 에세이 비슷한 글을 의뢰받았을 때 이건 일로 삼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것은 전부 찻집에서 하게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옆에 있으면 못 그린다. 대체 이건 뭔가 싶지만 습관이란 무섭다.

대체로 무슨 잡지에서 의뢰를 받는 터라 매수가 정해져있다. 의뢰받기만 할 뿐 스스로 솔선해서 쓴 글이 아니다. 게다가 에세이는 가공의 이야기라 아니므로 내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써야하니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쓰지 않지만, 인간은 대부분의 것을 착각해서 기억한다.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만이 신세 상담을 한다.

 

 

-------------

 

 

나는 일본인이 아니니,

사무라이처럼 장렬하게 갈 생각은 없다.

 

내 친정할머니가 그랬듯이

평생, 빠른 걸음으로 뛰지도 않고

맛있는 것 골라 잡수시거나 벌컥벌컥 들이 마시는 일도 없으셨고

누구를 향해 자 한번 입에 담는 일없이

사뿐사뿐 몸을 혹사시키지 않고 멈춰선 듯 고요한 그림자처럼 사셨다.

나처럼 똥배가 나올 일도, 얼굴에 여드름이나 기미가 낄 일도 없이

천상, 하늘에서 파견 나온 보살처럼 살다가셨다.

하루하루, 몸과 마음과 정신이 자연스럽게 소진되어

가볍게, 가볍게

마치 장다리 무꽃에 앉았던 

작은 흰나비가 날아가듯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요코처럼, 好不好 강하게

이것 좋아 저것 싫어 주장은 내 성정에도 차마 못할 일이다.

나는 할머니의 손녀딸이다

나의 할머니 홍대분, 남양홍씨 유인처럼 갈 수 있기를!

비 바람 햇살에 산화할수 있기를 願을 세운다.